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선수 경력

1 플레이 스타일

브라질 대표팀과의 평가전. 여기서 보여준 스타일이 홍명보의 스타일에 가장 가깝다.

U-16 대표팀부터 월드컵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수비수. 황선홍과 함께 9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수퍼 스타. 대한민국 선수 가운데 A매치 최다 출장(136경기)과 유일한 월드컵 4회 연속 출전 기록을 가졌다. [1] 거기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시아 월드컵 최다 출전경기 기록 보유자이다. 총 16경기.[2]

고려대학교 재학시절엔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지만 남대식 감독이 스위퍼의 재능을 간파하면서 재능이 꽃피게 된다. 수비수로서 피지컬과 스피드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탁월한 예측력과 전술이해력을 바탕으로 공이 가는 길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수비진을 조율했다. 4백보다는 3백에 특화되었고 일반적인 센터백보다는 스위퍼의 위치에 적합했다. 출신이 미드필더인지라 롱 패스가 상당히 정확했고 그로 인해 꽤나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줬으며 같은 포지션에 같은 성향을 지닌 프란츠 베켄바워와 비견되기도 했다. 카리스마와 리더쉽으로 팀 동료 사이에서도 항상 신망이 두터웠다.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사실 홍명보는 순수한 리베로라고 부르기엔 애매하다. 그의 플레이는 센터백으로서 리베로란 개념보단 독일식, 정확하게는 바이에른 뮌헨식 앵커맨에 가깝기 때문이다. 3백 시스템에서 중앙 3백 중 2명을 대인마크용인 스토퍼로 두고, 나머지 한 명의 센터백을 스위퍼로 두되 이 스위퍼가 거의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울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이 스위퍼를 앵커맨이라 불렀다. 이 앵커맨은 수비때는 스토퍼 2명을 백업하는 수준의 수비 요구치가 낮으며 피지컬 요구치도 상대적으로 낮은 대신 공격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로 뛸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는 포지션으로, 80~90년대 독일 국가대표의 로타어 마테우스,마티아스 잠머, 조금더 올라가면 현역시절 울리 슈틸리케등이 이 포지션에서 활동한 선수.

리베로란 게 엄밀하게 얘기하면 포백 시스템에서의 수비수를 가리키기 때문에 홍명보를 리베로라 부르긴 어렵다. 물론 개념이나 이름이야 해석하고 붙이기 나름이니 리베로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홍명보가 리베로라고 불리게 된 정확한 계기는 독일의 앵커맨을 일본 신문지상에서 리베로로 번역했기에 일본에선 홍명보를 리베로라 불렀고 이 호칭이 베켄바워와 비견할 정도로 간지도 나는 김에 어영부영 한국에도 정착하게 되었다.

바이에른식 앵커맨 자체가 그렇긴 하지만 홍명보는 실제로 써먹기 굉장히 어렵고 애매한 선수였는데, 정확한 롱패스를 활용한 빌드업 능력을 갖고 있었고 중거리 슈팅도 제법이었지만 정작 프로에서 미드필더로 포지션 체인지 했을때는 기본기 부족과 약한 피지컬 때문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홍명보가 한국이 아닌 다른나라에서 태어났거나 한 10년 일찍 태어났더라면 수비형 미드필더가 적합할거란 말이 많았다. 한국이 아닌 다른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좋은 유소년 교육으로 기본기가 튼실할 거고, 10년 전이라면 압박이 덜하니까...아니면 20년 늦게 태어나서 좋은 유소년 교육을 받았어도 기본기가 탄탄해서 기성용처럼 좋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자리잡았을 거라는 말도 있었다.

