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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5년 6월 19일 경기도 연천군 소재 대한민국 육군 제28보병사단 530GP에서 김동민 육군 일병이 내무실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여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이른바 김일병 사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건을 저지른 범인 김동민 일병은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사형이 확정되어 현재 국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2 상세
사건 당일 전방 GP에선 사고 발생 당시 조선인민군 육군의 공격으로 상황이 전파되기도 했지만 오래 안 가 정정되었다. 모 사단에서 당직 맡던 군필자의 말에 의하면 초기 상황연락 보고 받을 당시에는 영현백과 함께 태극기를 준비해달라는 보고[1]가 있었으나, 이내 정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전쟁이나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초반의 혼란스러운 상황 및 한정적인 정보수집 때문에 정확하지 못한 내용이 발표되는 것과 비슷하다.
2.1 원인
원인은 병영부조리.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1990년대에 비해 2000년대에 들어오자 그래도 대놓고 패거나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루는 일은 없어졌다.[2] 그러나 이건 인식이 바뀐게 아니라 감시해서 구타를 못하게 막으니까 벌어진 것이므로 독립부대의 구타는 여전했고, 가해자 김동민 일병 본인도 다른 GP에서 이미 이런 일을 겪다가 견디다 못해 사고를 치고 전입을 온 자원이기도 했다. 해당 GP에서 심한 부조리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마찰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아마 이런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해 총기난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언론에선 김동민 일병이 스페셜포스, 서든어택 등 총으로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게임광이라서 이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개소리를 쳤지만, 조사 결과 사실 김동민 일병이 플레이하던 게임은 메이플스토리로 밝혀졌으므로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3] 무슨 일만 일어났다 하면 게임 등의 콘텐츠부터 걸고 넘어졌던 언론의 오래된 악습이다.[4]
아이러니하게도, 김동민 일병은 부대원들 중에서 인성평가점수가 가장 좋았다고 한다. 모 국회의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꾸눈 세상에서 멀쩡한 사람이 병신취급 당한 경우라 할 수 있다.
3 사건의 여파
약간 과장되게 말해서 대한민국 육군의 병영 문화는 이 사건 이전과 이 사건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 조사결과가 발표되자 대한민국 국군은 발칵 뒤집혔고 특히 육군을 위주로 모든 부대에 걸쳐 부대 조사와 소원수리가 행해졌다. 육군 내 만연했던 구타, 갈굼, 내무부조리 등 병영의 악습들이 그럭저럭 사라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 그나마 좋게 봐줄 만한 점이다. 특히 육군 28사단은 전면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재편되는 굴욕을 당했다. 당시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이 전부 옷을 벗었고 군단장에게 경고장이 발부되었다고 한다. 이들을 감독하던 담당 병기부사관은 보병으로 아예 전과되었다. 이후 28사단은 내무부조리가 많이 사라진 걸로 알고 있지만, 2014년에 윤 일병 사건이 일어나면서 여전히 그럼 그렇지 수준의 개선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개선되었다는 기준은 방산비리가 근절되었다와 같은 의미가 된다.
