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역사

세르비아역사를 다루는 문서.

1 중세

현재는 슬라브계 국가들로 꽉 차있는 발칸 반도지만, 실제 슬라브인은 기원후 5세기에나 최초로 발칸 반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로마화된 그리스인이나 켈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약 545년에 '슬라브인의 대이주'라는 사건이 동로마 제국의 북쪽 국경을 위협한다. 콘스탄티누스 7세의 기록에 의하면, 화이트 세르비(White Serb)라는 곳에서 출발한 이 10만 명의 슬라브 이민족은 테살로니카를 점령하고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으며, 페르시아와의 접전지에서 급히 전력을 빼온 동로마가 이들을 격퇴한 뒤에도, 발칸 반도에 눌러앉고 계속 살았다. 동로마 제국이 물론 이런 '바르바로이'들을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건 아니었지만, 페르시아와 전쟁이 지속되는 한편,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간섭까지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전부 정리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 거기에 프랑크 제국의 미묘한 각축 지대에 위치한 슬라브인은 그 후 몇 백년 가량 통합된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해맨다. 물론 여러 작은 왕국은 세워졌지만[1],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런 상황에서, 야금야금 세력을 확대하는 1차 불가리아 제국에 대항하여, 동로마 제국은 한 슬라브 호족인 블라스티미르를 지원한다. 블라스티미르는 동로마의 소원대로 1차 불가리아 제국을 몰아붙이며, 동로마의 소원과는 정 반대로 동로마 역시 몰아붙인 다음 최초의 남슬라브 국가이자 최초의 세르비아인 블라스티미로비치(Vlastimirović) 왕조를 건설한다. 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는 영토를 마케도니아에서 보스니아에 이르기까지 확장하지만, 분쟁 지역을 대강 정리한 동로마 제국에 휩쓸려 사라진다.

하지만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원을 받았던 조반 블라디미르가 다시 한 번 독립을 시도하며, 그렇게 독립한 세르비아는 이번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절반을 뜯어먹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한다.

1.1 세르비아 제국

그리고 14세기 중반, 스테판 두샨 대왕의 통치로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두샨 대왕은 스스로 세르비아 제국을 선포하며 차르를 칭해 동로마 제국과 맞먹는 황제국임을 선언할 정도였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대가 바로 이 대였지만, 이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슈테판 두샨이 1355년에 급사하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하는데, 우선 그의 치세에 세르비아는 영토를 급속도로 확장하고 제국을 칭하게 되었지만 황제가 급서하는 바람에 제국의 내정이 안정되지를 못했다. 이는 고대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마케도니아 제국이 무슨 꼴을 당했는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그나마 슈테판 두샨에게는 당시 20세였던 아들 슈테판 우로시 5세가 있었으나, 성인이 되었는데도 모후와 궁정 관료들에게 매달리는 등 통치자로서는 영 아니었던 것이 치명타[2]. 결국 슈테판 우로시 5세 시대에 제국은 사분오열되기 시작했고, 1371년에 그가 후계자 없이 죽자 세르비아는 그대로 전국시대로 돌입. 그후 가장 강력한 지방 귀족이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가 등장하여 세르비아 공국을 창건. 세르비아의 재통합을 내걸고 세력을 넓혔지만, 하필이면 이 때 발칸 반도를 동쪽에서부터 먹어치우고 있던 나라가 바로 오스만 제국. 이에 맞서 라자르는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고, 자기 자신도 전사하고 만다[3]. 그리고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아들로 뒤를 이은 공작 슈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를 비롯한 세르비아의 지방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의 힘을 인정하고 신하국이 되었지만, 슈테판은 이후 세르비아의 귀족들을 대표하는 맹주로서 상황을 보아 가며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나름대로 경제, 문화적인 부흥을 이룩했다. 특히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과 자국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세르비아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신하국이 되는 조건으로 영토도 일부 할양[4]해주고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탓에, 문서상으로는 신하국이었지만 사실상 동맹국에 가까운 관계였다[5].

하지만 슈테판 라자레비치의 뒤를 이은 친척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가 1456년에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 계승분쟁이 일어나자, 그러지 않아도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이라는 두 강국의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하고 있던 세르비아 공국은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심지어 세르비아 제국에 속했다가 독립한 나라인 보스니아 왕이 계승분쟁에 끼어들더니, 주군으로 삼고 있던 헝가리에게 '제 아들을 세르비아 공작으로 만들게요. 그럼 세르비아랑 보스니아가 합쳐져서, 이교도에 맞서 더 강력한 완충국이 될 거임. OK?' 라고 제안까지 했고. 헝가리가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 결국 1459년에 이르러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6], 이후 4백년 가까이 지배를 받게 된다. 19세기부터 세르비아의 민족운동이 격렬해지면서 1817년 세르비아 공으로서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서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1878년 '제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2 세르비아 왕국

