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서양사에서 넘어옴)
이 문서는 서양사로도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1 개요

 History of Europe (3000 BC - 2013 AD)

전 육지 면적의 6.8%를 차지하고 11%의 인구를 점유하고 있는 의외로 작은 규모의 지역이지만 현대 문명의 요람이며, 19세기와 20세기에는 전 세계에 영향력을 떨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세계 4대 문명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는 출발점이 뒤쳐져 역사가 짧다는 매도도 많이 당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시작이 빠르며 훨씬 선진적인 지역이었다.) 근처의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빠르게 흡수해서 이미 기원전에 높은 문명 수준을 가진 고대 그리스로마 제국을 탄생시킨 지역이다.

2 시기별

2.1 서기: 1000년 ~ 2000년

로마 멸망 이후 소위 "중세의 암흑기"에는 경제적인 면이나 생산력 등 많은 분야에 있어서 유럽이 타 문명 지역보다 나을 게 없던 시기였다고 치부된 적도 있었다. 칭기즈 칸에 대해 쓴 역사가 잭 웨더포드몽골인들이 쳐들어왔다면 유럽이 간단히 제압당했겠지만, 유럽이 너무 가난해서 몽골인들이 그냥 돌아갔다고 주장할 정도. 단, 요즘은 바투가 이끄는 서방원정군만으론 어렵다는 설이 더 설득력있는 학설로 평가받는다. 그 이전의 전통적 해석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이고.

그러나 이건 기본적으로 유럽이 다른 문명권보다 우월하다는 걸 기본전제로 깔고 중세가 예외적이라는 주장일 뿐만 아니라 중세 역시 현대 사학계에서 좀 더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진 이후, 중세가 단순히 정체되어 있던 시기는 아니며, 꾸준히 발전되던 고딕 건축 등 타 문명에 비해서 높은 수준을 자랑하던 분야 역시 존재했다는 등 중세에 대한 재평가의 기조가 형성됐다. 이슬람 세력과 지속적으로 군사적인 면에서 대립하면서도 유럽은 꾸준하게 무역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14세기 이후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통해 로마의 문화적 유산을 찾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유럽은 문화적 과학적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유럽의 중세 초기는 로마 제국의 멸망과 혼돈의 시기로 인하여 분명히 '어두운'시기가 있었으나 중세 중기 부터 서유럽은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1인당 GDP에서 타 대륙에 비해 앞서 나가기 시작했으며 중세후기에는 그 차이를 더욱 벌렸다.

540px-Historic_world_GDP_per_capita.svg.png

무엇보다 15세기 후반에 벌어졌던 해외로의 진출은 유럽이 타 문명을 앞지르는 중요한 경제적인 요인이 된다. 이슬람 세력과의 대립으로 육지를 통한 무역길이 막히자 해양를 통한 진출을 노리게 되었고, 바스코 다 가마콜럼버스의 발견이 이루어진다. 인도와의 향신료 무역이나 중국과의 무역, 신대륙을 약탈해 얻어지는 막대한 은은 유럽이 막대한 경제적인 힘을 축적할 수 있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특유의 정치 사상과 지리적인 요인 등으로 인해 항상 분열해 있었던 유럽은 무역에 있어서 다른 국가를 앞지르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가는 상업과 과학기술을 중요시하게 된다. 16세기만 하더라도 중국 문명의 산물들 화약, 종이, 도자기, 나침반, 시계 등은 유럽의 것보다 뛰어나 유럽은 그것을 수입하던 처지였지만, 이 시기에 빠르게 진행된 유럽의 과학혁명은 17세기쯤 가면 중국이 기술적으로 유럽보다 우월한 것은 거의 없게 만들어 버리며 비슷한 물건들이 서서히 역수출 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슬람 세력(오스만 제국)과 중국(명나라) 등 주요한 타 문명은 유럽과 달리 쇄국정책, 전란, 지나친 중앙집권적 정치, 혁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 등으로 인해 정체되어 유럽은 점점 더 타 지역과의 격차를 벌리게 된다. 사실상 유럽은 16세기 ~ 17세기 정도면 경제적, 기술적, 군사적인 면에서 거의 모든 타 지역과 동등하거나 우위에 있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은 타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경제적인 약탈을 가속화하고, 이와 맞물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정치적인 혁명과 산업혁명, 자본주의 등이 발달하면서 유럽은 근대 국가로 변신하게 된다. 이후 19세기에는 제국주의가 대두되며 유럽은 제국으로서 전통의 라이벌인 오스만 제국과 중국 등을 군사적으로 두들겨 패며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양상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며 유럽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이 시기에서 유럽이 행한 것의 가장 중요한 점으로 그들 스스로 전통적인 문화와의 단절을 꾀한 모더니즘 사상의 대두를 꼽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방식의 문화가 발달되고, 이것이 세계로 전파되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의 직접적인 뿌리가 된다. 문화적으로도 20세기의 유럽은 전 세계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800px-European_empires.png

남색으로 칠해진 모든 영토가 한때 유럽의 식민지였다. 하늘색으로 칠해진 곳은 식민지는 아니었더라도 유럽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영토. 이 지도를 보면 한국은 유럽에게 지배당한 적이 없는 몇 안 되는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문도가 잠시 영국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긴 하지만 국가 자체가 유럽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2]유럽이 아닌 나라에게 먹혀서 그런 거지만

