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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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현장

당시 KBS 뉴스특보

1 개요

조선왕조 500년과 함께해온 조선의 심장을 한 노인이 무참하게 태워버린 희대의 방화사건이자 숭례문의 참혹한 흑역사.

2008년 2월 10일에 일어난 화재 사고로, 이 사고로 인해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소실되었다가 5년 뒤인 2013년에 복구되었다.

2 사건 경위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쯤 원인 모를 불이 흰 연기(검은 연기가 아니다.)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켰고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 현판을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고 화재 진압에 총력을 다했으나 2월 11일[1] 오전 0시 25분쯤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화재 4시간 만인 오전 0시 58분쯤 지붕 뒷면이 붕괴[2]되기 시작했으며, 2층이 붕괴되었다. 이어 바로 1층에 불이 붙어 새벽 1시 55분 쯤에는 누각을 받치고 있는 석반만 남긴 채 모두 붕괴된 다음 5시간 만에 전소되었다.

당시 숭례문을 관리하고 있던 업체의 직원은 퇴근하고 CCTV만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초기 화재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던 시민의 신고가 들어오고서야 사태가 파악되었다. 방화 당시 쓰인 것은 겨우 니스 3통과 라이터 하나였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YTN, 헤럴드 뉴스, 소방방재청, 경찰청 보도 참조).

20:47KT 텔레캅이 남대문에 설치한 센서에 뭔가 반응. 경찰서 및 소방서에 연락 함.
20:50화재 신고
20:53중부소방서 회현 소방파출소 도착. 화재 진압의 FM대로 해체하며 진화하기로 계획
20:57텔레캅 직원 도착. 현장에서는 진화작업중
20:59문화재청에 화재 통보. 답변 국보가 훼손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진화
21:30화재 진압된 것으로 결정. 잔화 처리. 발화점 미확인
21:35문화재청, '화재진압이 우선' 일부 훼손 승인
21:55화재 비상 2호
22:32화재 비상 3호 - 서울 소방재난 본부장 지휘
23:10숭례문 현판 회수
23:20화학식 소화제(거품으로 산소차단) 사용
23:50지붕 해체 개시
00:252층 누각 전체 발화
00:582층 붕괴
01:55대부분 붕괴

여담이지만 사건 날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밤에 보도된 숭례문 속보를 보고 "별일 없겠지"라고 생각하고 자다 일어났더니 숭례문이 전소되어 충격 받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3 방화범

방화 용의자는 택지개발에 따른 자신의 토지에 대한 보상액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해당건설사가 공시지가보다 높게 산정해 1억원을 제시했는데 이 인간은 밑도 끝도없이 4~5억을 내놓으라고 고집을 부린 것. 범인은 70세 채종기로 과거에 같은 이유로 창경궁에도 방화했던 것도 밝혀졌다.와 이정도면... 원래는 종묘를 불사르려 했는데 종묘의 경비가 삼엄하여 숭례문으로 표적을 바꾸었다고 한다. 문화재를 선택한 이유는 경비가 허술해 접근이 쉽고 인명 피해가 나지 않으며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

채종기는 현장검증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에게 하소연해도 들어주질 않았다는 뜻으로 "노무현의 잘못이 99.9%, 나의 잘못은 0.1%", "그래도 인명피해는 없었잖아. 문화재는 복원하면 된다" 는 망언을 하여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검증이 끝나고 "문화재를 훼손해 국민들께 죄송하다" 는 말을 했다. 재판을 받은 채종기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2년 형이 구형되었으며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형이 과중함을 들어 항소, 서울고등법원은 2008년 7월 31일 항소를 기각하며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여 복역하게 된다.

화재사건 이후 세간에서는 전통 문화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철없는 젊은 자식이나 어린 놈이 장난으로 삼거나 구식 문화에 혐오감 등을 가져서 불을 저질렀다고들 추정하였지만 뜻밖에도 70대의 노인이었다는 사실에 경악과 충격을 금치 못하였다. 무엇보다 전통 문화를 소중히하고 옛 것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노인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돈에 눈이 멀어서 문화재를 불태웠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2013년 시점으로 여전히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복역 중이며, 교도소의 규칙적인 생활 탓인지 요통까지 나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1939년생 78세로 2018년에 출소 예정.

