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오드리 햅번에서 넘어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셜리 부스
(사랑하는 시바여 돌
아오라)
(1953)
오드리 햅번 (로마의 휴일)
(1954)
그레이스 켈리 (갈채)
(1955)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분야영화
입성날짜1960년 2월 8일
위치1652 Vine Street
width=100%
이름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본명오드리 캐슬린 러스턴 (Audrey Kathleen Ruston)
국적영국
출생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 익셀
사망1993년 1월 20일, 스위스 보 주 톨로체나츠 (63년 6개월 16일)
직업배우 (1948 – 1989)
자선사업가 (1988 – 1992)
활동1948 – 1992
신장170cm
가족멜 페러 (1954 – 1968), 1남
안드레아 도티 (1969 – 1982), 1남
서명

1 소개

남녀노소 사랑세기연인

20세기 미(美)의 상징,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녀(美) 배우를 넘어 20세기 대중문화아이콘

미국 영화 협회(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배우 3위[1]

노년엔 유니세프 대사로 봉사활동에 힘쓴 인간의 모습을 한 아름다운 천사

벨기에 출생 영국 국적의 미국에서 활동한 영화배우.[2] 명연기와 아름다운 외모로 명성을 떨쳤다. 미국 연예계에 12명밖에 없는 EGOT(에미(Emmy, TV), 그래미(Grammy, 음악/청각 매체), 아카데미(Accademy-Oscar, 영화), 토니(Tony, 무대공연)상을 모두 수상한 배우) 중 한 명. 또한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또한 영화계 은퇴 후에는 아름다운 선행을 펼쳐 더욱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정식 풀네임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 세간에선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아버지인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이 훗날 성에 헵번(Hepburn)을 붙이면서 본인도 'Audrey Hepburn-Ruston'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 외모와 스타일로 패션을 유행시키는 아이콘이 되다.

인물 포토그래퍼의 거장 유서프 카쉬[3]의 작품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소피아 로렌으로 대표되는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를 얻고 있던 시절에, 호리호리하고 지적이며 고전적인 얼굴과 몸매로 등장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킨 배우이다.[4] 당대 최고의 미인 여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현재까지도 영원한 미의 상징, 세기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녀의 사진이 21세기의 휴대폰 광고에 쓰였을 정도.

헵번이 선보인 메이크업, 헤어 스타일, 옷차림은 현대에도 꾸준히 재유행하거나 변형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데뷔작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단발 헤어컷 역시 "헵번 스타일" 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사브리나에서 지방시의 옷들을 입어서 지방시를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격상시켰으며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선보인 헤어스타일과 검은색 드레스[5], 긴 장갑도 '헵번 드래스'라고 불리며 유명해졌을 만큼 영화 배우로 활동한 시기의 오드리 헵번은 한마디로 유행의 선두주자였다. 그래서 당대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각별히 사랑받은 여배우이기도 했다. 사실 1950년대 이후 오드리 헵번이 대중문화에 워낙 영향을 끼친 부분이 많다 보니, 우리 일상 생활에도 알게 모르게 정말 영향을 많이 끼친 영화배우. 심지어 오덕계에서도 오드리 헵번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나 의상 등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렇듯 최고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는 오드리 헵번이지만 헵번 본인은 외모 컴플렉스가 상당했다고 한다.뭐요? 지인들에게 털어놓기를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얼굴이 각졌고[6] 콧등도 매끄럽지 않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90년대에 EBS에서 방송된 세계의 명배우 다큐멘터리에서 생전 오드리 헵번과 절친했던 친구가 밝힌 것으로, 다큐멘터리의 원래 명칭은 세기의 여성들 오드리 햅번 편.

"이런 얼굴로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던 적도 있고[7] 자신은 너무 말라서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가 영화 배우로 한창 활동할 시기의 헐리우드에서는 여배우하면 일단 글래머러스한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었고 헵번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여배우들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헐리우드 여배우들 사이에서 '오드리 헵번은 거식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루머가 돌 정도였다고...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건강과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식단 관리와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그녀도 여느 사람들처럼 파스타나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초콜릿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디저트류는 절제하더라도 초콜릿은 평소에 적당히 먹어주는 걸로 자기 자신과 타협했다고 한다. 이 초콜릿 사랑(?)에는 그녀의 자식들이 이야기한 비화가 있다. 헵번은 10대 시절 영국에서 발레리나를 꿈꾸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심화되자 나치 독일 치하의 네덜란드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나치 독일의 식민지 탄압으로 인해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여 몸무게가 39kg까지 빠질 정도로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거의 죽기 적전에 네덜란드 병사가 준 초콜릿을 먹고 간신히 아사를 모면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의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인해 생긴 그윽한 다크서클과 마른 몸매가 그녀의 미모를 가장 강력하게 어필하는 상징이 됨과 동시에 현대 여성들이 꿈꾸는 여성성의 척도가 되었으니...

