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 ||||
2015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 | 밥 딜런 | → | 2017년 수상자 |
이름 | 밥 딜런 (Bob Dylan) | |
국적 | 미국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 |
출생 | 1941년 5월 24일, 미국 미네소타 주 덜루스 | |
신장 | 171cm | |
최종학력 | 미네소타 대학교 중퇴 | |
레이블 | 유니버설 레코드[1] | |
데뷔년도 | 1962년 1집 Bob Dylan |
목차
1 개요
대중음악인 포크의 가사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 역사적인 인물이자 전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화가이자 시인이다. 현재 이름은 1집 발매 전에 개명한 이름이고 개명 전 이름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 (Robert Allen Zimmerman).[2][3]
2016년에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로 가수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 삶
1941년 미네소타 주 덜루스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중산층 자녀로 태어났다.[4] 어렸을 때부터 행크 윌리엄스,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 리처드의 광팬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엔 로큰롤 밴드를 조직하여 여러 번 공연을 했었다. 이 당시에 그가 속한 밴드는 다른 스쿨 밴드보다도 매우 시끄럽게 연주했다고 하며, 한번은 교장 선생이 마이크 줄을 끊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59년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5] 미국에선 로큰롤 배척 분위기가 팽배해져 우디 거스리의 포크 음악과 흑인 전통 블루스에 관심을 돌리고 근처에서 밥 딜런이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61년에 뉴욕으로 올라와 카페에서 반주를 하고 간간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이 때 그는 우디 거스리의 병실을 찾아가 그를 간병하며 초기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1962년 컬럼비아 레코드의 눈에 띄어 첫 앨범인 "Bob Dylan"을 발표한다.
2.1 조안 바에즈(Joan Baez)와의 인연
여기에 따르면 1961년 1월 딜런이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도착했을 동갑내기 조안 바에즈는 이미 "포크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딜런의 2004년 자서전에 따르면 딜런이 처음으로 TV에서 바에즈를 보았을 땐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눈을 깜빡이기조차 싫었다 (중략) 그녀의 모습에 난 한숨만 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 악령을 쫓는 목소리. 하느님에게 직접 노래하듯한 목소리 (중략) 못하는 게 없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여 1961년 바에즈에게 비친 딜런의 공연 모습은 별로였었다고 한다.
1963년 바에즈는 아직 무명인 딜런을 자신의 공연에 불러 듀엣도 하고 솔로의 기회도 주기 시작하였다. 만명에 달하는 관객은 딜런의 낯선 스타일에 야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과 더불어 딜런의 인기는 바에즈를 추월하였고 이제는 바에즈가 딜런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였다. 1965년 유럽 공연을 떠난 딜런은 초기 바에즈가 준 도움에 보답을 하고 싶다며 인기가 몰락해버린 바에즈를 초대하였으나 결국 바에즈에게 해준 것이 없었고, 바에즈는 큰 상처를 입은 채 2년간 이어진 그들의 로맨스는 끝나고 말았다.
늘 저항 가수로서 활동하던 바에즈는 딜런에게 그 쪽 세계로 돌아오라며 공개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어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던 딜런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합동 공연을 통해 인연을 이어갔고, 바에즈가 자서전에서 딜런을 엄청나게 씹어댔(..)지만 현재는 서로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바에즈는 딜런의 노래만큼 부르기 즐거운 음악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밥 딜런은 비틀즈의 음악을 접하고 그들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면서 서로의 음악에 큰 영향을 주고 받게 되었고. 폐쇄적인 포크 소사이어티를 벗어나서 서로 다른 장르들이 융합하는 포크'록' 아티스트로서의 행보를 걷게 된다.
2.2 솔로 성공기
본격적으로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에 발표한 "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이었다.[6][7] "Blowin' In The Wind",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8][9] 등의 명곡이 쏟아져 나왔으며, 시적이면서 정치적인 깊이가 있는 가사와 모던 포크의 간결함을 수용한 이 앨범은 곧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이 앨범으로 인해 그의 음악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밥 딜런이 되고자 했다.[10] 하지만 그는 곧 너무 단조롭고 심심한 포크와 폐쇄적인 포크 커뮤니티에 질리게 되었다.[11] 그런데 그 때 신은 딜런에게 비틀즈를 선사했다. 더불어 신은 비틀즈에게 딜런을 선사했다.