여담으로 채종기는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인데 이로 인해서 대구 지하철 참사와 함께 엮여 '경상도인은 불의 민족이다'는 식의 지역드립이 퍼지는 데에 한몫 했다. 문화재를 태워먹은 걸로도 모자라 지역 이름에 먹칠을 한 셈.

4 비효율적인 진화

쉽게 설명하자면 그냥 물만 뿌려댔다
화재 신고는 비교적 일찍 되었지만 그 진화 과정이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소방인력의 전통 목건축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진화를 위해 노력했던 소방관들 개개인의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제도적으로 전통 목건축에 대한 소방인력 교육이 부족했던 것.

당시 소방관들이 돌입하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밖에서 소방차 32대로 물을 퍼부었지만 지붕이 완전 방수라 2층의 지붕 내부에 붙은 불들을 끌 수가 없었다. 목건축은 나무가 물에 닿으면 썩기 때문에 지붕 방수에 엄청난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4] 그래서 전문가들은 기와를 걷어내든가 서까래에 구멍을 뚫는다든가 해서 불이 붙은 부분에 직접 물이 닿게 했어야 한다고 하지만 당시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은 물론 경찰, 서울시, 현장 생중계를 하던 방송사 등 아무도 이를 몰랐다. 문화재청의 전문가들은 너무 늦게 도착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도면 역시 너무 늦게 왔기 때문에...

소방방재청에선 이런 고건축물 화재에 대비한 훈련을 전혀 한 적이 없어서 소방관들은 지붕이 완전방수라는 걸 몰랐다고 한다. 황평우 문화재연구소장 등 몇몇 민간 문화재전문가가 TV중계를 보고 급하게 연락을 시도하고 현장에 나왔으나 모두 무시당했다고... 당시 전국의 수많은 유적지에도 소화기만 비치되어있지 화재 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메뉴얼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방관들이 내부에서 천장에 구멍을 뚫고 물을 뿌리려고 했으나 붕괴 위험이 있어 포기했다고 한다. 전통 목건축물은 나무를 겹겹이 쌓아서 만들어진 것이고 무거운 지붕의 무게로 기둥을 누르는 구조기 때문에 기둥 등 구조체가 타게 되면 붕괴하기가 쉽다.

  • 목조 건축물이 5시간 이상 버틴 것도 기적이다. 전근대 화재 진화는 연소(延燒)의 방지에 중점을 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건물에 붙은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불이 붙은 건물은 포기하고 그 옆의 건물을 부숴 불이 더이상 번지게 하지 않는 방법이다.
  • 숭례문의 경우는 국보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입어 예전과 같은 가치는 회복하기 힘들다. 숭례문이 '국보 1호' 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일 것. 가령 2005년 4월 강원도 산불로 종각이 전소되어 소실된 낙산사 동종은 종각이 탔다고 해제된 게 아니라, 종 자체가 녹아서 구릿물로 변해 사라졌기 때문에 그해 7월 7일 보물에서 지정해제되었다.

사고 이후, 서울소방에서는 초동진화에 실패한 것이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2010년 16억원의 예산을 투자해 오스트리아 로젠바우어사에서 MAN TGS 차대 무인파괴 방수탑차를 도입했다. 중부소방서 본서(무학 119안전센터)에 가보면 구경할 수 있다.

5 복구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예 사라져버린 2층과 달리 1층 누각은 전부 불탔을지언정 상당 부분이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숭례문 안에 있던 가치 있는 문화재의 상당수는 1960년대 해체보수할 때 꺼내서 누각 안에 보관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서 무사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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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진 현판은 떼낼 시간이 없어서 연결 부분을 톱으로 절단하여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약간 파손되긴 했지만 지켜냈다.

