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멘델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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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x Mendelssohn

바이올린 협주곡 E minor op.64. 바이올린 야샤 하이페츠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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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묄리데 폰 에두아르드 마그누스 작, 멘델스존의 초상화 / 1846년 작)
야코프 루드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년 2월 3일 ~ 1847년 11월 4일)

독일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 초기 낭만파 시대의 음악가이다.

창작성 면에선 모차르트를 상회하는 신동이었고 요절만 빼면 가장 완벽한 인생의 승리자. 음악으로 대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얻은 음악가는 많지만, 멘델스존만큼 환경이 완벽한 음악가는 없었다.

작곡 뿐만 아니라 연주와 지휘도 했다. 당시 유명한 피아노오르간 연주자, 지휘자였다. 자신의 작품이나 다른 작곡자의 작품 모두 지휘했다.

그밖에도 시나 그림도 꽤 재주가 있었고 영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라틴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했다.

그리고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마태 수난곡을 복원하며 바흐의 음악을 다시 세상에 널리 알렸다. 잊혔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악보를 거액으로 수집해[1] 마태 수난곡을 복원하여 그의 음악을 재평가하면서 널리 알리기도 했다.[2] 이 부분은 2015년 5월 24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하필이면 신빙성 없는 푸줏간 이야기를 그대로 써먹었다 (...). 어찌되었든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을 복원하고 연주한 사건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이로써 바흐는 음악계에서 완벽하게 부활그리고 바흐는 신이 되었다하게 되었고 멘델스존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로베르트 슈만교향곡 제1번은 1841년 3월 31일에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이 직접 지휘를 하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에서 연주하여 초연되었고, 당시 작센 왕국의 군주였던 프레데리크 아우구스투스 2세에게 헌정되었다. 반면 교향곡 제4번은 지휘할 예정이었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취소했다.

2 모자랄 것 없었던 생애

북부 독일 함부르크의 명망 있는 유태인 가문에서 4남매 중 2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할아버지는 독일 계몽시대 철학자이자 라이프니츠 볼프학파의 한 사람인 모제스 멘델스존, 아버지는 부유한 은행장. 다만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소원했는데 아마도 몇백 년 전 조상 중 한 명이 유태인일 뿐 본인을 독일인으로 간주했고 개신교로 개종하기까지 한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는 유태계 혈통에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의 각각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인이자 영문학/불문학/이탈리아 문학가이고 누이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는데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1805~1847)에게 특히 꽤 의지했다. 커서도 왠지 시스콘 같다. 역시 음악가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홀대받았다.[3][4]

여기에 아름다운 아내 세실 샤를로트 소피 장르노(Cécile Charlotte Sophie Jeanrenaud)와 자녀 다섯 명[5]과 더불어 행복한 혼인 생활까지 향유[6]을 생각하면, 음악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던 행운아였다. 멘델스존 자신의 재능을 제쳐두고서라도 축복받은 인생. 당대 최고의 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어린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보고 칭찬했다는 사실만 봐도, 괴테를 만날 수 있을 만한 가문의 자재, 빛나는 천재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괴테가 멘델스존의 연주를 듣고 "저 아이의 실력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어린애가 빽빽거리며 소리지르는 수준일 뿐이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들의 생일 선물로 아버지가 아들이 단장인 악단까지 만들어 주었는데 당시 음악가들에선 흔치 않은 예라서 많이 질투받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역시 리하르트 바그너. 여기에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체코 프라하의 루돌피눔[7] 건물 꼭대기에는 조지 프레드릭 헨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안토닌 드보르자크를 위시해 독일·오스트리아·체코 등지에 있었던 유명한 음악가들의 동상이 있었다.(물론 지금도 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의 체코 점령 시절, 당시 체코를 담당하였던 체코 총독 대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그중에 있었던 멘델스존의 동상을 보고 유대인 음악가 동상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해하면서 이것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당시 일을 맡았던 인부들이 어느 것이 멘델스존의 동상인지 몰라서 그만 바그너의 동상을 파괴해서 지금도 멘델스존의 동상은 여전히 있지만 바그너의 동상은 그 자리에 없다. 사실 바그너가 반유태주의라는 오명까지 쓰면서 국가사회주의독일로동자당에 찬양받기까지 했지만, 정작 바그너는 유태인 음악가 레비를 후원하였고 레비가 유대교도였다는 사실에도 개의하지 않았던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바그너의 예 말고도 생전에 열폭 비스무리한 까임당한 적이 많았다. 일례로 '음악이 지나치게 분위기가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다', '평범한 음악가들의 생계 문제에 신경 쓰지도 않는 거만한 도련님' 등등.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열폭 수준이고[8] 두 번째도 멘델스존 본인은 가난한 연주자들의 복지 문제에 상당히 관심했고 이것을 개선하려고 꽤 노력했으므로 그의 입장에선 억울한 주장인데 이런 까임은 유복한 환경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다만 성격 면에서는 어릴 때부터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린 시절 펠릭스가 화를 내면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고 그나마 어머니도 손을 잡고 재우는 방법만이 유일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라이프치히 음악학교 교수 재임 시절에 멘델스존이 제자를 인격에 토대해 모욕하고 그것을 낙서해 동료 교수들과 낄낄거렸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매우 한정된 사람하고만 쉽게 잘 사귀는 인재였던 듯하다. 즉, 동시대 음악가들한테 부러움의 시샘이 아닌 진짜 미움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멘델스존의 천재성은 음악 작곡보다는 독일의 음악상 위상을 제고하는 곳에 더 많이 쓰였다고 간주해야 타당할는지도 모른다. 라이프치히 음악학교의 이름이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예술대학이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수였고 슈만과 함께 경제상으로 어려운 음악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등 수 많은 일했고 독일의 음악상 위상은 실제로 아주 높아졌다. 당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이던 쇼팽에게도 높은 금액의 공연료를 주면서 연주할 기회를 주기도 했듯이 많은 업적을 남긴 음악가였지만, 아깝게도 만 38세에 요절하고 만다. 죽기 전에는 악화한 건강으로 고생했는데 과로[9]가 건강을 더욱 악화하게 한 듯하다. 그 와중에 누나 파니[10]의 급작스러운 사망이 멘델스존에게 지울 수 없는 큰 비통에 빠지게 했고 그후 그 애통한 충격으로 말미암아 6개월이 채 안 되어 멘델스존도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9번 교향곡까지도 못 만들었다.

