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명칭
공식 명칭이 매우 길기 때문에 약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1.1 공식 명칭
러시아어: Дважды Краснознамённы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ансамбль песни и пляски Российской Армии имени А. В. Александрова
영어: A. V. Alexandrov Russian army twice red-bannered academic song and dance ensemble
한국어: 2중 적기훈장을 수훈한 A. V. 알렉산드로프 명칭 정통 러시아군 가무 앙상블
적기훈장. 소련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무공 훈장이다. 2회 수훈.
흔히 약어로 알렉산드로프 앙상블(Ансамбль Александрова)로 부른다. 실제 러시아인들은 이렇게 부르면 쉽게 알아듣는다. 약어로는 'КАППСА, КАППРА, КрАПП' 등등으로 사용된다.
1.1.1 기타
공식적으로 명칭에 러시아군을 명기하고 있지만, 소련 시절에 발족하고 또 유명해졌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붉은 군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직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특히 영어권으로 넘어갔을 때는 특히 옛 이름에서 파생된 'The Alexandrov Red Army Choir(Chorus)', 'The Alexandrov Red Army Ensemble' 혹은 그냥 'Red Army Chorus' 라고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름들은 모두 올바른 명칭이 아니지만 고유명사로 굳어진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구글이나 유튜브 등지에서 검색할 때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 검색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붉은 군대 합창단'이라는 비공식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붉은 군대 합창단이 알렉산드로프 앙상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붉은 군대 합창단'이라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알렉산드로프 앙상블만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러시아군에서 운영되는 군합창단의 총칭을 뜻한다. MVD(내무군) 앙상블, 적성(赤星) 앙상블이 대표적인 경우. 특히 국내에도 몇번 왔던 전략로켓군 소속인 적성 앙상블의 경우 '러시아 국립 적성 적군 앙상블'로 소개가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드로프 앙상블로 알고 낚였다(...).
이런 유사 단체와 혼동되는 상황은 러시아 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2011년에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이 자신들의 유튜브 공식 계정을 통해 러시아 내무군 앙상블이 해외 공연에서 자신들을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인 양 소개하거나 그렇게 오독할 수 있는 여지를 준 공연 프로그램 노트 등을 증거로 제시하며 정면으로 반박하는 스캔들이 터지기도 했다. 공식 반박 영상
2 개요
소련군 휘하의 합창단인데도 프로파간다와는 별 상관 없이 엄격한 규율과 연습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지켜내고 키워온 곳이다. 남성 보컬만으로 구성된 크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냉전 시기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동서를 가리지 않고 이름을 날렸다. 러시아 문화의 가장 뛰어난 유산 중 하나인 민요와 여기에 영향을 받은 군가들을 웅장하게 소화해내 남자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만드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또한 이곳은 소련에서 절대로 숙청되지 않았던 절대성역. 스탈린이 아꼈다 카더라. 따... 딱히 좋아서 숙청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1] 소련에 관련된 군가에는 독보적인 위치라 소련 군가를 검색해도 영상이나 음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소장이자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였던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андров)에 의해 붉은 군대의 공식 예술단으로 출범하였다. 편제는 기본적으로 여타 국가의 군악대와 동일하지만, 이름에 들어간 'песни и пляски(가무, 춤과 노래)로 알 수 있듯 합창단과 관현악단 외에 무용단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이는 창단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인데, 'пляски'는 러시아의 전통 춤을 의미한다. 문워크 혹은 셔플 등을 기대했다면 걸린거다. 소련 시절에는 혁명가나 군가를 위주로 불렀으나, 후에는 러시아 전통 민요, 교회 찬송가, 오페라 및 대중 음악도 공연하면서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예술단이다. 앙상블 편성은 남성 합창단, 관현악단[2], 무용단 세 개 그룹으로 되어 있다. 합창단의 경우 합창단 가수 외에 독창이나 중창만을 전문으로 하는 독창 가수가 별도로 편성된다.
이 앙상블 외에도 러시아군에 소속된 다른 합창단이나 앙상블도 많다. 특히 해군이나 공군 등의 군악대가 똑같이 군복 차림으로 공연하면 굉장히 유사하게 보여서, 완전히 다른 단체를 알렉산드로프 앙상블로 착각할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댄스 파트에 여군 단원이 있는 건 상관없지만, 합창 파트에도 여군이 있다면 정통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이 아니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프 앙상블도 단독 공연 외에 다른 단체와 협연도 많이 하기 때문에 잘 구분해야 한다.
