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Cyrus II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제5대 왕이며 실질적인 초대 군주.
-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이라는 호칭으로 유명하다.
탄생 | 기원전 580년(혹은 590년) |
사망 | 기원전 529년 |
고대 페르시아어: Kūruš, 바빌로니아어: Kuraš, 엘람어: Kuraš, 아람어: Kureš, 히브리어: כורש Koreš, 라틴어: Cyrus, 페르시아어: کوروش بزرگ
2 설명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 ㅡ 크세노폰
바빌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계 사면의 왕.
세계 최초의 대왕
세계 최초의 거대 제국인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키루스 1세의 손자이자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Κυρος', 퀴로스[1]로 표기했다. 성경에서는 '고레스'라고 하며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Kūruš'(쿠루쉬)라고 불리며 키루스 대왕이라는 뜻의 'Kūrošé Bozorg'[2][3] 어려서 그가 왕이 될 것이란 예언을 두려워한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에 의해 버려진 뒤 소치기에게 주워져 큰 뒤 권력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보면 이런 종류의 이야기의 원조인 듯.
페르시아, 혹은 세계에서 최초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남자로, 따지고 보면 대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대인배. 깝죽대던 칸달루스 등, 페르시아보다 강대한 왕국들(예를 들면 메디아와 리디아)을 박살냈으며,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인권운동의 시초로 불리는 키루스 원통이라는 법조문도 만들었다.
3 정복 활동
3.1 메디아 차지
페르시아는 당시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발흥한 국가인 메디아의 속국으로서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의 외할아버지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어느날 딸 만다네가 소변을 봤는데, 그것에 온 세상이 잠기는 꿈을 꾸었는데, 사제들을 불러 해몽을 시켜보니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 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스티아게스는 식겁해서 만다네를 절대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인 페르시아의 남자와 결혼시켰다.
얼마 후 만다네가 임신을 하자,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의 음부에서 포도나무가 자라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꿈을 꾸었다. 사제들은 이번에도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고 해몽했고, 아스티아게스도 위협을 느꼈는지 신하 하르파고스에게 만다네의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근데 아스티아게스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외손자가 다음 왕이 되어도 딱히 이상할 게 없다. 어쨌든 아스티아게스에게 아들이 없는 만큼 만다네가 차기 권력자로 유력해서 뒷감당이 두려워 그랬던 건지, 죄없는 어린 아기를 죽이는게 싫어서 그랬던 건지 하르파고스는 키루스를 직접 죽이지 않고 왕의 소치기에게 죽이라고 넘겼다. 그리고 소치기도 차마 아기를 죽이지 못해서 사산된 자기 아기와 바꿔치기 해서 키루스를 길렀다. 하르파고스는 사산된 아이의 시신을 보고 키루스가 죽었다고 여겨 아스티아게스에게 임무를 끝냈다고 보고했다.
세월이 흘러, 키루스가 동네 아이들과 왕 놀이를 하던 중 왕으로 뽑혔다. 요즘 왕 게임처럼 승자가 명령하는 놀이였던 듯. 그런데 어느 고위 관리의 아들이 자신은 고관의 아들이니 소치기집 아들의 명령은 들을 수 없다고 거부했고, 키루스는 왕의 명령에 개긴다며 두들겨 패서 반 죽여놓았다. 자식이 소치기집 아들에게 죽도록 얻어 터지고 돌아오자 빡친 고관은 아스티아게스에게 달려와 하소연했다.[4] 아스티아게스가 키루스를 불러 심문해 보자 키루스는 '놀이긴 하지만, 왕의 명령에 거역해서 벌했다'며 자기를 변론했다. 이때 왕이 키루스가 자기 외손자라는 걸 알아 봤다고 하고, 소치기를 불러 심문해보자 하르파고스가 맡긴 아기를 죽이지 않았다고 실토했고, 하르파고스를 불러 심문하자 자기가 임무를 실패했다는걸 인정했다.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를 또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지, 오래 전 꿈을 해몽해 줬던 사제들이 '놀이지만 왕이 됐으니 액땜 됐네요. 이제 안 죽여도 될 듯.'이라는 개드립을 치자 페르시아에 있는 친부모에게 돌려 보냈다.
그리고 하르파고스의 13살짜리 아들을 궁으로 부르고, 하르파고스도 식사에 초대했다.