복구까지는 짧게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로 예상되었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광화문 보수하느라 목재로 사용 가능한 정도 수령이 된 여분의 국내산 소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 건축에 쓰이는 목재는 크기가 적당한 나무도 있어야 하지만 벌목 후 수년동안 건조를 시켜야 하기 때문에 바로 조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광화문을 다 분해해 놓은 상태에서 거기에 쓰일 목재를 숭례문으로 돌려서 쓰고 있다고 한다. 목재가 부족한 이유는 한국전쟁 때문에 국내에 목재로 쓰일 만한 소나무 씨가 말라버려서이다... 다행히도 태조 이성계의 5대조가 안장된 준경묘(濬慶墓) 경역의 금강송 20그루를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사용하는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동의해 이를 벌채한 것[5]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소나무를 기증하겠다는 고마운 시민들 덕에 재목 충당은 별 문제 없을 듯하다. 그런데 자재를 뺏긴 광화문이 먼저 복원 완료된 게 또 미스터리다.외계인 고문이라도 했나..

5.1 복원 문제점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전통방식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80년대 이후 숭례문에 단가가 싸고 규격에 잘 맞는다는 이유로 수제 기와가 아니라 기계 기와를 사용했었고 이 때문에 화재 당시에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곤 전부 기계 기와로 교체 되었다고 한다. 이때 복원 당시엔 중요무형문화재 제91호인 제와장 한형준 선생과 그 제자들을 불러 수제 기와를 제작했고 중요무형문화재 121호인 이근복 번와장[6]이 그 기와를 가지고 교체했다. 화재 이전 숭례문과 복원 후 숭례문 기와의 색이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기계 기와는 검은색에 가깝고 수제 기와는 회색빛에 가까운 색이라고. 안타깝게도 현재도 고궁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화재 기와는 전부 기계 기와를 사용하는 편이다. 광화문 복원 당시 사용된 기와도 기계 기와라고한다.
복원 전복원 후
  • 숭례문에 그려준 벽화 복원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숭례문에 그려진 벽화가 화재가 나기 전에 있었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네티즌들은 원래의 용 그림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용처럼 만들었다며 비난했다. 역사학자 전우용 씨도 자신의 트위터에 단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하여 논란을 부추겼다.[7] 그러나 단청장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화재가 나기 전에 있었던 그림은 1963년에 복원공사 때 그려진거고 현재 그려진 그림이 오히려 원판에 가깝다고 밝혔으며 문화재청에서도 1963년 복원 공사 당시의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전우용 씨도 관련 트윗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다. 사실 조선 시대의 용 그림을 보면 의외로 지금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처럼 희화된 용이 많다. 용을 희화화한 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유행했던 것으로, 한나라 시기 때부터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왔다. 시대를 앞서간 조상님
  • 2013년 2월 가림막 철거 후에는 좌우 성벽 복원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물론 원래 성문이었고 현재 서울 시가 한양 성곽 복원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벽 복원 자체는 합당한 일이긴 한데, 아무리 주변 도로 문제라고는 하지만 성벽의 좌우 비대칭이 해도해도 너무 심한 비대칭인 것. 화재 이전 성벽 없이 숭례문 단독으로 서있었을 때의 장엄한 대칭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소수이지만 오히려 이런 비대칭미가 낫다는 의견 또한 있다.
그러나 수원화성의 경우에 도로 위로 성벽을 육교 형식으로 만들어 복원한 사례가 있고, 한양도성의 성곽들 역시 전체적으로 복원중이라 숭례문 서쪽 성곽도 곧 복원될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 상세한 복원공사 내용은 KBS 다큐멘터리 '숭례문 1911일의 기록'을 참고.
  • 2013년 10월 숭례문 단청 20여 곳이 벗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색을 밝게하기 위한, 일종의 배경색인 호분(흰색)을 너무 짙게 발랐고 또 그 위에 주색을 칠했더니 무거워져 전통안료인 아교로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락(剝落, 나무 등에 새긴 그림이나 글씨가 오래 묵어 긁히고 깎이어서 떨어짐)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파운데이션을 너무 발라 화장이 떨어진.. 아무래도 아교가 합성안료보다 약해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합성안료의 경우 녹색위에 바로 주색을 칠해도 색이 잘 나오지만 전통안료는 잘 나오지 않는다. 아마 이런 자잘한 사고는 앞으로도 자주!일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전통기법으로 복원하는 것이 옳긴 하지만 이미 전승이 끊긴 방법으로 무리하게 복원을 한 측면도 있다. 일례로 문화재청에서는 녹색 안료의 원석인 공작석을 힘들게 구해왔다고 홍보했지만 공작석을 받아든 단청장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며 오히려 신기해했다고(...).
  • 이 항목 본문에 언급되어있는 문화재전문가 황모씨는 라디오에서 전통 기법이었으면 안료가 나무에 스며들어 떨어지지 않는데, 일본식 안료를 써서 그랬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채색기법은 기본적으로 광물성 안료를 붙이는 것이다. 다만 그 안료나 붙이는데 사용하는 재료가 무엇인지(예를 들어 아교나 계란노른자)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항목에 언급된 것처럼 전승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기술들을 전통에 집착해서 무리하게 적용하다가 생긴 불상사인거지....... 숭례문 부실 복원 논란이 한창 거셀 때의 일로, 사실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논란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확인을 떠나서 명색이 문화재 전문가라는 사람이 제작 기법을 이렇게 몰라서야.....
  • 기타 부실 복구된 사항에 대해서는 이하 '숭례문 부실 복구 및 재시공 통보' 문단 참조.

