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양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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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논란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많은 사랑을 받는 양준혁이지만, 각종 흑역사를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며 이 때문에 많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극과 극의 평가를 받으며 은퇴한 시점에조차도 끊임없이 논란거리를 만들고 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현역으로 활동했던 만큼 이러한 내용이 길어짐에 따라 상위 항목인 양준혁 항목에서 해당 부분을 분리, 본 문서가 생성되었다.
1.1 푸른 피의 사나이?
1.1.1 삼성과의 사전 접촉 의혹과 신인 지명 회피 및 "양준혁 규정"
지명 규정을 피해 상무 입대를 택하면서 삼성 라이온즈로부터 월급을 받는 탈법적인 방법을 통해 삼성 라이온즈에 2년 후 입단한 사건.
삼성 라이온즈는 1991년 말에 열린 1992 신인 1차 지명에서 연고선수 중 좌완 투수 김태한을 택하면서 차후 양준혁에게 1차 지명을 약속했다. 한편 양준혁이 2차 지명에 나오게 되자 당시 2차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OB 베어스는 당연히 양준혁을 지명하려 했으나, 2차 지명을 앞두고 양준혁이 자신은 상무에 입대하기로 결정했으며 당분간 프로 입단을 미루겠다고 말하면서 결국 OB는 양준혁의 지명을 포기했다. 그러면서 양준혁이 상무 입대를 고집하는 이유가 삼성과 모종의 합의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퍼지면서 1992 신인 2차 지명에서 어떠한 구단도 1라운드에서 양준혁을 지명하지 않았다. 다만 쌍방울 레이더스가 '아무리 선수가 프로 입단을 거부한다 하더라고 지명조차 포기하는 건 프로 구단다운 태도가 아니지 않느냐' 라면서 2차 2라운드에서 양준혁을 지명했다. 쌍방울 역시 양준혁에게 후한 대우를 해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준혁은 공언한대로 상무행을 택했고, 이후 1992년 말에 열린 1993년 신인 1차 지명을 통해 삼성에 입단했다.
양준혁의 고향 사랑의 예로 여겨지기도 하며, 일부 팬들은 이를 두고 "푸른 피가 흐른다" 라며 칭송하기도 한다. 양준혁 본인도 무릎팍도사에 출연, 삼성에 대한 애정을 얘기하며 이 일화를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하지만 쌍방울 입장에서는 자기 픽만 날린 황당한 사건이라는 것. 신생팀 쌍방울은 그 귀중한 픽을 날려버렸고 쌍방울 팬들에게 원성을 들었다.
이 사건 이후 KBO는 신인 지명 규정을 손보게 되는데, '타 팀의 2차 지명을 받은 선수는 이후 연고 구단의 1차 지명을 받을 수 없다'는 이른바 "양준혁 규정"을 신설하였다. 또한 기존 2차 지명의 보유권을 1년에서 3년으로 늘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2년으로 조금 줄였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선수 영입의 근간을 방해하는 사전영입이 이루어 졌다는 것과 월급조로 월 100만원씩 받았다는 것. 더 심각한 것은 군복무 도중 무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삼성으로부터 월 100만원씩 수령했다는 것. 양준혁의 계약금인 1억원[1]에 비하면, 용돈 수준의 푼돈일 수 있으나, 사전 입단 합의가 된 미입단 선수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지급했다는 것부터 사전 접촉과 금전지급은 규정상으로 선수는 영구제명, 구단은 1차지명 또는 2차지명에서 금지를 받을만한 중징계 대상이다. 다시 말해 당시 KBO가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면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선수 '양준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 근데 요즘도 안하잖아 안될거야 아마
또한, 애초 방위병 판정을 받은 양준혁이 굳이 상무에서 복무한 것도 그렇고[2], 당시의 방위 복무기간인 18개월이라면 양준혁이 다시 신인드래프트에 나오려면 제대한 후 6개월이 지난 1994년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삼성은 1993년 드래프트에서 아직 제대가 6개월이나 남은 그를 지명이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거쳐 1차 지명으로 선택했다. 그러면서 양준혁은 수도권에 위치하던 상무를 1년만에 퇴단하고 대구로 주소를 옮겨 방위병 생활을 계속했다. 어떻게 상무라는 군 기관의 퇴단이 쉽게 가능했으며 방위 복무 중에 주소를 옮겨 근무지를 바꾸는게 가능했던 것일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으므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듯 싶었던 해당 사건은 후일 양준혁이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을 당시 스스로 과거 삼성 입단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났다. 1991년 삼성이 일단 급한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 김태한을 1차 지명한 후, 자신을 1차 지명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도록 권유했었다는 사실을 선수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것. 따지면 규정 외의 사전접촉 및 구두 계약이라고 볼 수 있으니 문제가 되는 발언으로, 당시 쌍방울이 양준혁을 2차 지명하면서 백지 수표와 48평 아파트를 제의했지만 거절했으며, '삼성의 권유대로 상무에 입대하고 난 뒤 월급조로 삼성으로부터 매달 100만 원씩을 받았다'는 사실도 함께 밝혔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해태의 김응용 감독은 "양준혁을 회유하여 팀에 입단하게 한 삼성의 행위를 문제 삼기 위해 구단이 직접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양준혁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해태는 '양준혁의 삼성 입단은 명백한 규약 위반이다'라며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에 KBO는 삼성에 1993년 양준혁의 입단경위서 제출을 요구했다. 삼성은 이러한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다가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 생각나지 않고, 경리 장부에 매월 100만 원의 지출 내역이 있는지 확실치 않다. 일단 확인 작업을 거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이 역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1.1.2 해태로의 트레이드 거부
임창용과의 트레이드 건 때 공개적으로 은퇴 의사를 밝히며 자신이 삼성을 위해 2년을 군복무하였다고 하여, 이 때 붙은 별명이 '푸른 피의 사나이'. 해외 진출 의사를 모색할 정도로 삼성구단 및 기업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듯 했으며, 양준혁의 말에 따르면 이 트레이드는 나중에 선수협 창설과 FA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동기 중에 하나가 됐다고 한다.
임창용과의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해태로 가게 되자 또 '자기를 용병으로 생각해달라' 며 끝까지 삼성맨임을 고집하였다. 양준혁의 트레이드 거부는 해태팬들의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는데, 팀 투수진의 기둥뿌리였던 임창용을 내주고 데려오려는 선수가 입단거부에 은퇴를 운운하는 것은 해태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당시의 해태는 자금난으로 최희섭, 김병현, 서재응 등의 지역 유망주들을 놓치는 등 돈없는 구단의 설움이 하늘까지 닿은 상태였다. 김응용 감독이 '1년 뒤에 놓아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동시에 1993년 입단 당시의 삼성-양준혁 밀약을 공개거론하며 압박하자 양준혁은 결국 해태 입단에 동의한다.