임무 실패로 처벌 받을까 두려워 하던 하르파고스는 왕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자 안심하고, 아들을 치장해 궁으로 보내고 자신도 왕의 식사에 참여했다.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에게 고기 요리를 대접했고, 그가 식사를 마치자 그에게 대접한건 특별한 고기라며 바구니를 줬는데 그 안에는 하르파고스의 아들의 머리통과 사지가 잘려 담겨 있었다.
하르파고스는 아들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도, 자신이 아들의 고기를 먹었다는걸 알고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왕에게 임무를 실패했던것을 사죄하고 이 처벌을 달게 받아들이겠다며 다시 충성을 다짐했고, 아스티아게스도 만족했는지 하르파고스를 다시 중용했다.
얼마 후 장성한 키루스는 페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에게 진압을 명령하며 대부분의 병력을 맡겼다. 그리고 하르파고스는 바로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키루스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하고 충동질한 게 하르파고스였다. 하르파고스는 대충 싸우는 척 하다 군을 물리며 아스티아게스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하르파고스의 내응 덕에 키루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커다란 전력차를 뒤집고 메디아를 멸망시켰다.
이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고, 만화 《히스토리에》에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어쨌든 이란 고원에서 아나톨리아 접경지대까지 뻗어 있던 광대한 메디아 왕국은 순식간에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3.2 리디아 정복과 델포이 신탁의 전설
메디아의 이웃나라이며 친분관계에 있던 리디아에게 있어 키루스의 쿠데타는 좋은 침공 구실이었다. 키루스 2세와 적대하다 무너진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관련해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치기 직전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피티아'라는 이름의 여제관이 답신을 주었다.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면 대제국이 무너진다"는 전언이 그것이었다. 대제국이라는 수식에 걸맞는 나라는 페르시아밖에 없다고 생각한 크로이소스는 피티아의 전언을 자신의 승리 예언이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 낙타 부대를 동원한 키루스의 우회 기동 전술에 보기 좋게 참패했다.[5] 즉 예언의 '거대한 왕국'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리디아였던 것이다[6] 다행히 크로이소스 본인은 키루스의 아량으로 목숨을 건지고 왕의 조언자로 살 수 있었다. |
이 이야기는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1권에서도 소개되며 김광수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서도 주어의 모호함을 지적하면서 언급된다.
이 일화 때문에 'delphic'이라는 영어단어도 생겼다. '애매모호한'이란 뜻. 또한 델파이 기법이라는 미래예측 기법도 고안되면서 여기서 이름을 따 왔다.
3.3 신 바빌로니아 정복과 성경의 사실
신 바빌로니아 말기, 바빌론 성벽에 누군가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이라는 기묘한 문구를 적어뒀는데, 유대인 예언자 다니엘은 이 낙서를 '파르시(페르시아인)'들과 연관이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과 관련이 있는지 몰라도 오래잖아 키루스가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막고 우회해 바빌론 침공에 나섰다. 성경 내용에 의하면 저녁의 어둠 속에서 페르시아 특공대가 그 유명한 바빌론의 문을 통과했고, 벨사자르의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바빌론은 페르시아에게 함락되었다고 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신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를 계승한 공포의 압제자였기 때문에, 해방자인 키루스를 적극 환영하여 맞아들였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른바 '고레스 대왕'으로 존경을 받는다.
4 사망과 그 이후
