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의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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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방대대 소속의 병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진으로 수많은 네티즌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후 국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발단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 있었던 유타 해안에서 로버트 브루어 중위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방대대 출신의 병사를 심문했는데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원래 인터뷰에서 브루어중위가 한국인으로 지목한 병사의 숫자는 4명. 이 사실이 어느 네티즌에 의해 상기의 사진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이웨이 홍보나 여러 매체에서는 앰브로스의 책에 저 사진이 있다고 하지만… 앰브로스의 책에는 저 사진은 없다. 그 책에 있는 어구와 저 사진의 인물을 합성한 텍스트가 돌면서 저 사진을 앰브로스가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것.

이 사진의 사람이 한국인이란 증거는 사진과 언급된 정보 말고는 없다. 포로 정보 관리는 어떻게 한거냐 연합군 당시 심문자와 참전자만 알고 있는 비밀

대충 유타 해안의 한국인이 어쩌다가 이런 모진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

1.1 소련군에 징집된 일본군 포로설

이 설은 일본의 징병으로 끌려감 →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됨 → 독소전쟁에서 병력이 부족한 소련군이 이들을 소련군으로 징집함 → 독일군의 포로가 됨 → 독일군도 병력보충을 위해 이들을 군사로 씀 →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게 붙잡힘...이라는 경로로 추정한다. 이때는 1940년대 이전이니 직업상의 이유로 군을 선택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1938년에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마이웨이>의 장동건은 어떻게 일본군에 갔을까?를 참조.

문제는 할힌골 전투중일전쟁 때 겉으로는 포로가 되면 안된다고 주장하던 일본군이지만, 나름대로 이면에는 포로 교환 교섭을 했었다는 것을 볼때 소련의 포로에서 소련군 징집은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할힌골 전투나 장고봉 사건 이후에 소련일본은 불가침 협정을 맺어서 나름 국경조약을 완료한다. 이때 대부분의 포로들이 귀국하게 된다. 물론 이 불가침 협정은 소련만주 작전으로 생깐다. 그러니 마이웨이에서처럼 일본군 포로설은 희박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물론 역사가 기록대로 간 것은 아니기때문이다. 할힌골 전투 포로 출신으로 소련군 장교가 된 박성훈이라는 사람도 있다. 포로의 소련군 입대가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출처:SBS스페셜).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한 조선인들은 한반도 내 부대에 주둔하라고 했지만, 첫 번째 사망자인 이인석 상등병(당시 나이 25세, 충청북도 옥천군 서면 출신)은 화북전선에 위치한 산서성에서 전사하였다. 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포로들 중에도 조선인에 관한 기록이 조금은 남아있으며 소련으로 전향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상당수의 고려인들도 독소전쟁에 참전하였다. 또한 독일도 소련군 포로들 중 전향자를 대상으로 동방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즉 이 주장도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1.2 고려인? 혹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

다른 설은 저 동양인은 원래부터 소련에 거주하던 사람, 즉 고려인으로서 징집되었다는 설이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 사진 등을 보면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동양계 병사들도 드문드문 있다. 비슷한 이야기로 홍범도 장군이 후에 소련군으로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했다는 고려인들의 구전 설화(?)를 소재로 한 굽시니스트웹툰도 있다. 고려인들은 독소전쟁에는 나름 참전한 경우가 있다. 겐나디 한(1919~1943) 같은 경우는 동아시아계로 드물게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며 나치와 싸우다가 격추당해 목숨을 잃었다. 6.25 전쟁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었던 남일 또한 소련군에서 대위까지 오른바 있다. 사진이나 기록에서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부모와 같이 이주당한 한국인으로 나왔다. 잊혀졌던 그는 90년대에 MBC 뉴스데스크에서 잠깐 다뤄져 조금 알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소련군에는 동양인이 꽤 많이 섞여 있었고, 고려인뿐만 아니라 생김새가 한국인과 거의 같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도 무차별 징집했으므로 동양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소련영화 "베를린 함락(1949)"와 독일영화 "베를린의 여인(2007)"에서도 아시아계 소련 병사가 비중있는 역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소련군의 동양계 병사 - 포로 - SS 부역자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무장친위대에 "중앙아시아"계 소련인 부대가 공식적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아시아계 소련인설"이 가능성도 높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소련군에 아시아인이 상당히 많았다. 당시에는 소련몽골군을 뒤에서 지원하고 있었고 카스피해 지역에 사는 몽골족의 후예인 칼미크인들도 상당수 소련군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해 독일과 싸웠기 때문이다. 이들이 독일에 포섭되어 무장친위대에 참여한 것은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다. 소련군은 이런 독일 부역자를 심사하기 위해 스메르쉬를 만들어 송환된 포로 전원을 심사하여 처형하거나 굴라그로 보냈다. 다만 저 사진은 SS에 부역한 병사의 사진은 아니다. 사진 속의 병사가 입고 있는 복장은 국방군 복장이며(SS는 군 상징 독수리소매에 달린다), 자유 러시아 군단국방군 소속이었다. 또한 자유 러시아 군단 패치가 소매에 박혀 있어야 하지만 보이지 않으므로, 역시 자유 러시아 군단 소속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말로 SS에 부역한 중앙아시아계 소련인인지 아니면 자유 러시아 군단 출신인지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2 행로는?

