조선의 추존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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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소태자 이정 (왕세손) | ||||||
정조 이산 (왕세손) |
묘호 | 진종(眞宗) | |
시호 | 소황제(昭皇帝) | |
본관 | 전주(全州) | |
능묘 | 영릉(永陵) | |
성 | 이(李) | |
휘 | 행(緈) | |
자 | 성경(聖敬) | |
배우자 | 효순소황후 (孝純小皇后) | |
아버지 | 조선 영조 | |
어머니 | 정빈 이씨(靖嬪 李氏) | |
생몰기간 | 1719년 2월 15일 ~ 1728년 11월 16일 |
孝章世子
생물연도 :1719~1728
1 생전
조선 영조의 첫째 아들로, 생모는 후궁 정빈 이씨다. 동복 형제로는 화억옹주와 화순옹주가 있다. 1719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상중이었기 때문인지 숙종실록과 경종실록에는 기록 자체가 없다.
영조가 즉위한 1724년에는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고, 그 다음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27년 조문명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하지만 1728년, 영조가 35살이던 해에 갑자기 병에 걸려 10세의 어린 나이에 단명했다. 영조는 친히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효장세자는 효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4세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현빈 조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영조의 병수발을 들면서 홀로 살아야 했는데 며느리를 불쌍히 여긴 영조가 현빈 조씨에게는 잘 대해주었다고 한다. (1752년 병을 얻어 그녀 역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야사에 독살설이 있고 이 설에 따르면 배후로서 경종비 선의왕후가 거론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영조 6년 3월9일 두번째 기사) 세자와 옹주를 매흉(埋凶)[1]한 궁인들을 친국한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독살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2] 일부 현대 역사입문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독살을 사실로 보고 있지만, 큰 옥사로 발전하지 않고 관련자들의 처형으로 끝난 것으로 미루어[3] 의심스러운 정황에서 그쳤을 가능성도 높다.
영조는 효장세자 사후 7년 뒤에야 겨우 아들을 봤는데, 이 어렵게 본 아들이 그 유명한 사도세자이다. 여기까지였으면 어린 나이에 죽은 그다지 존재감 없는 왕자였겠으나...
2 사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으면서 사태가 급변하게 된다. 영조는 세손인 정조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4]이었지만, 명색이 죄인인 사도세자[5]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에 죽은 효장세자를 끌고 와서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만든 뒤에 후계자로 삼았다.
정조는 졸지에 당시 자기 나이보다도 일찍 죽은 백부의 아들이 되어버린 것.[6] 게다가 영조는 죽기 전에 정조에게 효장세자를 추존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정작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무덤은 잡초가 무성하도록 방치한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어쨌건 이 때문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왕으로 추증하고 묘호는 진종(眞宗)이라 했다. 현빈 조씨도 남편이 추존되자 효순왕후 조씨가 된다. 게다가 순종 때는 황제로 추존되어 진종 소황제(眞宗 昭皇帝)가 되어버린다. 무덤도 정조가 새로 왕릉의 격식으로 만들었고 비명까지 정조가 직접 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큰아버지 겸 양아버지에게 감정이입이 될 리도 없었고 영조의 유언만 아니었으면 저렇게도 안 했을 것이다. 실제로 새로이 만든 왕릉도 직접 보면 왕릉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효장세자의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있는 '파주삼릉(공순영릉)'[7]의 하나인 영릉(永陵)[8]이다. 부인 현빈 조씨도 1751년 승하한 후 어렸을 때 죽은 남편 옆에 묻혔다.
능의 형태는 나란히 묻힌 쌍릉. 이 능의 비석은 3개인데 효장세자 부부는 세자, 세자빈에서 정조 때 왕, 왕비로 추존되었고 이후 대한제국 때인 1908년에 다시 황제와 황후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추존할 때마다 비를 새로 세웠기 때문이다. 삼단진화! 다만 정조가 좀 꾸미기는 했는데 처음부터 왕자 묘의 형태로 조성되어서 왕릉에 있는 무인석이나 난간석이 없다. 그래서 상술된대로 여기 가보면 왕릉이라기에는 초라하고 허전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엄연히 들어가는 능이다.
여담으로 효장세자가 영조가 죽을 때까지 생존했다면 자그마치 만 58세였을 것이란 계산이 나오게 된다. 영조가 그 나이까지 살게 가만히 놔뒀을지 의문이다 참고로 할아버지 숙종도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했다고 하나 환갑에 죽었다(...) 고려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즉위한 강종과 비슷한 나이. 독살이 아니어도 이래저래 아버지 재위 기간 중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슬픈 계산이 된다.[9]
뭐 혹시 모르지 장수했을지도...
- ↑ 특정인이 사망하거나 질병에 걸리도록 저주하는 의미로 흉한 물건을 만들어 일정한 곳에 파묻는 것.
- ↑ "세자가 점점 장성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또 다시 흉악한 짓을 하였고, 강보(襁褓)에 있는 아이인 4왕녀(王女)에게도 또한 모두 독약을 썼다."
- ↑ 사실 저주 자체만으로도 이미 죽을 죄이다.
- ↑ 영조의 친손자들은 다 사도세자의 아들들이었다. 당시 영조의 나이상 아들이든 딸이든 아이가 더 태어날 가능성은 낮았으니, 손자에게 물려주지 않을 거면 먼 친척 중에서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 ↑ 폐서인했다가 죽자마자 복권시켜주고, 시호도 줬다. 하지만 죄가 있다 하여 죄를 묻다 죽였기에 사망 당시에는 죄인이었다.
- ↑ 다만 정조와 효장세자의 나이차이는 생각보다 작은 33세. 33살 차이나는 부자관계나 백부와 조카 관계는 예전에도 적지 않았고 현대에 들어서는 만혼 등의 영향으로 더 흔해졌다. 즉 사도세자가 겨우 17살에 정조를 낳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 ↑ 나머지인 '공릉'과 '순릉'은 각각 한명회의 딸인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의 능이다.
- ↑ 세종대왕의 영(英)릉과 효종의 영(寧)릉과는 다르다.
- ↑ 물론 영조는 사도세자가 5살이 되었을 때 벌인 선위 파동때도 효장세자의 나이를 들먹이곤 했다. 살아 있었다면 20살이니 일찌감치 양위했을 거라고...
그럴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