막상 와서는 친척들이 인근에 많이 산다며 안정을 찾았는지 태업을 하진 않았다지만[3], 바로 1년 후 양준혁이 돈 많은 서울 연고 구단인 LG로 옮기자 해태-KIA 팬들의 분노는 더욱 격렬해졌다. 실제로 야구 갤러리 등지에선 기록은 좋았으되 곧바로 떠나버린 이러한 행태를 비꼬며 푸른 피의 홍어, 타이거즈 레전드로 부르며 조롱한다. 사실 해태 팬 입장에서 보자면, 개인 사정이야 어쨌건 임창용을 희생한 대가로 1년 동안 양준혁을 사용한 거니 격분할 만하다.[4]
게다가 양준혁의 트레이드 카드 데려온 선수가 하필이면 손혁이었다. 이 손혁마저 해태 입단을 거부, 은퇴를 선언하고 야구계를 떠나면서 해태 팬들과 양준혁은 완전히 갈라서버리고 만다. 이후 양준혁과 얽혀 해태 레전드 선동열이 삼성 팬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까이자 양준혁에 대한 해태-KIA 팬들의 분노는 다시금 하늘을 찔렀다. 게다가 자서전에서마저 '해태에 가는건 유배가는 느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탓에 사실상 해태-KIA 팬들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절반 정도 지나간 느낌.
1.1.2.1 트레이드 거부 사태의 다른 시각
그러나 이 사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방적으로 양준혁의 잘못을 논하기 어렵다.
그러나 양준혁 이외에 손혁마저 해태 트레이드에 거부했다는것은 그 당시 해태의 처지가 얼마나 궁색했는지를 잘 보여주는것이다. 실제로 그이후로 명문 해태구단은 막을 내리고 기아 타이거즈가 되어버린다. 그만큼 미래가 없어보이는 구단으로 옮기는게 막막했을것이다.
게다가 그 이전부터 프로야구에서 선수들이 트레이드에 반발하는것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것이 프로야구 초창기 한대화선수의 OB에서 해태로의 트레이드이다. 이 당시는 아애 산에 잠적해있는 한대화를 코치가 찾아가서 겨우 설득해서 데려올 정도였다.
그외에 최동원 김시진 트레이드 역시 당사자들의 반발이 무척 심했다.사실 트레이드에 대한 반발의 이유는 트레이드를 형벌처럼 보는 시각이 결정적이기는 했지만, 그 외에 열악한 그 당시 선수인권 문제도 있었다.
미국프로야구에서는 트레이드가 싫어서 아예 계약서에 트레이드 금지 조항을 넣은 선수들이있다.
양준혁 등이 계약서에 트레이드 금지조항을 넣은것도 아닌데 무슨 권리로 무작정 트레이드를 거부하냐고 욕하는 팬들도 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보면 한국프로야구에 트레이드 금지조항자체가 아예 없다. 그당시도 없었고 21세기인 지금도 없다.
게다가 21세기 현재까지도 프로야구는 에이전트를 허용 안하고 있다. 선수협은 있지만 선수노조도 허용 안 되고 있다. 모두 너무나도 기본적인 헌법에서 철저히 보장하는 권리지만 버젓히 그렇게 운영되고 있다. 임선동의 해외진출관련 소송을 봐도 구단의 횡포를 알수있다. [5]
이건 너무나도 당연한 헌법에서 보장된 권리조차도 프로야구 선수는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80, 90년대 최동원, 양준혁, 한대화가 활동하던 시절은 FA없거나 막 FA가 생겼을 시절이다. 선수는 구단과 계약 관련 아무런 주장도 할수없는 상황이었다. 즉, 구단은 선수에게 아무런 권리를 주지않고... 선수를 맘대로 한것이다.
만약 FA도있고, 자유계약시에 선수가 계약서에 맘대로 트레이드 금지조항을 넣을 권리를 선수도 가진 상황이라면 다를것이다.
즉, 트레이드 금지조항을 넣을수있는데도 불구하고 구단이 돈 더 주는 대신 트레이드금지조항을 안넣기로 하고 서로간에 협의끝에 계약서 작성했으면... 그 선수는 트레이드 되어서 아무 말 없이 구단을 떠나야한다. 뒷말하면 계약서로 보여주면서 반박하면된다.
근데 한국프로야구는 트레이드금지조항자체가 없는 리그이다. 게다가 80,90년대는 FA까지 없던 시절이니 구단이 일방적으로 모든 권리를 가져간 상황이니, 선수는 그냥 합법적인 방법자체가 봉쇄당한 상황이다.
제도상으로 방법이 없으니 제도밖에서 트레이드 거부를 할수밖에없는것이다.
80, 90년대 한국프로야구는 입단계약서 자체도 구단에서 맘대로 만든 계약서를 그냥 선수는 사인하게만든것뿐이다. 물론 초기에 계약금정도는 협의했을수는 있지만, 그 외에 에이전트의 도움을 얻어서 트레이드 금지조항을 넣은 계약서를 계약할수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없었다.
원천적으로 선수는 아무런 권리를 받지 못하고 오로지 구단의 노예같이 해야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즉, 제도적으로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못하는 상황에 대한 선수들의 반발이다.
사실 1차 선수협을 하려다가 실패해서 트레이드 당한 최동원과.. 그 이후 트레이드로 충격받은 양준혁이 선수협을 결성해서 결국 성공시킨다.
즉, 양준혁과 최동원의 트레이드에 대한 반발을 단순히 트레이드뿐 아니라 선수의 여러가지 원천적인 권리에 대한 반발의 한 방식이라고 봐도 될것이다.
1.1.3 FA자격 취득 후 삼성으로의 복귀 과정
2001년 양준혁은 FA자격을 취득하였고, 당연히 그의 거취가 문제시되었다. 당시 소속팀이었던 LG를 상대로 양준혁은 첫 협상에서 계약금 및 연봉 포함 4년에 36억원을 불렀으며, LG에서는 3차에 걸친 협상 후 포기를 선언한다. 이후 선수협 창단에 참석했다는 이유, 비싼 몸값 등으로 나머지 구단의 입질이 없어 FA 미아로 인한 은퇴 혹은 해외진출까지 고려하던 과정에서, 삼성이 양준혁과의 협상을 시작, 최종적으로 4년에 옵션포함 최대 27억 2천만원으로 삼성과 계약하였다.