압박은 달라진 현대축구의 가장 큰 명제이자 홍명보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는데, 옛날 경기를 돌려보면 홍명보의 플레이는 지금 기준으로 볼 때, 끝내주는 시야, 두뇌, 패싱력을 보유했지만 볼 트래핑을 비롯한 기본기가 민망한 수준인데다, 탈압박은 커녕 수비수와의 1:1대결조차 드리블로 뚫어내지 못하는 키핑, 드리블 능력의 소유자였다. 미드필더가 아닌 4백의 센터백으로 기용해도 처참했던 건 마찬가지였는데 일단 본인 수비가 별로였다. 쉽게 말해서 몸싸움은 수준 이하고 1:1대인마크도 좋지 않았다. 홍명보의 1:1에서 수비스타일은 '저지'이지 볼 쟁탈이 아니었다. 그래서 본인을 도와줄 선수를 기다리며 주춤주춤 뒷걸음 치는 모습을 자주보였다. 그나마 헤딩은 평타는 쳤으나 어디까지나 평타일뿐 헤딩도 훌륭한건 아니었다.기본적으로 헤딩을 하려면 몸싸움을 버텨야지 쓰리백 시스템에서 우리편 태클이 강한 선수와 반대편 드리블이 좋은 선수를 맞붙이고 우리편 헤딩이 좋은 선수와 상대편 타겟터를 맞붙이는 등 수비수들을 조종하며 공수의 진퇴를 결정하는 데는 능하지만 정작 수비적인 능력이 클래스에 비해 많이 애매한 데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훌륭한 수비수인가? 앞서도 언급한 탁월한 예측력으로 패스 커트와 슛각도 좁히기 or 블록 등에 능했으며 다른 스토퍼가 먼저 상대를 막다가 뚫리면 귀신같이 나타나 공격을 끊는 커버능력으로 수비진의 전설로 남았다. 홍명보의 결정적인 선방 장면들은 수비적 기본기가 뛰어나서라기보단 타이밍을 결정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경우가 많다. 즉 1:1보다는 다대일이나 막 1:1을 뚫은 상대를 저지하는 능력이 좋다. 순간적인 센스가 좋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1:1은 약하지만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동료가 있으면 능력을 발휘하는 커맨더형 수비수이다. 다만 커맨더형 수비수라고 해서 오프사이드 라인을 잘짠다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다. 홍명보는 항상 3백에 특화되있던 선수였다. 4백은 필연적으로 중앙수비가 직접적으로 상대 공격수와 맞대결하게 되기 때문에 홍명보를 4백의 센터백으로 1명의 파트너만 붙였다간 수비가 박살난다.

거스 히딩크도 2002년을 준비하며 몇 차례나 홍명보를 4백 시스템에 끼워넣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홍명보가 장기부상을 당한 김에 홍명보를 아예 버리고 4백으로 맞추려고 했다.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4백의 센터백 자리에는 맞지 않는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히딩크가 홍명보를 버릴 수 없었던 건 탈아시아급이라 할만한 홍명보의 딥라잉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버릴 수 없었고, 자신에게 알맞은 전형 위에 세워 놓으면 태양과 같은 리더였기 때문이다.[3] 2002년 월드컵때 대표팀 중원을 지킨 유상철김남일은 빼어난 경합능력과 수비력, 활동량으로 유럽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설순 있었으나 패스를 활용한 빌드업 능력은 없었다.[4] 홍명보를 버릴 경우 대표팀의 공격 루트는 측면밖에 남지 않는데 아무리 역습 위주로 경기를 운영하더라도 지공 상황이 아예 없을 수는 없기에 홍명보가 없으면 팀 운영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홍명보에게 어울리는 3백을 구축한 2002년 국가대표팀은 여러가지 조건이 좋고 경기력과 홈 버프를 받아서 역대 최고의 성과를 내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홍명보는 커리어 내내 클럽에서는 피지컬 압박이 덜한 J리그에서 황제로 군림했고, 국가대표에서는 확실한 자신의 보디가드들을 두고 있어야 능력을 100%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축구의 가장 큰 명제인 압박의 문제로 인해 피지컬과 탈압박이 약했던 홍명보식 한국형 플레이메이커 즉, 몸싸움과 드리블보다는 패스로 빌드업과 게임 지휘를 맡던 중앙 미드필더자리는 바로 뒷 세대인 윤정환, 이관우에서 한동안 끊어졌다가, 기성용이 이 자리를 이어받아 스스로 스텝업해서 계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기성용 항목에도 설명이 나와있지만, 기성용이 홍명보의 현대축구판 업그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5][6]

2 국가대표 경력

이제부터 이어지는 엄청 긴 경력을 통해 한국축구대표팀의 유니폼 변천사를 체험할 수 있다.

1988년부터 2002년 11월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89년 겨울 이회택 감독이 고려대학교의 홍명보를 국가대표팀에 선발. 동년배 황선홍과 함께 막내였지만 이미 황선홍은 1988년 아시안컵을 통해 스타가 되었기에 홍명보 본인은 꽤나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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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전 수비수였던 스위퍼 조민국이 부상을 당해 대안으로 국가대표로 뽑혔고, 1990년 2월 노르웨이와 친선경기에서 대표팀 데뷔했다. 그리고 이회택 감독의 총애를 받으며 이탈리아 월드컵에 선발출장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졸전을 거듭하여 월드컵 진출팀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처참했다.[7] 그러나 그 속에서도 홍명보는 '향후 10년 국가대표팀을 대표할 선수'로 평가받았다.

