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예술철학에서 넘어옴)

美學
Aesthetics

1 개요

가치로서의 미, 현상으로서의 미, 미의 체험 등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의 분과학문.

쉽게 말해 '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철학 분야라고 하겠다.

흔히 철학을 언급할때 '진(眞),선(善),미(美)' 세개의 가치를 다룬다고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는 각각 지성(知性, 인식능력), 의지(意志, 실천능력), 감성(感性, 심미능력)을 다루는데, 미학은 이중에서 '미'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분야이다. 나머지 두개 '진'은 철학, '선'은 윤리학의 영역.

1.1 미학의 체제

미학의 특성상 개별적인 부분을 다루기 쉽기 때문에 굳이 체제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미학에도 체제가 존재한다. 모든 아름다움은 보편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학은 그러한 보편성의 원인을 밝히는 것을 기본으로, 그 체제를 특정해 밝혀낼 수 있으며 이렇게 밝혀낸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구조를 축조해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미학적 체제를 구축한 헤겔의 경우에 미학이란 세계 속에 던져진 정신이 실현되는 과정이 새겨내는 결과물이었다. 이는 다른 모든 미학적 체제에도 보편적으로 들어맞는 설명이기도 한데,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특정한 목적의식을 배후에 숨기고 있으며, 그것이 그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꼈을 때, 그 영화는 사람들이 시대를 겪어나가면서 느껴왔던 감각들을 상징과 서사를 통해 재현해내는 데에 성공했으며, 이를 통해 삶으로 되돌아오는 감동을 느낀다. 영화 올드보이의 예를 들어 보자.

올드보이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갇히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풀려난 이후에 자신의 딸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주인공은 안타고니스트의 내면적 갈등을 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연하게도 이 과정은 뭔가를 상기하게 만든다. 독재를 겪고(갇혔다가) 해방되지만(민주화를 경험하지만) 그 이후에는 미리 마련된 장소로 유도 된다(민주국가에서의 정해져 있는 국민의 삶으로 유도된다). 이 밖에도 해석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미학에서는 이러한 과정 자체를 이런 식으로 체제를 통해서 정형화되는 과정으로서 판단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적인 형식의 배후에는 산업 체제를 형성하는 역동과 그 역동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대상화하는 형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판단해내기 위한 기준이 바로 미학이며, 미학은 그래서 늘 '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통해 미학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2 서양 미학사

2.1 고대

2.1.1 플라톤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론을 대충 요약하면 어떤 이 세계 너머 초월적인 존재가 있고, 이 세계의 만물은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즉 인간의 신체나 정신이나 다 이 이데아 존재의 마이너 카피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약간 병크스러운 주장을 펼치는데, 예술가는 다 잡아 족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 왜냐면 이 현실은 이데아짝퉁인데, 예술은 그 현실을 또 카피한 거니까. 유명한 침대의 비유를 찾아보길 바란다. 즉 '이데아의 침대>현실의 침대>침대 그림'이라는 상하관계가 성립한다는 것. 이런 주장을 펼친 다른 이유는, 당시 폴리스 내의 시인이나 연극배우가 도시국가 구성원들을 혹세무민에 빠트리고 잘못된 길로 이끈다고 보았기 때문.

2.1.2 아리스토텔레스

반면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 다른 입장을 세웠다. 플라톤이 근원이나 기원을 찾으려 하고 거기에 집착한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반대로 모든 만물은 목적인(causa finalis , 目的因)을 가지고 그에 따라 무언가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는 왜 씨앗이 전혀 다른 모양인 나무가 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사고방식에서는 씨앗이 발아해 나무가 되는 건 나무라는 목적인이 그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후의 과학은 목적론을 버리고 객관론적인 입장만 취하지만,[1][2]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애초에 만들어진게 하위호환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본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고 본 점에서 사물의 변화 가능성을 좀더 중시한 셈. 애초에 항구도시인 이오니아에서 태어나 자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물산을 많이 접했고, 그러다보니 자연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했던 것. 이때문에 플라톤은 후에 초기 가톨릭 교부들의 시대에 신플라톤주의로 기독교 신학과 퓨전하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한동안 이슬람에서 버로우탔다가 중세 수도원의 학문연구 때 다시 역수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사고방식은 미학에서 스승 플라톤보다 융통성을 발휘하는 이유가 된다. 그 대표적인 이론이 카타르시스 대강 요약하면, 비극을 보면서 우리는 애통함에 젖어 눈물을 펑펑 쏟고 후련해져서 '정화'되기 때문에 예술이 가치있다고 본 것. 카타르시스의 그리스어 어원 자체가 정화라는 뜻이다. 이러다보니 미나 예술에 있어서 플라톤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예술을 다 허용하자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저서 시학(Poetica, 詩學)에는 비극부분밖에 남아있지 않아[3] 정확한 내용을 알긴 어렵지만, 적당한 한계 안에서 자율규제(?)를 하자는 주장에 가깝다.