2000년 선수협 문제로 김재현과 함께 트레이드될 뻔 한 상황도 있었다곤 하나, 감독이었던 김성근감독이 양준혁을 잡아줄 것을 구단에 요청하였고 LG측에서도 그 해 타격왕을 달성한 양준혁을 그냥 보내려고 하진 않았으므로 협상은 일단 진행되었지만, 협상은 3차를 끝으로 결렬되고 만다. 당시 양준혁은 LG의 협상 포기 후 언론에 "협상이라는 게 일단 서로 상대방의 반응을 떠본 다음에 협상과정에서 조정하는 거지, 바로 계약 포기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언급을 하면서 황당하다는 인터뷰를 했던 것으로 보아 남들같으면 벌써 정 떨어졌을 상황임에도 어쨌든 협상의 여지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우선협상기간이 소득없이 끝나면서, 양준혁은 시장에 나오게 되지만 선수협 문제로 그를 영입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팀이 없었기에 마냥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리고 9년 후 메츠 계약드립이 터져나오는데
반면 삼성측에서는 무노조경영을 원칙으로 하는 그룹의 정책에 맞춰 구단 역시 선수협을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선수협의 핵심 멤버인 양준혁을 영입할 생각이 전혀없다고 여러번 공표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뒤집은 것이 좌타성애자 김응룡 당시 삼성 감독으로, 구단의 숙원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삼고초려 끝에 모셔 온 감독이 해당 선수를 사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니 구단으로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고, 결국 양준혁과의 FA 계약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김응용이 회고하는 당시의 상황.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삼성은 싫은 티를 상당히 냈으며 첫 협상에서 양준혁이 30억 이하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구단측에서 옵션 포함 최대22억을 언론에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양준혁이 28억으로 물러서다 나중엔 22억을 수용하는 대신 옵션으로 28억을 맞춰달라는 요구를 하여 최종적으로 삼성과 FA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 한달여에 걸친 이 과정에서 LG가 불렀던 금액보다도 훨씬 낮은 금액에도 그 자존심 강한 양준혁이 군말없이 삼성으로 돌아갔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데뷔 시절 벌어진 쌍방울 지명 회피 파동을 떠올렸고, 이로 인해 소위 삼성과의 FA 밀약설이 음모론으로 대두되기도 했다. 다만 이 부분은 위에서도 언급된 김응용의 증언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말 그대로 음모론에 불과하다.
1.1.4 은퇴 갈등과 은퇴경기
하단에서도 다시 볼 수 있겠지만, 은퇴하는 과정에서도 구단, 정확히는 선동열 당시 삼성 감독과의 갈등이 많았으며, 2009년 OPS 0.990을 찍으면서 리그 최상급의 성적을 찍었으나, 당시 구단에서는 양준혁에게 얼마의 기회를 주지도 않고 플래툰으로 빼거나, 대타요원으로 사용하였으며, 특히 어느정도 컨디션이 올라오니 바로 양준혁을 몇 경기 결장시키다 대타 요원으로 출장 시키는 등의 기용을 하였다. 팬들이 보기에는 양준혁이 아직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기회를 박탈시키고 은퇴를 종용하는 모습이었고 결국 양준혁은 올스타전 후 현역 은퇴를 선언,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더러워서 은퇴한다
은퇴를 선언하는 과정에서도 사실 선수 생활 연장의 기회는 있었는데, 김성근 감독이 있는 SK로 가면 선수 생활을 몇 년 더 연장할 수 있었다는 것. 실제로 삼성 구단에서도 '타 구단으로 가겠다면 아무 조건 없이 풀어주겠다'고 예우를 하였고, 은연 중에 김성근 감독도 바라고 있었던 것 같기 때문에 그가 결단을 내렸으면 SK행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구를 시작한 삼성에서 끝내는 것이 옳은 것 같다'고 밝히면서 결국 은퇴를 선언. 한때 LG에서 양준혁과 함께했던 김성근 감독도 "왜 은퇴했어? 이리 오지…" 라고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근데 갔어도 2011년에 성큰옹은...
양준혁의 은퇴에 관해서는 당시 야구를 봤던 팬들과 보지 않았던 팬들, 야구를 보았더라도 선동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팬들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팬들의 의견이 갈린다.
은퇴를 반대했던 팬들은 양준혁이 당장 전해에도 3할, 두자릿수 홈런, OPS 0.900+를 찍었는데 기회를 박탈했으며 만약 정상적인 기회를 받았다면 2014, 15년의 이승엽과 이호준처럼 뛰어난 성적을 보일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며, 은퇴를 찬성한 입장에서는 아쉽지만 박수칠 때 떠나서 오히려 추한 모습 없이 전설로 남을 수 있었고 영구결번 또한 받을 수 있었고, 또한 양준혁이 계속 자리를 지켰으면 채태인의 각성은 없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 만약 15년까지 야구를 했다면 구자욱이 뛸 자리가 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리빌딩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다만 양쪽의견 모두 선동렬이 양준혁을 은퇴시키는 모양새가 좋지 못했다는데는 동의한다.
위의 의견들과는 별개로 팬심으로 보면 1년만 더 참았으면 이승엽과 재회하는 모습을 봤을텐데 너무 일찍 은퇴를 결심했다며 아쉬워 하는 목소리도 있다.
1.2 기록원실 난입 사건
1995년 5월에 자신의 타구가 안타가 아닌 에러로 기록되자 기록원실에 난입, 기록 수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기록원실 문을 발로 찬적이 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이것으로 벌금 50만원이 부과되었지만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대라 여차저차 묻혔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과대포장되어, -항목이름이기록원실 난입사건인것처럼 잠겨진 기록원실 문을 두들기고 항의하다가 문을 안 열어주자 문을 부수고, 난입한것같은 뉘양스가 포함되어있는 루머로 발전하였다.
양준혁이 잠긴 문을 발로 부수고 기록원실에 들어갔다 라는 카더라가 세간에 널리 퍼져 있으나, 실제로는 기록을 못 고쳐준다는 말에 문짝을 걷찬 것이 전부. 그렇다고 그게 잘했다는 것은 아니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윤병웅 기록원은 "양준혁 때도 내가 담당 기록원이었다. 양준혁이 욕을 한 적은 없고, 기록을 못 고쳐준다고 하니까 기록실을 나가면서 문짝을 발로 걷어찬 적이 있다." 라고 증언했다.
1.3 메츠의 입단 제안?
양준혁, 뉴욕 메츠 제안서 9년만에 공개(스포츠조선)
2010년 은퇴경기를 앞두고 있었던 일로, LG 트윈스와의 계약이 끝나고 FA 미아가 될 처지가 되었던 2001년 양준혁이 사실은 뉴욕 메츠로부터 스카우트를 받아 계약서를 작성하는 단계까지 갔었음을 회고하면서 그 증거로 당시 메츠가 보낸 입단 제안서 팩스 문서를 공개했던 사건.