이들이 누구이며, 또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이들의 최후에 대해 앰브로스 등은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전쟁을 치렀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시 소련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고 주장한다. 소설가 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이 이 주장을 따른다. 굴라그의 신화중 하나인데 공산권 붕괴후 공개된 소련 문서에 따르면 이런 대량처형은 일종의 신화였고 대부분 노동력 착취를 위해 굴라그로 이송되었다. 그중 협력사실이 경미한 전직 포로들은 다시 군에 들어가는 것이 허가되었고 대부분 노예노동부대나 굴라그 경비병으로 차출되었다. 처형된 비율은 의외로 적고 실제 전범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맞는 비율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미국에 남아 여생을 지냈다고 추측한다. 북토피아에서 전자책으로 출간된 장웅진의 <노르망디의 조선인>이라는 소설이 이 주장을 따른다.(#)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일단은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5~1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페이지를 보면 조선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4명의 사진이 있다. 그 밖에도 투르크계 병사들의 사진도 보인다,

사실 연합국은 소련군 전향 포로와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망명한 코사크계, 백계 러시아인들을 소련에 다시 넘긴 사례도 있었다. 특히 동방대대 포로들의 경우에는 동유럽에서 소련군의 보호하에 있던 자국 포로들의 안전확보를 위해 국제조약도 무시한 경향이 있다. 본문 아래의 사례 같은 해피 엔딩이 많기만 바랄 뿐. 사실상 소련군 전향 포로에 대해서 2가지 사례가 모두 공존한다고 보면 된다.

어찌보면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서 기구한 삶을 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사례로 일본군에서 중국군(팔로군), 북한군을 거쳐 다시 한국군에 복무한 할아버지도 있다(#).

저 사진의 사람인지는 불명이나 위의 이야기는 양경종이라는 조선인의 경험이라는 뜬소문이 돌고 있다. 2008년쯤 국방일보 기사에서는 저 사진 인물이 양경종이라 소개했다.1920년 출생으로 신의주 출신이었던 양경종은 1938년 징집되어 관동군에 배속되었고, 할힌골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자원입대가 아니란 사실을 밝힌 양경종은 곧바로 소련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데로 이 부분은 의심스럽기는 하다. 일부 일본 공산주의자들중에 탈영 내지는 망명으로 사할린 등을 통해서 소련으로 넘어간 사람도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굴라그에서 일생을 마치지 징집은 되지 않았다. 양경종은 1943년 여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에도 똑같이 자원입대가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밥만 배불리 먹으면 됩니다"란 말을 들은 독일군 장교는 양경종을 독일군 동방대대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군은 절대로 이렇게 만만한 군대로 보기는 어렵다. 카이텔이 1943년 초반에 소련 포로들에 대한 노예 노동안을 제안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련군 소속의 열등인종 포로는 처형이 원칙이었다. 어쨌건 양경종은 이후 다시 1944년 노르망디 유타 해변에서 포로가 되었고, 영국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종전 직후 석방된 그는 1947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1992년 사망할 때까지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내용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독소전쟁 항목에서 알 수 있듯 노르망디에서 포로가 되기 전에는 하루하루가 생지옥이었을 테니 그럴지도란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영 앞뒤가 맞질 않는다. 위의 이야기는 미군에 포로로 잡혔을 당시 심문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2차세계대전 갤러리에선 양경종을 구라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이 '양경종 설'이 구라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애초에 양경종 설이 출현한 것은 2004년 초 도깨비뉴스의 기사《이 1장의 사진: 민족의 비극 그러나 강인한 민초…》의 댓글 중에서였다. 위의 사진을 소개하는 이 기사의 댓글란에 'truth'라는 닉을 쓰는 익명의 인물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이름 : 양경종