이후 키루스 2세는 신하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마사게타이[7] 정복 전쟁에 나서는데, 초반에 선전을 해 마사게타이 여왕 토미리스[8]의 아들을 포로로 잡는다. 이에 분에 찬 여왕이 "피에 굶주린 키루스여! 내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태양신의 이름으로 그대가 좋아하는 피를 실컷 맛보도록 해주겠다!"라고 외쳤으나 키루스는 끝끝내 풀어주지 않고 결국 왕자는 자살한다. 키루스로 인해 자신의 아들이 죽은 마사게타이의 여왕은 매복끝에 키루스를 살해, 그의 시체를 샅샅이 찾아내어 난도질하고 그의 머리를 맹세대로 핏물에 담가두었다한다. 이상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른 것인데, 헤로도토스 자신도 이 일화를 정확히 정설로 설명하지 않고 키루스 2세의 죽음에 관한 여러가지 버전 중 하나로서 카더라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키루스 2세의 말년과 죽음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9]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겐 신 바빌로니아로부터 민족을 구해준 영웅 중의 영웅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도와준 것 등으로 인해 그를 일컬어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라고 했을 정도다.[10][11] 유태인이 아닌 이민족의 지도자로서 유태인에게 이 정도로 후빨을 받은 사람은 키루스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다.[12] 그 외에도 '(유대민족에) 빛을 가져온 자'='샛별(헬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호칭이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 'Lucifer(루키페르)', 즉 루시퍼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이 호칭은 키루스 이후 페르시아의 왕들이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부정적 의미가 강해졌고, 이후 중세 시대 라틴어 성경으로 신학을 하던 수도사들이 바빌론의 몰락을 샛별이 지는 것에 비유한 이사야서의 구절을 확대 해석하면서 루시퍼에 지금의 타천사의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메시아의 이명 중 하나가 타천사의 이름으로 인식이 변화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13][14]
그의 일대기는 전설이 되어 그리스인과 로마인 지배계층들의 모범서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나 크세노폰 등 당대 페르시아와 적대하던 그리스 기록자들도 키루스를 강력하고 모범적인 영웅으로 묘사하였다. 사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역은 키루스의 후계자인 캄비세스 2세가 정복한 이집트나 다리우스 1세가 정복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펀잡 등 자잘한 부분을 제외하면 전부 키루스가 정복한 것이다. 그것도 조그마한 파르스 일대를 기반으로 봉기하여 서아시아 세계의 3강을 잇달아 무너뜨린 것이다. 물론 정복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제국이 어수선했고, 이는 키루스와 캄비세스가 죽은 뒤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반란들을 모두 진압하고 본격적인 교통정리를 시작하며 제국의 기틀을 다진 것은 다리우스 1세의 공이다. 다리우스 1세는 캄비세스 2세의 6촌으로 키루스의 7촌조카이지만 그의 딸 아토사가 다리우스 1세와 결혼했고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의 외손자이다.
한편 그의 인권 운동은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아서, 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 왕중왕들은 관용과 자비를 통치의 으뜸 덕목으로 삼게 되었다. 물론 그 관용과 자비라는 게 전지전능하신 왕중왕께서 꼴리는 대로 내려주시는 거라서 대단한 의미부여를 하긴 어렵지만, 닥치고 힘으로 찍어누르거나 신과 종교의 위엄에 의지하던 이전 왕조들에 비하면 통치 이데올로기가 한 단계 발전했다는 의의는 찾을 수 있다.
한편, 그의 무덤은 바로 이란에 남아있다. 그는 무덤을 검소하게 만들라고 유언해서인지 당대 여러 왕들의 무덤에 견주면 정말 작다. 오죽하면 그가 죽고 약 2백 년 뒤에 쳐들어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게 그 전설의 키루스 2세 무덤이란 말인가? 이리도 초라한 무덤이?"라며 믿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키루스 2세는 무덤에 글을 새기게 했는데
아무리 제왕이라도 결국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나 또한 여기서 그냥 빈 손으로 가고 이렇게 작은 쉼터에서 쉬고 싶을 뿐. 이름 모를 제왕이여, 그대는 나의 잠을 깨우지 말길. 빈손으로 가는데 화려한 보물이 뭐하러 필요하겠는가? 어차피 그대도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O man, whoever you are and wherever you come from, for I know you will come, I am Cyrus who won the Persians their empire. Do not therefore begrudge me this bit of earth that covers my bones.
이보게, 자네가 누구든 그리고 자네가 어디서 왔든, 나는 자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네, 나는 페르시아인의 제국을 건국한 키루스라네. 나의 뼈를 감싸고 있는 이 한 줌의 흙을 비웃지 말게나.
이 글귀를 본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일절 무덤을 건드리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무덤은 작지만 내부에는 많은 보물들과 사치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알렉산드로스 3세가 멀리 원정을 간 사이에 도굴당했다고 전해진다.