당대의 스타였던 두 뮤지션들은 곧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비틀즈는 심도있는 가사[12]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이 가진 에너지와 환희에 매료되었다.[13] . 딜런은 후배 밴드인 "버즈(Byrds)의 "Mr. Tambourine Man"과 자신의 앨범인 "Bringing It All Back Home"을 통해 록을 시험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본격적으로 포크 록에 도전한다. 그리고 기존 포크팬들에게 쌍욕을 먹기 시작한다.
당시 포크 씬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를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기 기타를 드는 행위가 포크의 순수성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5년 5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은 전기 기타를 드는 것으로 그들의 믿음을 배신했다.[14] 하지만 딜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8월 "Highway 61 Revisited"를 발표했다. 오히려 포크의 대부 우디 거스리는 "젊은 사람이 하겠다는 것이 바로 미래이다"라면서 딜런을 옹호했다.
이 앨범은 여러모로 밥 딜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우선 "Bringing It All Back Home"에서 간보기를 했던 포크 록을 본격적으로 완성시켰으며, 가사 역시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렸다. 록 평론가 '데이브 마시(Dave Marsh)'는 이 앨범을 밥 딜런의 앨범 가운데 최고라고 평하면서, "이 무렵 그의 영향력은 너무도 확산되어 정말 수천의 사람들이 그의 언어 하나 하나에 매달리는 실정이었다."[15]고 말했다. 수록곡 "Like A Rolling Stone"은 6분이라는 파격적인 곡 길이와 비의적이지만 신랄한 가사, 당시로서는 복잡한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싱글차트 2위에 올라 그의 대표곡으로 자리잡았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도 밥 딜런 커리어 중 으뜸으로 자리잡고 있다. 앨범전곡을 가사번역하신 분이 계신다. #
1966년에 발표한 "Blonde on Blonde" 역시 큰 찬사를 받았고, 작품성으로는 그의 정점이라 평해진다. 밥 딜런은 저 세 장의 앨범으로 천하를 제패했다. 하지만 앨범 발표 뒤에, 오토바이 사고가 일어나 크게 다친 그는 잠시 세간의 눈을 피해 요양하게 된다. 이는 사실 매니저 앨버트 그로스먼과 짠 계획이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던 딜런은 그로스먼과 신비주의 전략과 가정을 위하여 일부러 크게 다쳤다고 발표하기로 하고, 그가 다쳤단 소식이 들리자 딜런의 앨범 판매량이 급증했다.
복귀 이후 그는 히피 운동이 한창이였던 1960년대 말을 "John Wesley Harding", "Nashville Skyline", "The Basement Tapes"[16]같은 앨범을 녹음하면서 어쿠스틱과 컨트리에 집중하는 인상을 보였다. 이렇게 대중과 평단의 기대와 어긋나는 행보에 미묘한 반응을 얻던 차에 이혼 직후인 1975년 발표된 'Blood on the Tracks'으로 다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 앨범과 'Desire'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방향을 급격하게 전환한다. 종교 때문이었다.
1970년대 말,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한 밥 딜런은 1979년 "Slow Train Coming"이라는 가스펠 음반을 내놨으며 그래미 상도 타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밥 딜런은 기독교에 심취함을 넘어 전도사로도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전도사 생활 비중을 늘리면서 예전보다는 덜한[17]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정규적인 앨범 발표와 공연과 반전 운동으로 1980년대를 보낸다. 허나 발표한 앨범들의 퀄리티가 전성기보다 못해서 이 시절은 그의 암흑기로 불린다. 정확히 콕 집어서 말하자면 백 밴드 놔두고 당대 유행인 뉴웨이브를 어정쩡하게 도입하려고 했다가 안 좋은 평을 받았다고.[18] 그 와중에도 기억될 만한 음악적 경력을 꼽자면 미국의 유명 뮤지션 25명이 녹음한 자선음반인 "We Are The World"의 녹음 참가 정도(...) 그래도 별다른 휴지기 없이 꾸준히 공연 돌고 반전 운동에 참여하긴 했다. 별로 눈에 안 띄는데다 상대적으로 걸작이라 할만한 앨범이 없어서 그렇지
1989년 "Oh Mercy"로 지금까지의 암흑기를 떨쳐버리고 재기의 가능성을 내비친 그는 1997년 "Time Out Of Mind"로 확실히 재기에 성공한다. 지금도 3~5년 터울로 꾸준히 음반을 내놓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밥 딜런의 음악은 음악적인 뿌리 (블루스, 포크)를 찾아 회귀하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2.3 노벨 문학상 수상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수상이유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 링크
문인이 아닌데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경우는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 정치인 윈스턴 처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의 문학이라고 생각되는 범주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고[19] 가수로서 이 상을 수상한 것은 밥 딜런이 처음이다. 1990년대 이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올랐다는 소문도 있어왔지만 실제로는 수상하지 못해왔고 2016년에도 도박사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수상자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밥 딜런이었다.