6 사건의 파장

당시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은 이 일로 자리를 내려와야 했다.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하는 문화재의 수는 극히 적다(궁궐과 왕묘 정도). 문화재청 예산이 4천억 정도고 국내 문화재 개수는 다 합치면 대력 2만여개. 그래서 문화재청은 각 지자체에 방어 계획을 짜주고 지자체에서 돈을 내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누가 돈을 쓰고 싶을까. 하다못해 서울시장쯤 되는 큰 사람은 문화재청장보다 사실상 강한데... 그래서 유홍준은 문화재청장으로 있던 당시 1문화재 1지킴이 운동을 벌이고 스폰서로 KT를 써서 전국 문화재에 무인경보시스템을 돌렸다. 그러나 특별대우는 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결과는...

사건당시 파장이 엄청났다. 모든 언론의 탑기사로 숭례문 화재를 내세웠으며 외신에서도 비중 있게 다뤘을 정도. 전소 당시 많은 구경꾼(...)들이나 언론사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면 붕괴가 됐을 때 비명소리가 들려오는데 이건 무섭거나 놀라서가 아니라 진짜 안타깝고 아쉬워서 내는 소리였다. 심지어 현장에서 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뉴스를 보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도 꽤 됐다. 전소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등 웬만한 유명인 추모식을 방불케할 정도였다.

일부 환빠 커뮤니티에서 "사대주의 조선 왕조의 유물이 사라진다" 며 숭례문 전소를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한 개독교인이 미주 중앙일보에 투고한 "NO 숭례문복원 NO 우상망국" 이라는 칼럼은 우상숭배의 상징인 숭례문 복원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 수많은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서태지는 숭례문 전소를 보고 'COMA' 라는 노래를 제작했다고 한다.

뉴스 방송사 YTN은 사옥이 숭례문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어서 어느 언론보다 빨리 사건을 보도할 수 있었다. 대신 숭례문의 잔해가 보이는 배경을 화면에 비추기 애매하게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가림막을 설치하기 전 까지 숭례문을 비추지 않았다.

일본아사히 신문은 2월 14일 "남대문 화재-한국의 슬픔을 생각한다(南大門炎上―韓国の悲しみを思う)" 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1950년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복원한 교토의 금각사(킨카쿠지)를 생각하면 남의 일 같지가 않으니 이웃 나라의 슬픔에 마음을 담아 협력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내용.

