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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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鎔采
1932년 10월 05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 관료이다. 종교불교다. 호는 연곡(蓮谷)이다. 태권도 7단이다.

1932년 경기도 포천군에서 태어났다. 조선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5.16 군사정변 때 반란군 측에 섰다. 그리고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인이 되었다. 민주공화당 초기 차지철의 독주를 나무라며 차지철에게 손찌검을 하였다. 이후 경제기획원,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에서 관료로 근무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천탈락되었다. 직후 동방유량의 월급사장이 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기도 연천군-포천군-가평군-양평군 선거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중선거구제이고 출마자가 그와 신민당 천명기 후보 둘뿐이라 무투표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오치성에 밀려 공천 탈락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정치규제 기간에 서부트럭터미널을 운영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자 한국국민당에 입당하면서 비슷한 시기 서부트럭터미널을 매각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연천군-포천군-가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한국국민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다.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에 연루되었다. 1987년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한국국민당을 탈당하여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 이한동 국회의원을 피해 지역구를 자신의 출신 지역인 포천군과 가까운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 지역구로 겨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신민주공화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다.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소속이 되었다. 1991년 수서 비리에 연루된 오용운을 대신하여 공화계 몫으로 대한민국 국회 건설위원장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 처음에는 당선되었다고 발표했으나 재검표 결과 민주당 임채정 후보에게 낙선하였다. 이 무렵 정무제1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재검표 결과 때문에 의원직 뿐만아니라 장관직도 잃고 말았다.

1995년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따라갔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노원구청장 재보궐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연합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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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더월드 김용채 후보 뒤에서 박수치는 임채정 의원의 천하를 다 가진듯한 웃음이 압권

2001년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DJP연합이 붕괴되면서 1달도 안 되어 경질되었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67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국회의원)민주공화당-당선
1973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연천군-포천군-가평군-양평군)민주공화당-당선
1985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연천군-포천군-가평군)한국국민당-당선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신민주공화당-당선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민주자유당-낙선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자유민주연합-낙선
19961996년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 노원구청장)자유민주연합-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