1993년 도하 월드컵 지역예선 한일전에서 0:1으로 패배후 홍명보는 '이후 내가 또 한일전에서 진다면 축구화를 벗겠다'고 맹세했다고. 그리고 이 맹세는 끝까지 지켜냈다.하지만 동아시아컵에서 일본한테 지면 어떻게 될까? 결국 졌다. 그런데 동아시아컵 당시에는 감독이었기 때문에 축구화 벗은 것은 맞다.[8]

1994 월드컵(2골 1어시스트), 아시안게임 대표.
1996년 아시안컵 대표.
1998년 월드컵 대표.
2001년 컨페더레이션컵 대표.
2002년 월드컵 대표.
아시아 선수 최초로 월드컵 최우수선수 3위에 해당하는 'FIFA 브론즈볼'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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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국 월드컵이 홍명보란 이름을 처음으로 널리 알리게 된 실질적인 대회였다. 첫경기인 스페인전에서는 0:2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1:2로 따라붙는 뽀록 프리킥골을 성공시켰다. 사실 멋지게 들어가거나 그런건 아니고 수비벽 맞고 굴절된 공이 운좋게 골대안으로 들어가서 임팩트는 없었다. 오히려 그 직후 황선홍과 2:1 패스 후 날카롭게 서정원에게 찔러준 패스가 1:1찬스를 만들었고 서정원이 득점하면서 버저비터같이 경기가 거의 끝나기 직전 2:2로 극적인 동점을 만들었다. 물론 서정원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지만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주며 1골 1어시를 한 홍명보도 주목을 받았다.스페인전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날린 황선홍은 슬슬 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망의 독일전에서는 디팬딩챔피언인 독일을 상대로 ㅎㄷㄷ한 활약을 보여줘서 독일 선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특히 1:3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그림같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 활약의 절정을 맞았다. 참고로 이 골은 94년 월드컵 가장 먼거리에서 성공시킨골로 기록되었다. 골을 성공시키고 담담하게 손가락 하나만 척 들고 활보하는 쿨한 세레머니가 인상적이어서 당시 동네축구 초중딩들이 많이 따라했다.사실 골넣고 방방 뛰었는데 그건 방송에 잡히지 않았다.[9]그리고 이 골로 한국의 첫 월드컵 한대회 본선 멀티골 기록자가 되었다.[10] 그러나 팀은 2-3으로 패배했고 이로 인하여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여담으로 독일전에서 주장완장을 찼는데 원래 주장은 아니었고 최인영이 주장이었는데 전반전의 부진으로 이운재로 교체되면서 홍명보가 주장완장을 찼다.(위 사진에서도 완장을 찬 사진과 없는 사진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94월드컵의 활약으로 유명세를 타고 부동의 국대 수비수로 활약했다. 유벤투스와 AC밀란 초청 내한 경기 때 각각 득점으로 연결된 롱패스는 그의 패싱력을 보여주는 백미. 96아시안컵에서도 팀의 주축으로 출전했지만 당시 스위퍼로 포변하여 황혼기를 불태우던 김주성과 겹쳐서 당시 감독인 박종환이 홍명보의 패싱력을 써먹기 위해서 미드필더로 올렸는데 그때마다 성과는 영 아니올씨다였다. 다만 이란에게 2:6으로 패한 전설의 "씩스투참사" 때는 김주성이 미드필더로 홍명보가 스위퍼로 원상복귀 했는데 전반전엔 2:1로 이기고 있다가 후반전엔 알리 다에이의 학살이 시작되면서(...) 참패했다. 알리다에이의 마지막 골 상황에서는 가볍게 제쳐지는 굴욕도(...) 후술할 하나회 사건도 이 참패로 불거지기도 했고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던 홍명보가 처음으로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 시기인데 이후 차범근호 시기에 워낙이나 아시아를 씹어먹으며 승승장구해서 조용히 잊혀졌고 홍명보는 계속 주축 수비수였다.다만 그 이후로 국대에서 미드필더로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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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월드컵 예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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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월드컵 때.

1998 월드컵 때는 팀의 부주장이자[11] 수비진의 핵심으로 팀을 이끌었다. 도쿄대첩을 비롯한 예선에서 한국팀은 펄펄 날면서 본선행을 결정지었고 덩달아 당시 감독이던 차범근, 주 득점원이던 최용수와 더불어 주가가 올랐다. [12] 그러나 본선에서는 세계와의 격차만 확인하며 처참하게 발렸고 이에 홍명보라고 별 수 있던건 아니었다. 0:5로 발린 네덜란드전에서 그냥 빨리 경기가 끝나기만 바랐다고 한다.