3 작품 세계 및 주요 작품

행복한 환경 때문인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과 사이 좋게 잘 어울리는 그의 성격 덕인지 위에선 성격 별로였다며 멘델스존은 밝고 아름다운 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멘델스존의 음악은 분야별로 성격이 많이 달라지지만 유명한 곡이 대부분 밝고 표제스럽다. 멘델스존의 작품은 선율. 리듬. 화성에서는 고전파 양식을 따랐으나 내용 면에서는 표제스럽고 있는 그대로 모습을 그림 그린 듯이 자세히 보여 주는 낭만파의 특징을 띠면서 낭만주의 작곡가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위치를 점한다.

멘델스존은 가곡, 교향곡, 협주곡, 관현악곡, 피아노곡, 오라토리오, 실내악, 합창곡, 찬송가, 성악곡 등을 다양하게 작곡하였는데 유명한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다.

3.1 관현악

1828년에 작곡된 곡.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에서 이 선율을 클라리넷을 통해 인용했다.
멘델스존이 유럽을 여행하던 중 들른 스코틀랜드 헤브라이즈 군도의 핑갈의 동굴에서 깊은 인상받고서 1830년에 작곡한 연주회용 서곡이다. 표제 음악의 특징을 보여주겠다라는 식으로, 음악의 풍경화이다. 브람스는 '이런 작품을 쓸 수만 있다면 내 모든 작품을 던져버려도 좋다'고 말했다.
동명의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위한 부수 음악(incidental music). 1823년에 서곡(Op. 21)만 썼다가 17년 후인 1843년에 완성된다. 축혼행진곡이 이 중 한 곡이다. 결혼식 때 신랑 신부가 퇴장할 때 나오는 그 음악이다. 아이러니한게 신부 입장 시 나오는 음악은 멘델스존이 죽은 뒤에도 그를 비난했던 바그너의 로엔그린이라는 것.

3.2 교향곡

  • 교향곡 2번 C장조 Op.61
일명 '찬미가'.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하라' 로 시작하는 시편 150편을 중심 텍스트로 썼다. 멘델스존의 후배 부르크너도 시편 150(브루크너)에서 중심 텍스트로 쓴 바 있다.
  • 교향곡 3번 A단조 "스코틀랜드" Op. 56
1842년 3월 3일에 초연한 곡으로, 멘델스존이 스코틀랜드를 여행했을 때 받았던 영감을 토대로 작곡했다. 그의 교향곡 중 매우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다.
  •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 Op. 90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때 느낌을 그린 작품으로,[11] 1833년 초연된 작품으로, 매우 밝고 경쾌한 곡이다.
  • 교향곡 5번 "종교개혁"