3 생애

3.1 유년기

벨기에 태생.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 여남작 (Baroness Ella van Heemstra) 사이에서 태어나 벨기에와 영국, 네덜란드를 옮겨가며 지냈다. 아버지는 오드리를 낳은 후 가정을 버리고 방랑[8], 헵번이 영화배우로 성공한 이후에 아일랜드에 있는 요양원에서 다시 만난 게 전부라고 한다. 당시 나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매우 험악했기 때문에 오드리 헵번도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심히 고민했었다.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냈는데 그때 살던 곳이 바로 마켓 가든 작전으로 악명 높은 아른헴. 실제 자원하여 부상병 치료에 나섰다 전투에 휘말린 적도 있다고. 당시의 처참한 경험 때문에 평생 전쟁 영화 만큼은 출연을 사양했다고 한다. 남편인 멜 퍼러의 요청으로 헐리우드판 전쟁과 평화에 출연하긴 했지만 전투장면에서는 출연하지 않는다. 여담으로 당시 16세의 간호사였던 헵번이 치료한 어느 영국군 부상병은 20여년 후에 <어두워질 때까지>에서 감독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부상병은 바로 007 시리즈그리고 망작 오! 인천의 감독 테렌스 영.

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어린 시절에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난민 생활을 했는데 온갖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영양실조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먹을게 너무 없어서 튤립의 구근까지 캐먹어야 했다고 한다.) 종전 후 영국에 돌아왔을 무렵에는 전쟁난민 지원모금을 위한 홍보 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로우틴 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9] 키가 너무 커서(170cm) 포기했다고 한다.아무래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나보다 어려운 집안 사정 속에 연기 활동으로 집안에 보탬을 주다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긴 해도 전체적인 지명도로 치면 무명이나 마찬가지였지만...

3.2 세기의 연인

지지(Gigi)에서의 오드리 헵번.로마의 휴일에서의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의 본격적인 스타덤은 1952년,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뮤지컬 지지 초연에 캐스팅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24세 때인 1953년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을 거친 후 발탁,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다. 로마의 휴일은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평소의 일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남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는 이야기 구성의 원조로, 이것 외에도 훗날에 만들어진 여러 영화나 방송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로마의 휴일은 프랑크 카프라 감독이 캐리 그랜트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였으나 조지 스티븐슨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는데, 스티븐슨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몬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쥴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10] 연극 배우로서 어느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된것.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영화를 본 그레고리 펙이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포스터를 보자,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11]라면서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으라고 파라마운트사에 요청하고 그의 예상대로, 헵번이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Audrey-Hepburn-Sabrina1-1.jpg
이후, 오드리 헵번은 1954년작인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인 사브리나 페어차일드(Sabrina Fairchild)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제27화 아카데미상 여우주연 후보에 오르는 등 인지도를 점점 높혀간다. 이 영화에서 헵번이 입었던 옷과 스타일은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고 불리며 유명하다. 참고로 영화배우에게 특정 브랜드가 최초로 의상 협찬을 시작한 영화가 바로 사브리나인데, 이때 협찬한 브랜드가 바로 그 유명한 지방시(Givenchy).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인하여 매출이 급격히 늘어 큰이득을 보았고, 이후부터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의상협찬을 아끼지 않았다. 헵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그녀가 입었던 검정색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브랜드일 정도. 단 헵번은 협찬받은 옷은 모조리 촬영이 끝나면 반납했다고 한다.