98 월드컵으로 한국축구는 처참하게 세계와의 격차만 확인했고 차범근 감독은 중도경질당하는 등 내홍을 겪었으나 홍명보는 계속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계속 감독이 바뀌는 와중에도 홍명보의 자리는 탄탄했으며 핵심이었다. 그리고 홍명보도 이젠 원숙미가 느껴졌고 팀이 지고 있거나 경기가 답답할 때는 공격에 가담하면서 센터백 오버랩을 본인의 장기이자 국대의 한 공격 옵션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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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에서 이란과의 8강전에서 이동국의 극적인 골든골에서 완성된 오버랩을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은 0:1으로 패색이 짙다가 경기 종료 직전 김상식의 동점골로 극적으로 연장으로 간 상황이었다. 연장전 들어서 홍명보는 수비보다 공격에 더 치중했고 수비에서 2:1 패스를 이용해 갑자기 치고 나가며 노정윤에게 연결했고 노정윤은 이동국에게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주면서 골든골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렇게 극적으로 올라가서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가볍게 쳐발리며 3-4위전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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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준비과정에서 히딩크와 힘싸움이 있었지만 본선에서는 그야말로 절정의 활약을 보여줬다. 홍명보가 이끄는 한국 팀의 3백 최진철-홍명보-김태영[13]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엄청난 강호들을 상대로 5경기 동안 2실점만을 기록하며[14] 최고의 수비벽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서 승리를 확정짓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한국 축구 최고의 명장면이다.

마지막 3/4위전에서 시작하자마자 최종 수비수이자 주장이 경기 시작 11초만에 공을 터키 공격수 하칸 쉬퀴르에게 빼앗겨 실점하는 실수로 아직도 깨지지 않은 월드컵 최단시간 골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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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끝나고 홍명보는 아시아인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하게 되며 유종의 미를 거둔다.[17] 골든볼이 골키퍼인 올리버 칸이고, 실버볼이 공격수인 호나우두였던 것을 감안하면 월드컵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은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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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월드컵이 끝나고 친선경기에서 황선홍과 함께 명예롭게 국대은퇴했으며 후배들이 무등을 태워서 경기장을 한바퀴도는 훈훈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여담으로 홍명보는 1990~2002 사이의 4회의 월드컵에 개근하였으며, 한국이 치렀던 모든 경기에 출전했던 선수이다. 그가 월드컵에서 치른 경기는 16경기로, 이는 아시아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3 클럽 경력

3.1 상주 상무

1990년 대학을 졸업하고 K리그에 진출할 당시 최대급 대어였으나, 황선홍과 함께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해 파문을 일으킨다. 자세한 건 후술.

3.2 부천 SK

여론과 타구단의 반발을 이기지 못한 포항은 홍명보의 상무 전역 후 드래프트 시장에 내놓게 되었고 홍명보는 유공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드래프트를 통해 부산 대우(現 부산 아이파크)에 지명됐지만 포항에서 이미 가급여를 받고 있었고, 2중계약 파문으로 번질수 있었지만 3:1 트레이드를 통해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

3.3 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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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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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데뷔 첫해 MVP 수상. K리그 베스트 11. 포항 우승.
1994년 세계올스타전 출전. 아시아축구연맹 수비상. K리그 베스트 11.
1995년 세계올스타전 출전.

5월 10일 유공(현 제주)전에서 48m 프리킥 골 성공.(당시 최장거리 골) K리그 베스트 11.
1996년 라피도컵 전북전에서 해트트릭 기록. K리그 베스트 11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2골을 기록한후 당시 대표팀 기술고문이었던 비쇼베츠를 통해 유럽 3개팀[18]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지만 계약 문제[19]로 유럽진출이 거듭 무산되다가 마침내 '1996 시즌이 끝나면 해외진출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적할 팀을 물색,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행을 결심한다.

3.4 벨마레 히라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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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J리그 벨마레 히라츠카 입단. 당시 이적료 11억. 세계올스타전 출전.


청팀의 2번 선수가 누구인지 맞춰보자.경기 내내 호나우두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거다. 청팀 주장에게 가려져 잊혀진 백팀 주장 안습

벨마레 데뷔전은 스위퍼가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 그러나 보복 행위로-백태클이 들어오자 밟아버림- 레드 카드. 당시 벨마레엔 일본대표 로페스와 나카다가 있어, 리베로 홍명보가 아닌 수비의 구심점을 맡길 바랐고 자연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 1998년 팀 재정이 악화되면서 자구책으로 고액연봉자를 팔기 시작했고 홍명보도 트레이드 시장에 나왔다.

3.5 가시와 레이솔

1999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J리그 가시와 레이솔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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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홍명보를 영입한 가시와 레이솔은 만년 중하위권 팀에서 단숨에 리그 3위로 도약, 2000년 외국인으로서 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이 시즌도 역시 리그 3위. 우승을 목표로 황선홍과 유상철을 영입해 외국인 3명 제한을 모두 대한민국 대표팀 주전으로 채운다. 이른바 코리안 삼총사 탄생이다. 홍명보가 일본 축구팬에게도 커다란 존경과 애정을 사는 이유도 이 당시 활약상 때문이다.[20]

  • 1999년 세계올스타전 출전. 당시 말디니와 함께 뛰면서 수비라인을 조율하는 홍명보의 모습을 보고 외국 해설자가 "마치 두 명의 말디니를 보는 것 같다"라고 언급한 바 있음.[21]
  • 1998년 가시와 레이솔의 경기당 실점률은 1.7점. 99년에는 0.8점이 됨(...).