이 사건은 육군에게는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사건의 원인인 내무 부조리의 원인과 시작점을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는데 답은 일본군. 일본군의 심각한 가혹행위가 국군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당장에 육군 최초 대장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에 초대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도 일본 육사 출신, 유재흥도 일본 육사 출신. 한 마디로 육군이 이 모양인 것은 일본군 출신들이 들어와서 육군을 세우면서 일본군의 전통과 문화를 이식했다는 결론이 나온 것. 즉 독립군의 후예라는데 실은 일본군의 후예라는 것. 수많은 독립군과 대한 광복군을 시조로 정통성을 강조한 대한민국 국군 차원에서 보면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였다.[5] 해군, 공군은 일본군 출신이 없냐고 할 수 있는데 해군은 창군시부터 일본군 출신자가 아닌 독립운동가 손원일 제독을 위시한 상선사관 출신들이 창군을 주도했고,[6] 해병대를 제외하면 일본군 출신이 없었다.[7] 공군은 창립 멤버가 일본군 출신이 많은 건 비슷한데 창군을 주도한 사람은 창립자 중 가장 연장자이자 광복군 참모처장이었던 최용덕 장군[8]이고, 창립자 중에 김구의 둘째 아들인 김신 장군이 있다. 또한 대한민국 공군은 창립부터 육성까지 미국 공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연히 내무 부조리는 아주 몹쓸 문화로 찍혔다. 아무리 큰 사건이었고 사람이 죽어나갔다지만 보수적으로 유명한 군대에서 내무 부조리가 신속하게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이 점도 크다.[9] 참고로 해군, 공군은 지원제며 여기에 합격하는 사병이라면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사병들이 많으니 문제 생길 확률은 낮아지고(낮아질 뿐이다), 육군은 무차별 징집(...)이고 인원수가 많다보니 당연히 그만큼 사고 터질 확률도 높아지는 것일 뿐이다.
단, 이것을 단순하게 일본군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독일 영화 엑스페리먼트를 보면 "폐쇄된 환경"에서 간수 역할을 부여하자 외부와 고립된 상황에서 무한한 권력을 받은 일부 간수들이 점차 자신의 가학 본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무 부조리가 심한 군의 특징은 굉장히 폐쇄적이라는 것이다. 실제 2005년 육군훈련소 인분사건 당시에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당시 논산 훈련소장은 MBC기자에게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청탁까지 했을 정도였지만 결국 폭로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대대적인 관리, 감시가 이루어지고 이전보다는 좋아졌는데, 감시 체계가 투명해지는 것만이 가혹 행위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것이다.
지금은 많은 보도로 인해 많이 완화되었으나, 군대가 아니라 경찰 조직인 의경도 가혹 행위가 매우 심했고, 심지어 구청과 시청에 복무하는 공익마저도 가혹 행위 문제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또 이전에도 군대 괴담이나 몇 가지 확인되는 소스로 비슷한 사건[10]이 존재했으나 이전 사건들은 그대로 묻히고 개선의 여지조차 없었던 반면 이번 사건은 언론에 대서 특필 되면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
다만 그렇다고 해서 100% 개선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고 대체로 지휘관들이 감시를 철저하게 하는 부대일수록 구타가 줄어드는 형태였다. 즉 수백명이 함께 생활하는 중대나 대대에서 이전처럼 대놓고 구타하는 건 어렵게 됐지만 간부 감시가 소홀한 독립 부대의 구타는 여전했다.[11] 그 결과 2008년 모 사단의 GP에서 황모 이병이 수류탄 사고를 일으키는 등[12] 사고는 계속 터졌으며 특히 해병대는 개선된 점이 거의 없어 2011년 한국군 최대의 흑역사 중 하나로 기록되는 제2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4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 사건의 진범 김모 해병도 현재 사형 선고를 받고 국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나이도 많고 덥수룩 한 스타일의 수감자가 지나가서 중사 쯤 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김일병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2014년 4월, 똑같은 제28 보병 사단에서 의무대 후임병 폭행사망 사건이 터지면서 제28보병사단은 인권 쓰레기 사단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사건도 외부와 격리된 사실상의 독립 부대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2012년 5월 16일, 유족들의 동의하에 당시 상황을 찍은 영상이 유포되었는데, 사망자 유가족들이 재조사를 요구하기 위한 여론 환기 차원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육군 당국은 재조사 방침은 없다고 입장을 내놓았다.
이 사건은 2008년작 영화 <GP506>과 연관된 것처럼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감독은 공식적으로 관계 없다고 발언했다. 2012년에 나온 음모론.
