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 관련 인물(KBO), 범죄자, 출연금지 연예인
- 전 정치인은 강병규(1931), 전 관료는 강병규(동명이인) 문서 참조.
1 소개
1972.05.20~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전직 MC. 그리고 범죄자.
2 프로야구 선수 시절
이름 | 강병규(姜炳圭 / Byeong-gyu Kang) |
생년월일 | 1972년 5월 20일 |
신체 | 186cm, 81kg, O형 |
출신지 | 서울특별시 |
학력 | 미성초 - 성남중 - 성남고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1년 OB 베어스 고졸연고 자유계약 |
소속팀 | OB/두산 베어스(1991~1999) SK 와이번스(2000) |
타석에 시도했던 시절 (출처 : 포토로) |
(출처 : 포토로) | (출처 : 포토로) |
성남고를 졸업하고 1991년 OB 베어스에 입단한 우완 투수. 1990년 성남고를 봉황대기 결승까지 올려놓는 활약을 하며 OB 베어스에 입단했다. 아마 시절에는 대단한 유망주였다. 당시 LG와 OB(지금의 두산)이 모두 강병규를 1차 지명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제비뽑기로 결정한 것은 유명한 일화[1].
140km/h대의 직구 위력은 평범한 수준에 위력적인 결정구 부족으로 안타를 많이 허용하는 타입(통산 피안타율이 .278)이지만 구위에 비하면 공격적인 피칭으로 이닝을 많이 먹던 투수였다.
통산 성적은 56승 63패 평균자책점 4.15. 패가 승보다는 많지만 그래도 선발 투수의 지표인 시즌 10승을 두 번이나 기록했다. 게다가 1990년대는 우승한 1995년을 제외하면 베어스의 암흑기였던 점이 크고, 타선도 우동수 트리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강하다고 볼 수 없는 타선이었다. 통산 247경기중 137경기가 선발이었는데 완투를 15회 기록하였고, 선발 등판시 평균 이닝 6이닝을 먹어주는 괜찮은 선발 투수였다. 9회 2사까지 무실점으로 막다가 백투백 홈런을 맞고 2:1로 진(...)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그렇게 뛰어난 투수는 아니었다. 어느 팀에 가도 1선발을 맡을만한 선수는 당연히 아니었고 3, 4 선발 정도는 할 수 있는 투수였다. 이닝을 많이 먹었다고 해도 애초에 방어율이 5점대라는 것은 선발투수로서 뛰어났다고 볼 순 없다. 방어율이 전부는 아니지만 수비지표가 없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부족한 KBO 기록에선 방어율로밖에 따질 수 없다.
유독 삼성에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엽에게는 약했다고 한다. 특히 이승엽이 1999년 54홈런을 치던 시즌에 그가 3개를 맞았는데 그걸 가지고 토크쇼에서 참 많이 써먹었다. 이승엽이 비타민 게스트로 나왔었을때 이런 아픈 기억을 웃으면서 이야기하기도.(...) 참고로 이승엽에게 가장 많은 홈런을 허용한 투수는 태평양-해태/KIA에서 활약했던 최상덕(7개)이었다.
하지만, 이승엽에게 3홈런을 허용한 시즌이 그의 커리어 하이 였다는게 함정.
평소 장호연을 롤모델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연봉 협상을 질질 끌어서 임탈 위기에 가기도 할 정도로 구단에 민폐를 많이 끼쳤다. 그렇다고 장호연의 피칭 스타일이나 자기관리를 본받았냐면 전혀 아니올시다. 적어도 자기관리는 충실했던 장호연과는 달리 놀기 좋아한 탓에 스프링캠프에 늦게 합류하면서 이게 체력부족으로까지 나타나 전반기에는 나름 괜찮은 선발이었다가도 후반기에는 폭망하는 시즌의 반복이었다. 그나마 괜찮게 한 게 1993년과 1999년. 이때가 강병규 역사상 유이한 두자리 승수시즌이다. 뭐 이런 상황에서 장호연처럼 구질을 연마하거나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노릇이겠고...
결국 구단에서 실력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선수협 파동이 터지자마자 2000년 시즌을 단 1주일 앞두고 광속으로 그를 SK 와이번스로 넘긴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 말고도 타팀 선수협 관련자들은 대부분 트레이드되었다. 살아남은 송진우가 특이한 케이스.[2] 결국 그는 SK로 원하지 않는 이적 후 완전히 폼을 잃었다. 강병철 감독이 낮경기에 강병규를 중간계투로 등판시키려 했으나 '자신은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낮 경기에는 뛰어서는 안 된다.'하는 드립을 날려 SK 코칭스탭은 물론 프런트에서도 심히 찍혔다. 물론 이게 조기 은퇴의 원인이라고 볼 순 없겠지만, 일련의 사건 때문에 야구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는 사실에는 부정할 수 없다.
한국야구선수협의 선수협 파동에서 송진우, 김재현, 마해영 등과 함께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선 공로가 있다. 다만 나중에 보인 막장행각으로 다 까먹었다.
결국 태업을 하다가 2000 시즌을 날린 이후 박재용, 박정현, 김정수, 장광호 등과 같이 SK에서 방출당했다.
2.1 선수시절 성적
1991년 17경기 60과 2/3이닝 2승 2패 평균자책 2.67
1992년 18경기 67과 2/3이닝 평균자책 5.05
1993년 29경기 139와 2/3이닝 10승 9패 평균자책 3.09
1994년 18경기 78이닝 5승 5패 평균자책 4.27
1995년 18경기 103과 2/3이닝 5승 6패 평균자책 4.60
1996년 25경기 121과 2/3이닝 7승 11패 평균자책 3.99
1997년 48경기 103이닝 6승 5패 평균자책 3.58
1998년 34경기 134이닝 5승 10패 평균자책 3.63
1999년 29경기 143과 1/3이닝 13승 9패 평균자책 5.21
2000년 11경기 26과 2/3이닝 2승 2패 평균자책 8.44
유감스럽게도 마구마구에서는 실명으로 있었다가 은퇴 선수 초상권 및 이름 사용 문제로 2011년 2월 16일자 업데이트 때 강경호로 바뀌었다. 흑역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직 선수들의 경우는 KBO에서 일괄 관리하는 초상권 및 이름 사용권을 은퇴 선수의 경우는 선수 개개인이 갖고 있기 때문에 합의가 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마구마구 항목 참조.