공통점을 보면, 두 철학자 다 폴리스 공동체의 이득을 위해 예술이 봉사해야 한다 봤다. 또한 연극이나 시를 주로 언급하고 회화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당시 그리스의 예술이 연극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

2.1.3 헬레니즘, 로마 시대

2.2 중세

아름다움은 반사된 진리의 빛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흔히 중세는 문화와 예술이 신에게 종속된 흑역사라고 하지만 이런 관점은 현대에는 부정되고 있다.[4] 또한 이때의 스콜라 철학과 그 철학자들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때의 플로티노스라는 학자는 이 세계는 일자(=신?)에서 나온 빛의 유출로 보고 일자-정신-영혼-자연(질료)에서의 유출 운동과 상승 운동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예술은 이 일자로 가는 중간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언뜻 볼면 '이데아'='일자'로, 플라톤의 이데아론 짝퉁이 아니냐고 생각할수도 있는데, 플라톤예술을 이데아를 모방한 세계를 모방한 가장 마지막, 하급의 무언가로 파악한데 반해, 플로티노스는 오히려 일자와 자연 그 중간에 있는, 실제 세계보다 오히려 더 일자에 가까운 무언가로 파악했다. 그러니까 예술의 지위를 더 높게 평가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간단히 신플라톤주의기독교 신학에 수용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5]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추의 개념에 대해 검토하고, 추라 해도 부분과 전체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어 미에 보탬이 되므로 또한 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건 완전무결한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는데 악이 있는 이유에 대한 변명이 진짜 이유었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다들 , 또는 숭고에 대해서만 생각할 때 에 대해 고찰한 것만으로도 상당히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다. 에 대한 생각을 봐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분들간의 조화, 즉 비례와 균형을 중시 여겼고, 단순한 감각적 지각은 이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거의 천년이 지나서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에서는 그동안 신앙에 묻혀서 별 관심을 받지 못한 이성에 주목을 하는 경향이 생겼다. 일단 신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이성신앙을 구분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에서 벗어난(완벽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예컨대, 아퀴나스는 이전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미를 '감각세계의 미'와 '신적인'미로 나누었다.) 경험적 측면을 띠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중시한 만큼,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시 모방론을 돌아간다. 일단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내용은 '신의 창조'로 만들어진 자연을 '모방'하기 때문에 예술은 의의를 가진다. 라는 현대인에 입장에서 볼때에는 어디가 신에 대한 추종에서 벗어난건지 전혀 이해가 안가는 주장이지만, 이전의 신플라톤주의와 비교해 볼땐 아주 큰 변화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철학에서는 이데아(중세 철학에서는 신)는 볼수 없는 세계이므로 이 감각적 자연을 모방해봤자 뻘짓일 뿐이고, 이데아(=일자=신)을 쫓아야 하는데 바로 그 생각에서 탈피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들)은 르네상스를 낳고 자연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다른 스콜라 철학자나 중세 개혁주의 미학 등에 대해선 추가바람.)

