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淸談思想
청담사상(淸談思想). 청언(淸言),현언(玄言)이라고도 한다. 청담(淸談)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떠난, 맑고 깨끗한 담화(談話)라는 의미다. 이 사상은 위(魏), 서진(西晉), 동진(東晉) 시대에 크게 성행했고 남조(南朝)의 제(齊), 양(梁) 시대까지도 그 영향이 계속되었으며, 진(陳) 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유행한 사상으로 주로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현학과 함께 나타난 철학적 담론의 풍조로 노장사상을 기초로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정신적 자유를 중시했다. 사상의 기초는 도가(道家)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뿌리로 하고 불가(佛家)의 염세사상(厭世思想) 등을 취하여 만들어졌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한 사상이지만 실제로는 청담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할 정도로 악영향을 끼쳤다.
2 발생
후한(後漢) 말기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면서 국가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가(儒家)사상을 대신해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리고 당대의 유가사상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것에 치우치는 성향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었으므로 정작 유가사상에서 목표로 하는 충성, 효도, 예절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부작용을 보이게 된다. 예를 들자면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루는 것이 효도를 다하는 것이라고 언급된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소 앞에서 삼년상을 하다가 병들어서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남겨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게 만들거나, 아버지 묘소 앞에서 삼년상을 하다가 쓰러지자 어머니가 아들을 구하려고 이불을 덮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에게 불효한 쓰레기같은 인간이라고 평가가 급전직하하는 등의 사례가 넘쳤다.
그리고 후한 말기에는 청의(淸議)라는 사상이 존재했다. 이 사상은 주로 청류파에서 유행했는데, 당시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천하의 기둥이라 여기고 고결한 선비로 자처하면서 같은 부류끼리 모여 조정의 정사를 논하고 인물을 품평했다. 그리고 이들은 지방에 주로 거점을 두면서 현지의 민심을 향론(鄕論)이라는 것으로 취합해서 조정에 전달하며, 동시에 민심을 다독이는 일을 했다. 이런 사상은 향거리선제에서 인재 추천과 품평을 중시하면서 계속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중앙정권은 당고의 금같은 사건을 일으키면서 청류파를 막게 된다. 그러자 청류파들은 중앙정부와의 정면충돌은 자제하면서 각자의 거점인 지방에서 세력을 늘리고 민심을 자기편으로 돌리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 중에서 청류파의 중심인물인 곽태(郭泰)처럼 평론은 적당히 하고 과다한 비난을 하지 않아서 당시의 중앙집권세력인 환관들의 미움을 사지 않아서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래서 곽태에 대해서는 후세에 쓴 역사서의 기록중에 청담의 주위를 맴돌면서 세상일에서 점차 멀어져갔다란 비난이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청담사상의 창시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곽태의 경우에는 개인적인 피난행위에 가까우므로 실제적인 창시자라고 보긴 어렵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청담사상을 창시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위나라의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이다. 이들은 노장사상을 기초로 논어(論語)와 주역(周易)등 유가의 경서를 새롭게 해석하며 무(無)와 유(有), 명교(名教)와 자연 등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에 관한 철학적인 논의를 이끌었다. 특히 하안은 오석산을 개량 및 보급, 권장해서 현실을 잊고 명상에 빠지는 방법까지 창안한다. 오석산이 정신을 망가뜨리고 몸을 망치는 독약이라는 것은 잠시 잊자
진이 천하를 일통하고 한이 이어받은 이후, 제자백가가 난립했음에도 사실 중국이라는 고대의 초거대 국가를 지탱해 줄 만한 단일 사상은 없다고 봐야 한다. 당대 도사들이 난립했던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애환을 달래기에는 힘에 부치는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들이 도교와 도사를 원했듯이 식자층에게도 유교가 설명하는 바는 부족했다.
