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왕세자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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愍懷嬪 姜氏
1611~1646
1 개요
조선 소현세자의 부인. 보통 강빈이라 한다. 조선의 왕세자빈 가운데 가장 팔자가 사나웠던 사람으로, 시아버지 때문에 자신은 물론 자신의 친족들과 아들을 잃은 비운의 여자.
2 생애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딸이다. 본관은 금천(衿川)[1]. 1627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렸다.
사실 강씨는 본래 세자빈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간택되기 2년 전, 소현세자는 파평 윤씨 가문의 여성과 혼인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성은 이괄의 난에 가담한 윤인발과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결국 파혼당해 내쳐지게 되었다.인용 오류: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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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숫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설명적인 이름을 사용하세요 이후 소현세자의 혼례가 무산된 지 2년 만에 다시 간택을 거쳐 뽑힌 여인이 강빈.
이후 병자호란의 패배로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자 동행하여 심양까지 가게 되었다.
2.1 당돌한 세자빈
보통의 세자빈이었다면 궁 안에서 가만히 앉아서 지냈겠지만, 강빈은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일화로 1640년, 소현세자가 29세가 되던 해에 청나라의 홍타이지 황제가 소현세자 일행의 생활비가 부담된다 하여 소현세자에게 20만평 가량의 땅을 거의 반 강제로 주면서 농사지어서 알아서 먹고 살라고 했다.
그런데 농사 지을 인력이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이를 홍타이지에게 묻자, 홍타이지는 "조선에서 사람을 데려오든 뭘 하든 알아서 충당하라"고 했다. 그때 강빈은 우연히 심양 시내에서 노예시장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팔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현세자를 설득하여 그들을 구해낸 뒤, 심양 근교에 농장을 세우고 그들을 그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농장 경영은 거의 전적으로 강빈이 주관했던 걸로 보여지며, 농장에서 얻은 이득으로 소현세자는 청나라 고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잦은 선물요구를 만족시키고 나름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하는 밑천이 되었다. 하지만 별도로 본국에 끊임없이 물자 지원을 요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자기들도 돈 벌면서 안 그래도 없는 나라 살림에 손 벌린다며 인조와의 감정이 악화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더불어 소현세자와의 금슬도 상당히 좋았던 듯 하다. 소현세자 16세, 강빈 17세에 혼인하여 각각 18세, 19세 되던 해 첫 아이를 낳았는데 어려서 죽은 군주[2] 둘을 포함해 총 8남매를 낳는다. 이중 묵던의 볼모생활 때 태어난 아이만 다섯(...)이나 된다. 볼모생활 9년 중 초반 2년 가량은 인열왕후의 3년상 중이었고 두 사람 모두 현지에서 스트레스성 질환을 상당히 자주 앓은 점을 생각하면 흠좀무.... [3] 어쩌면 힘든 볼모생활 속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면서 살다보니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들 중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막내 경안군 이석견과 경녕군주밖에 없으니 참 자식 복도 없는 여인.[4][5] 여하간 볼모생활 중에도 세자관에 아이 울음소리 끊어지는 날이 없었지만 경완군 석린이 조선으로 보내져 조선에서 자란 점을 생각하면, 현지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조선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6]
2.2 죄를 뒤집어 쓰고 죽임을 당하다.
그러나 소현세자와 영구 귀국한 뒤, 그녀는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 인터넷에 흔히 퍼져있는 "청나라의 강함을 인정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더 큰 세상에 나아가 교류해야 한다고 주장한 소현세자가, 수구적인 인조와 사대부들의 미움을 샀다"는 건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의 주장을 끝도 없이 부풀려 나온 뇌내망상이고, 진짜 원인은 호란으로 인조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소현세자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버렸기 때문이었다.
인조-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사림이나 조정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여당이 광해군 과잉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7]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 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 경우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 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고려 무신정권 때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기에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경대승이 사망하자 스스로 무신 이의민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원 간섭기 고려왕들은 원 황실의 일원이라는데 집권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인조가 청에 의해 물러나고 소현세자가 즉위한다면 청에 의중에 따라 즉위해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을 얻는 조선왕이 출현할 것이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것은 당연했다. 이건 곧 원간섭기의 재림이다.