문제라면 양준혁이 공개한 메츠와의 계약서가 엉터리였다는 것. 보너스 항목의 PA는 타석을 의미하는데, 무려 '10만 타석당 5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한다고 명시되어 있다.[6] 이외에도, 골드글러브를 골든글러브라고 표기하는 등, 여러모로 메이저리그 구단의 계약서라고 보기에는 엉성한 부분이 좀 많다. 사실상 제대로 된 계약서라고 보기 힘든데, 일반적인 엘리트 체육인들의 교양 수준을 감안했을 때 양준혁은 저 계약서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저 계약서를 공개한 시점이 선동열이 자신에게 메이저리그에서 오퍼가 왔었다고 인터뷰를 한 바로 다음날이었을 뿐더러 좀 더 이전에는 이종범과 정민태가 일본에서 복귀했을 때 자신에게도 해외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지만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안 갔다는 식의 인터뷰로 두 선수를 간접적으로 디스했던 전력이 있었던 그가 느닷없이 9년 전의 제안서를 꺼낸 모습이 타 팬들의 시각에서는 쓸데없는 자랑질로 보였고, 이것이 위의 엉성한 문서 내용과 합쳐져서 심지어는 지기 싫어서 사기를 친 것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좋은 반응를 얻지 못했다. 얼마 뒤 있었던 은퇴식의 감동에 묻혀서 금세 잊혀지기는 했지만.
1.4 양준혁 vs. 선동열
야구계의 소문난 앙숙(?). 사실 양준혁 vs. 선동열 대립의 상당 부분은 8개구단 팬덤의 추측으로 구성된 것이다. 양준혁은 선수협 사태 이후 선동열을 비판했고, 선동열은 양준혁을 홀대한 끝에 강제 은퇴시켜버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둘의 악연은 선수협 창설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수협 발족을 기획하던 양준혁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선동열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에 선동열은 일본 선수회의 정관과 각종 규약 등의 번역본을 입수, 양준혁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선수협을 적극적으로 지원해달라는 양준혁의 요청에는 "선수협문제는 도와주고 싶지만 내가 나설 일은 아니다"라고 거절하면서 둘간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선동열이 삼성 코치를 거쳐 감독으로 부임하였는데, 초반에는 팀 성적도 양준혁 개인의 성적도 잘 나와서인지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서로 상대방을 높여주는 말을 했다. <프로야구 이모저모> 양준혁 "초보감독 같지 않았다", 선동렬 "양준혁 2,000안타는 日기록보다 값져", [말말말 선동열 "양준혁 없으면 기둥하나 없어지는 건데.."]
그러나 2008년부터 둘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2008년 양준혁이 주춤하자 선동열은 양준혁을 대상으로 플래툰 체제를 가동했고, 이때부터 선수 양준혁과 감독 선동열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팬들에게 알려졌다. 참고로 플레툰을 쓴다고 좌투에서 뺀 양준혁의 좌투 상대 타율은 0.302이다. 또한 그의 전년도 OPS는 1.019
그리고 2009년이 되면서 양준혁이 성적으로 찍어 내리면서 딱히 별말이 나올 수 없게 주전으로 기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서, 둘간의 갈등은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듯 했다. 물론 2009년에도 초반에는 선동열 감독의 양준혁 흔들기 시도는 자주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5번 양준혁을 상대 선발이 좌투수라고 플래툰을 돌리고, 양준혁의 빈 자리인 5번에 심광호를 기용하는 것과 같은 충격과 공포의 에피소드가 있으니.... 참고로 2009년 OPS는 0.990를 기록했으며, 좌타 상대로는 0.385를 기록했었다. 그리고 심광호의 2009년 성적은 2경기 5타수 타율 0할이다.
2010년 초반 역시 연례행사답게 수차례 플레툰으로 양준혁을 돌리면서 간을 봤으며, 이후 컨디션 저하를 겪자 바로 6월에 주전에서 탈락시키면서[7]삼성 팬덤의 내전이라 적고 소수 삼팬+위장전입 감독팬과의 내전이라고 읽는다.은 한층 격화되었으며, 양준혁의 올스타전 활약 당시 선동열의 뚱한 표정 등이 중계에 비춰지면서[8]. 양준혁 vs. 선동열 갈등구도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리고 올스타전 후, 양준혁은 은퇴를 선언했다.
삼성 팬덤은 선동열이 양준혁을 강제 은퇴시켰다며 격분했고, 중립적으로 보던 6개구단의 팬마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며 다같이 선동열 감독을 깠다.
'왜 그렇게 나를 싫어했었을까요? 난 한번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거든요. 늘 이기기 위해 노력했구요. "야구에 대해서는" 드러내놓고 반발하거나 반항하지도 않았잖아요. 열심히 하는 거 말고 뭐가 더 필요 했을까요?'
은퇴 결심을 한 후의 양준혁의 인터뷰였다. 한편 양준혁의 은퇴식에서도 선동열은 시크한 표정으로 일관했고, 은퇴식 말미의 기념사에서도 "양준혁은 누구보다도 볼을 잘 맞혔던 선수"라는 어중간한 찬사로 마무리해 양준혁의 팬덤에게 가열차게 까였다.
양준혁의 은퇴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양준혁은 2011년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류중일 감독으로 바뀔 줄 알았다면 3년은 더 뛰고 싶었다'고 밝히며 선동열 감독이 없었다면 은퇴결심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라이언 가코를 믿을 것이라는 류중일 감독의 발언에는 "나도 믿어주는 감독님 밑에서 뛰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덧붙이며 선동열 감독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트위터에 올라온 "가장 싫어하는 선수 5명은?"이란 질문에 "김선수, 이선수, 박선수, 장선수, 선선수[9]"라고 답변, 대놓고 선동열을 디스했다(…)
대체로 은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팬들이 양준혁 쪽에 손을 들어주는 편이며, 선동열 감독이 선수를 은퇴로 몰고 간것은 최소 옳은 판단은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다만 2011년 여름에 잠시 선수협과 관련해서 양준혁이 비판받으는 것에 편승해서 선동열을 옹호하려는 시도가 나왔지만... 이후 선동열이 이종범마져 강제 은퇴 시키면서, KIA팬마져도 최소 고참 타자를 강제 은퇴 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선동열을 옹호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물론 골수 선동열 개인팬들은 아직도 선동열을 응원하지만.
하지만 선수협 관련해서는 선동렬을 사실과 다르게 비하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수협 참고
양준혁의 은퇴 이후에도 두 사람은 종종 마주치는 일이 있는데 일단 카메라 앞에서는 훈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행사장에서 함께 하기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정말로 화해했을지, 본심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두번째 기사 사진 링크의 사인회장에서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는 두 사람의 무표정한 모습이 우연하게 찍힌 걸 수도 있지만 이 항목의 내용을 읽고 보면 사람들에 따라 절묘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1.5 선수협과 양준혁
일반적으로 양준혁은 선수협의 투사로 알려져 있었다. 선수협을 결성할 때 송진우, 심정수, 마해영과 더불어 큰 활약을 했으며, 선수협 회장직은 송진우가 맡았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열성파는 양준혁이었다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일단 본인 스스로 방송 및 자서전 등에서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1.5.1 강병규의 트윗과 양준혁의 대응
2011년 여름, 과거 선수협의 대변인이었던 강병규가 양준혁이 선수협의 단물만 빼먹고 변절했다며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트윗에 올렸다.
