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나폴레옹 전쟁/인물, 명장, 구국영웅
역대 영국 총리 | |||||||
24대 | ← | 25대 | → | 26대 | |||
고더리치 자작 프레더릭 존 로빈슨 | ← |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 → | 그레이 백작 찰스 그레이 | |||
27대 | ← | 28대 | → | 29대 | |||
멜버른 자작 윌리엄 램 | ← |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 → | 로버트 필 |
“공작이 없는 영국은 상상할 수 없다. 그는 신하가 된 자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모두의 위에 우뚝 섰었다. 그는 온 나라에서 존경받았으며 군주가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다. 오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 웰링턴 공작 사후.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영국 육군 원수이자 제1대 웰링턴 공작이며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육군 최고의 지휘관.
당시 무적에 가까웠던 희대의 먼치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최대 호적수이며 수비적 전술의 극한을 보여준 명장. [1]
1 생애
1.1 나폴레옹 전쟁 이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를 지배하는 영국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3남이라 영지를 물려받을 가망이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군에 투신했다. 특이한 것은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가서 군사학을 배웠다는 점. 집안이 빵빵한 덕에 영국 특유의 매관 제도를 이용하여 빠르게 진급, 1794년에는 연대장으로 플랑드르 지방에서 복무하다가 프랑스 혁명군과 싸워 공적을 쌓아갔다.
1798년 그의 형이 인도 총독[2]이 되자 형을 따라서 인도 주둔군에 복무하며 지방 반란들을 평정하며 형의 후광과 자신의 전과로 소장까지 진급한다. 특히 1803년 9월 23일 벌어진 아사예 전투에서 5천명의 병력으로 마라타의 5만 병력과 싸워 크게 승리했는데 웰링턴 본인은 워털루보다도 이 전투를 자신의 최고 전과로 꼽았다. [3] 1805년 본국에 귀국하여 인도에서의 공적으로 기사 작위를 받지만, 본토의 육군고관들에게 인도 복무기간 중의 성과는 무시당한다.
1807년 사단장으로 진급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덴마크를 침공하는 작전에 참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중장으로 진급, 1808년 포르투갈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이 파견한 부대의 선발대 지휘관으로 이베리아 반도로 처음 향한다. 그러나, 초전에 아직 소수였던 쥐노 휘하의 프랑스군을 연달아 격파하던 아서 웰즐리는 후속부대와 함께 도착한 상관들의 삽질로[4] 그의 성과가 모조리 날아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1808년 9월, 이것이 문제가 되어 아서 웰즐리는 그 상관들과 함께 의회조사를 받기위해 본국으로 송환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1.2 나폴레옹 전쟁
그러나, 후임으로 임명 되었던 존 무어 장군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직접 지휘하는 20만 대군에 밀려 퇴각하던 중 전사하자, 웰즐리는 그 후임으로 임명되어 다시 이베리아 반도로 향한다. 여기서 그는 마드리드를 향해 진격하지만, 프랑스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실패한다. 이후 연패로 개판이 된 영국군을 추스르고, 군기를 확립하며, 포르투갈-스페인 국경에 강력한 요새들을 설치, 프랑스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러나 군의 사기와 전투능력이 향상된데 반해 고질적인 약탈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여 민가를 약탈하다 걸리는 자들은 죄다 교수형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약탈행위는 번번히 일어났다. 웰링턴은 이에 질렸는지, 본국이나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기 병사들을 오합지졸, 영국사 최악의 부대,거지새끼들 등등으로 온갖 악평을 했다. 이베리아에서 철수하던 프랑스군의 뒷통수를 까 그동안 약탈했던 스페인의 보화들도 버리고 도망가게 만들었던 비토리아 전투에서는 병사들의 엄청난 약탈에 빡쳐[5] '술마시러 입대한 거지새끼들' 이라고 했다가 두고두고 까이기도 했다. 민가 약탈뿐만 아니라 전사자들의 시체를 뒤져서 물건을 챙기는 시체약탈도 교수형 시켰다고 한다.