3.3 협주곡

  •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 64
1844년에 완성된 멘델스존의 마지막 대규모 관현악곡. 베토벤, 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물론 흔히 3대, 4대 등등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으로 손꼽히며, 바이올린 협주곡의 여왕이라 불리는 걸작이다.[12] 이 협주곡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정열 있는 감성이 곡 전반에 흐르면서도 형식미가 조화된 명작이다. 대중에게 인기도 최고라서 최다하게 연주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연주 시간도 30분 이내로 길지 않고 멜로디도 쉬워 1악장 전반부만 들어도 금세 친숙해진다. 파로디우스다! 스테이지 8에서 요제프 바그너의 쌍두 독수리 깃발 아래서와 함께 배경음으로 썼다.
  • 1악장: Allegro molto appassionato(빠르고 매우 열정 있게), E단조
  • 2악장: Andante(느리게), C장조
  • 3악장: Allegretto non troppo(지나치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 빠르게) – Allegro molto vivace(빠르고 매우 생기 있게), E단조
  • 피아노 협주곡 1번 G단조 Op.25
  • 피아노 협주곡 2번 D단조 Op.40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A플랫 장조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E장조

3.4 피아노

  • 무언가 (無言歌, Lieder ohne Worte)
1825년부터 1845년까지 48곡의 무언가(無言歌)를 작곡해 6곡짜리 8권으로 출판했다. '말이 없는 노래'란 뜻처럼 사물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노래 같은 피아노 곡이고 3분을 넘지 않는 짧은 소품이다. 5권(Op. 62) 6번째 곡 "봄 노래(Frühlingslied)"가 가장 유명하다. 시드 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 비밀 프로젝트에서 Op. 19 1곡을 배경음악으로 썼다. 문명 4의 오라클 동영상에도 쓰였다.
  • 피아노 소나타 E장조 Op.6
  • 론도 카프리치오소 E장-단조 Op.14
  • 환상곡 Op.16
  • 환상곡 F샤프 단조 Op.28
  • 3개의 카프리스 Op.33
  • 6개의 전주곡과 푸가 Op.35
  • 엄격 변주곡 Op.54
  • 어린이들의 소품 Op.72
  • 안단테와 변주곡 Op.82
  • 3개의 연습곡 Op.104
  • 피아노 소나타 G단조 Op.105
  • 피아노 소나타 B플랫 장조 Op.106

3.5 실내악

  • 현악 4중주 0번 E플랫 장조: 사후에 발견된 곡.
  • 현악 4중주 1번 E플랫 장조
  • 현악 4중주 2번 A단조
  • 현악 4중주 3번 D장조
  • 현악 4중주 4번 E단조
  • 현악 4중주 5번 E플랫 장조
  • 현악 4중주 6번 F단조
  • 현악 4중주를 위한 4개의 소품 Op.81
  • 첼로 소나타 1번 B플랫 장조
  • 첼로 소나타 2번 D장조
  • 비올라 소나타 C단조
  • 클라리넷 소나타 E플랫 장조
  • 현악 8중주 E플랫 장조
  • 피아노 6중주 D장조
  • 클라리넷, 바셋 호른, 피아노를 위한 연주회 소품 1번 F단조
  • 클라리넷, 바셋 호른, 피아노를 위한 연주회 소품 2번 D단조

3.6 합창&가곡

1834년에 작곡된 곡. 가곡 중 잘 알려진 노래 중 하나이다. 가사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4 트리비아

  • 그의 차남인 화학자 파울 멘델스존이 설립한 회사는 2005년까지 이어져 왔다. 바로 아그파 필름이다.
  •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인 모세 멘델스존은 곱사등이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에 얽힌 도시전설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제법 감동적인 편.
젊은 시절 함부르크의 어느 상인 집에 들렀던 모세 멘델스존은 그 집의 아름다운 딸 프룸체에게 반했지만 프룸체는 곱사등이인 모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결국 모세가 함부르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고, 마지막 날 모세는 용기를 내어 프룸체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미래의 배우자를 정해주신다는 말을 믿나요?" 그러자 프룸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반문했다. "네. 당신도 그 말을 믿나요?" "물론이지요. 내가 태어날 때도 하느님은 내게 미래의 신부를 정해주셨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덧붙이시더군요. '하지만 너의 아내는 곱사등이일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외쳤죠. '안 됩니다, 하느님! 차라리 저를 곱사등이로 만드시고 제 신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곱사등이로 태어났답니다." 그 말을 들은 프룸체는 처음으로 모세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이후 그녀는 모세 멘델스존의 헌신적인 아내가 되었다.

해당 이야기는 선물이라는 책에서 소개된 내용이지만, 다시 한 번 멘델스존의 유복함을 생각해 보시라. 멘델스존 가문은 부유한 은행가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위의 이야기를 읽으면 감흥이 새롭다.