하지만 2016년 10월 19일 현재, 밥 딜런은 노벨위원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으며, 노벨위원회는 밥 딜런에게 연락을 포기 했고 측근에게만 수상 사실을 알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사르트르처럼 노벨상 수상을 거부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상태이다. 노벨위원회는 시상식에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 10월 28일,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상을 받겠다고 하였다. #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기사도 상당 수 존재한다.#
3 여담
알다시피 가사쓰는 실력을 보면 과연 보통이 아니다. 촌철살인식의 말도 잘 하기로 유명했으며[20],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그의 발언들은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잡게 했다. 하지만 그런 인기와 달리 그의 행동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면모가 많았다. 이런 독단적이고 개인적인 행동들 때문에 인생사가 심각하게 우여곡절이 많은 편이다. 이혼도 자주 했고, 마약도 하고, 주변 사람들과 불화도 심했다.
딜런은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외적인 이미지와 행동양식 면에서도 동시대 및 후대의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썬글래스를 쓰고 담배를 꼬나물고 늘 티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방진 이미지와 수수께끼 같고 냉소적인 행동방식을 통해 쿨한 락뮤지션 이미지의 원형을 만들어낸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
역대 록 뮤지션들 중에 섹시한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 스타가 엘비스 프레슬리라면, '지적인' 스타일로 쿨한 이미지의 원조가 바로 밥 딜런이다. [21]
특히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가 밥 딜런의 그런 이미지를 모방하며 이미지 스타일과 언행방식의 롤모델로 삼았다는 점은 꽤 유명하다.
60,70년대에는 앤디 워홀과 관계가 있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2015년 20대 경관에게 노숙자취급을 받아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리기도 했다.
90년대 번역 출판된 소설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비롯한 일본어 소설을 보면 밥 딜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편인데, 이름이 보브 딜런으로 표기되어있다. 밥 딜런을 일본어 가타가나로 풀어쓴 걸 그대로 옮겨온 듯한 이 번역은 사실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에 의한 것으로 2001년 국립국어연구원의 심의를 거쳐 지금의 밥 딜런으로 고쳐졌다. 다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2001년 이후에도 여전히 보브 딜런으로 쓰는 사람도 꽤 있다.
90년대 초반에는 애플 컴퓨터 제품에 이름이 딜런이라는 것 때문에 소송 제기했다가 패소했는데, 미국 언론에게도 딜런 토머스 지인들도 문제시하지 않은 일이라고 비웃음을 들었다.
외국에서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동급의 본좌 뮤지션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번안된 "Blowin' In The Wind"가 국내에서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언어 문제와 앨범에 담긴 미국적인 향취 때문에 의외로 대한민국에서 밥 딜런 자체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유명하지만 유명하지 않다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할까. 그래도 '아임 낫 데어' 같은 영화 때문에 일반 대중의 밥 딜런에 대한 인지도가 조금씩 늘고 있다.
가창력 자체보다는 웅얼웅얼 읊조리며 부르는 독특한 분위기의 창법이 유명하다.[22]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If Not For You'나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Knockin' On Heaven's Door'[23]를 들어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2012년 작 "Tempest"에 수록된 "Duquesne Whistle"에선 루이 암스트롱을 연상시키는 창법으로 노래했다.