3 방송인 강병규
두산 베어스 시절 출발 드림팀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정수근, 홍성흔 등과 함께 개그맨 뺨치는 입담과 개그, 야구선수치고는 준수한 외모 덕에 예능계에 도장을 미리 찍어두었다. 이로 인해 선수 시절부터 연예계 진출 제의를 여러번 받게 되었고, 그 덕에 야구선수 은퇴 후 KBS 시트콤 "멋진 친구들"로 첫 데뷔해 여러방송사의 주말 버라이어티 엠씨등을 맡으면서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연예계 진출을 이룬다. 본인은 연예계 진출 초창기 자신이 연예계 롤 모델로 같은 야구선수 출신으로 스포츠와 버라이어티를 접목해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 야구해설가 에가와 스그루를 꼽기도 했다.
방송인 전향 이후 제법 나쁘지 않은 진행 능력과 자신의 야구 성적 등을 끌어내 망가지는 등, 주로 '망가지는 MC' 역할을 맡았다. 위험한 초대에서 허구한 날 물에 빠진다든가, '위대한 밥상'에는 손도 못 대는 비타민 MC[3] 등이 그런 역할. 역량이 특출난 MC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무난한 정도.
무한도전의 초창기[4] 시절 표영호의 원래 자리는 강병규가 맡을 뻔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강병규는 당시 출연 제의를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하필 당시 출연 중이던 밥줄 프로그램 비타민의 녹화 시간이 겹치던 관계로 과감하게 무모한 도전 출연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 후 무한도전이 뜨고 나서 강병규가 속으로 배아파했다는 후문.
유인촌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도 친분이 있는 등 인맥에 있어선 발이 넓은 사람이기도 하였다. 어쩜 응원단도 이 인맥으로?
2012년 1월경에는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와 TV조선 토크쇼 노코멘트에 게스트로 나오기도 했다. 또한 10월 19일에는 채널A의 스포츠 프로그램인 '스포츠 베토벤'에 출연. # 함께 나온 사람은 정수근.
3.1 과거 진행한 주요 프로그램
- 99초 스탠바이 큐 (KBS2)
- 일요일은 즐거워 (KBS2)
- 자유선언 토요대작전 (KBS2)
-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
- 위기탈출 넘버원 (KBS2)
4 사건사고
4.1 베이징 올림픽 응원단 사태
2008년 올림픽에 연예인 응원단이 조직되었는데, 비즈니스석 비행기에 좋은 호텔에 마사지까지 국고로 지원했으며 심지어 표도 못구해서 인근 식당에서 TV를 보며 응원하고 왔다는 기가막히는 사건이 터졌는데, 이 사건의 주동자가 강병규라는 것이 알려지며 욕을 뒤지게 먹었다.
게다가 이후 강병규의 대응방식이 도마에 올랐는데 2억원이라는 국고를 낭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봉사를 하러 간 것이라느니, 불필요한 부분에 돈을 쓴 부분은 발 마사지 등 뿐이라며 그 60만원은 자기 사비로 갚겠다느니 하면서 네티즌으로부터 갖은 욕을 다 먹었다. 단순히 대응 방식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먼저 연예인 응원단을 요청했다.', '원래 27만원짜리 호텔인데 물가 때문에 비싸게 묵을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 좌석이 없어 비즈니스석을 이용했다' 등의 주장은 전부 거짓말임이 탄로났다.
이 사건 이후로 강병규는 각종 사고를 치기 시작한다.
4.2 불법도박 연루
이후 10억대 불법 도박 사건의 주인공 K씨가 강병규임이 밝혀지면서 결국 그는 유일한 밥줄이던 비타민에서 하차해야 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26억원 가운데 13억원을 도박 사이트에 날렸다고 한다. 여기에 도박으로 돈을 다 날려서 변호사 선임도 못하고 있다며 선처를 호소하기도 했다는데... 참고로 대한민국에는 국선변호사라는 좋은 제도가 있다. 그리고 억대의 돈을 날리는 동안 정신 못 차린 것은 분명 본인의 책임이기에 그저 병크에 불과. 단언할 수 없지만 그의 재기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4.3 이병헌과의 갈등
그런데 2009년 12월, 서세원[5]이 '강병규가 이병헌을 고소한 전 애인의 배후세력'이라는 루머를 아이리스 제작사의 정태원 대표에게 전하고, 이 이야기가 유포되기 시작되었다.
그 내용이란 캐나다출신 권모 여인이 이병헌에 대한 스캔들을 터트렸을 당시, 권모여인의 한국 거주지가 바로 강병규 애인의 집이였으며, 강병규는 권모씨를 돕기 위해서 자기 지인인 50대 남성 장모씨를 소개했고, 이 장모씨가 이병헌측에 전화를 걸어서 수십억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강병규는 김승우를 통해 아이리스 촬영장으로 찾아가서 항의하다 2차에 걸쳐 쌍방에 조폭까지 동원된 폭행사건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이후 2009년 12월 23일, 아이리스 제작사 측의 정태원 대표는 강병규를 고소하였고, 강병규는 정태원 대표의 출국금지조치를 신청했다.
그 뒤 이어진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결국 검찰은 여러가지 경황상, 강병규 측이 거짓말을 했으며 강병규가 주장한 조폭 개입설도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먼저 시비를 일으킨 쪽은 강병규라고 판단해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게다가 이병헌 협박/사기미수까지 덤으로 붙었다. 이에 따라 강병규는 억울하다며 역으로 이병헌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그리고 2010년 6월 30일, 검찰은 이병헌을 무혐의 처분했다. 그리고 2011년 7월 1일 사기와 폭행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다.
