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동성

夫婦同姓

부부가 같은 성을 쓰는 혼인 제도.[1]
동성부부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2]

1 개요

부부가 결혼하면 남자여자중 한 사람의 성을 따르게 되는게 이 제도의 골자이다. 일반적으로는 남성의 성을 따르는데, 데릴사위거나 그게 아닌데도 드물게 처가의 성을 따르기로 하는 경우엔 여성의 성을 따른다.[3]

2 세계의 부부동성

일본 민법 제750조 (부부의 씨[4]) 부부는 혼인 시에 정한 바에 따라 부 또는 처의 씨를 칭한다.

일본 호적법 제74조 혼인을 하고자 하는 자는 아래 사항을 신고서에 기재하여 그 뜻을 신고하여야 한다.
1. 부부가 칭하는 씨
2. 그 밖에 법무성령으로 정하는 사항

서양은 대부분의 국가가 부부동성이고, 서양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이나 일본처럼 영향을 받은 나라들에서 부부동성을 택한다. 아시아권 나라는 대부분이 이와 반대되는 제도인 부부별성이다.

흔히 여성이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고 한국이 특이한 사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5] 그건 소위 잘 나가는(…) 국가들이 그러한 관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찾아보면 부부별성이나 그 밖의 방법, 혹은 아예 성씨를 사용하지 않아 해당사항 없는 국가들도 많다. 자세한 건 성씨 항목 등을 참조.

일본의 부부동성제도 정착은 꽤 특이한 케이스로 분류된다. 일본이 아주 옛날부터 부부동성제도를 쓴 건 아니다. 실제로는 에도 시대까지만 해도 기본적으로 부부별성제였는데, 메이지 시대에 민법을 제정하면서 부부동성제를 법제화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제도를 이것저것 본받다가 서양의 부부동성 제도를 그대로 들여와서 법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일본에서 혼인을 할 경우 혼인신고서 자체에 누구 성을 따를 것인지 택일하여 체크하게 되어 있다. 법적으로는 오히려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를 수도 있기는 하나, 실제로는 90% 이상이 남편 성을 따른다고 한다.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법으로 부부동성이 강제되는 국가로는 일본, 오스트리아, 브라질 등이 있다.

법으로 부부동성이 의무화되어 있는 일본에서도 둘 중 한명이 외국인일 경우에는 부부별성이 가능하다. 또한 '혼인 시'를 기준으로 하는 법률이므로 일단 부부동성을 선택한 후에 다시 개명신청을 통해서 강제로 부부별성으로 만드는 케이스도 있다.

3 문제점

이 제도의 문제는 보통 아내가 남편의 성씨를 택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상당히 골때리는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가 결혼을 3번이나 하게 되면 호적이나 주민표, 운전면허증의 성이 3번이나 바뀐다. 다만 결혼 후 남편이 죽은 경우에는 재혼하기 전까지는 원래 성이 아닌 죽은 남편의 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듯 하다.[6]

이로 인해 결혼이혼, 재혼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은 물론,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여 개인의 커리어를 쌓는 경우가 늘어난 현대에는 그동안 쌓은 성이 초기화되는 셈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박정자고길동과 결혼을 해도 똑같이 박정자, 이혼을 해도 똑같이 박정자이지만, 일본에서는 다나카라는 여성이 고이즈미, 스즈키, 나카무라라는 남성과 결혼했다가 이혼하면 성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바뀌게 된다.

만일 이 여성이 학계에 꾸준히 논문을 발표하는 연구자였다면, 그녀의 논문은 다나카, 고이즈미, 스즈키, 나카무라라는 이름으로 발표된다. 이 때 논문 서치에서는 전부 다른 사람 명의로 인식된다. 때문에 그녀의 논문을 검색한 외부 연구자는, 논문의 저자를 '겨우 몇 년동안 활동하며 몇 편의 논문을 냈고 후속 연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별개의 별볼 일 없는 학자 5명'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 여성이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해당 논문들이 자신의 논문이라는 증거를 제출해 스스로 증명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결혼 이력이 제3자에게 모두 노출되는 것은 덤. 거기다 이혼 후 다시 결혼할 때까지 싱글로 지내는 기간 동안에 논문을 발표했다면, 몇 년 간격으로 다나카 명의의 논문이 나오는 괴악한 상황도 발생한다. 이혼하면 원래의 성으로 돌아가기 때문. 이런 문제 때문에 학계에서 연구자의 이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네임 이므로 결혼 유무와 관계없이 바꾸지 않는 분야도 많다. 더 친근하게 혹은 잘 기억되기 위하여 영어 이름을 구태여 쓰는 연구원들도 많이 있다(공학 및 수학 분야에서).