독립 이후 마케도니아를 둘러싸고 주변국과 갈등이 지속되어 1878년 완전 독립 이후로도 두차례나 발칸 전쟁을 벌였으며 완전 독립과 함께 보스니아를 점령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과정에서 친 오스트리아 성향이던 세르비아 2대 왕인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비밀결사인 '검은 손'에 의해 1903년 암살되고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의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에게 왕권이 넘어간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검은 손'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

3 유고슬라비아 왕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등을 강제 합병하여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 왕국이라는 긴 이름의 국가가 되었으나 1926년부터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 되었다.그러나 워낙에 단일국가로 묶여본적이 없는 민족 집단들을 강제합병,억지로 묶은 나라들이라 내부적으로 민족,지역간 분란이 심화되었고[7] 권력을 세르비아인이 독식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국왕 알렉산다르 1세에 의해 의회가 뒤집히고 전제 왕정이 돼버리면서 분란은 커졌다. 불만에 차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이탈리아, 마케도니아인들과 불가리아의 후원을 받으며 테러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1934년에는 알렉산다르 1세가 테러에 의해 사망하고 11세의 페타르 2세가 즉위하는 등 혼란상이 이어졌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4 제2차 세계대전

그리스를 쳤다가 피박을 쓴 무솔리니를 돕기 위해 히틀러가 발칸 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무렵, 친독파였던 섭정 파울은 페타르 2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1년 3월 25일 추축국 가입을 선언했다.[8] 이에 앙심을 품은 페타르 2세는 군부의 친영파를 결집하여 협정 조인 이틀만인 27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친정을 시작했는데, 독일이 싫다기 보다는 파블레의 전횡에 불만이 있었던 만큼 추축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영파의 집권에 당황한 독일[9]은 종전의 '마리타 작전'을 수정하여 알바니아 전선을 지원할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를 그대로 돌파해 그리스 국경까지 닿을 생각을 품게 되었고, 4월 6일 선전포고도 없이 베오그라드를 잿더미로 만들며 침공을 시작했다. 일단 전쟁이 터지고 나자 크로아티아인들은 상전인 세르비아인들의 뒷통수를 치고[10] 독일군에 가담했으며,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헝가리군은 간단히 조약을 파기하고 남진해왔다. 동시에 불가리아에서 건너온 독일군과 불가리아군이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간신히 탈출해 망명정부를 세웠고 10일만에 나라를 내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 유고 각지에서 반독 빨치산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 빨치산들이 왕당파, 공화파, 공산당 등등 아주 가지가지였고, 무엇보다 서로 잡아먹으려 들었다.

특히 유고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게릴라 조직 '체트니치(Четници)'를 이끌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군의 지원까지 받았지만, 반공 왕당파로 언젠가 연합군의 탱크가 베를린 의사당 정문을 까부수고 들어가 유고 왕정이 부활할 날만 기다리며 독일군을 공격하기 보다는 당시 세르비아인 50만 가량을 잔혹하게 학살한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정권(Ustaša)과 이에 맞서싸우던 빨치산 공격에 열을 올렸으며 20만 가량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을 학살했다. 체트니크의 공격에 질린 티토의 호소와 킴 필비 등 정보 기관에 암약하고 있던 간첩들의 공작으로 인해 1944년 연합군은 지원을 끊어버리고 망명 유고슬라비아 정부도 체트니크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실제로 체트니크 빨치산 조직 중에서 동료들의 뒷통수를 치고 독일군에 포섭된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 또한 주요했다.

어쨌든 체트니크 대신 선택받은 티토의 빨치산이 전후 주도권을 쥐고 전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 재탄생했다. 이 때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 연방 내 구성체로 성립되면서 현재의 세르비아 국경(코소보 제외)이 대략 형성된다. 유고 연방은 일단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있었지만, 소련의 간섭을 배제하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처럼 중립, 독자노선을 걸었으며 이로 인해 소련과 마찰이 심했다.

