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렌스부르크 정부

독일의 역사
Die Geschichte Deutsch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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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렌스부르크 정부
Flensburger Regierung
임시 정부
국기국장
1945년 4월 30일 당시
위치독일 동남부
수도플렌스부르크
정치체제임시 정부, 대통령제
국가원수대통령
언어독일어
주요 사건1945년 4월 히틀러 자살
1945년 4월 30일 정부수립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1945년 5월 23일 정부 해산
통화라이히스마르크(RM)
성립 이전나치 독일
멸망 이후연합군에 의한 독일 군정기

1 개요

베를린 공방전이 끝나갈 무렵 히틀러가 자살한 이후,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독일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을 수반으로 형성된 정부. 정부가 덴마크 플렌스부르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플렌스부르크 정부라고 부르지만, 제국 대통령(Reichspräsident)은 되니츠 제독이, 수상(Reichskanzler)은 루츠 폰 크로지크재무부 장관이 맡아서 되니츠 내각 혹은 폰 크로지크 내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의 항복 이후로도 약 2주간 정부 기능을 유지하다가 5월 23일 연합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고 요인들은 체포되었다.

2 형성

히틀러는 유언에서 대통령 직은 되니츠 제독이, 수상 직을 괴벨스가 맡아서 자신의 총통 직을 계승하라고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히틀러가 집권할 당시 수권법에 의해 총통직으로 통합된 대통령과 수상의 권한 및 직무가 형식상 다시 분리된 것.

하지만 괴벨스는 히틀러의 자살 다음날인 1945년 5월 1일 히틀러를 따라서 베를린의 벙커에서 가족과 함께 자살했고, 그 외 다수의 장관들도 베를린 공방전을 전후로 히틀러에 의해 해임되거나 혹은 사퇴한 상황이었다. 이에 5월 2일 되니츠가 제독이 재무부 장관 루츠 폰 크로지크를 수상으로 임명했고 폰 크로지크 장관을 비롯해 아직까지 직을 유지하고 있던 몇몇 내각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탄생하게 됐다.