그리고 일본은 무척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상대의 성으로만 상대를 호칭하기 때문에 부부가 같은 직장에 다닐 경우, 직장 동료가 그 성을 불렀을 때 남편 쪽을 부르는 건지 아내 쪽을 부르는 건지 헷갈린다는 문제도 있다. 맛의 달인에서는 지로(시로)와 유우코가 이 때문에 사내 부부별성을 쓰기로 결정했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상황이 클라나드 애프터에서도 등장.

이러한 탓인지 부부동성을 택하는 나라라도 연예인이나 연구자, 영업사원처럼 이름의 인지도가 중요한 사람들은 결혼한 후에도 대외적으로는 부부별성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데미 무어. 왕조, 왕족의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에선 남자 후손이 없자 여자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상속시키면서 사위의 집안과 합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을 이룬 적도 있다.

영국 왕실의 경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승계할 당시 남편인 필립 마운트배튼과 성씨를 합칠 뻔했지만 마운트배튼의 외삼촌이 설레발 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결국 여왕의 배려로 딸인 앤 공주는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씨를 쓰게 되었다. 물론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를 것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밖엔 없지만… 그리고 필립 마운트배튼이라는 항목 명칭을 주의깊게 보면 알수 있겠지만, 필립 윈저가 아니라 필립 마운트배튼. 그러니까 부부 본인들은 부부별성이다.

또한 일본 황실에서는 부부동성 제도 때문인지, 여성 왕족은 미혼 시절에는 친왕 작위를 소유한 명실상부한 왕족으로 취급받지만 결혼하면 남편 집안을 따라 평민으로 강등된다. 남편을 데릴사위로 들이면 안되나? 황족과 결혼하면 되겠지만, 그건 근친상간 구로다 사야코, 센게 노리코 등이 그 사례.

일본의 전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사토 에이사쿠의 부친은 사토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성씨를 사토로 바꾸었다. 아들 둘 모두 원래 '사토'라는 성씨를 사용했지만, 이후 장남의 성씨를 본래 성씨인 '기시'로 바꾸어 성씨를 잇도록 한 케이스. 고이즈미 준이치로 前 총리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도, 본래 성씨는 '사메지마(鮫島)'였으나 고이즈미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사메지마'에서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꾸었다. 덕혜옹주소 다케유키의 딸인 소 마사에(宗正惠)는 스즈키 노보루(鈴木昇)라는 남성과 결혼했는데, 노보루가 마사에를 따라 '소 노보루'로 성씨를 바꾸었다. 이는 장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였다고 한다.

부부동성제도를 시행하는 나라에서 부부별성을 사용하는 사례의 매우 특이한 유형으로는 앙겔라 메르켈 8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가 있다. 앙겔라 메르켈은 원래 성씨는 카스너였는데, 첫 결혼 때 남편의 성씨를 따라 메르켈로 바꾸었다. 이후 첫 남편과 이혼하였지만 성씨는 바뀐 채로 유지하였는데, 이후 2번째 결혼생활에서는 성씨를 바꾸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전 남편의 성씨를 계속 쓰고 있다는 것. 이 정도 되면 성씨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많은 불편을 초래하는지 알 만하다. 심지어 이혼 및 재혼을 할 당시 메르켈은 정치인도 아니었다!

그 외에도 금융거래 등에서 사소한 불편이 많다. 심지어 부부동성 때문에 이름이 바뀌어서,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택배물품을 못 받는(…) 사소한 문제도 가끔 벌어진다.

역으로 부부동성제도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사채꾼 우시지마에서는 계속 돈을 빌리기 위해서 결혼을 반복해 성을 갈아치우는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에선 민주당(일본)사민당이 11차례나 민법 개정안을 냈지만 자민당의 반대로 매번 부결되었다. 법무부 자문기관인 법제심의회에서도 1996년에 이미 부부가 동성으로 할 것이냐 별성으로 할 것이냐는 국민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제안했지만 자민당에서는 가족의 일체감을 해친다며 반대해 법안 제출이 무산됐다. 2009년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민법에 규정된 부부동성제는 63년만에 개정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일본 법무성은 2010년 3월에 부부가 각자의 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부부별성제를 각의결정하여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고 2013년에 다시 시도되었으나 또 무산, 결국 2015년 일본의 최고재판소(헌법재판소)에 위헌신청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부부동성제가 합헌이라고 내렸다.