기사 하나가 나왔는데 내용은, 법정에서 배우 김승우가 증언을 했는데 정대표와 그의 측근들이 강병규를 집단 린치했으며 실제로 강병규는 억울한 피해자라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빵은 강병규가 당했지만, 강병규도 대항해서 쌍방폭행 수준이라는 식의 이야기. 그러나 기사가 과장되게 나서 김승우가 강병규의 무고함을 풀어준양 소문이나자 이 때문에 그가 폭행 건으로 까이는 일은 적어졌고 기사들의 리플엔 그가 가엾다는 댓글들 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김승우는 강병규를 일방적으로 편들어준게 아니었다. 단지 돈을 가진측이 언플한건 사실이므로, 강병규가 억울한면은 있다. 그 결과 강병규와 그 당시 강병규가 연락했던 지인들도 싸움에 한걸로 혐의가 구성되어, 정대표의 측근들과 강병규의 측근들이 모두 쌍방폭행으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당시 김승우가 그 당시 정대표쪽의 야구방망이 폭행에 대해 증언했지만, 강병규측의 폭행에 대해서도 증언해서 강병규가 격분하기도 했다고 한다.
2012년 8월에 이병헌과 이민정이 교제사실을 인정하자, 트위터를 통해 이병헌에 대해 '이변태'등 온갖 인신공격성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어 논란이 되고있다.기사 결국 이병헌 측 법률대리인을 대신해 강병규를 고소했다. 기사
그리고... 2012년 11월 2일, 정대표와의 폭행혐의와 관련된 결심공판에서 검찰로부터 징역 2년 6개월을 구형받았다. 2013년 2월 1일. 사기 혐의[6]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협박과 폭행건에 대해서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사기와 관련된 수감 기간이 만료되면 집행유예기간 3년에 들어간다고 한다. 후새드
구속되기 1시간전까지 트위터활동을 했는데 이병헌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걸 보면 참 지독한 악연이다. 어쨌든 이젠 빼도박도 못하는 빨간줄 그어진 범죄자가 되었다. 그와는 별개로 이병헌과는 이젠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었다. 화해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2013년 3월 29일, SNS를 이용한 모욕건으로 추가기소되었고, 5월 27일 선고에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 2일, 사기 혐의는 징역 1년으로 감형 되었다.#
강병규를 도왔던 장모씨는 수사가 시작되자 중국으로 도피했다가 귀국해서 재판받고 2014년에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사회봉사 80시간을 명했다.#
4.4 선수협 관련
2011년 8월 17일. 트위터를 통해 양준혁을 디스했다. "해태로 트레이드 되자 트레이드거부 기자회견을 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해태로 갔다. 1년 후 그는 단체를 결성했고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선수들에게 말했다. 자기는 야구를 포기했다고 했다. 미련도 없다고 했다. 자기 혼자라도 끝까지 남겠다고 했다. 누굴까요?"라는 등 트위터를 통해 대놓고 디스를 날렸다. 사실 엄연히 말해서 김평호 삼성코치가 양준혁의 책을 읽고나서 트위터에 감상문을 남겼는데 강병규가 그 글을 보고 간접적으로 디스한 것. 그리고 밑에서 나오듯 양준혁만 디스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강병규의 폭로가 무작위적으로 퍼져가면서 사실처럼 각색되었고, 그걸로 인해서 양준혁의 이미지에 먹칠한것이 사실이지만, 사실관계가 전혀 다른것이 차차 밝혀지면서 강병규의 주장이 점차 평가절하당하고있다. 특히 개인적 목적으로 상대를 비방해서 그걸로 이익을 취하고자하는 의도가 크다는 평가가 늘고있다.
초기에는 비록 강병규가 범죄로 많은 욕은 먹었으나 선수협 사건만 놓고 본다면 강병규의저런 디스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반응이 많았다. 그 와중에도 트위터로 "저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 더 이상 이하도 아니고 왜? 이게 이렇게 이슈가 되나요? 차라리 당사자가 뭐라하면 될 것을..."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도박이나 이병헌 이야기, 방송 이야기 등 팬들을 가장한 디시인들의 각종 개드립에도 꾸준히 리트윗을 보내며 핵폭탄급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디시에선 "병규야 야갤하니?" "마약빨고 트윗한다!" 정도로 호응을 얻는 중. 애초에 2011년 초부터 양준혁에 대한 야갤의 반응이 안좋기도 했고.[7] 사실 어찌보면 양준혁도 선동렬 디스 언플한 댓가를 치룬 셈이기도
선수협 관련 트윗에 관해선 김광현(前 두산), 최익성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고 알려져있으나 더 정확히는 강병규의 이런 저런 발언에 대해서 양준혁이 "10년전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식으로 발언하였고, 그 이야기를 들은 최익성 등이 "과거 이야기라고 하지 말란 말이냐"라며 불쾌감을 표시하고, 그 과정에서 그 당시 무명선수의 희생에 관한 슬픔을 토로한 것이다. 결국 직간접적으로 선수협파동 당시 결국 무명선수가 보호받지 못한 결과에 대한 불쾌감이 포함된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강병규의 주장은 선수협이 출범할때 양준혁과 다른 임원들이 주도했지만, 막판에 구단에 결탁해서 합의하고 특히 양준혁은 돈많은 삼성으로 바로 이적한 배신자이고, 그걸로 희생당한 선수들이많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다.
- 양준혁을 포함한 선수협 주요임원들은 2001년 1월 김한길장관이 개입하고 국회의원까지 개인해서 합의안을 마련할때까지 마지막까지 구단측과 대립했고,
- 합의안을 조율할때 마지막까지 구단측요구는 선수협과 2차 임원진에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등은 빠지는 조건이었으며... 이 조건때문에 마지막까지 합의가 미뤄졌다. 즉, 정치권의 입김으로 선수협은 인정해주는건 어쩔수없어도 양준혁 마해영 송진우를 선수협에서 몰아내는것이 구단측의 중요 목표였다. 이때 2차 임원으로 넣은 것이 3대 회장 이호성이였는데, 이호성은 선수협 반대파였기 때문에 어용으로 넣었으나 정작 완장을 달고나서는 적극적으로 선수협 활동을 하게 된다.