사브리나 출연 직후 헵번은 영화계 인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인 <운디네(Ondine)>에 물의 요정 역으로 출연,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극 배우 출신으로서의 정체성과 단순히 예쁜 외모로만 뜬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1957년, 헵번은 전직 발레리나로서의 경험과 평소 특기였던 노래 실력을 살려서[12]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에 출연하였다. 생전 헵번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 중 자신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화니 페이스를 뽑았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오드리 헵번/티파니.png

화려했던 50년대가 지난 후,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주인공을 맡은 그녀는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이른 아침에 검정색 선글라스 &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Holly Golightly)가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13]의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도넛을 먹는 모습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명장면으로 그녀에게 스크린의 불멸성을 부여하였다. 물론 영화내에서 상류층의 남자들을 만나며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 홀리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건 덤. 다만 헵번은 홀리의 성격이나 생활이 자신의 실제 성격과 너무 달라서 이 영화를 찍기 싫어했다고 한다.


1964년, 오드리 헵번은 두번째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한다. 단, <화니 페이스>와 달리, 오드리 헵번의 노래 장면은 다른 가수의 더빙이었다. 본래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는 뮤지컬 초연 배우들을 그대로 기용하여 제작할 예정이었는데 영화사에서 초연 당시 여주인공을 맡았던 줄리 앤드루스의 낮은 인지도를 못마땅해 하면서 이미 영화 <화니 패이스>에서 뮤지컬 넘버들을 훌륭하게 소화한바 있었던 오드리 헵번으로 여주인공역을 바꾸었다. 하지만 헵번은 크랭크 인이 될때까지 뮤지컬 넘버들을 익힐만한 충분한 시간을 얻지 못했고 감독 또한 오드리 헵번의 노래실력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등에서 노래 더빙을 한 마니 닉슨의 더빙으로 영화에 수록하게 된것. 더군다나 오드리 헵번은 줄리 앤드루스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출연이 불발되고 출연한 메리 포핀스에 밀려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놓치는 바람에 헵번은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이처럼 오드리 헵번이 영화상에서 맡은 배역 자체는 다양했지만 데뷔작인 <로마의 휴일>부터 대부분의 영화상에서 헵번이 맡은 캐릭터의 성격은 순진무구함으로 세상의 때에 찌든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여성상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사나 대중들이 오드리 헵번에게 바랐던 게 저런 이미지였기 때문. 오드리 헵번은 이에 불만이 많았는지 연기생활 후반기에 찍은 샤레이드(1963)에서는 남편의 죽음 뒤 음모에 시달리는 귀족 미망인역을, 어두워질 때까지 (1967)에서는 살해 위협에 처한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여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평생 15번의 배역을 맡은 햅번은 60년대 후반부터는 <어두워질 때까지> 이후로는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곁에(원제: Always)'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14] 이 영화의 주연을 맏은 리처드 드레이퍼스가 스필버그에게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는데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레이퍼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다.

3.3 사생활

Mel-Ferrer-and-Audrey-Hepburn-s-Wedding-audrey-hepburn-and-mel-ferrer-30642938-400-308.jpg

첫 결혼 전 약혼했던 제임스 핸슨이라는 연인이 있었으나 헵번이 유명해지면서 스케쥴이 바빠지자 헤어진다. 이후 미국 배우인 유부남 멜 퍼러 (Mel Ferrer)[15]와 사귀게 되는데, 멜 퍼러는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헵번도 인정할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지만, 헵번을 구워 삶았다. 결국 1954년 멜퍼러는 세번재 와이프를 버리고 오드리 헵번과 네번째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은 아무리봐도 헵번이 아깝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탑여배우가 한물간 이혼남 배우랑 결혼하는 셈이었으니.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장났는데, 오드리 헵번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등 다른 거장들이 제안한 캐스팅을 거절하고 남편인 멜 퍼러가 감독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멜 퍼러는 결혼 생활 와중에도 자신의 바람기와 오드리 헵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아내가 오드리 헵번인데 외도가 가능한가? 헵번과 잦은 다툼을 했고 헵번이 첫번째 임신 중 언포기븐 촬영을 하다가 낙마사고를 당해서 유산한 이후 잦은 유산을 하게되자(퍼러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는 아들 하나밖에 없다.) 결혼 생활 말년에는 헵번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결국 참다못한 헵번은 1968년 이혼한다. 이후로 헵번은 멜 퍼러를 피한 것은 물론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멜 퍼러는 헵번과 이혼 후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장수하다가 2008년 만90살로 사망했다.