3 역사
3.1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 휘하
앙상블의 초기 역사는 정확히 말할 수 없는데,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극장 감독인 펠릭스 다닐로비치가 앙상블을 조직해 모스크바의 세 지휘자 중에서 음악 감독을 선정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였고 이 때 초기 인원은 11명이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1928년에 미하일 프룬제 명칭 붉은 군대 중앙 회관에서 12명의 인원이 모여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로프의 지도 아래 출범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 중 사실상 두 번째 설이 공식이며, 앙상블의 홈페이지에 있는 역사 소개 항목에도 후자가 채택되어 있다. 1928년 10월 20일 제22사단에서 첫 공연을 했고, 초기에는 기병대나 극동군, 혹은 광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곡을 주로 공연했다. 1929년부터 앙상블은 소련의 극동 지역 철도 노동자들을 방문했는데, 이 때부터 정기적으로 소련 각지를 도는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이 당시의 공식 명칭은 'M. V. 프룬제 명칭 붉은 군대 중앙 회관의 붉은 군대 합창 앙상블(Ансамбль красноармейской песни Центрального дома Красной Армии имени М. В. Фрунзе)'이었다.
앙상블은 군대의 계급과는 상관없이, 더 좋은 음악적 소양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고, 규모가 점점 확대되어 1933년에는 인원이 300명에 이르렀다. 이삭 두나옙스키와 게오르기 노소프, 보리스 모크로우소프,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 바실리 솔로뵤프-세도이 등의 소련 작곡가들도 이 앙상블을 위해 여러 군가와 가요들을 작곡했고, 이 곡들이 라디오 방송이나 기타 여러 공연을 통해 유명해지면서 앙상블의 명성도 소련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35년에는 적기훈장을 받았고, 이 때부터 붉은 군대 중앙 회관 직속 앙상블에서 독립해 나오면서 명칭을 '적기훈장을 수훈한 소련 붉은 군대 가무 앙상블(Краснознамённый ансамбль красноармейской песни и пляски СССР)'로 바꾸었다. 1937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엑스포에 참가해 그랑 프리(최우수상)를 수상했다. 하지만 대내외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준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이 시기 동안 앙상블은 전선에 참여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철도역부터 비행장, 병원 등 소련 각지에서 1500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 그래도 전쟁터엔 안끌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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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 1883.04.13~1946.07.08. 이거나 저거나 얼굴 뚱한게 참... 최종 계급은 상술한 대로 예술단 소속 장교의 진급 한계인 소장이었다. 창단 후 18년 동안 지휘자로 앙상블을 이끌었고, 작곡가로도 활동해 소련 국가(=2000년부터 사용된 현 러시아 국가)와 성전, 소련군 찬가 등의 군가도 작곡하였다.
초창기(1928년 ~ 1929년)의 앙상블의 인원. 맨 처음 출범 당시에는 12명의 조촐한 편성이었는데, 이 때도 두 명의 무용수가 있었다.
3.2 보리스 알렉산드로프 휘하
1946년에 창립자였던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는 독일의 소련 점령 지구에서 공연을 앞두고 급서했고, 그의 아들인 보리스 알렉산드로프(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가 앙상블을 이어받았다.세습 보리스도 아버지 못지 않은 조교조련 실력을 발휘했고, 임기 동안 사회주의노력영웅과 소련 인민예술가 칭호를 비롯한 여러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았다. 1949년 2월 7일에 앙상블은 대조국전쟁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적기훈장을 두 번째로 수여받았고,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적성훈장도 수여받았다.[3] 같은 해 6월 10일에는 창립자의 이름을 따 '2중 적기훈장과 적성훈장을 수훈한 A. V. 알렉산드로프 명칭 소련군 가무 앙상블(Дважды Краснознамённый ордена Красной Звезды ансамбль песни и пляски Советской Армии имени А. В. Александрова)'로 개칭되었다.
보리스 알렉산드로프가 지휘한 앙상블은 공산주의 이념이나 선전하는 프로파간다 앙상블이 아니라 국제적인 인지도와 명성을 쌓는 예술 단체로 성장했다. 보리스는 1987년에 은퇴할 때까지 엄격한 훈련으로 앙상블을 이끌었고, 특히 지휘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30분 이상 흐트러지지 않고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단련시켰다. 덕분에 지휘자가 퇴장한 뒤에도 악단과 합창단은 탁 트인 무대에서 계속 공연을 진행했고, 그 앞에서 무용수들은 자신들의 춤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 사후 데탕트 시기가 찾아오자 앙상블은 영국, 프랑스, 쿠바, 일본,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순회 공연을 가지면서 해외에도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 공연을 개최했던 1956년과 1963년에는 EMI에서 세 장의 LP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당시 소련의 음반 사업은 여느 공산주의 국가들처럼 국가 직영 음반사인 멜로디아가 꽉 쥐고 있었고 해외 반출되는 음반도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실제로 EMI가 낸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의 음반들은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스테디 셀러가 되었고, 이것으로 이 앙상블의 음악을 처음 들어본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또 이 음반들에서 독창 가수로 출연한 예프게니 벨라예프, 이반 디덴코, 이반 사브추크, 니콜라이 아브라모프(이상 테너), 알렉세이 세르게예프, 아르투르 에이젠(이상 베이스), 콘스탄틴 게라시모프(바리톤) 같은 이들은 이후 앙상블을 퇴단한 후에도 각자 솔리스트 혹은 교육자 활동을 계속 하면서 소련 음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8년에는 창단 50주년을 맞아 정통(академический)[4] 칭호를 받았고, 이름도 '2중 적기훈장과 적성훈장을 수훈한 A. V. 알렉산드로프 명칭 정통 소련군 가무 앙상블(Дважды Краснознамённый ордена Красной Звезды академический ансамбль песни и пляски Советской Армии имени А. В. Александрова)'로 또 개명되었다. 이것이 소련 시절 이 앙상블이 최종적으로 가졌던 공식명칭이다.