4 이야기거리
사건 발생 초기 국방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망자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하지 않았다. 국군수도병원(서울특별시), 국군양주병원(경기도 양주시)[13], 국군일동병원(포천시), 국군벽제병원(고양시) 등 군병원 4곳에 분산수용하여 유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원천봉쇄한 것이다.[14]
그러자 당시 국방부장관인 윤광웅 제독의 정책 보좌관이었던 정태용은 현안 업무를 조정하는 국방부 현안점검회의에서 "왜 시신을 한 곳에 안치해 합동분향소를 차리지 않느냐" 고 따졌다. 이에 인사복지 업무를 총괄하는 김승렬 차관보는 "군의 실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야 말썽이 안 난다" 라고 답변했다. 이에 빡친 정보좌관은 "그게 말이 되느냐, 시신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안치하고 합동분향소를 차려 유가족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정 보좌관의 노력으로 시신들은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지고 합동분향소가 안치되었다. 또한 1953년 국방부장관인 손원일 제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해군 출신으로 장관에 오른 윤광웅 장관 등은 분향소의 유가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국방부 간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분향소에 조문 갔다가 수십 명의 군인과 유가족, 언론사 취재진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거센 항의를 받았다. 평상시에도 좌파정권에 투신한 좌파군인이라던지, 해군 출신이라며 국방부 내에 온갖 견제와 조롱을 받던[15] 윤광웅 장관은 국방부 특히 육군 간부들에게 "그럴 줄 알았다" 며 또 다시 조롱당했다.
그리고 이것이 사상 최초의 국방부장관의 조문이었다.
그동안 육군의 행태를 보자면 일본군 전통을 답습해 군대에서 사람은 소모품이라는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도 17명의 우리 장병들이 전사하였지만 시신들을 분산 안치해 개별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합동위령제는 아예 열지도 않았다. 합동분향소나 위령제가 없는데 대통령, 국방부장관 기타 등이 올 일은 만무하다. 그리고 위의 사건 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연평해전 당시에도 이와 같은 행태가 반복되었다.
결국 이렇게 합동분향소가 차려지게 되어 유가족들이 뭉치게 되자 유가족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생방송으로 중계된 수사상황 발표에서도 유가족들이 집요하게 의문점을 물어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유가족들이 '우리 자식들은 북한군에 희생되었다' 고 음모론도 꾸미게 되고 언론에 철저히 공개된 덕분에 보수언론에서도 좌파정부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글을 쓸 수 있었다. 비록 합동분향소를 만들게 되어 유가족과 언론에 의해 국방부가 더 많은 질타를 받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국가와 군대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것을 이제야 한 것이다.
또한 상당수의 보수언론은 이 사건이 좌파정부의 영향으로 군인들의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하였지만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도 똑같은 육군 28사단에서 똑같이 8명이 사살당한 제28보병사단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오자 바로 버로우했다.[16]
이 사건을 계기로 역대 총기난사 사건 등 국군의 주요 사고 사건들을 죽 정리한 2005년도 기사를 보면 먼 과거에도 이런 사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불과 9일 뒤, 해군에서도 자칫했으면 이 사건보다 사상자가 더 컸을 뻔한 사건이 터졌다.
5 국방부와 유가족의 대립
유가족들은 현재까지도 국방부의 수사결과를 강하게 불신하고 있다. 유가족 측은 북한 육군의 포격으로 530GP의 병력들이 전사한 사건을 군이 은폐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사상 최대의 군 의문사 530gp>라는 책을 발간하여 군의 수사결과를 반박하였다.
유가족 측의 주장은 SBS 뉴스추적에서 방송이 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연천530GP피격사건전사자유족회, 연천530GP진상규명촉구국민협의회의 명의로 2014년 12월 16일 서울지방중앙검찰청에 은폐조작 당사자로 지목한 국방부 관계자를 고소하였으며, 국방부 민원실에 재조사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 이는 북한군의 도발로 벌어진 국지전에서 전사했다는 뜻이다.