-특히 양준혁은 2001년 1월 선수협 합의 이후, 구단측의 요구로 반강제적으로 선수협을 그만두게 되었고, 엘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가 삼성으로 이적한것이 2001년 12월이다. 이 때도 김응용 김성근 감독과 당시 언론등에서 양준혁이 FA미아가 될뻔했는데, 김응용이 구단측에 특별히 요청해서 삼성으로 이적이되었다고 김응용이 언론에 많이 이야기했다. 김성근 감독이나 하일성 그리고 각종 기자들도 그 당시 증언했던 내용이며, 2001년 11월에 열렸던 선수협 총회에서도 양준혁이 FA미아가 될까봐 후배선수들이 걱정했다는 기사가 있다.양준혁 FA미아를 걱정하고 있는 후배선수들 배신자라면 과연 후배들이 걱정했을까?
합의문 내용은 ▲송진우.양준혁.마해영.심정수.박충식.최태원의 공시 철회 및 불이익 방지 ▲선수협 구성인원은 KBO 등록선수 전원으로 하되 개인 의사에 따라 불참도 가능 ▲1월말까지 임기 1년의 새 집행부 구성 ▲사무국은 신 집행부에서 재구성 등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4.4.1 강병규의 이종범 저격 실패
강병규발 의혹사건이 여럿 있으나, 대표적인 것이 이종범의 선수협회장 부임당시 억대의 금전사고가 있다는 의혹이다. 강병규 트위터에 따르면 이종범 회장은 선수회비를 펀드에 투자 결정했고 그걸 모든 선수들에게 공표하지 않았고 결국, 손실처리난 억대의 금액을 쉬쉬하고 넘어갔으며 이종범은 회장으로서 책임도 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때, 손민한이 회장에 취임하며 전임 나진균 사무총장을 강제해임 하는 걸로 이 일을 마무리짓고 8개구단 대표선수 중 그 어느 누구도 금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선수협은 선수협 공금을 일부 고참 선수들에게 빌려주던 사실도 문제가 되어 선수협 집행부의 자질 문제도 심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진균 전 사무총장의 말에 따르면 펀드로 인한 손실은 계약을 해지하는 과정에서 500만원 가량이라 하며 선수협이 펀트를 투자한것은 각 구단 대표 8인의 통보 및 승인을 받은 사항이라고 한다.
강병규 역시 이후 인터뷰에서 억대의 손실을 600만원의 손실이라 말을 바꾸었으니 결국 본인도 자신이 잘못 알고있었다는 것을 인정한 꼴.
4.4.2 박충식의 양준혁 선수협시절 옹호
그러나 최익성보다 더 조기 은퇴하고, 야구계에서 받아주는곳이 없어서 호주로 이민갔었던 박충식은 선수협 당시 양준혁에 대해서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박충식은 그 이후 한국에 귀국해서 양준혁과 같이 일하다가 현재 선수협에서 일하면서 욕먹는 일처리를 했으나 그 이전에 행적에 의문이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선수협과 관련해서 결과적으로 해피한 결말을 봤으나, 과정에 그렇게 해피하지 않았던 김재현같은 선수도 역시 양준혁과 공개적으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양준혁을 배신자로 생각했으면 과연 그렇게 친분을 유지했을까.
4.4.3 2001년 후반기 선수협 총회 당시의 수백명 선수들의 양준혁 옹호
양준혁(32)에게 선수협은 영원한 족쇄인가. 선수협 정기총회가 열린 4일 경주 교육문화회관에 모인 일부 선수들은 양준혁의 영입협상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일부 구단 고위층의 입김을 의심하고 있다. 원 소속구단인 LG가 협상을 아예 포기한 뒤 양준혁의 영입을 추진했던 구단은 삼성과 기아. 지금쯤이면 어렴풋이나마 연봉과 조건에 관한 이야기나 나올 법하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은 단순히 몸값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양준혁을 비롯한 지난 선수협의 주축선수들은 이를 구단 고위층이 양준혁의 영입에 딴죽을 걸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선수협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양준혁이 거액의 연봉을 받으면서 쉽게 선수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
즉 선수협 활동으로 '찍힌' 선수에게 불이익을 줘 앞으로 선수들이 단체행동을 못하게 하는 등 선수들을 순치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보고 있다.
선수협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몇몇 선수들이 실제로 불이익을 당한 사례는 많다. 초대 대변인이었던 강병규는 두산에서 SK로 트레이드된 뒤 옷을 벗었고, 마해영(삼성)과 심정수(현대)도 정든 팀을 떠나야 했다.
경주에 모인 선수들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양준혁을 미아신세로 만들려는 각 구단과 KBO의 의도가 분명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만약 실제로 이같은 의도가 있었다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선수협은 회장을 맡을 사람이 없어 정기총회에서 제4기 신임회장 선출을 못하고 다음 대의원총회로 미뤘다. 신임회장이 유력했던 기아 이종범과 LG 유지현이 회장직을 고사하는 등 선수들 사이에서 나서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2001년 후반기 선수협 총회 당시 기사
이렇듯 강병규의 발언 초기에는 이것에 낚인 사람들이 양준혁을 욕하고 다녔고, 현 시점에서도 정말 양준혁이 그랬던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것은 강병규의 명백한 거짓말이다.
4.4.4 초기 강병규의 주장의 허구성
- 양준혁이 해태 트레이드라는 개인적 복수심으로 선수협을 시작하였다?
- 최동원 선수만 해도 자신의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어간 무명선수의 가족의 생계가 막막한 가슴아픈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선수협을 시작하게 되었다. 특정한 동기로 인하여 각성하게 된 것이 문제라고 할수없다. 개인적 복수심으로 시작했더라도 결국 그 행동의 목표가 개인적 이기심을 채우기 위함이었다면, 그걸 공익으로 포장하진 말아야한다.
- 근데 선수협을 만든것이 양준혁 개인의 인생엔 아무런 이익을 주진못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
- 양준혁이 선수협을 배신하였다??
- 양준혁을 비롯한 선수협 주축멤버들은 2000년 초반 선수협을 공식 발족하고, 구단과 선수협파동이 터진이후 2001년 1월 구단이 선수협을 인정하고 선수협 파동이 끝나는 시점까지 같이 했다. 양준혁은 주축멤버로 처음부터 같이했고, 2000년 12월 20일 구단에서 6명의 주축선수 자유계약으로 방출명단에 포함되었다가, 양준혁은 2001년 1월에 결국 구단이 선수협 인정키로 한 합의가 이뤄질 당시까지 주축멤버였다.