2010년 3월 31일 잠실에서 내한공연을 열었다.
원피스 만화 연재본 572화의 제목인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밥 딜런의 3집 앨범 제목이자 타이틀곡이다. 이 노래는 잭 스나이더가 감독한 영화 왓치맨의 오프닝 곡으로도 쓰였다. 오프닝 영상은 원작에서 길게 소개되는 미닛 맨 소속의 과거의 히어로들의 역사를 20세기 미국사의 여러 장면들과 함께 시간순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데, 이는 원작의 긴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요약해 보여줄 뿐 아니라, 노래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영욕의 세월을 거쳐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아가는 작중 히어로들의 상황을 잘 나타낸다.
첫째 부인에서 얻은 네번째 자식인 아들 제이콥 딜런 또한 미국의 유명 밴드 '월플라워스(The Wallflowers)'의 리더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아버지 밥 딜런 정도의 전설은 아니지만, 아버지 후광 없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 뜨고 나니 아버지가 밥 딜런이었구나 하고 알려질 정도. 1996년 앨범 Bringing down the horse, 그리고 이 앨범 최고의 히트곡 One Headlight 는 상당히 유명하고 1998년 Time Out Of Mind로 아버지 밥 딜런이 그래미 앨범상을 받을 때 월플라워스 역시 락부문 그래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앨범부터는 그만한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잇다. 활동은 중단하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하는 중. 밥 딜런이 심한 바람둥이었기 때문에 부자 간 사이는 좋지 않은 듯하다.
손자인 파블로 딜런은 래퍼로 활동 중인데, 할아버지나 삼촌과는 달리 철저하게 언더 활동 중이라 정보가 매우 부족한 편.
2013년 11월 13일 "Complete Album Collection Vol. 1"이 국내 정식 발매되었다. LP 미니어쳐로 제작된 정규 47개의 앨범들, 268쪽의 부클릿등 딜런의 음악을 귀로 직접 체험하고 싶다면 구입해보도록 하자. Vol.1이라는 타이틀이 무섭게 느껴진다.
안 어울리게도 크리스마스 앨범도 냈다. 그런데 개봉 사진을 보아하니... 은근 밝히는 에로한 오야지 음반 평은 별로라고.
여기까지 읽고도 '도대체 이 사람이 뭐길래 이리 잘났다고 호들갑인가' 라고 생각한다면 임진모의 평을 읽어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임진모는 오히려 이 문서보다도 밥 딜런을 더 칭송하고 있다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밥 딜런의 노래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팝과 락 등의 대중음악 감상에 있어서 아마추어로는 거의 최고의 수준에 올라갔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의 노래들은 그만큼 미적으로 뛰어나지만 이해하기도 어렵다.
배우로도 잠깐 활동한 적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영화라면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이 있다.[24] 비중있는 조역인데 연기는 그닥 (...) 감독 영화도 있는데 망했고. 10여년 이후 영화가 재발굴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Hearts of Fire이 혹평을 들은 이후로는 영 아니다 싶었는지 출연은 없다.
장난삼아 배우를 한 건 아니고,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존 포드와 찰리 채플린이라고.
" 존 포드의 영화엔 용기와 용감한 행동과 구원 그리고 고뇌와 황홀함의 기이한 조합이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드라마틱한 방식을 통해 보여 준다. (...) 찰리 채플린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조차 그렇다. 난 항상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의식하는 것 같다. "[25]
허영만의 1987년 작품 <고독한 기타맨>에도 나온다. 처음에는 주인공 이강토의 동경의 대상이었으나("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반복해서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나중에 이강토와 직접 만나게 되며, 이강토의 기타 실력에 빠져서 그의 멘토이자 프로듀서로 나선다. 이강토는 밥 딜런의 도움에 힘입어 전미를 석권한다. 실제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계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넘어 기축이 되었던 존재였다. 한국 포크록의 전설인 한대수도 밥 딜런의 창법과 스타일을 많이 연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든게 "행복의 나라"였다. 실제 그가 말하길 밥 딜런은 한국 포크음악 등장에 씨앗을 뿌렸다라고 평한다.
