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Faraday
마이클 패러데이
탄생 | 1791년 9월 22일 |
사망 | 1867년 8월 25일 |
1 소개
물리학 및 화학과 같은 현대 자연과학의 기초를 닦은 영국의 실험철학자이며 과학자의 표상.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 대중강연자이자 오컬트 폭로자. 그와 동시에(?!) 종교적 신앙심으로는 당대에 유명했던 독실한 개신교인.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존경했던 바로 그 사람.[1] 무엇보다도, 실존했던 인생역전의 사나이.
별칭으로 전자기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화학 분야에서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물리 분야에서도 매우 중대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전자기 유도는 그를 빼놓고서는 절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1.1 생애
런던 근교에 있는 뉴잉턴의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다. 가난을 피하기 위해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이사한 그는 그때부터 서점의 제본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점원으로 일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이 제본했던 과학서적들을 읽었는데, 이때부터 과학적 흥미가 생겼다고. 이로 인해 일반 강연을 들으면서 화학 실험도 시도해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던 중에 패러데이의 고용주는 이런 사실을 고객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던 와중, 그런 고객들의 아버지 중 왕립 협회의 높으신 분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드디어 19세 때, 당시 최고의 과학자인 험프리 데이비의 강연 티켓을 받게 되어 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이후 아예 과학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이 기록한 노트를 제본해 데이비에게 보냈으며, 이게 데이비의 눈에 띄었다. 마침 데이비가 실험 중 눈을 다치게 되어 치료기간 동안 자신을 도와줄 조수가 필요했는데, 데이비는 그때 페러데이를 자신의 연구 조수로 발탁했다! 오오 데이비 오오[2]
이때부터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실험을 보조하면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때가 1813년, 그의 나이는 불과 22세였다. 이후 1824년에는 왕립학회 회원, 그 다음 해에는 왕립 연구소 주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산업혁명의 바람이 불던 영국에서, 밑바닥에서 돈 많은 부르주아의 전유물로 일컬어졌던 과학 분야의 이런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건 당시로선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레알 신분상승
이하에 서술될 다양한 업적을 남긴 뒤, 죽을 무렵엔 웨스트민스터 묘지[3]에 장사를 지낼 것을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제안했으나 거절했다.[4] 그 외에도 평생 동안 온갖 혜택 제안이 들어왔지만, 패러데이는 대부분 다 거절했다.[5] 패러데이의 이러한 겸손한 면모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고, 지금도 패러데이는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로 회자되고 있다. 페러데이의 묘지는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다.
2 과학적 업적
2.1 화학 분야
흔히 패러데이를 물리학자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는 화학에도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애초에 처음으로 했던 실험이 화학실험이었다. 염화질소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 특수강(特殊鋼)에 관한 연구, 염소의 액화연구 등 실험 화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825년에 벤젠을 발견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다.[6]
2.2 물리 분야
그러나 단연 패러데이가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역은 물리 분야였으며, 특히 전자기학에서 매우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가 전자기학에서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전기와 자기의 연관성을 밝혀낸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전기와 자기를 별개의 것으로 보았지만, 패러데이의 연구를 통해 하나로 합쳐질 수 있었다. 이때 전기와 자기의 통합에 일조를 했던 것이 전자기 유도의 발견으로, 자기장의 변화가 전류의 흐름을 유도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패러데이가 처음으로 이를 발견한 것이다.
패러데이는 전문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수학에서 매우 약한 모습을 보였기에[7] 전기와 자기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지언정 이를 수학적인 언어로 깔끔하게 정리하지는 못했다. 이후 전자기 유도를 포함한 전자기학 전체를 깔끔한 4개의 식으로 정리해 낸 사람이 바로 제임스 맥스웰이다. 그리고 이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20세기 물리학의 최대 업적들 중의 하나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유도된다.
아무리 맥스웰이 전자기식을 수학적으로 유도해냈어도, 패러데이의 실험 데이터가 없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또한 맥스웰 방정식 식에서 유도된 상대성 원리도 패러데이의 실험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페러데이를 존경하며 아무리 이론물리학이나 계산물리학(computational physics)이 발달해도 실험의 중요성은 절대로 약화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된다. 또한 그가 발견한 전자기 유도는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단적으로 이게 없으면 지금의 발전기가 존재할 수 없다! [8]
2.3 대중강연 활동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패러데이는 정규 과학 교육을 받기 어려운 처지의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과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키우기 위해,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자신이 재직하고 있었던 왕립 연구소에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공개 강연을 실시하였다. 그 중 1860년에 그는 1개의 양초만을 가지고 6번에 걸쳐 실험을 하고 강연을 했는데, 이를 동료과학자인 윌리엄 크룩스가 편집을 하고 서문을 써 그 다음 해에 출간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양초의 과학. 패러데이가 얼마나 뛰어난 실험가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강연이 영국인들의 인상에 워낙 깊이 남아서인지 20 파운드 화폐 뒷면에[9] 패러데이의 초상이 실렸을 때 이 장면이 배경으로 실렸다.