- 즉, 양준혁은 선수협파동이 끝나는 최종시점까지 선수협과 함께였다.
- 사실 선수협초기는 매우 험난했다. 보복 트레이드도 있었고 선수방출도 있었다. 2000년말까지 구단이 선수협을 맹공하고있었는데, 반전이 일어난 계기가 주축선수 6명 자유계약선수 방출 건이다. (이 6명의 방출 선수에 양준혁 송진우등 포함)
- 그 이후 여론이 끓고 이승엽이 가입한 이후, 김대중 정부의 김한길 문화체육부 장관이 선수협사태에 개입해서 구단측에 선수협 인정하길 요구한것이다. 즉, 양준혁을 포함한 선수협 6인의 방출건이 중대 반전포인트였다.
- 구단측과 선수협과의 합의과정에서 구단이 요구한것중의 핵심은 지도부 사퇴였다.
한국 프로야구선수협회와 KBO 간의 합의 내용[8]
- 구단 대표 6명 방출조치 철회
-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의 집행부 사퇴
- 선수들의 자율에 따른 새 집행부 구성
- 선수협 사무국은 새 집행부에서 구성
- 선수협 참여선수에 대한 불이익 금지
- 즉, 양준혁이 자기 이기심으로 선수협을 이탈한적이 없고, 마지막까지 같이 투쟁했고, 구단측의 견제대상일 정도로 핵심이었다.
4.4.5 양준혁은 선수협의 배신자가 아니었다.
선수협과 구단측의 합의로 선수협 주축멤버들이 지도부에서 사퇴한게 2001년 1월, 양준혁의 FA선언로 삼성이적은 2001년 12월 21일이다. 즉, 선수협 사태가 끝난다음에 거의 1년이후에 FA되어서 삼성으로 간것이다. 선수협을 배신하고 대기업구단으로 가서 잘 살았다는 식의 강병규의 말과는 전혀 다르다. 특히 양준혁이 FA시절에 "FA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양준혁을, 내가 구단에 요청해서 데려왔다."는 김응룡의 십 수차례 인터뷰와 토크쇼에서의 발언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양준혁 FA때 김응룡감독은 여러 언론기사를 통해서 미아 될 뻔한 양준혁을 자기가 삼성라이온즈 사장을 설득해서 데려왓다고 여러번 인터뷰했다. 티비 토크쇼에 나와서도 그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김응룡 양준혁으로 검색해보면 기사가 줄줄 나온다. 게다가 김성근감독의 FA때 선수협관련 어려움이 있었는데 본인이 LG구단에 내가 보증할테니 잡아달라고 부탁 했었다는 증언, 양준혁 FA선언당시 선수협총회에 모인 수백명의 선수들중에서 양준혁 구단의 보복으로 FA미아될까 염려하는 목소리 등의 여러 기사와 증언들이 있다. 그때가 그 이미 양준혁 송진우등이 선수협을 떠난지 1년쯤 뒤인 당시 2001년 후반기였고, 선수협총회에 수백명인 모인상태로 선수들이 양준혁을 걱정하고있었다.
즉, 양준혁은 선수협 모든 사태가 종료되고, 초기지도부가 모두 선수협을 떠난지 1년 후에 FA로 삼성으로 간것이다. 양준혁은 선수협을 배신하고 삼성에 간 게 아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FA선언이후 LG와의 계약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타팀과 계약 가능 날짜가 11월 27일부터였는데, 결국 계약일은 12월 21일로 무려 25일에 걸려서 계약을 한것이다. 거물 FA는 시장에 나오자마자 그날 새벽에 이미 계약이 끝나거나 하루를 넘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홀대받았다는 송은범 배영수가 12월 2일 3일 계약할걸 고려할때 유례없는 오랜기간 계약을 못한것이다. 실제로 김응룡이 사장에 요구한 이후 뛰어든 삼성을 제외하면 접촉한 구단이 없었고, 삼성과의 단독협상기간에도 36억, 30억, 28억보장, 총액 28억등 갈수록 협상액이 낮아져서. 최종 계약액은 최저 17억 최고 27억으로 플러스 마이너스옵션만 10억에 달하는 만족스럽지 못한 계약이엇다.
이렇듯 FA 미아설만 해도 멋모르는 팬들이 양준혁의 개드립으로 몰아갔지만 실제로 FA 미아가 될 뻔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며, 이 사실은 양준혁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그 당시 야구 기자들이나 김응용의 후일담 등에서도 잘 나오고 있다.
결국 초기 양준혁 비판이 모두 거짓말로 드러나는 등, 마구잡이로 양준혁을 공격하다가 그 이후에 반박이 들어오자 위기감을 느꼈는지 그 이후 쿠키등의 인터뷰에서 강병규의 발언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실제 초기의 비판 내용이 모두 거짓이므로 그걸로 계속 공격할수는 없으니..
4.4.6 그후 바뀐 비판 내용
그래서 그 이후 쿠키 인터뷰의 내용을 보면 양준혁이 배신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 2기 회장이 이호성이 된 것.
- 이호성 회장은 선수협을 매우 반대했던 인물이다. 구단 측이 선수협을 인정하는 조건 중에서 이호성의 회장 기용도 있었다. 강병규는 이호성에게 회장직을 넘긴 것을 분노해하고 있었다. 근데 양준혁 혼자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지도부가 같이 결정한 일이며 그 때 다 같이 사퇴해서 강병규 본인도 그 이후 선수협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 그러나 이호성은 실제로 회장이 된 이후에 구단과 강경 노선을 걸으면서 최저 연봉 인상 및 연봉 상한선 철폐, 연봉 하한선 유지, 복지기금 조성 등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 결과 몇개월만에 잘렸다. 강병규의 이호성을 차기회장으로 세운 것이 배신이라는 주장은 여러모로 말이 안되는 부분이다.
- 게다가 차기 회장이 이호성이 된것은 양준혁이 혼자서 밀어붙힌게아니다. 선수협에서 다들 논의해서 구단과 합의를 수용한건데 왜 양준혁만 욕먹을까.