소현세자는 노골적인 박대를 받다가 귀국 2달 만에 의료사고일 가능성이 높은 죽음을 맞았고 소현세자 가계를 대통에서 배제할 결심을 굳힌 인조의 칼끝은 강빈과 세자의 아들들을 향했다.
소현세자 사후 궁내에서 소용 조씨를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었으나, 인조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것을 강빈을 제거하는 도구로 활용하여 강빈의 궁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강빈은 후궁 별당에 감금했다.
이런 가운데, 인조가 먹는 수라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인조는 이 사건의 배후도 강빈이라 주장하기에 이른다. 실록에서는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趙昭媛)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그 정도로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티가 난다.
여담으로 이때 강씨에 대한 인조의 분노가 제대로 표출되는 일화가 있는데 소현세자를 폐한 후 강씨에게도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세자빈을 폐위한 후 사약을 내려 죽이려 하자 신하들이 나서서 "이러면 안됩니다. 강빈은 전하의 자식이 아니지만 전하의 자식인 소현과 배필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맞지 않습니까."라며 극구 반대를 했고 인조가 우승지 정치화에게 "아니 새퀴들, 내가 강빈 이야기 꺼내지 말라 그랬는데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나를 모욕하고 있는데 이거 불충 아니냐? 얘들 조져야 하는 거 아니냐?"라며 분노를 표출하자 정치화가 "어제 올라온 신하들의 보고서를 보니 그들의 주장에 억지가 있는거 같긴 한데 왕을 모욕한다는 건 동의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결국 1646년 3월 15일 35살의 강빈은 조씨 저주사건과 인조 독살 음모의 누명과 강빈이 일전에 대전으로 와서 큰 소리로 자신을 못 살게 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외친 것도 죄목 등으로 인조의 명령으로 사형을 당했다.
3 사후
강씨는 죽은 뒤에도 고통받았다. 강씨가 죽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는 강빈의 사형을 반대했던 신하들을 까면서 강빈이 죽기 전에 "소숙[8]과 조씨가 이 애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는 커서 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자녀들과 시비들에게 남겼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정식 조사[9]를 요청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조 입장에서는 강빈 사건에 대한 완벽한 전환점이 될 만한 일이었지만 인조는 이 요청을 무시했다.
왕권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자 청의 영향력 하에 있는 후계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인조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고 이 혈서설은 마지막으로 남은 강씨의 아들들(이자 자기 손자들)까지 완전처리하기 위한 공작으로 추정된다. 결국 1646년 5월에 강씨의 세 아들은 모두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그 곳에서 풍토병에 걸린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2년 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
효종조에는 강빈에 대한 대우가 정말로 험악했다. 강빈이 사사되기 전에 씌어진 윤방의 행장에 강빈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본 효종은 눈이 뒤집혀서 관련자들을 죄다 처벌했고, 강빈 신원 요구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이 일을 꺼내는 놈은 죄다 역적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어떤 말이라도 다 받아들이고 벌도 내리지 않겠다는 구언의 교지가 내려졌다. 이에 황해도 감찰사 김홍욱이 강빈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게 다 강빈의 억울한 죽음에 하늘이 노해서 그렇다고 주장하자 완전히 이성을 잃은 효종은 김홍욱을 소환해 곤장을 때려 장살했다. 김홍욱은 삼정승과 대간들을 불러서 "의견을 말한 것만으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예로부터 말하는 자를 죽여놓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었소?"라고 항변했지만 효종의 분노는 엄청났다. 자신이 살 수 없음이 확실해지자 김홍욱은 오자서의 유언을 인용하며 저주를 퍼붓고 죽었다. 다만 효종은 남겨진 강빈의 자식들은 최대한 보호하려 노력했다. 어쨌든 조카니까. 실제로 경안군이 현종때까지 산것도 이를 증명해준다.
소현세자와 심양에서 동고동락하며 의좋게 지냈던 효종이 이렇게 강경한 입장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강빈에 대한 처분은 효종 자신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조카를 제치고 즉위한 입장에 있는 그에게 강빈의 무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정통성 부족을 자인하는 길이었을 것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 현종은 정통성 문제로 직격탄을 맞는데 그것이 예송논쟁이다.