2.3 근대

2.3.1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흔히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도배된 시절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근원을 올라가보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인데, 르네상스의 핵심은 동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인한 동방정교회의 피난길과 연이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그 위세를 많이 잃어버린 로마 가톨릭의 입국거부로 인한[6] 대립의 페라라 공의회가 끝이 나지 않자, 당시 피렌체의 새 군주로 등장한 코지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가 엄청난 거금을 지원하고, 동로마 방랑객들을 극진히 모시자 공의회는 피렌체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르네상스 문화의 특징은 이 동로마 방랑객들로, 이들이 동로마 제국에서 보존, 연구해왔던 신플라톤주의 서적들과 동방교부들의 고유한 지혜서적들이 피렌체에 보급되었고 코지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는 학자들 가운데 제미스토스 플레톤의 강의를 경청해 플라톤 연구를 위한 아카데미를 세워 연구에 정진하려고 했지만 플레톤이 고향이 돌아간데다가 다른 일로 바빠지자 한동안 그 계획은 연기되었으며, 몇 년 후 주치의 아들인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양자로 삼아 피치노가 플라톤에 열의를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연구 자금을 마련해줬으며, 나중에는 몬테베키오라는 별장을 제공해 피치노가 그리스어를 공부해 플라톤의 글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게 배려했다.[7]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기존의 라틴 스콜라 신학에 신플라톤주의를 다시금 접목시켜서 <플라톤 신학>을 저술하였으며, 수많은 그리스 서적들을 번역,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스 서적들이 중세에 불온서적으로 지목되어 불타버린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반감을 보였지만 메디치 가문의 수호아래에 있었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시대적으로 구텐베르그로 인해 인쇄술이 발달하고 많은 유학자들이 나타나면서 원서연구가 대세가 되었는지라,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필두로 피렌체에 이러한 연구집단들과 재단이 등장하면서 하나의 아카데미아가 건설되는데, 이것이 피렌체의 도서관 플라톤 아카데미이다. 이들과 2년 동안 함께 먹고 자면서 신플라톤주의를 공부한 미켈란젤로는 현대 학계에서는 더이상 예술가로만 보지않고 독자적인 신플라톤주의 신학자로 해석하고 있다.[8]

연세대 김상근 교수는 미켈란젤로의 소네트에서 종교개혁의 정신도 담겨져 있을 수 있으며 이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다면 이제 종교개혁사를 16세기의 독립적인 역사로 이해하는 사관에서 14~15세기의 서양사관을 적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 아카데미라고 쓰였지만 메디치 가문 재단이 후원하여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메디치 가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세 명의 피렌체 플라톤 철학자들이 연구와 강의를 하였다. 마르실리오 피치노, 폴리치아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가 그들이다. 이들의 연구는 때로는 다원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카발라, 이슬람신학자 아베로에스, 조로아스터, 헤르메스, 오르페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의 지혜를 차용하기까지 하면서 스콜라 신학에 대한 반발로 종교통합을 시도하였다. 각각의 철학과 종교사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을 찾아보려는 다원주의적 시도였는데 당연히 교황청에서는 너 이단크리를 먹여서 실질적인 여파는 없었다.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은 미켈란젤로, 보티첼리가 있었으며 이후에는 메디치 가문이 축출되면서 몰락한다. 플라톤 아카데미의 책을 읽었던 사람들은 당대에 천재라 불리우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양식을 펼쳤다. 이들이 내세운 표어는 신플라톤주의였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파엘로는 메디치의 폭풍같은 후원을 받지 못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위의 동로마 고서들이 르네상스를 추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 전에도 천재들은 존재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4세기에는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조토가 있었고 15세기에는 브루니,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마사초가 피렌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메디치 가문은 15세기 초에 발흥하여 18세기 중엽에 대가 끊겼다. 메디치 가문을 언급하는 것은 시대정신을 이끌어낸 주역이면서 처음으로 근대적 개념인 예술가 후원을 시도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나쁘게 이야기하자면 당시 메디치는 시대흐름을 미리 포착하고 후원해서 떼돈을 번 스티브 잡스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2.3.2 대륙 합리론

18세기 당시 유럽 철학은 크게 경험론합리론으로 나눠진다. 영국에서는 베이컨의 영향으로 경험론이 대세를 타 로크, 버클리, 에 의해 계승되었고, 대륙에서는 데카르트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합리론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 시기 철학은 인간 중심적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후의 계몽주의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프니츠 볼프 학파(Leibniz Wolffische Schule)[9]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은 미학이라는 말을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움가르텐은 이성적 인식의 학문인 논리학과 대비되는 감성적 인식의 학문이 필요하다고 보고 에스테티카(Aesthetica)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지금은 '에스테틱'이라는 말을 피부미용같은데서 쓰지만, 본래 에스테틱이라는 말은 지각, 감각, 감정, 감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이스테티코스(aisthetikos)에서 유래한 말이다.[10] 즉, 육체적인 감각과 그에서 발생하는 마음 감정, 감성 같은 것에서 유래한 단어를 썼다는 얘기. 이 단어가 독일어 에스테티쉬(Ästhetisch), 프랑스어 에스테티크(esthétique)로 이어졌고, 이것이 영어 단어로 이어진 것.