- 2. 양준혁이 선수협 사퇴 이후에 선수협에 선배로써 충고를 하지 않았다.
- 그러나 장작 강병규 본인도 선수협 사퇴 이후에 몇 년 동안 선수협에 관여하지 않았다. 양준혁이 선수협 창립 주동인물이라 해서 그 이후 십여년이 흐른 이후에 충고를 안했다는 이유로 배신자라 모는 것은 과도한 이야기로 보인다.
- 3. 2009년 선수노조 설립당시 삼성의 퇴장
- 선수협이 선수노조로 전환하기 위해 투표할때, 삼성과 LG의 선수들은 투표를 거부했다. 강병규는 삼성 선수들을 선동한 것이 양준혁이라고 주장한것으로 알려졌으나 강병규가 양준혁이 선동했다고 딱 집어서 이야기한건 아니다. 그냥 양준혁의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준혁의 책임이라는것도 애매한이야기 (어쨌든 LG 삼성이 퇴장했지만, 양준혁이 선동했다는 증거는 없다)
강병규의 이런식의 양준혁 비판이 문제가 되는것은 10년전 선수협 당시 강병규와 양준혁을 다 같이 선수협의 주축선수였고, 강병규의 언플에 따르면 강병규가 선수협을 끌고 나가고 양준혁은 놀러나 다녔다는 식이다. 물론 말도 안되는 주장이지만, 어쨋든 강병규도 선수협 주축선수로써 같이 책임을 공유하는 입장이다. 선수협이 마지막에 구단과 합의를 할때는 정부가 이 사태에 관심을 가지고 김한길 장관이라는 거물을 투입해서 합의를 이끌었고, 정부가 없었으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합의였다.
근데 그 합의에 강병규는 반대를 나머지 집행부 전원이 찬성을 했다는 썰이 있다.
난 반대표를 던졌으니 그 합의로 인해서 선수협이 생긴건 쌩까버리고, 선수협당시 희생자는 나는 전혀 책임없고 나머지 집행부가 모두 책임져야하며, 그것도 양준혁이 모두 책임져야한다는 희안한 논리. 잘한 건 강병규 때문이고 못한 건 양준혁 때문이다
그리고 강병규의 각종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몇몇 강병규 옹호자들의 이런 주장을 하면서 옹호하는 경우도 있다.
SNS에 올린 양준혁의 발언 "구단과 잘 지내지 그랬니" 라는 말을 듣곤 강병규가 양준혁을 지웠다고 했다는 발언에 대해, 양준혁은 당시 지도부 사퇴를 해서 힘도 없는데 어쩌냐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 발언의 포인트는 강병규 입장에선 양준혁이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갔더니 선수협 문제로 미운털이 박혀 방출당한건데, 구단이랑 잘 지내지 그랬냐는 헛소리나 하고 있으니 열이 뻗쳤다는 이야기다. 강병규만 불이익을 받은게 아니라 당시 지도부 모두 불이익을 받았으니 조작된 발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도 있었는데, 강병규 입장에선 양준혁 따라갔다가 더러운 꼴을 당했다는게 중요한 문제이지 미운털이 몇 명이 박혔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만 불이익 받았다고 한것도 아니고.
라는 식으로 강병규를 옹호하는 측이 있는데, 이 말대로면 오히려 강병규는 천하의 개쌍놈이다.
결국 양준혁이 실질적으로 강병규에게 잘못한건 없으나, 서운한 말을 했다는 것이 핵심인 논리인데. 강병규도 선수협의 주축선수였다는걸 기억해야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서운한 말 한마디가 있었으면 개인적으로 풀어야할 문제다. 차라리 술자리를 갖던지 했어야한다. SNS와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양준혁을 공격했다면, 그건 더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강병규가 선수협 주축선수였으니 선수협에 관한 폭로식의 주장은 더욱더 개인적 문제는 아닌셈이다. 근데 양준혁이 실질적인 개인적으로 서운한 말을 했다는 서운함을, 그걸 선수협의 공적인 잘못으로 문제를 확대해서, 사실관계를 엉터리로 조작한 사실로 양준혁을 비난하고 다녔다면 그야말로 개쌍놈이다.
강병규는 '본인은 보복 트레이드 당했고, 양준혁은 대기업 야구단으로 옮기고 배신했다'는 식으로 발언했으니 최소한 강병규 자신은 불이익을 받고 양준혁은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는 뉘양스의 주장을 한건 사실이다. 최소한 팬들은 양준혁은 불이익을 받지 않고 강병규는 불이익을 당했는데 양준혁은 외면했다는 식으로 파악했던 사람이 많다. 게다가 '구단에 잘하지 그랫니'라는 말이 서운해서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비판을 한다는 이야긴데, 그게 10년을 지나고서도 계속 물고 늘어질 이야기일까. 자기만 믿고 따라오랬던 선수협 초창기 이야기를 계속 모든 주장의 근거로 삼는데 사실 강병규 자신이 본인 의지로 선수협 주축으로 활약했으면서 '난 양준혁만 믿었는데 나의 모든 불행은 양준혁 탓'이라고 하는건 너무 과한 이야기로 보인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든 강병규 말고도 대부분의 선수협 핵심선수가 트레이드 되었고, 나름 야구선수로써의 활용 가치가 있을 당시는 활용되었지만 은퇴 이후에 해외 코치 연수를 갔거나 팀에 프런트로 남든 코치로 남든 구단이 배려해준 경우는 한화 소속이었던 송진우밖에 없다. 즉, 다들 불이익을 받은거다.