유교는 어지러운 천하 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의 냉혹한 아귀다툼을 지속하던 시기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사상이었지만, 천하가 안정세에 접어들었고, 또 생산량이 늘어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발달하고 나자 괴력난신과 같은 신비적 요소를 비롯해 삶의 본질이나 본질적 지혜나 천하의 기본 세계관 같은, 어찌 보면 배부른 고민과 의문이지만 결국 호기심을 지닌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의문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당대의 유교는 고대의 신화적 주술적 세계관을 가진 도교를 비롯한 많은 사상들과 결합한 형태로 이 물음에 답하려 했지만 미진한 구석 투성이였다. 비록 초창기 주요 연구자들인 하안이 사마의가 일으킨 고평릉 사변으로 참살당하고, 왕필이 젊은 나이에 병사했으나 이른바 3현(三玄)이라고 불리는 도덕경(道德經), 장자(莊子), 주역(周易)의 연구와 해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학(玄學)의 학풍이 크게 성행하였다. 하후현(夏侯玄), 왕연(王衍), 완적(阮籍), 혜강(嵆康), 상수(向秀), 곽상(郭象), 배위(裵頠) 등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주제를 둘러싼 고도의 철학적인 논변이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노장사상에 기초해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정신적 자유를 강조하고, 명분과 형식에만 집착하는 유학을 비판하며 3현을 기초로 한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논의를 중시하는 풍조가 나타났으며 이를 청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실제적으로도 청담사상의 기초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 후한 말기의 혼란 및 위나라가 진나라로 교체되는 등 잦은 정치적 격변이 발생하면서 지식인과 귀족 사회에서는 정치에 실망하여 은둔하거나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세속의 일이나 민생에 관한 논의를 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서 산림에 은거하여 청정무위(淸淨無爲)의 담론을 나누었다는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영(劉伶),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嵆康), 상수(向秀) 등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등장했다.
죽림칠현은 청담의 풍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유가에서 강조하는 명교(名敎)를 초월해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속적인 명예나 이익, 예의를 초월하여 활달한 행동을 일삼았으며 현대의 시각에서도 정도를 벗어난 행동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보이는 행동은 겉보기에는 자유분방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유가사상을 깊이 믿고 있었다. 완적이 정작 자신의 아들은 음주 행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혜강이 가계(家誡)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아들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예절과 주의사항을 훈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까지는 청담사상은 시대의 한계는 있었으나 나름대로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 청의사상을 이어받아 백성들을 위로하고 스스로도 청렴, 결백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유지했다. 특히 재산을 모으거나 권력을 탐하는 것을 비루하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사치와 탐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 불의한 중앙정권에 대한 저항사상을 이어갔다. 물론 저항의 방식이 적극적 저항에서 소극적 저항, 그리고 세상에 미련을 끊어버리고 자연에 심취해 살면서 출사를 거부하는 식으로 축소되었으나 저항이라는 것 자체는 유지했다.
- 허례허식에 사로잡힌 당대의 유가사상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탐구를 함으로서 생각의 다양성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유가사상을 버린 것도 아니라서 유가사상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을 허례허식을 버리면서 추구하기도 했다.
3 변질
그러나 이런 식으로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당대의 권력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마소는 종회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죽림칠현 중 혜강을 불효죄로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은 당대의 지식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청담사상에서 저항이라는 의미는 이 시점을 계기로 해서 사라진다.
여기에 더해서 현학은 기본적으로는 유가사상에 속하지만 사실상 유가사상이 아닌 속성을 많이 가졌으므로 연구와 사색에 높은 수준이 필요했다. 그래서 높은 성취를 이룬 하안이나 왕필 같은 사람들은 호학과 중용과 멋부림을 동시에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기본적으로 현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특성이 현실과 분리되어 공상을 하기에 딱 좋다는 위험성은 제거하지 못 했다. 여기에 더해 하안, 왕필, 하후현 같은 당대의 일류 지식인들이 처형당하거나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들의 경지에 이르지 못 한 2류 이하 얼치기들은 뭣도 모르고 허무주의, 중2병, 과시욕, 신비주의로 흘러가기 딱 좋았으며[1] 실제로도 그렇게 돌아갔다.