여담으로 누나 파니가 할아버지처럼 곱사등이였다는 설이 있다.
  • 아버지 아브라함이 경영했던 멘델스존 은행은 20세기 초까지 독일의 대형 은행으로 성장했고, 독일의 패전과 대공황 때도 경영 위기를 잘 넘겼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후 반유대정책을 펼치면서 위축되었고, 1938년에 도이체방크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 베토벤의 대 푸가가 워낙에 복잡난해한 작품이다 보니 '아, 그거 대선배님의 걸작이죠'라는 요식 행위성 찬사만 보냈을 뿐이고 곡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건 멘델스존 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도 마찬가지여서 대 푸가가 제대로 분석되어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20세기에 쇤베르크스트라빈스키 등이 연구를 하면서부터 가능했다.

(순서대로 기본곡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루트비히 판 베토벤펠릭스 멘델스존프레데리크 쇼팽프란츠 리스트안토닌 드보르자크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기본곡 마무리 이다.)

  1. 하인과 고기를 사러 푸줏간에 들렀다가 고기 포장지로 사용되던 마태 수난곡의 중요부분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 해당 의견은 대체로 설득력이 없다. 마태수난곡의 규모를 볼 때 푸줏간에서 총보를 온전히 보관할 리도 없고, 마태수난곡 악보 사본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19세기 음악사를 다루는 책들에서는 대체로 멘델스존의 할머니가 생일선물로 줬다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인다. 해당 이야기는 바흐 악보 이야기 나올 때 마다 등장하는 시덥지 않은 농담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2. 여기서 흔히들 오해하는 사실이 있는데 마태 수난곡 같은 바흐의 명곡들은 음지에 묻혔지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그 자체는 묻힌 이름이 아니었다. 멘델스존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잊힌 여러 명곡을 발굴하기 전까지 출판된 많은 음악 서적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이름이 언급되는 게 그 증거.
  3. 원 게시물엔 멘델스존의 누이인 파니의 천재성이 조금 더 높았다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파니가 동생에게 보낸 작품이 그에게 굉장히 많이 까인 사실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떨어지는 말이기도 하다. 자세히 아시는 분 추가바람. (멘델스존은 자기가 싫어하는 스타일을 많이 지닌 쇼팽을 포용하고 높이 평가하는 등, 남의 재능을 인정 못하는 성격까진 아니었다고 하는 만큼, 파니는 아마추어 정도까진 아니었더라도 평범한 수준의 음악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 파니에게 프로 음악가의 삶을 권유하지 않은 것은 19세기의 성차별과 출판사와의 계약으로 인한 강도높은 노동 때문이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해당 기사에서도 파나에 대해서 다루었으며 파니의 천재성과 프로 음악가로의 좌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음악세계에서 출간한 펠릭스 멘델스존: 전통과 진보의 경계에서 잘 다루었다.
  5. 1838년 2월 7일에 칼 볼프강 파울이, 1839년 10월 2일에 마리가, 1841년 1월 18일에는 파울이, 그 이후에는 릴리와 펠릭스 아우구스트가 태어난다. 그 중 펠릭스는 1851년에 홍역에 걸려 죽는다.
  6. 그런데 멘델스존이 죽자 부인은 그와 주고 받았던 편지를 다 태웠다. 금슬이 좋았다면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겠지만, 배우자 사후 유품을 다 처분하는 건 대개는 죽은 사람이 지긋지긋해서 그 흔적을 남기는 것조차 싫거나 그 사람과의 사이가 너무 좋았기에 정확히는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자기도 죽고 마리라는 생존 본능에서 나오는 행동 둘 중 하나라고 한다. 참고로 전자는 재혼을 꺼리고 후자는 의외로 금방 재혼하는 예가 잦다.
  7. 예술의 전당 일종 같은 곳.
  8.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열폭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현재 음악계에서 돈을 버는 어떤 사람들은 멘델스존의 음악상 깊이는 다른 작곡가보다 조금 얕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9. 이때 걸작 오라토리오인 엘리야가 탄생했다.
  10. 동생 펠릭스처럼 음악가로서 활동했었다. 동생 못지 않은 재능이 있었고 실제로 훌륭한 곡도 많이 작곡했으나 여성 음악가를 대상으로 한 편견이 강할 때라서 큰 유명세를 타진 못해서 작곡한 곡 중 일부는 동생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책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에서는 남편 사후 본격으로 음악 활동을 하려 했는데 이에 멘델스존이 편지로 반대 의견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이 실화인지는 불확실하나, 어쨌든 그 무렵으로부터 1년 후 파니는 죽었고 펠릭스는 자신의 마지막 현악사중주에 <파니를 위한 레퀴엠(Requiem For Fanny)>라는 제목을 붙였다.
  11. 다만 멘델스존은 이탈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2. 바이올린 협주곡의 왕은 베토벤의 협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