흔히 홍명보를 말할 땐 리베로를 떠올리지만, 실제 대표팀 시합에선 수비에 치중하거나 공격에 가담한다 해도 제한적인 경우-전방에서 워낙 공격이 안 풀리니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형태-가 많았다.

결국 '철저하게 리베로 홍명보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기능하는 팀'은 대표팀이 아닌 J리그 프로팀인 셈이었다. 황선홍과 함께 1990년대 일본 대표팀에게 무수한 좌절을 안겨준 인물이 홍명보란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22]

3.5.1 포항 스틸러스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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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와에서 아이콘이나 다름없던 홍명보에게 은퇴 후 지도자 생활-차기 감독-을 요청했으나,

일본의 팀은 인솔하고 싶지 않다. 나의 영혼은 항상 한국에 있다.

라는 말과 함께 사양하고 J리그 생활을 정리한다.[23]
이때 감독했으면 일본에서도 평생까임권 획득
대신 홍명보는 포항에서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정리할 예정으로 2003년까지 계약을 맺었다.

3.6 LA 갤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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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그러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MLS로 이적하겠다는 주장과 함께 LA 갤럭시로 이적해서 포항에게 엄청난 통수(...)를 선사했다. 자세한 건 후술.
다만 논란과는 별개로 미국 축구내에서 긍정적인 족적을 남기긴 한 듯하다. 경기 전에 애국가도 나오고 한국계 미국인이 미국국가를 불렀으며, 하프타임에 태권도 시범단의 공연이 나오는 등 한미 문화 교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LA갤럭시에서 보관중인 홍명보의 축구화.

4 선수생활 중 사건/사고

4.1 K리그 드래프트 파동

홍명보는 이미 고려대 시절 1990 월드컵에 출전하면서 대표팀의 차후 10년을 책임질 중핵으로 떠올랐다. 이에 드래프트 판에 나올 경우 모든 팀의 관심이 집중될 대어였으나 홍명보는 황선홍과 더불어 선수 본인이 가고 싶은 팀에 입단할 수 없다는 점과 계약금과 연봉이 타 종목에 비해 낮게 책정되었다며 드래프트 거부 선언을 했다. 그리고 포항제철이 꼼수를 부려 산하 아마추어팀에 황선홍과 홍명보를 입단시킨 후 포항제철 소속 선수로 맞아들였다. 이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동시에 아마추어팀 입단에서 3년이 지날 때까지 경기에 나올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황선홍과 홍명보를 포항이 해외 유학을 보내기로 발표하며 일반 팬들에게까지 파문이 확산되었다. 이후 황선홍은 해외 유학을 떠났고 홍명보는 상무에 입대한다.

그러나 여론과 타구단의 반발을 이기지 못한 포항은 홍명보의 상무 전역 후 드래프트 시장에 내놓게 되었고 홍명보는 유공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홍명보는 이미 포항에게서 1억을 상회하는 돈을 받았기에 유공으로 가는 건 포항제철의 책임자들에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포항은 기존 포항 선수와 더불어 그해 드래프트 1, 2순위자들과 유공의 홍명보를 1:3 트레이드하며 홍명보를 데려오게 된다.그리고 포항은 15년 후 홍명보의 고려대 후배 선수에게 뒤통수를 맞는 부메랑 효과를 누리게 된다.[24]

4.2 LA 갤럭시 이적 관련 통수

포항은 4강팀의 주장 홍명보로 포항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적은 생각도 없었으나, 어느 틈에 홍명보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홍명보는 MLS로 이적하고 싶었고, 느닷없이 MLS로의 이적의지를 천명했다. 포항은 금시초문이었는데 홍명보와 LA 갤럭시 간의 개인협상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정황이었다.[25] 포항은 당연히 뭔 소리냐는 반응으로 홍명보의 이적 의사를 일축했으나 홍명보는 이에 백태클 퇴장으로 대표되는 태업으로 응수했으며[26], 장외에서는 언플 및 개인 팬클럽 등의 활발한 활동으로 대승적 차원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구단이 졸렬한 것처럼 보이게 압박했다. 결국 포항은 이적료로 100만 달러를 요구했는데 LA 갤럭시에서는 36만 달러밖에 주지 못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결국 홍명보 본인이 파기 위약금을 물고 자유계약으로 이적했다. 나이를 감안해도 바로 6개월 전 월드컵에서 브론즈볼을 수상한 선수에게 36만 달러가 적당한 이적료는 아니었다.