다만 이후 유럽 문명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 새로운 강자로 조용하게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반대로 유럽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떨어지는 생산성으로 적자로 돌아선 식민지 체제 등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크게 충격받게 된다. 결국 유럽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식민지 등을 포기하며 세계의 주도권을 미국소련에 넘겨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세계대전과 같은 공멸의 위험성에 대한 반성과 유럽을 뛰어넘는 새로운 '초강대국'들과의 경쟁에 대처하기 위해 유럽연합이 발족하게 되었긴 하지만, 유럽 특유의 분열 지향적 전통과 그것이 실제로 장점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통합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유럽연합이 어떠한 방식으로 유럽통일을 이뤄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유럽연합 내부에서도 유럽연합이 처음 발족했을 당시부터 여러모로 의견이 갈리고 있다. 미국이나 러시아 등과 같은 완전한 연방제 국가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지역의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의견과, 그렇게 완전한 연방제 국가로 가는 걸 반대하고 대신 지금과 같은 국가연합 단계의 통합을 형식상 유지한 상태에서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권한과 권력을 연방제 국가와 비슷한 수준으로 강화하는 방식으로 지역의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리고 있고, 전통적으로 완전한 연방제 국가로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고 국가연합 단계의 통합을 유지하면서 지역의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후자의 의견이 우세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유럽연합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방식의 통일을 최종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발표는 딱히 행해지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이 처음 발족했을 때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럽 지역 전체의 통합을 추구한다는 두루뭉실하고 애매한 목표 이상으로는 명확하게 무언가가 결정된 바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의 통일을 최종적인 목표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실하게 표명된 것이 없었고, 지금도 점진적인 통합을 추구하는 유럽연합의 특성 덕에 확실한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다.

3 정치적 특징

이 동네에는 뭔가 이상한 전통이 하나 있는데 잘 나가는 나라는 일단 패고 본다. 뭔가 뜨는 나라가 하나 있으면 주변국들이 달려들어서 걸레를 만들어 놓는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만들어진 4자 동맹의 목적 자체가 자기들 빼고 잘 나가는 나라는 패고보는 것.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요소를 유럽의 강점으로 보고 있다.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가진 비슷한 수준의 국가들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교류를 불렀고, 경쟁으로 인한 발전이 다시 빠르게 전 유럽으로 퍼지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정신에 의해 촉발된 세계대전과 냉전에 대한 반성으로 유럽연합으로 뭉치고 있지만...

중국의 경우도 춘추전국시대엔 잘 나가는 나라 있으면 일단 패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나라고 그 외 나라, 나라. 나라가 통일할 수 있었던 건 여섯나라가 다굴해도 힘들 정도로 진나라가 너무 커졌기 때문. 하지만 중국의 경우 지리적으로 항상 통일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으며, 유교적인 논리가 강하고 이민족의 성공적인 침략 등 여러 요인에 의해 항상 이러한 견제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 유럽과 다르다.

사실 중국사에서도 시황제가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통일이라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관점에서야 통일이겠지만, 당시 관점으로 봐서는 그냥 멀쩡히 있는 옆나라를 멸망시키고 흡수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진나라가 통일한 이후에야 '같은 중국'이라는 관점이 생기니 통일의 명분이 생긴 것이지만, 그 전에는 그냥 옆에 보이는 나라들을 모조리 때려잡고 흡수한 것일 뿐, 통일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3]

4 관련 항목

  1. 흔히 산업혁명전까진 동양이 앞서 있었는데 산업혁명 이후로 추월당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그 전에도 이미 미술,건축,음악 분야에서는 유럽이 훨씬 앞서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유럽 대륙 면적은 거대한 편이며 면적에 기초한 추정 인구는 초창기부터 결코 적지 않았다. 사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처럼 거의 쓸모가 없는 영토들을 제외하고 실질적인 영토만 보면 타문명권보다 압도적이었다.현재는 과학기술 덕분에 아프리카 등도 쓸모 있는 영토가 늘어남
  2. 유럽 열강들은 자원도 매리트도 없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는 데 그 당시 관심이 없었다. 그저 러시아의 부동항과 태평양 교두보 확보를 저지하기 위한 용도였을 뿐 한반도를 식민지로 직접 합병하려는 데에는 오히려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았던 상황이었다. 결국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와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잃게 되고 러시아의 남하가 저지되자 유럽 열강들은 일본의 동아시아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이후 일본은 한일합방을 더욱 강하게 추진하게 되었다. 일부는 한국이 왜국(일본)이 아니라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같은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로 먹혔으면 일본보다 더 낫지 않았겠냐는 헛소리들을 늘어놓기도 하는데, 이는 구한 말 당시 정세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은 현실성이 없는 가정일 뿐이다. 유럽 강대국들의 해외 식민지 통치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3. 하지만 여러모로 복잡한 것이 춘추시대까지는 주천자의 권위를 형식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었고 중화권에 속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주천자의 봉신이었다. 형식상으로는. 통일국가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리스 문명의 폴리스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수준 이상의 동질성은 가지고 있었던 것. 전국시대는 깡패수준으로 거대하고 강력해진 전국칠웅이 천자 밑에 중화권은 단일하다는 관념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서로 쪼개질지를 결정하는 과도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