현학을 넘어선 청담사상의 가장 큰 위험성은 꾸밈이나 행위 자체를 지양하는 그들의 통치나 행동철학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도사 나부랭이들이 읊어대는 혹세무민이나 황당무계한 주술적 무당질을 받아들이거나 결합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죽림칠현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이 추구했던 청담사상은 권력자나 지식인층에서 일종의 최첨단 유행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기 때문에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모두 청담사상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시점에서 청담사상은 크게 변질되었으며 말 그대로 국가를 망치는 사상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이때부터의 청담사상을 공담(空談)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 뜻은 말 그대로 청담을 위한 청담사상, 즉, 말만 그럴싸한 헛소리며 무의미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 청담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다. 권력층이거나, 유명한 지식인이거나, 적어도 재산이라도 많아야 한다. 물론 신분은 귀족이나 적어도 호족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서 생각이 뛰어나더라도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애초부터 청담에 참가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청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며 미천한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 청담을 나눌 장소도 중요했다. 경치가 좋고 자연을 직접 느끼면서도 지체 높으신 분들이 불편함이 없는 곳을 택해야 했으므로 아무 곳에서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후술하지만 이 문제는 다른 문제점을 크게 불러온다.
- 청담을 나눌 때 담객들은 반드시 먼지떨이 모양의 불자(拂子)를 손에 들어야 한다. 해당 불자는 사불상이라는 동물의 꼬리에 손잡이를 단 것이고 손잡이의 재질을 옥 등의 귀한 자재를 써야 한다. 그리고 청담을 나눌 때 불자를 살살 흔들면 마치 신선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화를 나눌 때 별 필요 없는 호화사치품이 있어야 하며, 쓸데없는 분위기 연출을 중요시하니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 청담의 내용은 주로 기존의 경전을 다루었다. 그리고 경전에 적힌 내용을 논할 때 전통적인 논법에서 벗어난 기상천외한 말을 할수록 추앙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밀한 추론이나 논지 전개 따위는 필요가 없었고 단지 사람들이 감탄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심지어 왕연은 노자를 해설할 때 제멋대로 이론을 수정하고 적혀있는 기록을 제멋대로 삭제하는 행위까지 전개한다. 한 마디로 말해 헛소리 경연대회라고 보면 딱이다.
- 청담을 끝낼 때 어떤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해도 수습만 가능하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박명수: 여기까지입니다대화가 있으면 결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싹 망각한 행위로 한 마디로 말해 시간낭비다.
종합하자면 청담을 나누는 것 자체가 키보드 배틀보다 무의미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유행이 되어 구품관인법과 결합한 결과는 끔찍했다.
4 결과
우선 서진의 붕괴에 청담사상이 큰 역할을 했다. 당장 당대 청담사상의 일인자인 왕연이 태위라는 고위직에 있으면서 정사를 소홀히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동해왕 사마월의 시신을 분봉지에 묻어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낙양에서 도망치다가 석륵에게 잡혀서 포로가 되었다가 최후를 맞았다. 게다가 혼자 최후를 맞은 게 아니라 10만에 이르는 사람들과 같이 최후를 맞았는데, 이들은 서진의 친왕들을 포함한 낙양 수비병력의 주력이었다. 덕분에 서진의 황제인 회제(懐帝) 사마치(司馬熾)는 병력부족상태에 시달리다가 낙양이 함락되면서 체포당한 후 나중에 끔살당한다. 이것이 바로 영가의 난이다.
하지만 청담사상은 죽지 않고 동진의 왕도에게 이어진다. 초기에는 긴급상황이라 미약했지만 곧 정세가 안정되자마자 동진의 수도인 건강에서는 청담사상이 꽃을 피웠으며, 이런 증상은 양나라가 후경이 일으킨 난으로 사실상 박살나는 시기까지 이어진다.
- 관료들이 실무를 외면한다.