강병규에 의하면, '양준혁이 후배들에게 자신이 책임질테니 따라오라고 설득했다가 그를 따랐던 선수들을 내팽개치고 구단에게 붙었고, 이 과정에서 양준혁만큼의 인지도를 가지지 못했던 선수들은 버림받은 채 모조리 숙청당했다'는 것. 또한 강병규가 SK에서 방출될 때[10] 양준혁이 그에게 '구단이랑 잘 좀 지내지'라는 말을 했다면서, 자신은 이후 연예인으로 벌만큼 벌었으니 손해보진 않았지만 그때 이름없는 수많은 후배들이 야구인생을 접어야 했다며, 양준혁이 선수협 관련 이야기로 자기 자신을 미화하는 것을 가만 둘 수 없다는 등의 언급도 했다
그러나 강병규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것이 차차 알려지면서 강병규가 자신의 재기를위해서 일부러 노이즈를 일으키는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양준혁과 선수협 주축선수들은 강병규가 방송으로 빠져나간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투쟁해서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면서 2001년 1월 구단과 선수협실체를 인정받는 합의서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양준혁 마해영 송진우등은.. 구단측에서 마지막까지 선수협에서 영구히 참가하지 못하게 조건을 달아서 합의안을 만든다 이런 구단의 어이없는 짓을 봐도 선수협 주축선수들이 구단측에 붙엇다는게 엉터리인걸 알수있다.
합의 이후 선수협 기존 주축선수들은... 보복 트레이드당하거나, 양준혁처럼 FA미아가 될뻔 하거나..심정수 ,박충식처럼 야구계에 남지못하고 이민가거나 고생했다
반대로 선수협5적이라 불리는 선수들은 구단에 남아서 승승장구해서.. 현재 코치감독생활 잘하고 있다. [11]
사장단 대표와 선수협 집행부는 전날 이홍석 차관보의 적극적인 조정작업으로대략적인 합의를 마친 상태였으나 이날 합의문 작성을 앞두고 새 집행부 구성방법을놓고 논란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1시간30여분 동안의 협상끝에 송진우, 마해영, 양준혁은 새 집행부에도참여하지 못하도록 결정했고 새 집행부는 선수협측 방안대로 선수들이 자율적으로구성하기로 했다.선수협 구단 합의문 당시 기사 [12]
양준혁(32)에게 선수협은 영원한 족쇄인가. 선수협 정기총회가 열린 4일 경주 교육문화회관에 모인 일부 선수들은 양준혁의 영입협상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일부 구단 고위층의 입김을 의심하고 있다. 원 소속구단인 LG가 협상을 아예 포기한 뒤 양준혁의 영입을 추진했던 구단은 삼성과 기아. 지금쯤이면 어렴풋이나마 연봉과 조건에 관한 이야기나 나올 법하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은 단순히 몸값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준혁을 비롯한 지난 선수협의 주축선수들은 이를 구단 고위층이 양준혁의 영입에 딴죽을 걸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선수협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양준혁이 거액의 연봉을 받으면서 쉽게 선수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 즉 선수협 활동으로 '찍힌' 선수에게 불이익을 줘 앞으로 선수들이 단체행동을 못하게 하는 등 선수들을 순치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보고 있다. 선수협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몇몇 선수들이 실제로 불이익을 당한 사례는 많다. 초대 대변인이었던 강병규는 두산에서 SK로 트레이드된 뒤 옷을 벗었고, 마해영(삼성)과 심정수(현대)도 정든 팀을 떠나야 했다. 경주에 모인 선수들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양준혁을 미아신세로 만들려는 각 구단과 KBO의 의도가 분명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2001 경주 선수협총회 당시 선수협 선수들 분위기 [13]
이후, 당시 사건에서 각을 세웠던 최익성이 양준혁 지지 발언을 하고[14],선수협 소속이거나 소속이었던 선수들과 양준혁 사이의 관계가 극악으로 치달았다는 등의 소식이 없다는 점에서 선수협에 대한 그의 본심이 어떠했든, 적어도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협 소속 선수들과의 사이는 원만해 보인다.
1.5.2 강병규 선수협관련 발언의 허구성
2011년 10월이후 강병규가 양준혁에 저격을 시작하였다. 이에 의하면 양준혁은 선수협에 앞장섰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구단측에 붙어서 선수협을 배신하였고, 그 이후 삼성으로 이적한후 선수협을 모른체한 배신자라는 주장이며, 이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사실처럼 알려졌으며, 현재도 믿는사람이 있다. 이 내용과 더불어 그 당시 선수협 지도부가 모두 구단측에 붙어서 합의한결과 힘없는 선수들이희생되었다는 잘못된 사실이 퍼져나갔다.
게다가 이 대해 당시 선수협에 참여했다가 구단측으로부터 일방적 보복을 당한 최익성도 강병규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역시 조기은퇴당하고 야구계에서 퇴출되어 이민까지갔다온 박충식등은 양준혁을 지지하였고, 그 당시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면서, 강병규의 거짓이 알려지게되고 결국 그 당시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을 당한 강병규의 재기를 위한 몸부림쯤으로 결론지어지고 있다.
- 양준혁이 선수협에서 도망갔다??
강병규의 발언에 의하면 한참 선수협이 힘들때 양준혁이 도망가서, 삼성에 가서 잘먹고 잘 산것처럼 묘사되어있다. 실상은 2001년 1월 선수협과 KBO와 구단측이 모여서 합의안도출할때까지 주축 멤버중의 하나가 양준혁이다.
- 양준혁을 비롯한 선수협 주요멤버들의 구단편으로 변절하였다??
선수협 사태를 강경대응하던 kbo는 2000년 12월 양준혁 송진우등 6명을 전격 방출했다. 선수생명을 끊은것이다. 그러나 팬들의 엄청난 반발로 주요6인 방출철회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문화복지부 장관 김한길까지 나서게 된다. 대기업으로써는 장관까지 합의를 종용하는 상황에서 2001년 1월 어쩔수없이 선수협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단측에서는 양준혁 송진우 마해영은 사퇴하고, 2차 지도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내용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합의문에까지 들어가게된다. 선수협사태종결 당시 기사
즉, 마지막까지 양준혁 송진우 마해영 등 선수협 주요멤버는 구단의 눈의 가시였다. 강병규는 그 당시 이미 티비로 진출해서 구단의 견제 명단에도 없었다.