MBC 무릎팍도사에서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 교수(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가 나와서 "숭례문의 운명과 나의 운명은 오버랩이 됐다. 내가 아무리 문화유산에 대해서 잘했다고 할지라도 국보 제 1호 숭례문 화재 시절에 문화재청장이었다는 것은 죽고 난 다음에도 기록에 남을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소방관들을 대신해 기와를 뜯어냈을 것이다." 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2월 10일을 문화재보호법을 통해 '문화재 방재의 날'로 지정하였다.

6.1 숭례문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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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붕괴 이후 조선정도전"숭례문이 전소하면 도읍과 나라의 운이 다한 것이니 멀리 피난을 가야한다."라는 말을 실록에 남겼다는 풍수 괴담 짤방이 돌아 사회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디시인사이드의 모 회원이 창작임을 밝히고 만든 짤방이 와전되어 퍼진 소문이다.

무엇보다도, 정도전의 정치적·철학적 성향에 비추어보면 저런 말을 했을리가 없다. 정도전이 아니라 사명대사같은 사람이었으면 더 그럴 듯 했을텐데... 도대체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무엇을 했길래 모를까? 다 배운건데.

정도전은 유학 이외의 가르침은 일체 배격했으며, 당연히 땅의 기운이 어떻다느니 하는 얘기도 전혀 믿지 않았다. 태조 임금이 도읍을 옮기는 문제에 대하여 재상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에는 "신은 음양술수 그런 거 모릅니다. 그러나 중국 역사를 살펴봐도 천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건 땅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지기의 성쇠 어쩌고 하는 건 자기네들이 생각이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겁니다. 술수하는 자 말고 선비의 말을 들어 헤아리십시오." 라는 상소를 올려서 도읍을 옮기는 데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천도가 결정되자 도시 설계에 큰 역할을 담당한 것도 사실이다.

풍수상으로 숭례문이 광화문의 해태상과 숭례문 옆에 있었던 남지라는 연못(서울역 인근 서울스퀘어 터에 있었다)과 함께 경복궁의 화기를 막는 비보수단으로 만들어졌고, 숭례문의 현판이 세로인 것도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게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남지는 도시계획으로 없어지고 해태상은 광화문 복원 작업으로 치운 지금 숭례문까지 없어져서 관악산의 화기가 청와대로 바로 간다는 소리는 있다. 여기서 화기는 단순히 불의 기운이 아니라 전쟁이나 재앙과 같은 살(煞)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사실, 조선시대같은 왕조 시절에는 한 국가의 대문이 전소될 지경이면 수도가 점령상태 혹은 총체적인 무질서와 대혼란의 상태이므로 멀리 피난을 가는 게 상식이었다.

6.2 숭례문, 복원 후...

화재 이전 숭례문, 화재 당시 모습, 복원 이후 숭례문의 모습 비교는 여기서 볼 수 있다. #

복원 후에 심하게 훼손되어 국보 1호의 가치가 사라져 지금이야 그렇지 100년, 200년 지나고 후손들은 역사적인 유물로 생각할 것이 분명한데. 당장 경복궁도 대원군 집권 때 건축한거니 200년도 안된 건데국보 2호나 보물 1호, 혹은 불국사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거라는 추측이 있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어 있기도 하니까 불국사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사실 국보의 번호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 그저 등재된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진 것이다. 가치의 차등보다는 일종의 일련번호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게다가 한 번 결번이 되면 다시 쓰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감히 누가 국보 1호를 지울 수 있겠냐는 것이 문제. 그리고 사실 불국사야말로 숭례문보다 더 심한 폐허에서 복원된 사례이며 현재 복원된 숭례문 자체도 1층 부분과 석축 부분은 많은 부재들이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숭례문은 이변이 없는 한 국보에서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불국사 자체는 면(面) 단위로 지정되는 사적이지 점 단위로 지정되는 국보보물과는 다르다.