- ↑ 사실 지금도 구타나 가혹행위 자체는 있을 공산이 크다. 한국군 자살자는 연간 80여 명 정도를 기록하는데 징병제라 21개월~24개월만 버티면 끝이라 어지간히 환경이 열악하고 훈련이 빡세도 자살할 확률은 낮기 때문에 결국 가혹행위가 상당부분을 차지했다고 봐야 맞다.
- ↑ 후일 원사운드는 TIG의 게이머 자녀 확인 방법이란 만화에 메이플스토리를 플레이한다. 정상입니다.이란 컷을 넣어 제대로 깠다. 다만 알아들은 사람이 몇 없는듯.
- ↑ 사이버 지식 정보방을 제외하고는 보안상의 이유로 오락활동에 엄격히 제약을 받는다. 물론 게임같은 걸 하게 가만 놔두는 것도 아니고.
- ↑ 물론 광복군이나 독립군 출신 군인들 대부분도 국군에 재입대하여 창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 인물로 초대 1군단 사령관 김홍일 장군이 있다. 김홍일 장군의 경우 6.25전쟁에서 다 무너진 육군을 살려낸 영웅이고, 미군은 9월 4일 인천 상륙전까지 기껏해야 2개 사단 정도만 있었고, 그 중 1개 사단은 대전에서 거의 몰살당했다. 즉 서울이 함락된 6월 28일부터 9월 4일까지는 거의 국군의 힘으로 버틴 것이다. 그리고 그 버틴 것을 한 기반과 작전을 짠 사람이 김홍일 장군이다. 물론 얼마 안 있어 예편 당하셨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이자 초대 육사교장인 안춘생 장군이 있다. 하지만 광복군/독립군 출신자들은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에 비해 인원 수가 워낙 미비해 큰 파벌을 형성하진 못했다. 더군다나 광복군 출신자들이라고 마냥 병영 부조리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아니었고(안춘생 장군 또한 똥군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일본군 출신자들 중에서도 이종찬 장군과 같이 양심적인 군인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 ↑ 일본 해군이 육전대가 아닌 해상 병과에는 조선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해군 출신자들은 해상 병과에 무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 ↑ 상부에서 이야기한 일본 해군 출신자들 대부분이 해병대로 편입되었다.
- ↑ 중국 공군에서 비행 훈련을 받았으며, 광복군에 있을 때 항공대를 설립하려 하였다.
- ↑ 이때문에 니코니코 동화, 2ch 등에서는 한국군은 영원한 일본군의 후예라고 댓글을 남기며 마구 조롱한다. 하지만 자위대의 병영 문화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며, 한국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병영 부조리가 만연하다.
- ↑ 부대원이 불만을 갖고 있다가 부대 날려먹고 자폭했다는 식의 이야기.
- ↑ 악질적인 구타 및 가혹 행위 사고가 벌어진 부대를 종합해 보면 대부분 상급 지휘관들의 감시가 이뤄지기 힘든 독립 부대다.
- ↑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 ↑ 육군 제6군단 28사단 지원 전방병원인 관계로 부상자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었다.
- ↑ 실제로 사건 당일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모인 국군양주병원의 경우 비무장 단독군장 차림의 기간병들로 유가족들의 병원 본관동 진입시도를 봉쇄하기도 했다.
- ↑ 예비역 고위직들 사이에서는, 전역한 후 정계에 입문할 때 새누리당이 아닌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쪽을 지지하거나 혹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고위직에서 일했던 이들은 내부에서 부역자, 혹은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국방 및 보훈정책의 개선과 발전, 투명성 제고 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가 민주화, 문민화 이후부터였고 민주당 쪽에서도 과거 집권당이던 시절부터 이를 꾸준히 주도했으며, 총선 및 대선에서 지속적인 정책을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슨 소리인가 싶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안보', '보수'의 아젠다를 선점해 과거 군사정부 시절의 후신으로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현 집권 여당의 역사가 있으니.
- ↑ 사실 28사단에서 소문처럼 떠돌던 이야기였다. 이 보도가 나오자 '진짜였어?' 하고 놀라워하는 예비역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