- 선수협 주요멤버들에 대한 구단의 보복
의리의 회장님을 가진 송진우와 이미 트레이드된 양준혁을 제외한 전원이 합의안 발표 한달도 안지나서 보복 트레이드 되었다. 그 당시 선수협 집행진이 구단편에 붙었다면 그런 일이 있었을까.
그 이후 선수협 지지하던 선수들중 기량 모자라거나 저하된 선수는 야구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고, 기량이 여전히 좋아서 팀에 쓸모가있는 선수는 선수생활 유지했다. 강병규나 최익성도 그러했지만, 양준혁을 지지하는 박충식 등도 조기은퇴후 프로야구계에서 남지 못하고 결국 이민가서 10년이나 호주가서 살다 돌아왔다.
선수협5적이라 불리는 선수들은 거의 자기팀에서 은퇴하고 코치하거나 감독까지되었지만, 양준혁을 비롯 선수협 주요멤버들 중에서 보복트레이드후 선수생활계속한 선수들도 어떤 이유에선지 은퇴이후 거의 대부분 코치등으로 친정 구단에 남는 경우가 거의없었다. [15]
- 양준혁 FA미아설
선수협과 구단의 합의가 2001년 1월에 있었고, 그 후 11개월후 2001년 11월 양준혁은 FA가 되었는데 강병규의 말과는 다르게 선수협사태가 끝난 한참뒤에 Fa가 된것이다. 강병규에서 촉발된 양준혁에 대한 음모론은 양준혁의 FA미아도 거짓이고, 이미 구단측에 붙어서 삼성에 가기로 합의했다는 식의 내용이 마치 사실인양 떠돌고 있다. 그러나 FA미아설은 양준혁이 소설로쓴게 아니다. 그 당시 김응용 감독이 영입생각이 없던 삼성사장에게 영입을 요구했다고 직접 언론에 여러번 밝혔다 [16]관련기사 김성근 감독 역시 그 당시 FA당시 선수협관련해서 양준혁이 힘들었는데 엘지에 잡아달라고 요구했다고 인터뷰한적있다. [17]
- 그 당시 실제 선수협을 구성하는 수백명 선수들과 양준혁
강병규가 티비에서 잘나가던 그 시절, 2001년 12월 선수협 500여명의 선수가 모여 총회를 열었고, 그 총회에서 선수협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더불어, 양준혁의 FA미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 강병규는 모르는 실제선수들의 목소리다. [[ http://cafe.daum.net/bluetwins/5Wv/890?q=%BE%E7%C1%D8%C7%F5%20%C1%B7%BC%E2&re=1%7C선수협총회 당시기사]]
1.5.3 2009년 선수노조 결성 투표 거부 루머
2009년에 선수협이 선수노조로 전환을 시도할 당시 삼성과 LG 소속 선수들이 투표를 거부한 일이 있었는데, 위의 트위터 사건과 더불어 이 사건이 와전되어 양준혁이 노조설립 안건에 대한 '투표 자체를 거부하고 삼성 선수들을 인솔해 퇴장했다'는 루머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확실한 것은 투표거부 사실 뿐, 이를 양준혁이 주도했다는 건 몇 년 뒤에 썰로만 퍼진 것으로 보인다. 강병규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선 '삼성선수들이 거부했는데 고참인 양준혁이 책임져야한다'는 식의 모호한 발언만 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사건과 더불어 '투표 거부를 양준혁이 주도했다 카더라'는 소문이 동네방네 퍼졌다는 것이 문제(...)
더욱이회장님 송진우가 아직 은퇴하지도 않은 한화도 초기에 노조설립에 반대하다가 태도가 변하는등, 선수대표가 아닌 고참 한명이 팀 전체의 의견을 좌지우지 못한다.
2000년 선수협 설립당시에 총회에서 여러논쟁을 벌였던 당사자들 김기태 유지현 등도 이제 30대내외로 최고참이 아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주장이었다는 점이다. 즉, 최고참이 아니라 주장이 선수들을 좌지우지 했다.
즉, 최고참 한명이 선수단을 좌지우지하는게 아니라는것이다.
1.6 양준혁 전복갈비찜 사건
어예
2011년 9월 홈쇼핑에서 직접 개발했다던 양준혁 전복갈비찜을 런칭. 첫 방송 때부터 매진을 기록하며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판매 후의 반응이 영 좋지 않았다. 포장 및 음식의 상태 모두 하나같이 엉망이었기 때문. 거기다 홈쇼핑 홈페이지의 부정적인 후기글이 속출하자 홈쇼핑사에서 아예 게시판을 막아버리면서 대차게 욕을 먹었다. 실제로 먹어본 사람들 말로는 이걸 판 양준혁 얼굴 보기도 싫다고 했을 정도...
이를 두고 강병규가 양심을 속이지 말라고 했다. 이로 인해 생긴 별명이 양불신. 누가 할 소리야?
어쨌든 이 전복갈비찜 판매는 양준혁 은퇴 이후 최악의 흑역사로 손꼽혔다. 양갈비 별명도 득템
갈비찜에도 들어갔던 전복을 포항 앞바다에서 직접 양식하고 있는데 2014년 9월 적조가 발생하는 바람에 전복이 모두 폐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2012년에도 양준혁은 계속해서 소곱창 등의 식품사업을 벌였다. 전복갈비찜 때의 좋지 않았던 반응으로 식품회사에서 신경을 쓴 모양인지 이전보다는 평가가 좋아졌다. 9회말 2아웃에서 떠올렸다는 바로 그 곱창!
1.7 장남식 창씨개명 성명권 논란
양준혁이 선수협에서 탈퇴함에 따라, 2012년 4월 1일부터 성명권 및 퍼블리시티권의 선수협 위탁이 해제되었고 2012년 3월 28일 온라인 야구게임 마구마구 의 시즌5 업데이트로 인하여 선수카드 명이 양준혁에서 장남식(…)으로 변경되었다. 다른 온라인 야구 게임들에서도 모두 같은 장남식으로 변경되었다.
이미 은퇴선수를 둘러싸고 성명권과 관련한 논란이 한 차례 크게 있었고, 이와는 별개로 메이저리그로 가면서 성명권 역시 KBO의 손을 떠나 가명처리된 선수들도 있었던 만큼 은퇴선수의 가명 처리 자체는 큰 이슈가 될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4대 야구게임 모두가 이름을 장남식으로 통일하여 변경했다는 점. 마구마구의 장씨 형제들 혹은 프야매의 신씨 형제들과 같이, 각 야구게임들은 자신들만의 가명 규칙이 있는데 양준혁의 경우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장남식'으로 이름을 바꿨던 것. 장남식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장가도 못간 남자 식히(새끼)라는 의미가 유력하다고(...).