3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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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 당시 전황. 하얀 영역이 독일의 영토다. 중간중간 연합군에 의해 영토 여기저기가 분단되어 있다. 라트비아쪽 하얀색은 북부집단군의 잔해인 쿠를란트 집단군이 주둔하던 쿠를란트 포켓. 이 집단군은 1945년 5월 12일에 항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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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항복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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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현실이 엔간한 시궁창이 아니었던만큼,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연합군과의 항복교섭 뿐이었다(...) 교섭 목표는 하나, 서방 측에게는 항복을 하면서 동부전선에서는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5월 4일 되니츠 제독은 자신의 후임으로 해군총사령관에 임명된 해군상급대장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과 해군대장 바그너 제독을 영국 육군원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에게 파견[1]해 항복을 교섭하게 했다. 이 날의 교섭을 통해 네덜란드, 덴마크를 비롯한 서부 전선쪽의 독일군에게는 되니츠의 항복 명령이 전달됐다. 하지만 다음 날 프랑스랭스에 머무르고 있던 연합군 총사령관 미 육군원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동/서부 전선 양쪽에서, 동시에, 무조건 항복만을 협상 조건으로 내걸면서 이러한 목표는 난관에 부딪힌다. 이에 되니츠는 협상을 담당하던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과 육군상급대장 알프레드 요들 장군에게 가능한 협상을 지연시켜 최대한 많은 독일 군민들을 소련군에게서 벗어나고자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의도를 간파한 아이젠하워 장군이 "당장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으면 소련군 점령 지역에서 건너오는 독일군과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하겠다."라고 엄포를 놓는 통에 망했어요. 결국 되니츠 제독은 5월 7일 요들 장군에게 무조건 항복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고, 5월 8일 독일측은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여담으로, 되니츠 제독은 아이젠하워 장군의 이런 강경한 태도에 "아이젠하워, 이 사람 정말 정치감각이 없군. 종전 후의 상황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잖아."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냉전을 이미 되니츠 제독은 직감적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것. 그러거나 말거나 연합군 측은 이미 얄타 회담에서 전후 처리에 대한 합의를 자기들끼리 끝내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 망해가는 독일 정부가 냉철한 현실 인식을 가져봤자 상황에 대한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이 '독일 정부의 냉철한 현실 인식' 이란 것 자체가 딱히 탁월한 통찰력이라고 여길만한 것도 아니다.(...) 물론, 당시 독일 입장에서야 영-미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소련 사이의 알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유리한 강화조건을 얻어내는 것이 그나마 유일하게 가능한 긍정적인 대안이었겠지만, 문제는 이 대안이 미국과 연합국 입장에서는 딱히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 연합국측 입장에서 보면 이 대안이란 결국 '현재의 동맹이지만 미래의 잠재적인 적'을 견제하기 위해 '현재 당면한 명백한 적'의 숨통을 틔워주고, 미래에 갈등관계가 될 것 같다는 이유로 어쨌건 현재의 동맹인 세력과 척을 지라는 것인데, 이건 도저히 현실주의자가 선택할만한 방안이 아니다. 훌륭한 현실주의자란 미래에 대한 대비도 결코 게을리하지 않지만, 일단 매 순간 당면한 문제를 가능한 한 철저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법이다.(...) 애초에 영-미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소련 사이에 상당한 갈등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그 히틀러 자신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고, 몰락 직전까지도 '결국 영-미와 소련의 연합 내부에서 균열이 발생할 것이고, 이를 통해 기사회생의 여지가 열릴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이지만 사실 루즈벨트처칠, 심지어 스탈린조차 히틀러보다 훨씬 제정신이었기에 일단 '당면한, 그리고 가장 위험한' 적인 독일을 완전히 무너트릴 때 까지는 협력을 유지했다. 결국 되니츠의 제독의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내놓은 대안(교섭 목표)이라는 것은 잘 봐줘 봤자 낙관적 전망에 기초하여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수준이었다고 할 수는 있어도, 현실적인 대안이었다고 보기는 도저히 어려우며, 오히려 이런 일방적으로 독일에게만 유리한 협상안을 연합국측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나, 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전선 지휘관인 아이젠하워가 정부의 입장에 반하여 자신의 협상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되니츠 제독의 정치감각이 별로 뛰어나지 못했다고 볼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젠하워 장군의 정치 감각은 전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대통령직을 8년간 수행하며 자국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미국 내 인종차별 문제 해결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자기 자신이 군인 출신이면서도)지나치게 비대해진 군산복합체와 국방예산을 효과적으로 축소시키고, 사회보장제도를 크게 확충한데다 제국주의 시기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다시 제 3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영국, 프랑스와 양대 열강으로써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툰 소련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견제함으로써 충분히 증명되었다. 비록 독일 본토의 여러 강제 수용소의 참상을 접한 지 얼마 안되어 "독일 군복을 입은 자는 아무도 만나기 싫다."고 대놓고 말할 정도로 악감정이 생긴 상태라지만, 아이젠하워 장군이 되니츠 제독에게 정치 감각이 있네 없네 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5월 8일의 항복 서명 이후 스탈린은 자기네를 빼놓고 협상이 진행됐다고 이 항복을 인정 안하고[2] 다음날인 9일 베를린에서 한 번 더 항복서명을 받았다.

4 해산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을 비롯해 일부 내각 구성원은 이제 해산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되니츠 제독은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임시정부로서 존속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이를 거부했다. 아주 틀린 기대도 아니었던 게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이 항복이 되니츠 국가원수에 의해 독일에서도 승인받았다'고 종전 직후 대국민 연설에서 밝히면서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에 종전 이후 2주 동안 연합군과 독일군이 같이 치안을 담당하는 기묘한 상황도 벌어졌지만 소련이 곧 이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이에 5월 23일 연합군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고 되니츠 제독 등 내각 구성원들을 체포한다. 이후 서독동독 정권이 성립될 때까지 약 4년 4개월의 시간 동안 독일은 연합군의 군정 상태에 놓이게 된다.
  1. 되니츠 제독이 프리데부르크 제독과 바그너 제독을 협상 대표로 보낸 것은, 육공군보다 앞서 일찌감치 무력화된데다, 연합국 육군 장군들이 직접 싸운 일이 거의 없어 적개심이 덜할 해군 제독들이 육공군 장군들보다 이들을 설득하기 쉬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2. 실제로 독일군의 8할을 상대하고 독일 영토의 6할을 점령한데다가 가장 많은 전사상자가 발생한 국가가 빠졌으니 충분한 결격사유이며 영미측도 이를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