Dotti.crop.jpg
1969년,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부터 "나는 오드리 햅번과 결혼식을 올릴꺼에요" 라고 말하며 오드리 헵번을 따라다니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와 재혼하는데, 재혼시 나이가 만 39세 였는데도 아들 하나를 낳았다.[16] 그러나 전성기 시절 헵번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했던 안드레아 도티는 중년이 된 헵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도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오드리와 결혼 후 13년만에 이혼했다. 그래도 오드리는 도티와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고 한다. 도티와 이혼 후 헵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되고 구호 활동시기에 네덜란드 배우인 로버트 월더를 만나서 1993년 사망할 때 까지 동거한다.

평소 오드리 헵번은 매우 검소해서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밥을 해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치도 하지 않는 매우 검소한 성격이었다. 스위스로 이사를 갔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으며 재규어에서 나온 예쁜 승용차도 가지고 싶어했지만 가족이 다 탈 수도 없고 장 보러 갈때 쓰지도 못한다고 끝내 안 샀다고 한다.[17] 둘째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사람들이 "너희 엄마가 밥은 주냐, 책은 읽어주냐"고 물어봐서 다른 엄마들은 아무도 집에서 밥을 안 해 줘서 자기에게 묻는 줄 알았다고 한다. 패드립이 안먹히는 순수한 아이

3.4 은퇴 이후의 행보

아름답게 늙는다는 말의 좋은 사례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런 활동에서 미소짓는 노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하고 또한 아름답다. 특히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 이런 모습을 보인 분이라 헵번의 아버지가 나치 동조자였다고 까는 소수의 사람들은 십자포화TOT로 맞게 된다. 어차피 아버지는 헵번이 어릴때 집을 나갔으니 영향을 받을 겨를도 없었으며. 오드리 헵번은 사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피해자들 중 하나였다. 네덜란드로 갔던 어렸을 적 독일군이 최후의 발악으로 식량을 죄다 수탈해가는 바람에 튤립 구근을 캐먹어야 할정도로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고 네덜란드가 해방된 후 연합군과 유니세프가 지원해 준 연유를 허겁지겁 먹다 탈이 났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처절한 경험은 그녀가 자선사업 활동을 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Time Tested Beauty Tips
시간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매혹적인 입술을 가지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사랑스런 눈을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의 선한 점을 보아라.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자와 나누어라.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예쁜 머릿결을 가지고 싶다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그 손가락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라.

For poise,
walk with the knowledge you'll never walk alone...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다면
결코 그대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라.

People, even more than things,
have to be restored, renewed, revived,
reclaimed and redeemed and redeemed ...
재산보다는 사람들이야말로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며, 활기를 얻고, 깨우쳐지고,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Never throw out anybody. Remember, if you ever need a
helping hand, you'll find one at the end of your arm.
누구도 내버리지 말라. 이 사실을 기억하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그대는 그것을 자신의 손 끝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대는 손이 두 개인 이유가
하나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 하나는 다른 이를 돕기 위해서임을 알게 되리라.

오드리 헵번의 유언이라는 유언비어가 붙어 다니는 글로 사실은 헵번이 좋아했던 시이다. 시인은 샘 레벤슨(Sam Levenson).

4 기타

  • 오드리 햅번은 <사브리나>를 찍을 때는 전문 요리사 수준의 요리를 배웠고 <하오의 연정>을 찍을 때는 첼로 연주를 배워서 직접 첼로를 연주했다. <파계>를 찍을 때는 실제로 수녀 수업을 받으면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병원에 실려갔을 정도로 매 역할마다 진지한 자세로 임하였다고 한다.
  • 영화 '아멜리에'로 유명한 프랑스 배우 오드리 토투도 부모님이 이 배우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애완동물로 사슴을 기른 바 있다. 그린맨션 촬영때 만난 사슴인데, 이름은 핍핀이었다고. 간혹 트위터나 웹상에서 사슴과 함께 있는 흑백사진들을 볼 수 있다.
  • 2013년 영국의 초콜릿 회사 갤럭시 초콜릿의 광고에 CG로 구현되어 등장했다.