현재는 숭례문과 함께 한양도성 일부를 복원시키는 작업을 진행중이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중이다.#

복원이 끝나 개방이 되고 나서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주말에는 바글바글 사람들이 몰려와서 숭례문을 사진에 담고 숭례문 안내를 듣는 등 활기가 넘친다.

6.3 숭례문 부실 복구 및 재시공 통보

복원된 지 5개월쯤 경과한 2013년 10월초 단청이 벗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부실 복구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다.

좀더 자세한 조사를 위해서 문화재청은 숭례문 종합점검단을 구성하여 종합적인 현장 확인을 하고, 원인 분석 및 향후 대책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현장 확인 결과, 단청의 벗겨짐 뿐만 아니라, 기와가 깨져 있고, 현판이 금가 있는 등 다수의 하자가 발견되었다.

SBS 뉴스 캡처본

단청에 제대로 된 아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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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말린 부실 목재를 사용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결국에는 부실복구 특별조사에 감사원 감사청구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국보를 부실공사하다니, 충공깽 그 자체.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부실복구에 대한 책임으로 전격 경질되었다.

숭례문 복원공사가 부실로 이어진 것은 “공기(工期)를 맞추기 위해 서둘러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공기를 하루 초과할 때마다 1670만원의 지체금을 내야 해서, 부실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다.

한편 복원과정에서 사용된 목재가 일부 빼돌려졌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 의혹에 대한 경찰수사가 시작되었다. 추후 조사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월 18일, 숭례문 부실공사 관련 검증조사를 했던 충북대학교 박원규 교수가 학과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의 조사결과 자살로 결론이 난 상태이다.

2014년 3월 4일, 숭례문 목재가 DNA 분석 결과 러시아산이 아니고, 국내산이 맞다는 뉴스가 나왔다.

2014년 5월 15일, 감사원이 감사결과발표를 통해 복구 부실내역을 발표했고 문화재청에 재시공 통보했다.

숭례문 원형복원은 장기간 미완으로 남게 됐다.

2014년 9월 9일, SBS에서 전문가와 함께 내부를 점검했는데, 재앙수준이라고 평가했다.

2016년 문화재 수리 법이 통과되면서 희망이 보인다.링크
  1. 덕분에 '일본 건국 기념일에 불탔다'는 말이 돌았다.
  2. 사실 전통 건축물에서 기와가 자연히 흘러내리면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기와가 흘러내린다는 것은 각재와 기와 사이가 화재로 상실되었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건조물이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통 기와가 흘러내리기 시작한 후로부터 거의 즉시 건조물이 붕괴됨을 고려할 때, 숭례문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화재를 버틴 것이라 할 수 있다.
  3. 문화재에 대한 시민 의식이 아직도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지금이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전통이란 그저 낡고 버려야 할 것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50년대 미국에서 한국 문화재 전시회가 열리자 분노한(...) 한국인들이 빨리 없애야 할 전통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다니 말이 되느냐고(...)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나마도 유형 문화재는 어느 정도 보전이나 되었지 춤, 노래, 요리를 비롯한 무형문화재들은 그따위 상것들의 장난질이 어떻게 문화재냐고 오랫동안 비웃음을 당하다가 박정희 시대에 가서야 겨우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4. 비오는 날 궁궐에 가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아무리 비가 거세게 퍼부어도 기둥이 습기는 먹을지 언정, 절대 통로나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까지 비가 들이치지 않는다.
  5. 벌목하기 전에 벌목자가 '어명이요!'라고 외치고 벌목을 시작하였다. 기사참조
  6. 제와장이 기와를 굽는 장인이라면 번와장은 그 기와를 가지고 실제 시공을 하는 장인을 뜻한다.
  7. "숭례문에 '복원'된 용 그림이 화제군요"라며 "용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 십중팔구 '단가'일 겁니다. 디즈니 캐릭터 같은 이 용이 '가격' 중심문화의 상징인 셈이죠"라고 썻다가 이후 "복원 기준으로 삼은 건 1963년의 용 그림이라는데, 참고하세요. '단가' 관련 트윗들은 지우고 당사자에게 사과드립니다"라는 트윗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