위의 논리대로면 그 이후 강병규가 방송하다가 망했는데, "난 이경규 선배만 믿고 방송계에 진출했는데 나 망했는데 어떡할 거에요"라고 이경규를 비판해야 하는 것인가* 가끔 방송에서 누구 믿다 망했다 하는 이야기는 그냥 우스갯소리 정도로만 나오는 수준이다. 사실 그런 식이면 강병규 본인도 두산 소속으로 여러 선수들을 설득해서 선수협 활동에 참여시켰을 텐데, 그 선수들의 인생 하나하나를 책임져주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강병규도 남의 인생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왜 두산 선수들 참여하게 했나. 강병규가 SK로 트레이드 당한 상태에서 전에 강병규 설득으로 선수협에 가입했던 두산 선수들 중에 몇몇이 찾아와서 '너 때문에 선수생활 망했다'고 말하면 강병규는 어떤 식으로 그들을 책임졌을까? 강병규 따라갔다가 더러운 꼴 당한 선수들이 강병규 원망하면서 인터넷에 폭로하던가? 개인적 원망이야 있을수는 있어도 강병규가 두산 선수를 선수협으로 이끌어놓고 책임 못져줬다고 깐 사람은 없다. 독립운동하면서 광복군 모으러 다녔던 독립운동가들은 결국 부하들이 일제에 죽음을 많이 당했는데 결국 김좌진 장군이나 부하들 시켜서 일제에 폭탄 던지게 해서 사형당하게 만든 김구 선생도 다른 사람 더러운 꼴 당하게 했다는게 중요한건가? 선수협이란 단체를 만들기 위해선 어쨌든 선수들의 참여가 필요하기에 선수들의 참여를 요청하고 다녔던 양준혁의 행위가 있었는데, 그때 양준혁을 따라가지 안았더라면 내 인생 덜 꼬였다 싶은 개인적 원망은 있을 수 있어도, 10여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제3자들이 선수협을 인정한다면, 선수협을 아예 처음부터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상은 선수협 결성을 위한 선수참여 요구는 인정해야 한다.
그는 트위터 등을 통해 양준혁에 대해 여러가지를 폭로하였고 이것이 호응을 받아 엠엘비파크 등 각종 사이트에서 재조명받은적은 있다. 그 결과도 억울하게도 선수협에 대해 양준혁이 대차게 까이고 있으며 그동안 양준혁에게 디스당했으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선동렬은 반대급부로 대인배였다고 칭송받는 중이다. 그런데 선동열은 선수협 활동을 안해서 양준혁 디스거리를 몰랐을지도 이때까지는 위선자 양준혁을 총대매고 저격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위에서의 막장행각은 물론이고 추가로 막장짓을 한게 밝혀져서 과도한 몰아가기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결국 상당수가 엉터리 주장임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강병규 본인까지 포함된 지도부 모두의 문제점을 양준혁 개인의 문제점인양 지적하고, 선수협을 배신하고 삼성으로 간적이 없는 양준혁[10]을 배신자로 몰았으며, 강병규 본인만 선수협 활동을 열심히 하고 양준혁은 죽일놈이고 회장 송진우나 마해영 심정수 등은 그냥 그림자 취급을 한것이다.
그리고 양준혁 디스 거리가 좀 떨어졌다 싶으니까 이종범 디스를 시작했다. 유명선수들 붙잡고 까대는거 보면 아예 이 길로 나가길 작정한 듯하다. 반박도 물론 있으나 제대로 대응하진 않은 듯.
이 대목도 결과적으로 강병규의 말이 허구성이 드러났다.
4.4.7 손민한 저격과 그 이후
그러나 들어맞은 저격도 있는 것이 바로 손민한 저격이다.
2011년 9월 21일 쿠키뉴스의 조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작정한 듯 선수협 관련 내용을 실명과 함께 까발렸다. 본인에 관한 해명의 진실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선수협 관련 내용의 경우 명예훼손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협과 실명이 거론된 당사자들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어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라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다만 문제는 발언들이 모두 사실이면 강병규의 행동도 몇가지 문제나 모순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에게 유리한 발언만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폭탄 발언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잃을 것이 없는 남자의 패기. 오오.
결국 선수협 회동이 일어나면서 최소한 현 4기 선수협에 관련된 그의 발언은 진실이었다. 그가 선수협 관련으로 하는 발언에 대한 신빙성은 갈수록 상승하고 있다(...). 2011년 10월부터는 손민한을 직접적으로 까고있는 듯.
그리고 2011년 11월 10일 오후 대전역 회의실에서 프로야구 선수협회 긴급이사회가 열렸는데 강병규가 느닷없이 찾아왔다.
선수협사태에 대한 조언차 왔다고. 선수협 측에서 초청한 것으로 강병규 본인이 주장했으나 근데 표정들이 왜 저렇게 똥씹은 표정 두산에서 동료였던 홍성흔조차도 어색한 표정 아무도 초청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이제 선수협을 쥐락펴락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았고, 결국 선수협 회장을 맡은 박재홍은 강병규와 거리를 두겠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다시 또 박찬호를 언급하면서 묘하게 시비를 거는듯한 발언을 했다.강병규 "박찬호가 이승엽·김태균을 바보로 만들었다"
2012년 1월 24일에는 다시 한 번 양준혁에게 시비를 걸며 둘 사이에 인터넷으로 언쟁이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네티즌들에게 비웃음과 함께 까임을 받는 중. 양준혁이 도박판에 수십억 원씩 기부하지 말고 사회를 위해 뭔가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 보는 것이 어떨까라며 강병규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자 강병규는 제가 도박으로 수십 억 날린 건 정말 지적 잘 하셨다. 그 돈은 나라에 국고로 귀속됐다며 과정이야 좀 다르지만 제 돈은 나라에 바쳤다.[11] (양준혁) 보다는 훨씬 많이 나라에 낸 것 같은데라고 자기자신을 방어했다(...). 처, 천잰데? 죄지어서 감옥간 사람들은 그럼 나라에 봉사활동하러 일부러 징역을 살았냐며 폭풍 까임을 받는 중. 역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이리 된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7월 이후로도 계속 선수협의 자문위원 자격으로 있는 듯하다는 착각이있는데..선수협과 강병규는 무관하다.본인은 사무총장 사무국장까진 못되도 대변인이나 고문쯤이라 생각하겠지만..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 가운데에 계속 KBO를 성토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12월 16일 논란을 일으킨 박충식, 서재응 등을 '병신'이라는 호칭을 써 비하하였다. 네티즌들이 강병규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이번 말에 대해 네티즌들은 호응하고 있다. 그리고 박충식, 서재응은 귀신같이 욕을 엄청나게 먹고 있다. 그러나 아래에도 언급했듯이 일련의 선수협 디스는 진정으로 선수협을 위한다기보다는 여론에 편승해 자기 이미지 세탁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이 많다. 가만 보면 자기만 진짜 선수협이라는 식.