사람이 아니라 천사같아 5초 후 광스킵보다 짧게 느껴지는 1분

  • 2013년 3월 7일에 방영된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는 헵번의 열렬한 팬이 등장했다. 심지어 이 양반은 스스로 헵번의 피규어까지 만드는 흠좀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후에도 팬을 거느린 무서운 헵번그팬의 블로그 또한 이 팬은 2015년 추석 연휴 마지막 날, MBC에서 방송된 능력자들이라는 특집프로그램에도 한국인 중 오드리 햅번 덕후로 출연하였다.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에서 둘째 아들과의 SNS 인맥을 과시함과 동시에 오드리 햅번의 첫째 아들이 직접 출연하였다.
  • 2014년 5월 4일 구글에서 오드리 헵번의 탄생 85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일 로고를 제작했다. #
파일:Attachment/오드리 헵번/Hepburn doodle.jpg
  • 2014년 11월 29일부터 2015년 3월 8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오드리 헵번의 생애 전체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린다. 헵번의 둘째 아들로 오드리 헵번 어린이재단 회장을 맡고 있는 루카 도티가 주관하여 헵번이 출연한 영화의 소품과 의상, 집에서 쓰던 물품 등을 전시한다고 한다
  •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담배 처음 펴본 공주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론 골초로 유명하여 이 때문에 흡연으로 인한 결장암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인 1993년에 사망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보여 준 긴 담배 파이프가 유명하며 아직까지도 헵번 파이프곰방대라고 하면 통한다. 대장에 생기는 결장암이랑 담배랑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흡연은 결장암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 지금 담배보다 훨씬 독한 저 시절 담배를 피우면서도 피부에 잡티 하나 없는 모습[18]을 보면 참.... 신은 불공평하다.
  • 여담으로 담배 피우는 헵번의 모습이 2001년 우표에 담겨 발행된 적이 있는데, 헵번의 아들이 어머니가 담배를 피는 모습이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하여 발행 중단을 요청, 중단되었고 판매된 것들은 전량회수되어 소각처리했다. 당연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가장 최근 낙찰가가 한화로 6억 7천만원 정도.(...) 1,400만장을 발행했으며 당시 폐기를 담당한 직원이 30장 가량 빼돌렸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만한 노후 자금이 없네 몇 장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잊을만 하면 경매에 나와주셔서 그 때마다 최고가를 갱신하고 가시는 귀하신 몸이시다.
  • 앙드레 김은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어떻게 영화내내 옷차림이 수차례 바뀌냐(당시 어려운 상황이었던 우리나라에선 멋으로 옷을 여러 개 입는다는 건 매우 익숙치 않은 일이었다), 서양사람들은 옷이 많아 저렇게 그때그때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구나 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이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삶으로 가게 된 하나의 계기라고 한다.
  • 브리짓 바르도개고기 혐오 발언을 하자 강하게 비꼬면서 "전쟁 터지면 개고기? 그보다 더한 것도 먹는다. 당신도 그 전쟁 경험 안 해봤냐?"라고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오드리 햅번은 어렸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피난민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산에서 튤립의 구근까지 캐먹어야 했고 전쟁터의 빈 집에서 남기고 간 소시지, 베이컨, 햄 등 식재료들까지 먹었어야 했다고 한다. 당연히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니 그 식재료도 상하거나 썩은 게 많았지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서 그거라도 먹다가 배탈이 나고 설사로 심한 고생을 해야 했다. 원래부터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먹을 게 없어도 너무 없어서 온갖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영양실조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종전 이후 영국으로 돌아왔을 무렵 전쟁난민 지원모금을 위한 홍보 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애완동물 대전이 등장하면서 추가된 애완동물 조련사 npc 중 '오드리 번헵'[19]이라는 인물이 있다. 스톰윈드에서 애완동물 대전 입문 퀘스트를 주고 있다.
  • 한국영화 수상한 그녀에 주인공 오말순(심은경이 연기)이 이름을 오드리 햅번을 따서 '오두리' 라고 하며 그녀의 스타일도 노골적으로 오마주 한다. 인상깊은 대사로는 "오드리 햅번이 죽어버렸어?".
  • 2004년 방영된 KBS 월화 미니시리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남주인공 차무혁(소지섭 분)과 윤서경(전혜진 분배우자 이선균)의 생모인 오들희[20](이혜영 분)의 이름은 오드리 헵번을 벤치마킹 한 것이다. 왕년에 고결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과시하던 톱스타 여배우 출신이라는 설정에 봉사활동과 기부 등을 자주 하는 것으로 나오며 여배우로 활동하던 당시 유부남 감독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혜영 씨의 연기가 아주 발군이다. 여담으로 그 감독과의 사이에 쌍둥이 남매(차무혁, 윤서경)를 임신하게 되지만 출산 시 혼절한 틈에 오들희 母에 의해 유산한 것으로 꾸며지고, 쌍둥이 남매는 운전기사 겸 매니저 송대천(이영하 분, 여주인공 송은채(임수정 분)의 父)에 의해 고아원에 버려진다. 차무혁은 호주로 입양되어 거리의 개처럼 살고, 윤서경은 어린 시절 사고로 지적 장애를 가지게 되어 역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남들과 같은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다. 그런데 정작 유산한 것으로 아는 자기의 아이에 대한 모성을 견디다 못해 최윤(정경호 분)을 입양하여 친자식처럼 키워 훌륭한 가수로 만들어낸다.. 이외에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5 주요 출연작