결국 억울하게 죽어 간 그녀는 효종, 현종 대에는 "역강(逆姜: 역적 강씨)", "강적(姜賊: 강씨 성의 도적)" 등으로 불리다가 왕권, 정통성으론 따를자가 없던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신원될 수 있었다.
4 평가
상당히 강단있고 진취적인 여성으로 평가받는데 여러가지 일화에서 그녀의 성격을 엿볼수 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소현세자와 강빈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이 자신의 식구들만 챙기고 도망치려 하자 강빈이 소리를 냅다 지르는 통에 김경징이 놀라서 세자와 세자빈에게 배를 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심양으로 끌려갔을 때 청 황실의 예법으로는 누구도 가마를 탈수 없다는 이유로 강빈의 가마를 못 들어가게 하자 과감히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10]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왕비로서 그녀는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있다. 그녀의 이런 성격은 인조가 강빈을 사사할 때의 빌미[11]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강씨의 집안이 고려 구국영웅 강감찬의 직계후손이었기 때문에 강감찬의 묘가 1960년대에 이를 때까지 위치가 묘연해졌다.
2000년대에 들어와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 대대적으로 부각되어 많은 조명을 받기도 했다.
5 창작물에서
박씨전의 박씨 부인의 실제 모델이 민희빈 강씨라는 설이 있는데 솔직히 근거가 희박하다. 대신 현대 사극에는 많이 등장했다.
- 마의 - 경수진
-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 송선미
- 매우 진취적이고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기는 했는데... 작중에서 보여준 행각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역적 소리 들으며 사약을 받은 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 로 막나가는 행동도 여럿 보여주었다. 중간부터는 편집증적인 정신병 환자로 보일 정도로 과격하다. 소현세자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한밤중에 사람들을 떼로 끌어모아 궁궐로 달려가는 장면 이라든가... 드라마 자체가 막장 오브 막장인 것도 이유이기도 하고...
- ↑ 또는 진주 강씨 인헌공파다. 강(姜)씨의 본관은 99% 진주강씨에서 갈라져 나와서 엄밀히 말하면 대부분 진주강씨다.
- ↑ 왕세자의 적녀. 왕세자의 서녀는 현주라 한다. 또한 왕의 적녀는 공주, 왕의 서녀는 옹주라 한다.
- ↑ 특히 경숙군주와 경완군 이석린은 연년생이다. 그 아래의 3남매 경녕군주, 경순군주, 경안군 이석견도 셋이 나란히 연년생이다.
- ↑ 각각 23세, 42세까지 살았다. 살아남아 혼례를 올리고 성년에 이른 아들은 경안군뿐이며 소현세자의 후손은 모두 경안군 가계에 속한다.
- ↑ 그 외에도 인조 가계 자체가 요절로 점철돼있다. 인조의 친자 중 숭선군 징이 52세로 가장 장수했고 효종 41세, 인평대군 37세에 사망. 손자 대에서도 복평군 연 52세가 최장수 기록이다.
- ↑ 반대로 효종의 장자 현종은 8세에 귀국할 때까지 거기서 컸다. 대통을 이을 왕손이 아닌지라 느슨했던 모양.
- ↑ 참고로 선조의 선위를 주장하며 신하들이 들었던 예가 당 현종과 당 숙종의 사례인데 선대 황제와 현 황제의 권력다툼이 벌여져 아버지 현종이 실권을 모두 잃고 반유폐생활을 해야 했다. 선조 이전까지 조선에 상왕이 4명 있었는데(상왕으로 달랑 하루 있었던 세조 제외) 군사권과 외교권을 쥐고 실권을 휘두른 태종을 제외한 태조, 정종, 단종은 모두 쿠데타(1, 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로 반강제로 물러났으며 이중 단종은 비명에 갔다. 이런 사례들을 볼때 선위하고 물러나라는 게 선조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
- ↑ 작은아버지. 인조는 인평대군을 말하는 듯하다고 주장
- ↑ 당시 강빈 사건은 철저히 인조가 독단적으로 조사했으며, 의금부 등 신하들을 통한 정식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 심양일기에서 소현세자가 인상 깊게 여겼던 부분 중 하나가, 여성들도 말을 타고 야외활동에 참여하는 청의 풍속이었다.
- ↑ 아녀자로서 바깥 일에 깊이 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