일본에서도 상당히 보수적인 논조로 유명한 산케이 신문은 "부부별성제도가 가족의 일체감을 헤치고, 자녀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법개정에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라는 사설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부부별성을 허용하는 법개정이 가정붕괴를 부추긴다는 주장이다. 반면 도쿄신문은 여성의 입장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부부별성제에 찬성한다는 사설을 게재하였다. 결혼하면 부부는 호적에서 같은 성씨가 되는 것이 민법으로 의무화되어 되어 있는데, 이러한 부부동성을 강제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며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일본에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으로 '가족의 유대관계가 무너진다'라든지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상에 위배된다' 등의 반대의견을 비판하였다.

한국의 부모성 같이쓰기와 같이, 일본에선 연예인이 아닌데도 남편과 아내가 부부별성을 하기로 하면 대단히 괴짜로 보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차차 나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젊은 층으로 갈수록 부부별성에 호의적이기는 하지만 아직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일본 여성들 가운데도 '남편 호적에 자신의 이름을 넣으면서 성씨가 바뀌는 순간, "아, 이제 정말 이 사람과 한 가족이구나"하고 실감하게 된다'며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구태여 성차별로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딱히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근대 한국에서도 부부동성의 사례가 몇 개 있다. 서양 것은 다 좋다고 받아들이던 시절의 산물로, 영친왕의 아내인 이방자 여사와 이중섭의 부인, 교육 수준이 높은 여성 독립운동가 중 몇몇이 그 예다. 이방자 여사는 원래 일본의 황족이었기 때문에 아예 성이 없던 상태에서 영친왕과 결혼을 하면서 원래 이름인 마사코(方子) 앞에 남편의 성인 '이'를 붙인 것이다. 이중섭의 아내인 이남덕 여사의 경우는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란 일본식 성과 이름을 완전히 버리고 한국식 이름인 '남덕(南德)'을 따로 만든 후 남편의 성인 '이'를 붙였다(이 두 사람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같다.). 그리고여성 독립운동가들이나 신여성들 중에는, 본명이 아닌 서양식 이름으로 활동할 때 자신의 성이 아니라 남편의 성을 쓴 경우가 있었다. 하란사(河蘭史)[7]박에스더[8] 등이 있다. 이 경우는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뒤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랐던 가라샤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내가 남편 성 따르는 게 성차별이라는 인식이 있는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기겁할 일

오늘날에도 배우자가 한국인귀화인의 경우 중국이나 한자권 출신이 아닌 한 (본관은 새로 정하더라도) 성씨는 배우자의 성씨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1. 참고로 부부동성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어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고, 부부동성으로 검색하면 동성결혼관련 내용이 주로 검색된다.(이 경우는 한자로 쓰면 夫婦同性이 된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부부별성이 당연했기에 굳이 이를 구분하고 지칭할 단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듯
  2. 동성부부는 성별이 같은 부부를 말한다.한자부터 同性夫婦로 다르다.
  3.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장명부.
  4. 일본의 氏는 우리의 姓에 해당한다. 성명을 氏名이라고 하기도 한다.
  5. "외국에서는 결혼하면 여자가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꾼다는데 우리는 왜 안 그러나요?"같은 질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6. 실제로 어떤 일본인이 결혼을 해서 남편 성을 따랐다가 남편이 죽었는데 성씨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게다가 이 사람이 한국에서 한국인과 재혼 후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일본 호적에도 그 일본인의 원래 성씨가 아니라 죽은 전 남편의 성씨가 물려진 사례가 있다.
  7. 본래 김 씨였으나, 남편을 따라 하 씨로 성을 바꾸었다. '란사'는 Nancy라는 영어 이름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이화학당에서 교사와 사감으로 일했으며, 각종 사회활동을 활발히 한 신여성이다.
  8. 한국 최초의 근대 여의사. 본래 이름은 김점동이었으나 이화학당에 다니면서 '에스더'라는 서양식 이름을 받았고, 박유산과 결혼한 후 남편을 따라 박 씨로 성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