- 가장 큰 문제점으로 국가의 봉급을 받는 사람들이 청담사상에 빠져 실무가 뭔지도 모르고, 가급적이면 실무가 없는 청직(淸職)으로만 몰렸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청담사상의 현실은 덧없다는 이야기가 왜곡된 것이다. 하안이 일찍이 요순조차도 죽을 힘을 빼고서야 세상 사람들 조금 좋아지게 했던 것에 불과한데 속인인 우리가 세상을 위할 때 더 무엇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으니 힘써 무엇을 바꾸려 하지 말고 돌아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놔두면 된다고 말하고 저술한 바가 있다. 하지만 이 하안은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정치에 있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따라서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기본이며, 탁직이라고 불리는 실무가 많은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는 데다 실무를 맡은 몇 안 되는 사람이 권력에 집착하거나 부패하면 답이 없어지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즉, 앞서 서술되었던 것처럼 하안, 왕필, 하후현이야 멋도 부리면서 실무도 가능했지만 얼치기가 따라하면 그냥 죽도 아니고 밥도 못 된다. 하안이 말했던 것은 고수가 되어 뭐가 정상이고 자연스러운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헛심 빼지 말고 그렇게 돌아가도록 놔두라는 거지, 그냥 놀라는 얘기가 아닌데 그걸 갖은 멋과 기교를 다해 서술해놓은 것을 보고 그냥 놀고 자빠졌던 것이다.
- 열심히 일하는 것을 비천하게 여겼다.
- 역시 만만치 않게 큰 문제점이다. 청담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냥 놀기만 했다면 다행인데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매우 비천하게 생각했으며, 동류에 끼워주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 자기네들은 고상한 귀족이니 천박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품관인법에 따라 인재의 추천권을 가진 게 이들이라 그 문제가 더 컸다.
- 탁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성실히 일해도 고위직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부패와 탐욕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문벌귀족의 성격을 구품관인법과 함께 수립하고 문벌귀족들이 끼리끼리 모여 당파를 결성해 타인을 배척하면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증상을 심화시켰다.
- 이는 앞서 설명한 청담을 나누려면 격이 맞아야 한다는 괴상한 법칙을 심화발전(?)시킨 결과였다.
- 호화사치풍조가 뒷구멍으로 만연했다.
- 얼핏 보기에는 청담사상이 청빈과 함께 자연을 벗 삼는 것을 강조하므로 호화사치와는 연관이 없을 듯하나, 바로 이 이론을 뒤틀어서 해악을 끼친 것이다.
- 예를 들어 자연과 벗 삼을 만한 곳에서 청담을 논하기 위해 경치 좋은 곳을 점거해 주변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내쫒고 사유지로 삼거나, 아예 자기 집 앞마당에서 청담을 논하기 위해 집 주변의 땅을 강제로 뺏은 후 기암괴석을 뽑아다 마당에 박고 정자를 건설하며 연못을 파고 거기서 청담을 논한 것이다. 그래놓고 자신은 물욕이 없다고 선언까지 하면 금상첨화...
- 모순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 겉으로는 청빈하게 보이기 위해 돈이나 재물이라는 것이 꿈에라도 보인다면 몸을 깨끗이 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며, 관직에 뜻이 없음을 알리기 위해 몇 차례나 온 조정의 사신을 돌려보내는 등의 일을 한다.
- 그러나 속으로는 돈과 재물은 비천한 하인이나 노비를 시켜 받아챙기고, 더 높은 관직에 화려하게 오르기 위해 뒷공작을 하면서 자신의 맘에 드는 관직이 올 때까지 거절하는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 트롤링이 만연했다.
- 누군가가 자신을 비판하면 견강부회, 증거자료 위조, 권위에의 호소 등 토론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모든 행위를 별 부끄럼 없이 수행했으며, 이것도 안 통할 것 같으면 동문서답을 하거나 죽림칠현 같은 옛 성현을 본받아 그렇게 한다는 면피까지 꺼냈다. 한 마디로 말해 누가 질책하면 입만 살아서 나불나불했다는 것이다.
- 현실을 망각하고 실속 없이 허례허식이 늘어났다.