2007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전기 영화인 아임 낫 데어가 제작되었다. 감독은 토드 헤인즈, 리차드 기어,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 케이트 블란쳇, 벤 위쇼, 마커스 칼 프랭클린 6명의 배우가 각각 밥 딜런의 다른 모습을 연기하였다.
1960~70년대 많은 유명곡을 뽑아내던 활동시절과 현재의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음악 성향도 그렇고.
1980년대 이후 앨범들은 한국에서 그다지 잘 알려있지 않기 때문에 2010년 내한공연 때 예전 생각하고 보러 온 상당수의 관객들이 당황하기도 하였다.
과학자들이 그의 가사로부터 인용을 많이 해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4 디스코그래피
연도 | 제목 |
1962 | Bob Dylan |
1963 | The Freewheelin' Bob Dylan |
1964 | The Times They Are a-Changin' |
1964 | Another Side of Bob Dylan |
1965 | Bringing It All Back Home |
1965 | Highway 61 Revisited |
1966 | Blonde on Blonde |
1967 | John Wesley Harding |
1969 | Nashville Skyline |
1970 | Self Portrait |
1970 | New Morning |
1973 | Pat Garrett & Billy the Kid |
1973 | Dylan |
1974 | Planet Waves |
1975 | Blood on the Tracks |
1975 | The Basement Tapes |
1976 | Desire |
1978 | Street Legal |
1979 | Slow Train Coming |
1980 | Saved |
1981 | Shot of Love |
1983 | Infidels |
1985 | Empire Burlesque |
1986 | Knocked Out Loaded |
1988 | Down in the Groove |
1989 | Oh Mercy |
1990 | Under the Red Sky |
1992 | Good as I Been to You |
1993 | World Gone Wrong |
1997 | Time Out of Mind |
2001 | Love and Theft |
2006 | Modern Times |
2009 | Together Through Life |
2009 | Christmas in the Heart |
2012 | Tempest |
2015 | Shadows in the Night |
2016 | Fallen Angel |
4.1 Traveling Wilburys
1988년 딜런은 비틀즈의 전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 Pretty Woman으로 유명한 로이 오비슨, 톰 페티(Tom Petty), 제프 린(Jeff Lynne) 등 이름만 들어도 후덜덜한 친구들과 함께 Traveling Wilburys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한다. 초유명 음악가들이 프로젝트성으로 내는 수퍼그룹의 원조다.
Handle With Care 감상해보자.
5 참고 항목
- ↑ 2010년대부터 소속되었다.
- ↑ 짐머맨이 아니다! 간혹 알파벳을 보고 짐머맨으로 아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본명이 로버트 지머맨이고 밥 딜런은 예명이라는 식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는 첫번째 음반을 내놓을 시기에 아예 법적으로 밥 딜런이라고 개명했다. 아들 이름이 제이콥 지머맨이 아니라 제이콥 딜런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 ↑ 본인의 말로는 딜런 토마스의 시를 좋아해서가 아닌, 딜런이란 이름 자체가 멋있어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 ↑ 아버지는 그 지역 노동자들에게 가구, 가전제품을 팔고 외상을 받아내는 사업을 하여 집안이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는 데, 딜런은 이런 가정 환경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 ↑ 음악 활동에 치중하느라 학업을 매우 소홀히하여 1년도 못채우고 중퇴.
- ↑ "The Freewheelin'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 앨범 표지에 등장하는 여성은 당시 딜런의 전 여자친구인 수지 로톨로(Susan Elizabeth Rotolo, 1943년~2011년)이다. 여담에 따르면 수지의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졌다고 한다.
굴러온 복을 걷어찬 셈 - ↑ 이 두 곡은 발표 당시에는 혼성 포크 그룹 '피터, 폴 앤 메리'의 리메이크곡이 훨씬 유명했고 상업적으로 더 많이 팔렸다. 이 곡들이 담긴 그룹의 스튜디오 앨범은 100만 장 가까이 팔려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사실 밥 딜런의 유명세는 가수 활동 자체보단 이 곡들에 담겨진 비범한 가사와 곡조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더 먼저 주목받는 데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정설.