어원 그대로 바움가르텐이 사용한 의미는 지각(知覺), 감각(感覺), 감성(感性), 감정(感情)과 관련된 학문이란 의미가 크다. 지금도 그렇지만그때까지 감성적 인식은 이성적 인식에 비해 낮게 평가되고 있었다. 그리고 바움가르텐은 감성적 인식의 완전한 것이 미(美)라 정의하고, 따라서 감성적 인식의 학문은 동시에 미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고전 미학은 미의 본질을 묻는 일종의 형이상학이었고,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초감각적 존재로서의 미의 이념을 추구한데 반해, 근대 미학에서는 감성적 인식에 의하여 포착된 현상으로서의 미를 대상으로 한다. 즉 어떤 이념으로서 추구되는 ~~~~ 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의식에 비쳐지는 미라는 것. 근대미학이 미의식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3.3 영국 경험론

2.3.4 칸트의 판단력 비판

미의 보편성을 중시하는 대륙 합리론과 개개인의 미적 취미판단을 중시하는 영국 경험론의 전통은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러 종합된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을 동시에 다룬 인물이라 철학에서 한 산봉우리 정도로 취급될 정도. 흔히 칸트의 3대 비판서로 꼽히는게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인데, 이중 마지막 판단력 비판이 주요 미학 개념을 담고 있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진','선','미'에 대입시켜 본다면, 순수이성비판은 '진', 실천이성비판은 '선', 판단력비판은 '미'에 대응된다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주로 하는 얘기들은 대강 그런것들이다. 칸트는 인식능력(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욕구능력(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쾌와 불쾌의 감정(인간은 무엇을 좋아해도 좋은가)이라는 심적 능력의 구분에 따라 초월론철학을 이론철학, 실천철학, 목적론의 세 부문으로 나누고 집필하려 했다고 한다.

2.3.5 헤겔과 독일 관념론

2.3.6 낭만주의

2.4 현대

19세기 후반부터는 독일 관념론의 사변적(思辨的) 미학을 대신하여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사례를 근거로 하여 미이론(美理論)을 구축해 나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페흐너는 ‘아래로부터의 미학’을 제창하면서 심리학의 입장에서 미적 경험의 법칙을 탐구하려는 ‘실험미학’을 주장하였다. 오늘날에는 또 미적 현상의 해명에 사회학적 방법을 적용시키려는 ‘사회학적 미학’이나 분석철학의 언어분석 방법을 미학에 적용하려고 하는 ‘분석미학’ 등 다채로운 연구분야가 개척되고 있다.

2.4.1 현상학적, 실존주의적 미학

2.4.2 해석학적 미학

2.4.3 마르크시즘 및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미학

2.4.4 프래그머티즘 미학

존 듀이 [경험으로서 예술]

2.4.5 분석 미학

분석철학적 방법론은 점차 미학과 예술의 문제에도 적용되어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고자 하고 있다.

  • 예술 정의와 범주 문제 - 예술정의 불가론(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의 도입), 예술제도론, 기능주의적 정의 등등...
  • 미적 태도, 미적 경험, 미적 속성에 관한 논의들 - 분석철학 전통의 형이상학에서의 속성 실재론/반실재론, 심리철학에서의 현상적 경험/지식 등의 논의들고 맞물려 이루어진다.
  • 예술과 가치 평가 문제 (도덕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논의들) - 분석철학적 전통에서의 윤리학/메타 윤리학과 얽혀 있는 문제들...
  • 개별 예술에 대한 논의들 (philosophy of ~) - 미술이론, 음악미학, 영상미학, 자연미학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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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양 미학사

동양에서의 미학은 서양에 비해 연구가 미진한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미학의 원칙은 개인의 판단력에서 근거하는데, 이 개인이라는 게 세상 앞에서 홀로 마주하는 존재로서의 근대적 개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의식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부분 근대화가 진행된 나라들도 있지만 여전히 가문을 우선시하거나 시대의 흐름을 대상화하지 못하고 휩쓸려다니기만 하는 것은 많은 동양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동양 문화의 핵심을 차지하는 인도와 중국은 그 양상은 다르지만 근대인으로서의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미학적 판단을 수행 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정리된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이것이 동양 미학의 진수'라고 이야기하기가 서양에 비해 어려운 것.