양준혁의 성명권 및 퍼블리시티권을 양준혁 야구재단으로 옮겼는데, 결국 게임사들이 양준혁 야구재단과의 협상 실패로 본명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게임사들이 저렇게 뒤끝 쩌는 모습을 보인 덕분에 이에 대하여 까들은 양준혁이 자기 돈 벌 욕심에 눈이 멀어서 게임사들이 저런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었냐며, 야구게임팬들에게 추태를 보이고 있다며 신나게 깠고, 양준혁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장남식씨라며 조롱하였다. 또 우리의 야뱅께서 디스를 시작하심 반면 양준혁의 팬들은 아무리 협상이 안되었기로서니 멀쩡한 사람의 이름을 장가 못 간 놈이라고 고친건 디스질이라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양준혁 측은 침묵하였다. 명예훼손으로 신고 들어가야 되는거 아닌가?
사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양준혁은 본인 성명권을 사용하여 재단 사업을 운영할 예정이였으며, 각 게임사와의 개별 계약을 통해 성명권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한 상태였다고 한다. 다만 게임 회사 입장에서는 개인 한 명과의 계약을 할 경우 이후 유사 계약으로 은퇴 선수 계약시 혼란 및 비용이 발생할 수 있기에 계약을 아무도 안하고 차라리 가명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추측으로 나왔다. 이 분의 선례도 있던 터라...
이에 대하여는 야구게임사와 선수 개인간의 복잡한 셈법이 얽혀있는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막장행각이 드러나면서[18] 선수들은 선수협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나름의 이름값을 가진 선수들은 자신의 성명권을 개별적으로 (경제적 이익 목적이든, 사회적 기부 목적이든) 사용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에 비하여 프로야구 온라인 게임업체 입장에서는 선수들이 그런식으로 하나둘씩 선수협의 위탁대상에서 제외되어 개별협상의 대상이 되면, 게임 운영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란 우려가 생기게 되었고, 가급적이면 선수 전체의 성명권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었다.
현재 선수협과 독점으로 성명권 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NHN (야구 9단)으로, 다른 업체는 NHN에 인정된 재판매권을 기초로 선수들의 실명과 사진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 이전의 이상훈등의 초상권 논란에서 보듯이, 온라인게임회사는 선수 개별의 성명권이 문제가 된 경우에는 차라리 가명을 쓸지언정 선수 개별간의 협상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입장에 있다. 이런 이유로 발생한 가명의 선수는 게임사마다 가명을 임의로 붙여서 서로 이름이 다르기 마련인데, 양준혁 건에 있어서만큼은 모두 '장남식'으로 통일하였다는 점은, 앞으로도 선수 개별간의 성명권 계약은 어느 업체에서도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담합 메시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성명권 관련 논란은 마구마구의 항목도 참고해 볼 것.
양준혁 측은 양준혁야구재단에 유/무형의 성의 표시만 한다면 성명권을 무료로 쓰게 해주겠다는 입장에 있고,(님 제시! 성의 보이면 드림) 유일하게 한 야구게임에서만 양준혁의 이름을 쓸 수 있는데, 이는 양준혁 야구재단 배너를 달아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야구 게임 회사에서는 이것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성의 표시'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어느 조건으로 기부를 하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 비난은 야구게임사가 받고, 그것의 공은 선수들만 받는다는 점에서 선수간의 개별협상보다 오히려 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프로야구라는 특수한 무대에서 쌓아올린 선수 개인의 성명권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어느 정도의 가치가 더 있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게 된다면 자연히 해결되겠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정확히 알 길이 없고, 앞으로도 이를 판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양준혁과 같은 상황이 반복될 우려가 크다는 것인데, 일단은 선수들이 성명권을 자유롭게 푸는 것이 현재까지의 모습이다. 2015년 기준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가명을 쓸 수밖에 없는 선수를 제외하면 김태균, 이범호, 이대호, 이승엽, 박찬호의 경우 해외진출, 선수협 위탁 해제, 혹은 은퇴로 인해 한 차례 가명을 겪었다가 다시 본명으로 돌아온 상태이며, 류현진과 윤석민은 가명처리가 되어 있다. 후자는 다시 본명으로 돌아오겠지 반면 김병현의 경우 국내로 귀환했음에도 여전히 가명을 사용중이다. 아마도 현역이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소속으로서의 성명권이 꼬여서 그런 듯. 그럼 임창용은?
결국 양준혁 측에서 초상 및 성명권 사용 승낙에 관한 문서를 각 게임회사에 발송하는 것도 고려 중이란 인터뷰가 있었고 # 실제 그런 절차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2012년 4월 13일자로 야구 9단과 프로야구 매니저에서 업데이트를 통해 장남식을 양준혁으로 환원시켰으며, 마구마구에서도 2012년 4월 18일 패치로 다시 양준혁 카드가 되었다.
여담으로 야구게임 '와인드업'은 당시 양준혁의 이름을 장남식으로 바꾸지 않았었는데, 배너를 삽입하는 조건으로 재단과 협상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 기타
자신의 야구재단을 통해 어린이 야구캠프 등 각종 사업을 벌였는데, 하필 같은 시점에 박찬호가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자신 및 유명 선수와 함께하는 야구캠프를 여는 바람에(...) 당연히 비교가 되고 말았으며, 참가비 및 구성에서 양준혁의 캠프 참가비용이 꽤 고가였기 때문에 야구 팬들에게 까인 일이 있다.
또한 야갤을 하냐는 트윗 질문에 하지 않는다고 답하고선, 얼마 뒤 그와 대척점에 있는 엠엘비파크의 접속 인증글을 올려 야갤러들에게 배신자 양가놈이라고 대차게 디스당했다. 맞다. 바로 양가놈이란 별명의 탄생 이유(...)
당시 국내야구 갤러리와 MLB파크는 양준혁과 이종범을 두고 자주 설전을 벌였는데, 그 때 까지만 해도 국내야구갤러리에서는 양준혁을 밀어주며 '양신'이라 칭했지만 위 사건을 계기로 배신감을 느낀 국내야구 갤러들이 '양씨'로 격하시키며 '양가놈'까지 가게 된 것.