파일:Attachment/borisalexandrovportrait.jpg
보리스 알렉산드로프 1905.08.04~1994.06.17 최종 계급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소장이었다. 마찬가지로 지휘와 작곡을 병행해 우리의 국가 영원하라[5] 같은 가요도 남겼다.
보리스 재임기에는 콘스탄틴 비노그라도프와 유리 페트로프 등이 합창 지휘를 담당했고, 동생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프도 1978년에 사망할 때까지 소령 계급을 달고 관현악단 담당 지휘자로 재직했다. 보리스 알렉산드로프 퇴임 후에는 악단의 수장이 행정을 총괄하는 단장과 지휘를 담당하는 예술 감독으로 나뉘었고, 역대 단장과 예술 감독은 다음과 같다.
역대 단장
- 아나톨리 말체프 (Анатолий Васильевич Мальцев, 1987~1992)
- 드미트리 소모프 (Дмитрий Васильевич Сомов, 1993~2002)
- 레오니드 말레프 (Леонид Иванович Малев, 2002~)
역대 예술 감독
- 이고르 아가폰니코프 (Игорь Германович Агафонников, 1987~1993)
- 빅토르 표도로프 (Виктор Алексеевич Фёдоров, 1994~2003)
- 뱌체슬라프 코로브코 (Вячеслав Алексеевич Коробко, 2003~2008)
- 이고르 라옙스키 (Игорь Иванович Раевский, 2008~2012)
- 겐나디 사체뉴크 (Геннадий Ксенафонтович Саченюк, 예술 감독 대행, 2012~)
3.3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붕괴 이후 앙상블의 이름 변경에 대한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고, 결국 보리스 옐친의 결정으로 러시아군 앙상블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고유 명사화 된 이름을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결국 1998년에 가서야 현재의 공식 명칭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명칭 개명보다 더 큰 타격은 심각한 재정난이었고, 결국 여타 군 예술단과 마찬가지로 인원 감축에 들어가 현재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의 단원 수는 소련 시대와 비교하면 상당히 줄어들었다. 소련 체제 후반기인 1989년에 진행한 미국 순회 공연에서 각각 87, 43, 45명 규모였던 합창단과 관현악단, 무용단은 2003년 프랑스 공연 때 각각 46, 29, 20명으로 집계되어 상당히 격한 다이어트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자료 출처 비단 해외 공연 뿐 아니라 러시아 국내 공연에서도 예전보다 확실히 체급이 많이 줄었음을 알 수 있다.
4 그 외
백견이불여일문,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가끔 이렇게 자본주의 팝을 커버하여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기도 한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여기에 올릴 수 없으나 북한에 와서 뚱땡이 1세 찬가를 불러댔다.
4.1 제복
붉은 군대의 군악대로 출발했으므로 공연 때 입고 나오던 군복 자체는 당시 소련군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계급을 나타내는 견장은 리라 모양의 자수가 들어간 붉은 색의 것을 사용해, 일반 군인의 정복과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앙상블의 제복은 1969년 소련 군복의 대대적 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용되다가 1970년에 다른 군복들에 맞춰 전부 변경되었다. 현재는 러시아군의 정복을 입는다.
4.2 내한공연
1991년 "레드아미 코러스"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최초로 내한공연을 온적이 있다. (이건 진짜 알렉산드로프 앙상블) MBC에서 녹화중계를 해줬을 정도. 당시만 해도 냉전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어서 곡은 군가가 아니라 대체로 러시아 민요를 위주로 불렀다. 하지만 이후 한국 공연은 없는 상태고, 주로 북한에서 공연을 뛴다.
한국에는 보통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이 자주 오진 않고, 전략로켓군 소속 적성 앙상블이 내한공연을 맡아서 뛰고 있는 중이다. 2010년에도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공연을 했고 2012년에도 내한했다.
4.3 홈페이지
러시아어: [2]- ↑ 실제로 스탈린이 좋아하던 음악 중에는 이 합창단이 자주 부른 조지아의 서정 가요인 술리코(Сулико)가 있었다.
스탈린이 좋아해서 자주 불러준 것일지도 - ↑ 바이올린족 현악기가 인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적인 관현악단과 달리, 발랄라이카나 도므라 같은 러시아 전통 발현악기와 아코디언의 일종인 가르모니와 바얀이 대거 편성되어 있다.
- ↑ 소련에 근속 훈장이 없었을 때는 적기훈장이 그것을 대신했다.
- ↑ 영어로 직역하면 academic이지만, 러시아어에서는 대학교와 관련 없이 어느 분야에 정통하다는 의미의 형용사로 쓰인다.
- ↑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국가가 이 노래를 개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