4.5 기타
NDS용 소프트로 등장한 비타민의 광고모델이 되기도 했으나, 사건이 터지자마자 광고도 버로우하고 말았다. 출연 연예인이 제품 이미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광고계에서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해주었다고...
절묘하게도 위기탈출 넘버원의 진행자를 했는데 같이 하던 진행자가 이혁재였다. 훗날 새로운 의미로 재조명받는다
2011년 9월 19일에 트위터에서 유재석 대한 글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던 강병규가 유재석만큼은 착하고 자기 관리을 잘하는 친구라고 오히려 극찬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물론 강병규가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유재석 만큼은 건들지 않은 것일수도 있겠지만 강병규가 실제로 유재석와 나이 동갑이며 KBS의 예능 프로그램인 위험한 초대에서 같이 출연한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친한 사이 라고 볼수가 있다. 만약에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는 이병헌이 아닌 유재석에 의해 감옥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2012년 1월 21일에 자신의 트위터에 악플을 남긴 악플러들의 신상을 공개하면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2012년 4월 27일에는 트위터로 8년 전 사고가 있었던 해당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MC였다는 이유로 장정진 성우를 애도하면서 방송에서의 음식 빨리 먹기 게임의 위험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 좋은데 하필 왜 당신이?[12] 얼마나 더 망해야 정신을 차릴건가!?
2013년 1월 6일에는 조성민의 비고 소식이 나오자 트위터에 나 같은 놈도 버티고 사는데 라며 많이 슬퍼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건 강병규의 개인적인 일이 아닌 야구 후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올린글인데도 불구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반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4.5.1 언론플레이? 이미지 세탁?
2014년 이병헌 음란음성파일 사건에서 이병헌이 모델 이지연과 연관이 있었다는 정황이 조금씩 드러나자 내가 할일은 없어졌다. 게임은 끝났다. 라는 식의 글을 또 올렸다. 그후 인터뷰는 정중히 거절한다는 글을 올렸으며, 다희와 이지연의 징역이 구형된 후 유력한 증인이었던 클럽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다만 이 정황들이 진실이던 아니던 간에 강병규와 이병헌 둘사이에서 법적다툼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다.
또한 이 이후에도 프로야구 FA 몸값 거품 논란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단체훈련 금지 논란을 일으킨 선수협에 일침을 가하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대한항공 KE 086편 이륙지연 사건에 대해 대한항공의 명칭 변경을 제안한 건 덤. 네티즌 대다수의 의견은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왜 하필이면 강병규냐며 이미지 세탁을 노리고 언론플레이를 벌인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2015년에도 KT 위즈의 신고선수 방출 건을 디스한 것과 2015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의혹, 서울 히어로즈의 J TRUST 명명권 계약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도 반응은 마찬가지.
여기에 클라라 사태때 "디스패치 보도에 반박을 못한다. 디스패치가 기레기들보다 낫다."는 트윗을 올렸는데, 반응은 냉담. 왜냐면 원래 디스패치에 대한 여론이 대부분 '열애설 보도 사이트', '한국의 파파라치', '사생활 침해 언론'이라는 그닥 좋지 않은 시선이 많은 것도 있지만, 이병헌 논란 때 이병헌 문자 내용을 공개한 게 디스패치라서 강병규가 신나서 디스패치를 참언론이라 칭하고 있나며 비난하고 있다. 저 클라라 사태만 해도 지나치게 클라라에게 불리하게 기사가 쓰여있었고, 이외에 박봄, 이태임건 등으로 이미지를 왕창 구겼다.
2015년 2월 6일 국민라디오 '정영진의 불금쇼'에 출연했다. 연예기획사를 차렸다.
5 여담
삼성 라이온즈의 강봉규와 이름이 비슷해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신문에선 강봉규를 강병규라고 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어떤 팬은 이병규와 헷갈리기도 한다.
- ↑ 출처: 이종남 기자의 사람 좋으면 꼴찌
- ↑ 다만 FA때 삼성과 한화 두 구단에서 제안을 했을때 한화를 선택한 이후 구단측과는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 ↑ MC팀이 이기는 날이 거의 없었다.(...)
- ↑ '무모한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유재석, 노홍철, 정형돈, 표영호 등이 주축 멤버였던 시절.
- ↑ 이사람도 그런데 문제는 많다. 인간쓰레기 양원경이 슈퍼텔렌트출신의 아내와 결혼하고 싶어 하자, 루머를 퍼뜨려서 방송출연을 막으라고 모사꾼 역할을 했다. 그리고 본인도 다시는 연예계로 못돌아올 사건을 저질렀다.
루머로 일어난자 루머로 망한다천하의 개쌍놈그것보다도 전 배우자 서정희가 아직 고등학생이었는데 납치해서 강제로 결혼하는 바람에 서정희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퇴학먹었고 32년 동안 맨날 두들겨 팼다. - ↑ 지인에게 3억원을 빌렸으나 갚지 않았다.
- ↑ 참고로 현재 양준혁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같은 삼성팬덤 조차 양신이라 부르는 파와 양가놈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파로 나뉘었을 정도.
- ↑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0049615
- ↑ 양측은 1시간30여분 동안의 협상끝에 송진우, 마해영, 양준혁은 새 집행부에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결정했고 새 집행부는 선수협측 방안대로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 ↑ 나중에 다시 삼성으로 돌아간건 나중의 일이다.
- ↑ 도박으로 날린 수십억은 국고로 귀속되기 전에 이미 조폭의 배를 불렸다. 당연하지만 저 돈이 해외로 빼돌려졌다면 국고 귀속이 아니라 외화유출이다.
- ↑ 장정진은 불의의 사고로 고인이 된지라 장례식 분위기가 매우 엄숙했는데, 그 와중에 방문했던 사고의 원인이 된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시종일관 웃고 떠드는 분위기였다고 하며, 강병규 역시 마찬가지로 시끄럽게 웃고 떠들다 갔다고 한다(...)
- ↑ 사실 이는 낚시용 가공의 내용이다. 헨리 오 함마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