현대에 와서는 일본을 통해서 동양의 미학이 나름대로 그 형태를 갖추게 된 부분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서양에서도 동양의 미학적 이미지를 떠올릴 때 일본의 것이 되고는 하는 것이다.

'분재'와 '동양식 정원'을 예로 들자면, 이 둘은 동양 특유의 미적 감각, 내면성을 간소한 형식으로 대상화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거대한 나무와 자연을 가까이에서도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축소한 형상을 다듬어 내면서 자연의 거대함을 자신의 내부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성을 가다듬는 동양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근대적인 미학 개념을 통해 정형화되는 것들은 곧 일부에서 유행이자 스타일이 되는데, 더 파봤자 별로 나오지도 않는 서양에 비해 동양에서는 이렇게 보편화할 수 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는 수 많은 잠재적 대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다.

3.1 유가

3.2 도가

3.3 불교 및 인도의 미학

4 관련문서

4.1 미학 관련 인물

4.2 기타

5 참고자료

판단력비판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철학문헌정보센터
아트앤스터디 관련 강좌(유료)
위키피디아 판단력비판
두산백과
칸트: 판단력 비판

6 창작물에서의 미학(?)

광기어린 인물들이 자신은 XX의 미학이 있다는 식으로 읇조리는데 학문으로서의 미학과는 일절 관계없고 어떤 행위를 할 때 자신이 보기에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광경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신념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살인의 미학(..)이라든지 파괴의 미학(..)이라든지. 당연히 중2병과 접점이 있다.
  1. 당장 진화론을 봐도 기린이 목이 길어지는건 목이 길어지려는게 기린의 목적이라서가 아니라 어쩌다 자연도태가 이루어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목이 짧게 태어난 개체가 도태되면서 그 유전자가 후대에 이어지지 못한 것일 뿐 애초부터 정해진 각본대로 심어진 목적에 따라 그런 형상이 되는건 아니라는 것.
  2. 다만 현대 진화론 이론 중에서는 후성유전의 사례가 있다고 보고되기도 하므로 주의
  3. 희극에 대해 다룬 부분은 유실되었다고 한다.
  4. 중세에 관한 많은 재평가가 그러하듯이, 중세의 예술과 문화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더이상 부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르네상스 역시도 중세 예술의 연장선 혹은 전성기로 보는 견해마저 설득을 얻고 있다.
  5. 단 아우구스티누스 개인의 사상을 전체 기독교 미학의 정수로 보는 것은 현대 신학계의 눈에 심히 골룸한 관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서로마의 멸망으로 버로우 탈뻔했던 중세 라틴신학을 이끌었기 때문에 서양사상에서 빼놓지 않을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보다는 초대 교부였던 오리게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등등의 동방교부들이 요즘 기독교 미학의 대세로 뜨고 있다.
  6. 이는 전체 교회공의회가 열리는 경위를 역사적, 문맥적으로 추측한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흑사병이 창궐하고, 수많은 인구가 이동하는 때여서 다음과 같이 추측할 뿐이다. 르네상스의 발원지인 피렌체도 르네상스가 일어나기 전에는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죽었다.
  7. 흔히들 그리스 서적이라고 하면 다들 철학을 떠올리는데, 철학 서적뿐만 아니라 미술, 조각, 건축, 기술, 발명, 수학, 해부학, 식물학, 음악, 법률, 천문, 도시계획, 지리 등의 동로마, 이슬람(?!) 서적들도 포함된다. 동로마 제국에는 고대 로마 시절 때부터 전해 내려 온 엄청난 분량의 책들이 있었고, 바로 그 책들이 전부 피렌체로 몰린 것이다.
  8. 그의 조각, 미술, 건축에서도 이 사상이 가끔 보이지만 그의 사상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작품은 그의 편지들과 소네트이다.
  9.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크리스티안 볼프의 이름을 딴 학파이다.
  10. 비슷한 영어 단어를 찾는다면 sensitive 와 perceptive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