패러데이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했던 실험은 영국 왕립 협회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마다 시행되고 있다. 20세기가 된 이후에는 BBC로 전국 중계까지 한다. 영국 왕립협회의 전통인 만큼 강사진도 어마무시하다. 강연했던 사람의 목록을 보자면 리차드 도킨스, 칼 세이건 등 일세를 풍미한 대 학자들이 포함되어있다.
2.4 폭로자(debunker)
오늘날 제임스 랜디 같은 이능력 무효화 능력자 초능력 사냥꾼들이나 마이클 셔머 같은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의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오컬트 및 초자연현상에 대한 폭로자, 즉 "디벙커" 로서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미 마이클 패러데이가 그러한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의 타겟은 바로 강령술로, 그의 검증 과정을 지켜보면 실제로 제임스 랜디가 떠오를 정도다.
파일:Attachment/faraday-spiritualism.jpg
강령술사들이 영혼을 부르면 탁자가 움직인다고 설레발을 치자(…) 패러데이는 100만달러를 상금으로 걸면서 강령술사들 몰래 약간의 장치를 해서 미세하게 손이 움직이면 건초더미가 쓰러지도록 고안한 탁자에서 검증해 보라고 제안했고, 강령술사들은 물론 보기좋게 실패했다. 영혼이 어쩌고가 아니라 그냥 무심결에 손을 조금씩 움직여서 테이블을 흔들었던 것.[10] 1853년, 패러데이가 그 결과를 저널에 보고하자 당연히 수많은 강령술사들이 애드혹 가설을 내세우며 들고일어났고, 패러데이는 그 모든 도전들을 전부 받아주었으나 정작 나타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자칫 대중적 생명력을 얻어 위험해질 수도 있었던 강령술은, 패러데이의 활약 덕분에 진작에 그 실체가 까발려져서(…) 한낱 철없는 어린아이들의 유흥 정도로 전락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패러데이가 죽고 나서 7년 후에 해리 후디니가 태어나게 되고, 그 역시 강령술 폭로자로 크게 활약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후디니의 활동은 유명하지만 패러데이도 강령술의 허구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습.
3 종교적 신앙
당대의 많은 초창기 과학자들처럼, 마이클 패러데이 역시 지극한 신앙심과 과학자로서의 사고방식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의 관점에서 자연 만물은 신의 섭리와 능력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었으며, 바로 이 맥락에서, 그 중에서도 물리학적 기본 법칙에 대해서라면 그거야말로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고전역학의 세계관에서 본다면, 신의 섭리로 운행하는 이 모든 세상은 수학적으로 아름답고 깔끔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마이클 패러데이 역시 이 당시의 이와 같은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패러데이의 교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칼뱅주의 계통의 소수교파였는데, 근거지(?)에서 이름을 따서 글래사이트(Glasite)라고도 불리며, 지도자 샌더먼(R.Sandeman)의 이름을 따서 샌더매니언(Sandemanian)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대표적인 영국 국교회 반대주의(Nonconformity)의 입장을 취했는데, 신에게 소속된 나라인 교회가 세속의 권력을 잡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위 듣보잡 군소교파로서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희대의 먼치킨을 하나 배출한 셈.
의외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패러데이의 신앙심은 오늘날의 웬만한 극성 종교인들을 연상시킬 정도.[11] 당시 빅토리아 여왕을 급히 알현하러 가는데 교회 일요일 예배 복장을 갈아입지 않고 그냥 그대로 알현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다. 옷을 갈아입으려면 교회 예배에서 먼저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고.(…) 그리고 보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는데, 자신을 지켜주는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2] 전자기력의 발견 이후에는 심지어 중력에까지 흥미를 보였는데, 당연히 그로서는 거진 200년 후의 후손들도 간신히 단서를 찾아가는 마당에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력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가설은 그 자신의 개신교적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13]
패러데이의 후임이었던 존 틴들(J.Tyndall)은 저 유명한 틴들 현상을 발견한 인물이기도 한데, 패러데이와는 딴판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실제로 틴들은 불가지론적 무신론자에 가까우니,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패러데이와 여러 모로 비교가 될 만한 인물. 틴들은 물론 패러데이의 업적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지만, 그와는 별개로 패러데이의 종교적 열성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던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패러데이가 기도실 문을 열 때, 그는 실험실의 문을 닫는다."