5 티토 치하

티토 정부는 빨치산 시대의 경험을 토대로 소련이 침략해올 경우를 대비하여 범 국민적인 방어체계를 만들었다. 이 방어체계는 청소년 이상의 모든 국민이 각각의 게릴라 부대에 소속되며, 국민 개개인은 독자적인 저항권을 지니고 있어서 정부가 함락되어 항복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침략자에 항전을 계속할 권리를 부여받고 있었다. 물론 전국민이 정규군으로 처리되어 제네바 협약까지 적용된다. 당연히 각지에 무기를 잔뜩 챙겨두고 훈련도 열심히 했다. 그 덕분에 티토의 죽음 이후 내전이 벌어졌을 때, 아주 열심히 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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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티토는 세르비아인이 아닌 크로아티아인이었고[11], 거기다 빨치산 활동을 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지도력과 통제력을 유지하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티토 사망후 통제력을 상실한 유고 연방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의 민족주의 선동을 막지 못하고 붕괴, 세르비아계인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제외한 전 연방 구성국들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퍼져있던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로부터 재독립을 하려고 들었던 것으로, 이를 진압하려는 신생 크로아티아/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인들을 후원하는 베오그라드 정권 사이의 내전이 발발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인종청소와 포로 학살, 그리고 두브로브니크 포격으로 인해 대두된 동정적 감정이 서구의 개입을 불러왔으며, 베오그라드 정권은 크로아티아 동부, 보스니아 등지의 세르비아인들을 모두 내팽겨쳐두며 세르비아-몬테네그로(신 유고연방)로 국가를 개편하였다.

6 유고 내전

그러나, 권좌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대 세르비아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정적 살해와 코소보 사태가 발생하면서 1999년 신 유고연방은 NATO군의 공습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신 유고연방군이 코소보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으나 이듬해 세르비아 내 반정부 시위대가 세르비아 국영 RTS방송국을 점거하는 일명 불도저 혁명이 일어나고[12] 전범으로 기소되면서 정권까지 교체되었다. 2006년 5월 21일에는 몬테네그로가 분리독립투표를 의결함으로서 신 유고연방이 해체되어, 세르비아는 내륙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2006년 3월 밀로셰비치는 교도소 안에서 죽었는데 죽기전 몬테네그로마저도 독립한다는 정보를 듣곤 죽기 얼마전까지 "세계가 내 조국을 조각내는구나..."라 중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유고 내 구성국들의 연쇄독립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적극적으로 행한 밀로셰비치의 책임도 큰 편이다. 코소보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타협할 수도 있던 사안에 제노사이드를 저질러 잃어버린 게 한두개가 아니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괴물이 된다는 말이 있다지?

7 코소보 전쟁 이후

한편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자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다수를 차지하던 코소보 역시 세르비아로부터 강력하게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유고 연방 국가들의 분열로 잃을때로 잃어버리다시피한 세르비아는 더 이상의 분리 독립은 용납될 수 없다며 자신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코소보의 독립을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코소보의 독립을 막기 위한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이에 핀란드 아티사리 대통령과 유럽연합, 국제연합 등이 코소보 지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평화 협상과 세르비아와 코소보간 화해를 중재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코소보의 지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이 실패를 거듭하자 결국 2008년 2월 코소보는 일방적으로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이러한 일방적 독립 선언을 무효라며 코소보를 정식 주권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고 코소보가 독립하자 세르비아 전역에서 코소보의 일방적인 독립을 규탄하는 독립 반대 시위가 벌어졌으나[13] 독립한 즉시 미국영국, 프랑스 등등 서방 국가들이 코소보를 정식 주권 국가로 승인해버렸다. 그러나 수단, 아르헨티나, 중국, 스페인, 인도네시아, 슬로바키아, 러시아, 그리스, 인도, 이라크, 모로코 등 대다수의 국가들이 코소보를 정식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코소보는 현재 그 지위가 상당히 애매한 미승인 국가로 남아있는 상태다.

주변국들과 달리 역사적으로 패권은 커녕 침략과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렸고 현재에도 전범의 처리문제와 지속되는 민족 분쟁, 종교 분쟁으로[14]EU 가입자격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15] UN 가입 역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한창이던 1992년 UN 안전보장이사국의 유고 재제 결의에 따라 회원국 자격을 박탈당했으나 2000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신 유고 연방의 국호를 달고 다시 가입했다. 반면 몬테네그로는 독립 이후 EU 가입의 청신호가 켜진 상태. 그러나 이런 국내외적 악조건 상황속에서도 세르비아는 현실적으로 EU 회원국 가입을 희망하고 있으며 2009년 12월 세르비아는 EU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 세르비아 주변의 이웃한 나라들이 EU에 가입했거나 EU가입을 추구하면서 세르비아 내부에서도 지금 당장이라도 EU에 가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커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별다른 성과를 내질 못하고 있다. 허약한 자국의 경제력도 그렇고 EU의 기준에 맞게 고쳐져야 할 법률이나 제도 등이 상당부분 개선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 얻어진 건 EU 회원 후보국 지위 뿐. 일부에서는 아예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베니아 처럼 국민투표를 통해 EU 가입을 이뤄내듯이 세르비아도 이들 나라처럼 EU 가입 문제를 국민투표로 해결 지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헌데 실제 국민투표를 해서 세르비아 국민 과반수가 EU 가입에 찬성한다 해도 EU에서 회원국 가입 승인해줄지는 글쎄...[16]