이때 묘한 언플로 마치 포항은 홍명보를 공짜로 J리그에서 데려왔는데 돈장사한다고 욕먹었지만, 기실 홍명보의 이적에 공식 이적료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당시 가시와와 홍명보의 남은 계약기간 동안 홍명보가 받을 수 있는 연봉이 100만달러였고 포항이 이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이적이 발생했던 것이다. 즉 단 반시즌만 뛴 홍명보를 포항이 36만달러에 보내주면 포항은 자기 맘대로 이적 안 시켜준다고 태업질을 일삼으며 여론을 조종해 팀을 뒤흔든 선수를 6개월 동안 쓰기 위해 64만달러 + 6개월어치의 연봉(필시 포항 출심임과 더불어 4강 영웅이자 주장임을 내세워 최고급 대우를 해줬을 테니 연봉 10억 이상도 생각할 수 있는 만만찮은 액수)이라는 거대한 비용을 지불했어야 하는 꼴이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는 위약금만 물면 언제든지 자유계약 신분이 되어 이적할 수 있다는 거대한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악질이라고 볼 수 있다. 선례왕 박따봉의 원조[27] 끼리끼리 논다더니

여튼 이 사건으로 포항에서 홍명보에 대한 평가가 급락하게 되고 지금도 이 사건을 아는 포항 올드팬들에게는 욕을 먹는다. 황선홍도 도피성으로 J리그 가면서 이미지가 안 좋아졌던 시절도 있긴 했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깽판을 치면서 가지는 않았다. 은퇴 이후에도 포항에 애정을 보여주며 감독까지 된 황선홍과는 달리 홍명보는 포항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며[28] 되려 포항이 울산 다음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서울 구단에 관심을 더 많이 보여주면서 스스로 이미지 악화에 일조했다. 자서전에서도 자신은 포항의 레전드는 아니고, 가시와 레이솔의 레전드는 될 수 있겠다고 쓴 바 있다.[29]

다만 포항 구단이 숱하게 홍명보의 해외 진출을 완강하게 막고 그가 J리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포항 구단도 일방적 피해자는 아닌 셈이다. 그러나 포항이 얼마나 공들여 홍명보를 데려왔는지, 데려와서 군대 보냈다 어쩔 수 없이 드래프트 시장에 내놓은 뒤 1:3 트레이드로 다시 데려왔는가는 이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30]

이 때 뭔가 저주라도 받은 건지 포항은 홍명보에 이어 또 다시 통수를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더 맞게 된다. 김 모씨-박주영-오범석에 이어 2014년에 황희찬까지.

4.3 잦은 항명 및 태업 의혹

과거 전 29만원의 그것을 본딴 사조직 '열하나회'의 멤버로서 대표팀내 영향력을 행사하며 가입하지 않는 선수에겐 불이익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하나회'가 그 시절 국대들에 대한 홀대와 막나가는 대접 때문에 선수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단 반론도 있으나 감독 통제 벗어나서 자기들끼리 밤새 술먹다가 걸린(...) 조직이 그럴리가...게다가 당시에도 박종환 당시 대표팀 감독을 무시하고 고의로 태업을 벌였단 의혹도 받았다. 대표적인 게임이 전반까지 2:1로 멀쩡히 앞서가다가 후반에 탈탈 털린 대 이란 2:6 참패 경기...[31]

다만 여기에 대해선 다른 설도 존재한다. 열하나회는 하나회를 모델로 만든 것이 아니라 베스트 엘레븐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열하나+회라고 했다는 것과 박종환 감독 당시 이란전 6-2 대패의 경우, 박종환 감독의 소위 빠따질을 위주로 한 강압적인 지휘에 불만을 품고 벌인 일이라는 이야기다. 박종환 감독 자체가 워낙 강압적인 지도와 빠따질...로 유명한 구세대 감독이라 나름 그들에게도 명분은 있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대표팀에서 사조직을 창설한 것은 비난을 받을 여지가 많다.

비쇼베츠 감독과의 불화가 대표적으로 꼽히는데, 올림픽 대표팀에 와일드카드로서 합류가 유력시됐으나 불발되고 말았는데 감독의 출장명령을 대놓고 거부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비쇼베츠 감독이 한국 문화에 매우 잘 적응하지는 못했던 점, 그리고 당시 윤정환 위주의 팀을 만드려고 했던 것이 불화의 원인이 아니었나 추측되곤 한다.