그럼에도 일단 틴들은 패러데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굉장히 좋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패러데이는 그 특유의 겸손함과 검소함, 모난 데 없이 온유한 성격으로 당대에 평판이 좋았고, 틴들 역시 그의 인품에 대해서만큼은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 가면서[14] "패러데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라고까지 할 정도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패러데이의 종교인이자 과학자라는 특성 때문인지, 종교와 현대과학의 관계를 다루는 템플턴 재단에서는 아예 연구소를 세울 때 패러데이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름하여 패러데이 과학종교연구소. 영국의 세인트 에드문드 컬리지 산하 연구소이다.
4 기타
풍문에는 마이클 패러데이가 자기장 실험을 하고 있는데 관료들이 와서 "이걸 어디다 쓰나? 이거 돈 되나?" 고 태클을 걸자, 차분하게 "훗날 당신들이 이것에다 세금을 매길 날이 올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는, "그래요, 갓 태어난 아기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Of what use is a new-born child?)라고 비꼬았다고도 한다.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 관료들의 무지가 이슈가 될 때마다 반복적으로 회자되는 이야기.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진 건 없어 보이지만...
- ↑ 생전 아인슈타인의 연구실 벽에는 패러데이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옆에는 맥스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 ↑ 험프리 데이비 본인도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불릴 만큼 유능한 사람이었다. 또한 열이 에너지의 일종임을 증명하고 전기 분해 실험 및 알칼리 금속을 발견하는 등 결코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하필 제자가 본인보다 훨씬 더 월등한 천재인지라 그의 다른 업적들 보다 패러데이를 발굴해낸 것이 그의 최고의 업적으로 치는 사람들이 많다. 안습 하지만 당시에도 제자를 높게 치는 사람이 많아서 패러데이를 별로 안좋아했다고 한다.
왠지 제자 잘못 둬서 살아생전부터 지금까지 쭉 제자랑 비교되며 까였던 이분이 생각난다 - ↑ 아이작 뉴턴이 묻힌 바로 그 곳이다!
- ↑ 이때 남기 유명한 말이 "그냥 패러데이로 남고 싶소."
- ↑ 패러데이는 "지적인 노력에 대해 상을 준다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20세기에 태어났다면 상금 15억짜리 상도 거절할 사람이다 - ↑ 다만 명명을 한 것은 패러데이가 아니었고, 일반인들에게는 벤젠 하면 케쿨레의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꿈(...) 얘기가 워낙 유명한지라, 또한 전자기 유도로서 물리학에 워낙 큰 획을 그은 인물이라서, 벤젠 발견은 그의 업적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은 편.
- ↑ 사실 과학사를 보면 수학을 못했던 물리학자도 더러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닐스 보어. 아인슈타인의 경우 수학을 못한다는 것은 흔히 알려진 고정관념 중 하나라고 한다.
- ↑ 심지어 놀이기구에서도 이 전자기 유도가 사용된다! 바로 자이로드롭. 브레이크로 이 전자기 유도를 사용한다. 그래서 낙하 도중 갑자기 정전이 되어도 영구자석을 이용하는거라 안전하게 멈출 수 있다.
- ↑ 앞면은 주인이 정해져 있어서 다른 인물의 초상은 뒷면에 실린다...
- ↑ 실제로 오늘날의 적지 않은 자칭 초능력자들도 이런 원시적인(?) 트릭을 이용한다.
- ↑ 물론 패러데이는 '자연과학'은 결코 '신앙'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녔으며, 자연과학으로 알아낸 것들을 일종의 계시처럼 여겼다. 이런면에서 본다면, 그를 오늘날의 광신도들과 같은 카테고리로 묶기는 힘들다.
- ↑ 오늘날 어지간히 극단적이라는 근본주의자들도 이런 종류의 주장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들도 교회에서 어디 놀러갈 일 있으면 여행자 보험쯤은 들어놓고 간다 - ↑ 그의 관점에서 모든 자연법칙은 서로 우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이론체계만 가지고도 전자기력뿐 아니라 중력까지도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그가 믿는 바에 따라 신의 섭리가 법칙으로서 드러나게 되기 때문. 신앙심으로부터 떠올린 생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사실상 1800년대에 통일장 이론에 대한 출발선을 그어본 셈이었던 것이다!
이쯤되면 저 신앙심도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 ↑ 정확히 말하면 디모데전서/티모테오 첫째서간 3장 2~7절의 내용. 참고로 우리말 성경의 그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