자신의 트위터에서 음주운전 사고에 연루된 이용찬을 옹호했다가 두산과 삼성을 제외한 6개구단 팬들에게 폭풍같이 까였다가 글을 삭제한 적이 있으며, 또 고영민의 사인 훔치기 의혹을 제기했다가 두산팬들에게 폭풍처럼 또 까였다. 트위터의 특성 때문에 조금이라도 문제되는 발언이 나오면 바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퍼거슨옹 이번에도 1승 추가하셨습니다
2 항변
다른 선수들같으면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는 투로 가볍게 언급될 사건들이 많다는 점에서 유독 양준혁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이 많으니까 항목이 넘쳐서 이렇게 독립이 된 거잖아 실제로도 몇몇 항목은 루머에 그치거나 물증이 없는 경우도 있고, 사소한 헤프닝이거나 양준혁의 잘못은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템퍼링 같은 경우는 관행에 따라 유야무야 넘어가서 그랬을 뿐 엄격하게 규정을 적용하면 그 당시 기준으로도 선수의 생명을 끊어버릴 수도 있는, 그래서 추가 규정까지 만들어진 큰 사건이었고 그 외의 일들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변명이 될 만한 것은 없다. FA를 통한 삼성으로의 복귀나 선수협과 관련된 문제는 루머가 사실을 덮어버렸다는 점에서 선수 본인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적어도 후자의 경우는 양준혁이 무시 말고 적극적인 대응을 보였다면 이 정도까지 일을 키우고 불신을 사진 않았을 수도있다.
그러나 강경대응을 한다면 강병규와 진흙탕 싸움을 해야하는데, 아애 무시해버린덕에 그나마 팬들이 진흙탕을 덜 본것이다. 사실 분야는 다르지만, 스타매니지먼트의 기본이 일을 키우거나 진흙탕싸움을 피하는것이지만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적극적으로 고소고발해서 인실좆을 만드는 식의 대응을 하기도 한다. 이병헌과 강병규의 관계가 그러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강병규는 유죄를 받아 죄인이되었고, 이병헌의 이미지도 흐려졌다.
꼭 강경대응이 최선은 아니란것이다. 잃을게 많은 사람과 잃을게 없는 사람의 싸움은 무조건 피하는게 최선일 경우도 많다.
- ↑ 양준혁의 계약금은 1억 1200만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발표했다. 실제 계약금은 1억원이었고 연봉은 당시 신인선수 연봉인 1200만원으로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1800만원이었다.
- ↑ 물론 1994년까지 상무는 6개월 및 18개월 방위 판정을 받은 선수의 복무가 가능했다. 1995년 병역 제도가 변경되면서 상무는 현역 자원 및 신장과 체중으로 인해 보충역 판정을 받은 선수들만 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보충역 판정을 받고 군 복무를 뒤로 미루고 있던 1974년생까지의 선수들 상당수가 공익요원 복무를 하게 된다.
- ↑ 실제로 해태에서 양준혁은 .323의 타율에 32홈런-21도루, 그리고 본인의 한 시즌 최다 타점, 득점 기록인 105타점-96득점을 올리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 ↑ 다만 이쪽은 김응용 감독이 약속대로 보내준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 ↑ 임성동이란 아마추어 스타선수를 구단에서 자기들 맘대로 선수를 지명해놓고 그 선수가 해외를 가려고 하니까 자기들 선수라면서 못가게 막은 사건이다. 사실 미국의 경우도 그렇지만, 구단에서 맘대로 담합해서 선수를 지명할 권리가 없다. 자본주의에서 그런걸 담합이라해서 매우 중대한 경제적 불법행위로 취급한다. 모든 신인은 자유계약FA로 모든 구단과 일대일로 협상해야하는게 원칙이다. 그렇지만 그런식으로 하면 구단운용이 안 되므로, 미국의 경우 선수노조가 구단과 합의하에 구단에서 선수복지로 돈을 받고 선수는 드래트트를 신청해서 합법적으로 구단에서 선수를 드래프트하게 되는것이다. 즉, 선수노조도 인정하지 않은 대한민민국 야구단이 임선동의 허락도 안받고 그들내부에서 담합해서 임선동은 엘지선수라고 맘대로 정해놓고.. 엘지선수인 임선동이 자기 맘대로 해외간다며 소송을 건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구단은 그렇게 할 권리가 원천적으로 없다. 물론 재판은 임선동이 승소했다. 그러나 그런 승소과정에서 해외진출은 물건너갔고, 결국 국내에 잔류하게 된다. 이렇듯 너무나 당연한 권리조차 묶여있는게 선수들의 현실이다.
- ↑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원년 이래 해태/KIA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두 팀이 가졌던 총 타석수가 약 14만 타석이다.
- ↑ 2010년 당시 양준혁의 기록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 참조. 시즌 초 양준혁이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꾸준하기로 유명하고, 전년도 리그 10위 안에 드는 타자를 2-3개월만에 완벽한 백업으로 돌리는건 상식에 어긋나고 팀 성적을 위한 운영도 아니라는 의견이 대다수.
- ↑ 표정이 굳은 채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 ↑ 참고로 한국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 1군 출장기록이 있는 선씨는 딱 한명이다(...)
- ↑ 강병규 본인은 두산에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된 후 연습 부족 등으로 야구판에서 퇴출되었다.
- ↑ 2015년 두산 우승감독 김태형, 엘지 기아 감독 김기태 등
- ↑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0049615
- ↑ http://cafe.daum.net/bluetwins/5Wv/890?q=%BE%E7%C1%D8%C7%F5%20%C1%B7%BC%E2&re=1
- ↑ 더군다나 1월 5일에 양준혁은 최익성이 운영하는 저니맨 야구육성 사관학교에 방문하였으며 같이 웃으며 사진도 찍었다.
- ↑ 김기태, 김태형은 감독까지 올랐고, 유지현 김경기 조경택 모두 코치생활 잘하고 있다. 반면 양준혁, 마해영, 심정수, 박충식 등은 코치를 안하는지못하는지 상태고, 송진우는 의리의 회장님 덕에 한화코치를 했고, 박충식 심정수(다만 심정수는 유학 성격이 컸다.)는 이민까지갔다. 과거 1차 선수협 당시 최동원 역시 은퇴후 방송등 야구로 돌아가지 못하다가 거의 20년만에 잠시 코치생활을 했었다. 다만 최태원이나 박정태는 코치생활을 제법 했고, 김재현도 방송 몇 년 하다 2015년 코치를 하고있다.
- ↑ 김응용 감독은 우승청부사로 삼성에 영입된 감독. 그가 원하는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는것이 그 당시 삼성 방침이었다. 게다가 김응용이 삼성 사장의 고교선배로 삼성 사장은 정말 선배처럼 예우해줬다.
- ↑ http://sports.media.daum.net/sports/baseball/newsview?newsId=20100730203420591 김 감독은 "양준혁은 효자다. 기본적으로 착하다. 2001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렸는데, 당시 선수협 문제가 있었다. LG 구단에게 '양준혁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착한 아이다. 내가 책임질테니 LG에서 꼭 계약을 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는데, 결국 LG에서 잡지 못하고 삼성으로 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 소속 선수들의 성명권 및 퍼블리시티권을 위탁관리하는 중 20여억 원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막장행각을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