5 기타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첫 접촉이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당시 리디아 왕국의 동맹국이었던 스파르타는, 리디아가 멸망하는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에 수치를 느꼈다.(더군다나, 이 동맹은 리디아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도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신탁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스파르타인들은 강력한 경쟁자이자 원수였던 아르고스를 제쳤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를 보낼 여건은 못되었기에 스파르타는 사신을 보내어 키루스에게 이오니아 지방을 건들지 말 것이며, 만약 이오니아로 진출한다면 스파르타에게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때, 스파르타 사신들은 '스파르타'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페르시아가 두려워 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키루스는 부복하고 있던 이오니아인 시종을 불러 대체 스파르타인이 누구인고?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스파르타 사신들은 데꿀멍. 하지만, 키루스가 딱히 스파르타에게 억한 심정을 가지고 이런 것은 아니었고,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다. 당시 스파르타인은 전투종족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떨게 하고 있었고 스파르타인은 누구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페르시아에 비해 너무나도 작은 지역이었다. 하물며 거기서 아르고스와 아웅다웅하고 있었던 스파르타의 이름은 키루스가 알리가 없었고, 어째서 스파르타라는 이름에 그들이 그토록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아했을 뿐이었다. 페르시아 입장에서 어떤 이민족이 무례한 요구를 한 사소한 일에 불과했지만 스파르타인들은 이 굴욕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손자인 크세르크세스 대에 이르러서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불과 300명으로 그들의 앞을 막아선 스파르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5.1 대중 매체 속의 키루스 2세
키루스 2세의 이야기는 만화 《히스토리에》 1권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큐로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오역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으나, '큐로스'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불리는 명칭이다. 참고로 이때 키루스 2세에게 붙어 메디아의 함락을 도운 하르파고스라는 장군의 일화도 같이 나온다. 왕이 시킨 한 가지 일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해서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친자식의 고기 요리를 먹어야만 했다고 나오는데, 《히스토리에》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그 한 가지 일이라는 것이 키루스 2세의 신탁과 관련된 것. 태어나자마자 데려다 죽이라고 했는데 살려보내서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고 있는 《페르샤》라는 작품도 키루스 2세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 국내의 일반적인 표기법으로는 키로스지만, 천병희 교수의 번역을 따름.
- ↑ 아랍 문자로는 'کوروش بزرگ'와 같이 표기
- ↑ 후대 사산 왕조의 왕 이름이며 현대 이란에서 남성 인명으로도 널리 쓰이는 호스로(Khusrau)는 이 쿠루쉬에서 유래한 것이다.
- ↑ 고관이 자기 아이를 두들겨 팬 평민집 아이를 직접 조지지 않고 왕에게 탄원했다는 점에서, 고대 메디아가 상당한 수준의 법치 국가였다는걸 알 수 있다.
- ↑ 참고로 이 낙타부대 전술을 제안한건 위에 나온 하르파고스였다
- ↑ 그러니까 예언이 틀린 건 아니다. 당시 리디아도 페르시아 못지 않은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국력이 페르시아에 비벼볼 만 하니까 단독으로 침공할 수 있는 것이다
- ↑ Massagetae. 트란스옥시아나 서부, 호라즘 북부 일대에 살던 스키타이계(이란어족) 유목민들이다.
- ↑ 본명은 아니며, 이 사건을 기록한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멋대로 지어낸 이름이다. 참고로 이 토미리스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실존했는지는 확실치는 않다.
- ↑ 다른 기록도 많다. 크테시아스는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했다고 했으며,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 평화롭게 죽었다고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헬레니즘 시대 바빌론 출신의 역사가 베로수스는, 키루스가 북동쪽 국경지대에 사는 유목민족인 다하이(Dahae)족의 세력에 대해 근심하다 죽었다고 기록했다.
- ↑ 구약성서 역대기 하, 이사야 서(제3 이사야), 에스라 서 등
- ↑ 그리고 일부 유태인들은 이사람을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 ↑ 당시 유태인들이 가장 원하던 2가지인 종교적 자유와 자유무역시장을 약속하고, 실제로 어느정도 실행에 옮기기도 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호평을 받긴 했지만 약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키루스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비 로마인들중 유대인들이 가장 슬퍼했다.
- ↑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 넘어지다니!(이사 14:12)> 이 구절에서 샛별을 라틴어로 쓰면 루키페르다. 애초에 루키페르는 샛별을 뜻하는 일반명사였다. 문제는 이후 일부 신학자들이 '이사야서의 몰락하는 샛별'을 '몰락하는 사탄'으로 오해하였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루키페르'을 사탄의 이름으로 오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여겨지며, '몰락하는 샛별'은 '바빌론 왕'을 뜻한다고 해석된다. 즉 애초에 루시퍼라는 이름의 악마는 후대의 오해가 불러일으킨 성경 동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 사실 그리스도를 샛별에 비유하는 경우가 기독교에서는 은근히 많아서, 자칫 오해를 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바티칸에서 라틴어로 찬송가를 부를 때, 예수를 샛별로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라틴어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잘못 들으면, 예수를 악마에 비유하는 것으로 오해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부 근본주의 개신교에서 악마의 편집을 시전하여, 바티칸이 악마를 찬양한다고 우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에서 부르는 <내 진정 사모하는>(통일찬송가 88장)이라는 찬송가의 후렴구의 초반에는 "주는 저 산 밑의 백합, 빛나는 새벽 별"이라는 가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