1998 월드컵 감독인 차범근과 2002 월드컵 감독인 히딩크와도 당시 크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아드보카트는 아드보카트 감독님이라고 부르는데 히딩크는 히딩크 감독이라고 부른다.[32] 하지만 후술할 내용에 의하면, 히딩크와는 크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히딩크가 감독을 맡던 안지 마하치칼라 팀에 가서 코치 연수를 받았었다.사이가 크게 좋진 않다고 했지 나쁘다고 하진 않았다. 애초에 감독과 주장이 사이나쁜 막장팀이 4강까지 갈리가...
  1. 참가만 따지면 황선홍도 포함된다. 다만 황선홍은 98년에 부상 때문에 엔트리에만 포함되고 출전은 하지 못했다.
  2. 박지성이 2014년 월드컵에도 뛴다면 이 기록을 깰 수 있을것으로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국가대표팀을 은퇴하였다. 총 출전경기수는 2010 월드컵까지 총 14경기째.
  3. 후술할 열하나회 및 각종 태업 사건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멘탈 측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 시대만 해도 지금과 달리 똥군기도 그냥저냥 넘어가던 시대긴 하다. 그래도 홍명보 이후 박지성이라는 걸출한 주장이자 리더쉽, 인성을 갖춘 선수가 존재해서 홍명보 은퇴후 리더쉽 부재로 인한 혼선이 일어나진 않은 편. 되려 박지성 은퇴후 기성용 페이스북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4. 파일:NBnK3TF.jpg이 점은 16강전에서 맞붙은 이탈리아 대표팀도 바로 알아보았고, 토티를 내보내 홍명보를 집중 견제하여 패스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전반전은 한국 대표팀이 공격 전개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더럽고 치사한 팔꿈치 공격과 더불어 선제골을 얻어맞는 등 부진하였다.
  5. 여담으로 기성용도 기본적인 수비력 자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는 평이 대부분이나, 기본적인 하드웨어가 좋은 편이라, 한때 미카엘 라우드럽 감독의 지도를 받을 때, 중앙 수비수 역할을 가끔 맡아서 잘 소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예 포지션을 센터백으로 전향할 것을 권유받기도 할 정도였다.그러나 본인이 이 역할을 별로 선호하지 않아서 거부하였다.
  6. 기성용도 롱패스를 활용한 빌드업과 넓은 시야 등으로 홍명보와 비교되기도 하고 피지컬과 볼 다루는 테크닉은 당연히 기성용이 우위지만, 홍명보의 예측력과 위치선정 같은 센스적인 부분은 비교불가다. 기성용이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수비적으로 까이는 이유는 활동량만 많지 그 활동량을 활용하지 않는 애매한 위치선정 때문인데, 이 위치선정에서 홍명보는 정말 탁월함을 보였다.
  7. 엄밀히 얘기해서 졸전은 아니었다. 그냥 당시 한국축구의 실력이나 수준이 세계레벨과 워낙이나 격차가 있었을 뿐이다. 당시의 한국축구의 위상은 2015년 현재 한국축구 위상과는 많이 달랐다. 즉, 제 실력을 발휘못했다거나 특별히 본선무대에서 더 못했다거나 했던 건 아니라는거
  8.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전에서 일본과 2차례 대결했는데 이미 출전을 확정지은 대표팀이 홈경기에서 사지에 몰려 있던 일본에게 0:2로 패배한 바 있다. 이때 홍명보는 경고 누적으로 1경기 출전정지가 되었기 때문에 출전할 수 없었다.
  9. 파일:94명보4.jpg잘 보면 이것도 별로 환하게 웃는 얼굴은 아니다(...)쿨타임 8년 더 기다려야 한다
  10. 애초에 월드컵 본선에서 2골 넣은 선수가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에 별로 없다. 2015년 현재에도 2골이상 기록자는 홍명보를 비롯해서 안정환, 박지성(이상 3골), 황선홍, 이청용, 이정수, 유상철(이상 2골)이 전부다.
  11. 주장은 최영일이었다. 그런데 최영일이 결장한 경기(멕시코전 등)엔 홍명보가 주장 완장을 차지 않고 유상철이 대신 찼다. 이유가 따로 있는지는 추가바람.
  12. 다만 당시 예선을 하면서 포스트 홍명보라며 장대일이란 신예가 등장하며 몇 경기는 빠지기도 했었다. 미남에 연예인과 약혼도 했던 장대일은 큰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로는...
  13. 물론 송종국과 이영표가 양쪽에 서서 수비에 활발하게 가담함으로써, 수비 상황에서는 5백과도 같은 상황이기도 하였다.
  14. 이 당시에 이운재 역시 야신상 유력 후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선방을 선보였다.
  15. 이 일에 대해 홍명보는 "유상철이 골키퍼에게 패스할 줄 알았다. 그 상황에서는 골키퍼에게 패스하는게 당연하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유상철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이후 2014년 월드컵 때 보여준 졸전과 불통 이미지로 인해 몇몇 커뮤니티에서 대회 직후 이 일화가 세삼스럽게 재조명되고 있다;;