- 앞서 언급한 사불상의 꼬리로 만든 불자는 애교로 볼 정도로 평소 사는 곳을 신선 같이 꾸미는 데 열중했다. 이것도 모자라 기본적인 경서에 대한 교양도 없는 상태에서 패션만 최첨단을 걸었다. 물론 현실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이러한 단점이 복합된 결과, 남조의 각 국가들도 개판 5분 전이 되었다. 이는 양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 북제로 간 안지추라는 사람이 안씨 가훈이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할 정도로 심각했다.
양나라 전성기에는 사족 자제들은 모두 널찍한 옷을 입고 높은 모자를 썼다. 그리고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옷에는 향을 뿌렸으며 얼굴은 깨끗하게 면도를 한 후에 분과 연지를 발랐다. 집을 나설 때는 차양이 긴 수레를 탔으며 집에서는 비단방석에 앉았고 양옆에는 골동품을 진열해놓은 다음 공리공론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겉보기에는 신선과 같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시험을 보게 되면 대신 시험볼 사람을 찾아 시험을 치르게 하고, 조정의 연회가 있으면 미리 사람을 시켜 좋은 시구를 짓게 한 후 그걸 외우기만 해서 현장에서는 앵무새처럼 그대로 말하기만 했다. 그리고 관직에 나가서는 실무가 없는 청관만 하려 했다. 밭을 갈고 풀을 뽑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수확을 하는지도 몰랐다. 피부는 연약하고 뼈는 약해 잘 걷지도 못 하고 몸이 약한 데다 기운도 없어서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지 못 했다. |
심지어 후경의 난으로 국가가 개발살난 상태에서도 청담은 끊어지지 않았다. 양나라 형주의 강릉 지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원제(元帝) 소역은 554년에 서위의 군대가 맹공격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용광전에서 백관들에게 노자를 강의했다. 이 강의에는 무장들도 갑옷을 입고 강의에 참석해야 했으며 양양까지 적군이 당도했다는 긴급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만 며칠 동안 잠시 강의를 중단했다가 사태가 잠잠해지는 것 같자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덕분에 국가는 망했으며 소역은 11월에 강릉이 포위되고 외성 서문이 열려서 서위군이 들어오자 절망하며 "만 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라면서 내성 안 동죽각전에 비치된 고금도서 14만 권을 모두 불살라 지가 공부 잘못한 건데 국가도서관 분서라니 웬 트롤링이냐 이건 없애고 내성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12월에 내성까지 함락된 후 포로로 잡혀 최후를 맞는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청담사상은 끈질기게 남아 진(陳) 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했으며, 결국 수나라가 진을 멸망시킨 후에나 일단락된다.
5 평가
청담은 형이상학적인 주제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확대를 가져와 중국 철학의 이론적 수준을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동진 후기에는 불교 사상의 영향도 수렴하여 노장사상과 불교와 유교가 융합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는 남송시대에 성리학이 출현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노장사상에 기초해서 탈속한 기풍을 강조하는 간결하고 정순한 예술적 풍조를 일으키는 데도 기여하였다. 나아가 명교(名敎)를 벗어난 각 개체 스스로의 전개와 발전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주의적인 자아의 자각과 개체 의식의 확대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를 벗어나 형이상적 주제에 관한 현리만을 논의하는 청담은 원래부터 공론(空論)에 치우쳐 민생을 돌보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삶에 대한 쾌락적이며 방관적인 태도를 만연시키기도 하였으며,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와 은둔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낳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해 일찍부터 청담은 공담으로 변질되었으며, 그 결과는 말 그대로 청담이 나라를 그르쳤다로 종합할 정도로 국가와 사회에 해악이 가득했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본다면 이론적 사유면에서의 약간의 향상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있을 필요가 없는 허망한 사상이었다.- ↑ 생각해보자. 지금도 어떤 사상들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아는 자들은 전혀 상관 없는 것에 대해서도 그런 사상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상당히 잦으며, 공부를 하더라도 어설픈 수준까지 한 이들은 주화입마에 빠져 본질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