생년월일 : 1920년 3월 3일
본적 : 신의주
관동군 입대 : 1938년
노몬한 전투 참전 때 소련군 포로
1943년 여름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독일군 포로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유타 해변에서 미군 포로
1945년 5월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 여기서 사실 무근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전후 처리나 전쟁 범죄 조사, 피난민과 자국 병사들의 귀환때문에 적대국 전쟁포로의 귀환은 상당히 늦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전범과는 거리가 멀었던 필리핀 포로 수용소 출신의 오오카 쇼헤이도 1년 반 정도 뒤에야 석방돼서 돌아가기도 했다. 1945년 5월이면 전쟁이 끝나자 마자 석방되었다는 이야기.
1947년 미국으로 이주
1992년 4월 7일 미국 일리노이노스웨스턴 대학교 부근에서 거주하다 사망
평범하게 태어나 수많은 전쟁참화를 겪은 뒤 미국으로 이주
40년 넘는 세월을 평범한 미국 시민으로 생활
슬하에 2남 1녀 자녀 둠.
결코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이야기 한 적 없다고 전해짐.

해당 기사의 기자는 추가 사실 확인을 위해 개별적으로 연락을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이 익명의 인물은 더 이상의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 양경종이란 인물이 실존 인물이고 자녀가 존재하며 제3자가 행적을 알고 있을 정도라면, 이미 당사자가 고인이 된 마당에 추가 정보 공개 요청에 응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또한 언론 및 관련 동호인들의 집요한 추적에 걸려들지 않았을 리도 만무하다. 아울러 다른 이외의 어떤 객관적인 자료도 위의 댓글의 신빙성을 뒷받침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 '양경종 설'은 정체 불명의 누리꾼에 의한 낚시질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애초 내용도 뭔가 미심쩍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저 내용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만족해야할 사항이 있다. 가족에게도 말 안하고 가족도 모르는 과거사실과 이후 생활 및 가족사항, 그리고 사망일자까지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 즉 가족보다 더 진한 유대관계가 있는 사이거나 그런 사람을 잘 알고 있는데다 그 사람이 당사자가 가족한테도 안한 이야기를 제3자에게 술술 불었다는 거다. 특히 후자라면 사진까지 보여줬단 소리고 전자의 경우는 거의 저 사항들을 대부분 같이 겪은 전우급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유대관계다. 차라리 사이코 메트리로 사진을 읽었다고 해라

3 미디어

2005년SBS 스페셜에서 "노르망디의 코리안"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에 대한 2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21~22회)
1부 - 독일 군복을 입은 조선인 2부 - 국적 없는 포로

2007년에 발표된 조정래의 역사소설 <오 하느님>은 이 한국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 찾아보면 절판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2009년 <사람의 탈>이라는 제목으로 개제되어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이를 중심 소재로 삼은 영화 마이웨이(강제규 감독 작품)가 2011년 12월 22일에 개봉했다. 장동건, 오다기리 죠, 판빙빙(范氷氷) 등 캐스팅이 매우 화려하다

중국의 밀리터리넷에서는 이 사람을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다.중국 기원설

4 결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르망디에서 연합군 포로가 된 아시아인은 있었다. 그러나 이 사진의 사람이 양경종이라는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다.. 장웅진이 쓴 노르망디의 조선인에서는 심문관인 러시아계 정보장교가 러일전쟁 뒤 자기만 미국으로 보내고 러시아에 남았던 아버지가 재취한 뒤 얻은 딸, 그러니까 배다른 누이동생의 남편이 이 인물인 것을 알아차리고 빼돌리는 식으로 전개했다. 그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사진의 주인공 또한 역사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노르망디, 에 있는 2차대전 기념관에 전시되어있는 내용을 보면 그 사진과 함께 그가 한국인이라 나와있다.

최근 국립국악원독일의 한국인이 부른 음원을 독일에서 발견하는데 성공했고 그 음원은 당시 인류학자가 아시아인이 부른 노래를 에디슨 원통형 축음기로 녹음한 것으로 아리랑 등이 녹음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앨범화 작업 중에 있고 2016년에는 그 결과물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이전 버전에서는 이것이 노르망디의 한국인의 증거라고 했지만 체록시기가 1917년이고 인물 추적 결과 1차 세계대전 당시 제정러시아 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포로가 된 연해주 거주 한국인의 음원이었음이 밝혀졌다.참조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