  1. 개중에는 프랑크 상인이 왕이 된 왕국도 있었다.
  2. 실제로 슈테판 두샨('두샨' 은 별칭이고, 원래 이름은 슈테판 우로시 4세다)은 '강인한 왕(the Mighty)' 이라는 별명을 받은 한편, 슈테판 우로시 5세가 받은 별명은 '약한 왕(the Week)'
  3. 다만 이전 버전에서는 코소보가 세르비아의 대패라고 되어 있었지만, 전투 자체는 무승부에 가깝다. 당시 오스만의 술탄이었던 무라트 1세도 전사했고, 오스만 제국은 코소보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까지 일부 빼내와야 했을 정도. 하지만 코소보 전투 한번에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세르비아에게는 '다른 곳에 주둔한 병사들' 따위가 있을 리 없었고, 회전력에서 밀린 탓에그대로 굴복하고 만다.
  4. 이때 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내어준 도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날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 당시 베오그라드는 헝가리 남부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가운데 하나로, 슈테판은 이 도시를 받자 세르비아의 수도로 정했다. 다만 그가 사망하자 다시 헝가리에게 돌아갔으며,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대제가 1521년에 정복하게 된다.
  5. 이전 버전에서는 '희대의 안습스러운 작태' 라고 소개했지만, 이 시기의 세르비아 공작 슈테판 라자레비치가 듣는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소리다. 그는 때때로 오스만 제국에 맞선 군사적 업적과 문화. 특히 문학을 발전시킨 공을 인정받아 세르비아 교회로부터 성인으로까지 추증되었다.
  6. 당시는 보스니아 왕의 생각대로 보스니아 왕자가 세르비아 공작을 겸하고 있었는데, 세르비아인들은 이미 나라는 망했어요라고 인식하고 있었던데다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으로는 관대했던 반면 보스니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고 있었기에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7. 사실 세르비아,마케도니아,크로아티아,몬테네그로,보스니아등 구 유고 출신 국가들은 민족 혈통상으로는 슬라브족이 맞다.
  8.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1930년대부터 꾸준히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 특혜적인 대우를 해준데다가, 말이 추축국 가입이지 실상은 독일의 전쟁에 가담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혜적이고 실질적인 중립보장을 얻어냈었다.
  9. 사실 그동안 엄청나게 유고슬라비아에 투자했는데도 뺨을 맞았으니 열받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법. 그것도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베오그라드의 시민들이 독일의 국기와 외교관을 모독하기까지 했으니, 속좁은 히틀러가 뭔 생각을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10. 크로아티아 온건파세력이 섭정과 줄다리기를 한 끝에 1940년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어냈지만, 이탈리아의 입김을 받은 강경 파시스트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
  11. 정확하게는 크로아티아계 아버지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12.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당시 세르비아인들이 모두 밀로셰비치 정권에 호의적이기만 했던건 아니었고 대세르비아 주의를 내세운 결과가 세르비아 이미지의 추락과 경제악화라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밀로셰비치에 대한 지지가 급속히 약화되었다.
  13. 말이 좋아 반대 시위였지, 사실상 폭동이었다.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 미국 대사관을 공격했으며, 미국 국기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14. 그런데 이런 민족 분쟁들이나 종교 분쟁들은 세르비아말고도 다른 동유럽의 나라들에서도 다 대부분 겪었다.세르비아의 옆나라이자 한국에서는 요구르트와 장수국가로 유명한 불가리아도 과거 터키계와 이슬람교를 믿는 자국내 슬라브인들을 민족,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하거나 군경을 동원해 유혈진압한 전례가 있었고 헝가리도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에 살고 있는 헝가리인 문제로 루마니아,슬로바키아와 갈등을 빚었고 구소련권 국가인 몰도바나 우크라이나도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민족, 지역간 대립과 갈등이 전쟁과 지역감정으로 폭발한 적이 있었다.
  15. 그러나 세르비아의 EU 가입에 발목을 잡고 있었던 전범의 처리 문제는 2011년 여름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전쟁 범죄자인 라트코 믈라디치와 고란 하지치가 검거됨으로서 사실상 종료되었다.
  16. 사실 세르비아는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와는 사정이 다르다. 일단 이 나라들의 경우 최소 EU 가입을 위한 EU측과 협상이 완료된 상태에서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였고 덕분에 EU 가입이 수월했다. 허나 세르비아의 경우 뒤늦게 EU에 가입신청서를 냈고 가입 협상도 겨우 시작한 상태다. 이런상태에서 세르비아가 자국민들을 상대로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설사 찬성표가 많이 나온다고 해도 EU에서 회원국 가입을 받아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