- ↑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의 경우, 양병집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제목의 한국어 개사곡을 내놓은 바 있다.(곡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번안곡이라고 할 수 없고 사실 상 밥 딜런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한 2차 창작에 가깝다.) 김광석이 부른 곡은 이 곡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그리고 가사 일부가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시대착오적이라 김광석은 스튜디오 버전은 물론이고 공연때 마다 일부 가사를 바꿨다. - ↑ 국내 가수인 김민기도 그중 한명.
- ↑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저항의 기수로 띄우려는 움직임을 상당히 불편해 했다. 이 징조는 후술할 Bringing It All Back Home 이전에 내놓은 포크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에서 이미 드러났고,(이 앨범에 수록된 My Back Page의 후렴구가 매우 유명하다. 그 땐 너무 늙었고, 지금은 더 어려졌지) 이 앨범을 발표할 즈음에 포크 관련 행사에서 포크 팬들과 좌파 성향의 인물들을 벙찌게 만드는 소위 '트롤링'에 가까운 발언을 했다. 그 중엔 행동으로 옮기진 않지만 존 F. 케네디 암살범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식의 발언은 그야말로 충공깽.
- ↑ Help!에 수록된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나 러버 소울에서 그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 ↑ 정확히는 위에서 설명했듯이 로큰롤 배척 분위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포크에 자리를 물려주고 숨죽이고 있었던 록 스피릿(...)이 비틀즈 음반을 듣고 다시 꿈틀댄 것에 가깝다.
- ↑ 이런 배신(?)행위는 이듬해 5월 16일에 영국 맨체스터의 자유무역회관에서 벌인 공연에서 절정을 이루었는 데, 관중들 중 누군가가 유다(Judas)!!라고 외치자 난 너희들을 믿을 수 없어. 너희들은 거짓말쟁이야.라고 화답한 뒤 밴드 멤버들에게 존나 시끄럽게 연주해라고 지시를 했다. 곧바로 연주하는 곡은 바로 이 각주 다음에 올 문장에서 설명할 앨범의 수록곡인 Like A Rolling Stone.
- ↑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가사가 한층 심오해졌다. 다만 가사가 생각보다는 어렵지는 않다고 한다. ...영어/문화 장벽은 제외하자.
- ↑ 더 밴드와 작업한 앨범으로 유명하다. 녹음은 1967년에 마쳤지만 발표는 1975년에 했다.
- ↑ 사실 6,70년대 시절 밥 딜런은 요즘 웬만한 슈퍼스타, 걸그룹 뺨치는 수준이었다.
- ↑ 심지어는 커티스 블로우(힙합, 랩 역사의 태동기에서(소위 올드스쿨 힙합)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 중 한명으로, 래퍼로써 최초로 메이저 레코드 사와 계약한 인물이고, 대표곡인 The Break는 랩 음악 역사 상 최초로 후렴구를 사용하여 상업적인 히트를 기록했다.)의 곡 Street rock이란 곡 도입부에서 랩을 하는 충공깽 행보를 보였다.(...)
- ↑ 역사학자인 테오도르 몸젠을 제외하고서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회고록'를 집필. 러셀은 수필을 많이 남겼고, 사르트르는 <구토> 같은 뛰어난 소설을 남겼다.
- ↑ 다만, 사석에서는 말수가 적었다고...
- ↑ 그래서 엘비스가 록의 엉덩이(혹은 골반)고 밥 딜런은 록의 두뇌라는 비유도 있다. 참고로, 밥 딜런 본인도 다른 당대 로커들이 그랬듯이 엘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 사실 밥 딜런과 같은 수준의 보컬리스트들은 노래를 못하는 것조차 하나의 미적 효과로 작용하게 된다. 애초에 멋지게 잘 불러야 듣기 좋을 노래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
- ↑ 그런데 현실에서 이 노래는 건즈 앤 로지스가 부른 것으로 더 유명한 듯 하다. 오죽하면 존 본 조비가 "아가들아 GNR 노래가 아니라 밥 딜런 아저씨 노래란다" 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이니.
- ↑ Knockin' On Heaven's Door'가 바로 이 영화 사운드트랙에 실린 곡이다.
- ↑ #출처 기사 / #중앙일보 번역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