  1. 1위는 캐서린 햅번과 2위는 베티 데이비스로 둘 다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연기를 펼친 여배우들인 것을 생각 하면 흠좀무. 게다가 만인의 연인이였던 4위 잉그리드 버그만을 체치고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배우 3위를 차지하였다.
  2. 벨기에 브뤼셀에서 영국 국적의 아버지과 네덜란드 국적의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벨기에, 잉글랜드, 네덜란드 사이에서 어린시절 2차세계대전을 피해 난민 생활을 하고 스위스에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벨기에, 영국, 네델란드, 스위스에서는 오드리 햅번이 자기나라 배우라는 떡밥이 끊이질 않는다.
  3. 윈스턴 처칠의 그 유명한 노려보는 사진 등 수많은 명사들의 사진을 촬영한 대가다.
  4. 덕분에 '또한 같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문화 센세이션 아이콘이기도 한 마릴린 먼로와 이미지가 정반대'라는 평을 듣는다. 문화예술 전반적 상징이라는 점 때문에 서브컬쳐나 예술에선 둘이 함께한 팬아트도 종종 볼 수 있다.
  5.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패셔너블한 LBD (리틀 블랙 드레스) 중 하나로 뽑힌다
  6. 정확히 말하면 사각턱. 사각턱은 서양에서는 흠으로 치지 않고 오히려 매력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헵번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인 경우.
  7. http://book.interpark.com/product/BookDisplay.do?_method=detail&sc.shopNo=&sc.prdNo=2268925&sc.dispNo=028016015 서평중에서…
  8. 나치 동조자였다고 한다. 나의 햅번은 이렇지 않아!
  9. 이를 의식해 라이프지에서는 커버 스토리에 올리면서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발레리나라는 캐치프레이드를 많이 쓰기도 했다. 실제로 오드리의 첫 직업은 발레리나였던것. 이는 우아하고 지적인 그녀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으며 빌리 와일더 감독은 《파계》에서 아프리카 로케이션때 틈만 나면 촬영장에서 책을 읽는 오드리를 보며 "아무리 어려운 말이라도 알 듯한 분위기를 가졌다."라고 했다.
  10. 영화의 주요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단 하루라는 것도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나온 아이디어.
  11. 그레고리 펙은 헐리우드에서 드문 진짜 대인배 인격자로 유명했다.
  12. 헵번은 노래실력도 괜찮아서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 와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하기도 했고 동화 오디오북도 녹음해서 이 오디오북으로 그래미를 받았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훗날 명곡의 반열에 든 "문 리버"를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부르기도 했다.
  13. 다이아몬드 액세서리 전문으로 유명한 실제 브랜드이며, 영화에서 나온 그자리에서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직접 찾아가보면 영화를 추억하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많은편.
  14. 공교롭게도 그녀의 출세작 로마의 휴일, 그리고 영화배우로써 유작 올웨이즈의 각본가는 같은 사람인 달턴 트럼보였다.
  15.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같이 출연한 배우이다. 영화서 주인공격인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역을 맡았다.
  16. 헵번은 이후로도 임신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한다.
  17. 재규어는 공돌이들이 빠른 차를 만드려고 노력하던 회사라, 거의 모든 모델이 스포츠카였지 승용차나 RV는 거의 없었다. 물론 XJ라는 고급 세단이 있었지만 이건 80년대에 나왔다.
  18. 이정현이 동안 비결을 묻자 담배를 일절 입에 안 댄다고 대놓고 말한 것을 생각하자.
  19. 영문명도 똑같은 Audrey Burnhep.
  20. 극중 드러나는 본명은 조말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