  16. 이 사건을 계기로 홍명보와 유상철이 사이가 틀어져 그 다음부터 공식석상에 한번도 같이 안나왔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그 후로도 같이 잘만 나왔다.# 실제로 이때는 월드컵 4강을 달성하고 워낙 분위기가 좋아서 터키한테 연속으로 골을 먹으면서도 침울해지지 않았다. 실제로 터키 선수들과는 경기 후 서로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 마디로 승부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분위기. 그런데 여기서 나온 실수 하나로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의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17. 월드컵이 끝나고 방송에서 그전까지는 조별 예선만 마치면 짐싸서 한국으로 왔으니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사실 상술한 글들을 읽어봐도 한국에게 월드컵은 흑역사에 가깝지 딱히 영광의 역사는 아니었다. 패턴이 아시아에선 승승장구->세계무대에서 멸망이던 시절이라(...)
  18. 그 중 하나가 바르셀로나였고 또다른 하나는 AC 밀란이었다. 흠좀무.
  19. 계약 문제라기 보다는 그냥 포항 구단에 오퍼가 온 적이 없었다. 홍명보 본인의 자서전인 '영원한 리베로'에서도 자신한테 직접 제의가 왔지 구단에 제의가 갔다는 이야기가 안 적혀 있다. 기본적으로 자서전이란게 선수 자신에 대한 미화가 어느정도 들어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구단에 오퍼가 간적이 없다고 봐야한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진출 어쩌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하물며 당시는 보스만 판결 이전이었기 때문에 FIFA 이적룰도 2001년 개정 이전과는 완전 딴판이다.
  20. 이때문에 당시 발매된 위닝일레븐 J리그 시리즈에서 홍명보의 능력치는 그야말로 신급. 가시와 레이솔을 잡고 확인해보면 팀 기본전술에도 센터백 오버랩이 설정되어있고, 켜는 순간 수비진 가운데의 노란 점 하나가 폭풍처럼 오버래핑을...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21. 이 부분은 사실 홍명보가 주위선수들에게 지시하는걸보고 해설자가 비꼬는 투로 "뭐죠. 말디니가 두명인가요?"라는 식으로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2. 센터백 오버래핑을 팀 전술로 완성시킨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자 문제도 있고, 팀의 규모 문제도 있고 한국 프로에서는 쉽지 않았다.
  23. 이때 이 말을 들은 일본 팬들 중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식의 볼멘소리도 조금 있었다고 한다.
  24. 여담이지만 결국 이 드래프트 파동은 번지고 번져서 결국 신태용을 위시해서 어정쩡하게 국대에 소집되고 해외진출도 안 하는 a급 유망주들을 잔뜩 수집한 일화가 꿀을 빠는 결과로 끝나게 된다.
  25. 지금이야 사문화된 규정이지만 축구계에서 구단과 선수(+대리인)간의 사전 접촉은 절대불가능이며 이는 피파 선수 이적규정에 명시되어있다. 2002년이면 이 규정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던때였다.
  26. 홍명보는 이미 월드컵 이후 K리그에서 출전하는 경기마다 허술한 수비와 거친 플레이로 포항 팬들의 빈축을 사고 있었다. 송종국이 네덜란드리그 진출을 확정짓고 떠나기 전 부산 팬들 앞에서 가진 마지막 고별전에서 송종국에게 불필요한 거친 태클을 넣어서 9시 뉴스에까지 보도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월드컵 4강 동료이자 후배인 송종국에게 대체 왜 그랬는지는 미스테리다.
  27. 실제로 이후에 몇몇 포항 선수가 이런 식으로 이적하려다가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28.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29. 다만 자서전에서 포항 구단을 비중있게 언급하고 자신은 "영원한 포항맨"이라 한 부분도 있다(...). 양심은 있나보다
  30. 다만 위에 다른 각주에서 기재한 것처럼 구단에 정식 오퍼가 왔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불분명하다. 더불어 입단테스트의 경우는 정말로 검증이 되지 않은 신예선수들 위주로 이루어진다는 반문이 있고, 이적료와 임대료가 비싼 것처럼 기재되어 있지만 홍명보가 벨마레 히라츠카 입단 당시 포항이 받은 이적료가 한화 11억으로, 당시 150만 달러와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봤을 때는 포항의 완고함보다는 유럽 클럽들이 알려진 것 처럼 가치를 높게 쳐주지 않았을 확률도 있다. 다만 최순호의 예를 보았을때 진짜로 정식 오퍼가 왔더라도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의미는 없다.
  31. 다만 히딩크 이전 한국 대표팀은 토너먼트에 맞는 체계적인 체력 트레이닝 없이 우리는 체력이 강하다는 막연한 인식속에 구 일본군식 정신론만 내세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냥 후반전에 체력 떨어져 졌을 가능성도 높다.
  32. 자신의 롤모델은 아드보카트라고 자주 얘기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