약탈을 막은건 인도적인 이유 외에도 전략적인 이유도 있었는데, 프랑스 병사들이 스페인 땅에서 약탈질을 해대다 반프랑스 민병대와 게릴라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가 바로 그 상황에서 스페인에 왔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진격할때는 국적문제로 스페인군의 통솔이 영국군보다 더 어렵고, 또 스페인 병사들이 프랑스에 품고 있을 원한을 우려해 스페인군을 회군시키기도 했다.[6]
1810년 영국군을 포르투갈에서 몰아내기 위해 앙드레 마세나와 니콜라 장드듀 술트가 포르투갈로 침입해 왔으나, 부사코 전투에서 마세나군과 격돌, 영국-포르투갈군은 1,200명의 사상자가 난데 반해, 마세나의 부대는 4,5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만든다. 그리고 그대로 요새선으로 후퇴, 요새를 공격하던 프랑스군은 제풀에 지치고, 식량과 물자는 바닥나고, 지휘부마저 분열되어 퇴각하게 된다. 그러나, 추격전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마세나의 조공인 술트가 다른 쪽 국경에 침입, 바다호즈 요새를 점령했기에 추격을 중단하고 포르투갈로 귀환한다.
확실한 승리를 거두는 데는 실패했지만, 일단 프랑스군은 더 이상 포르투갈 공세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고, 영국이 오히려 공세를 가할 수 있는 입장으로 바뀌어, 웰링턴은 스페인 게릴라를 지원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을 노리는 한편, 수시로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여 서서히 이베리아 반도의 프랑스군을 약체화 시킨다.
1813년, 마침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눈을 돌리는 틈을 타,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연파하기 시작, 비토리오 전투에서 스페인내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멸하고, 1814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남부를 유린하며 북상하던 중, 나폴레옹의 실각 소식을 듣는다. [7]
1815년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는 이전과는 달리 호레이쇼 넬슨의 뒤를 잇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웰링턴 공작의 칭호와 영지를 하사받는다. 그리고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정세를 결정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석하게 된다.
그러나, 빈 회의 와중에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급히 귀국, 영국육군을 이끌고 벨기에로 향해 워털루 전투에서 우세한 프랑스군을 맞아 악전고투 결국 프랑스군에게 중앙을 돌파당할 뻔했으나 마침내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도착하면서 프랑스군을 포위, 나폴레옹의 운명을 끝장낼 수 있게 된다.
1.3 나폴레옹 전쟁 이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가로 변신, 의회와 내각에서 여러 활동을 한 끝에 1828년에 총리가 된다. 총리 시절 그의 주요 업적으로 아일랜드의 오랜 염원이었던 천주교도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그로 인해 자신이 당수이기도 했던 보수주의 여당의 지지를 잃게 된다. 훌륭한 군인일 뿐 정치감각은 별로 없었던 데다가[8] 대단히 보수적인 정책으로 군인 시절 얻었던 인기를 잃고 2년만에 사임했다. 1842년에는 영국 육군 총사령관이 되기도 한다.
1846년 공직에서 은퇴한 뒤 1852년 83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으며 유해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1.4 흑역사
아편전쟁 지지발언을 의회에서 했다. 귀족 출신의 보수주의자이고 군 지휘관이었던 웰링턴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영국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는 별로 당연한 짓도 아니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아편전쟁에 대한 평가는 극히 나빴고, 영국 의회 내에서도 아편전쟁 지지파와 반대파의 비율은 비슷했다. 물론 현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도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분명히 있었고, 특히 아편전쟁 같은 경우는 사회 주류에서도 심하게 비판받고 있었다. 더구나 영국은 1833년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등 사회적 악습 철폐에 대한 요구가 많던 시대에 마약 팔아먹자고 전쟁 한다는 건 귀족사이에서도 반발이 심했다. 대표적인 것이 훗날 수상을 하는 글래드스턴 등이었다. 대영제국은 자랑스럽지만 마약팔아먹는건 좀 창피하다구요. 결국 아편전쟁 결의안은 십여표 차이로 겨우 통과되었다.
1819년 맨체스터에서 보편선거를 요구하는 빈민들의 집회(차티스트 운동) 당시 기병대로 군중들을 깔아뭉개기도 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맨체스터의 성 피터 광장이었기에 워털루 전투에 빗대어 '피터루 학살(Peterloo Massacre)이라고 욕을 처먹었다.
2 일화
병사들에겐 굉장히 엄격해 Iron Duke(철의 공작)이라고 불리던 때가 있었지만 사실 다정한 사람이라고 불러지는 일화들이 많이 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귀국하여 길을 가던 중 한 소년이 울고있는 것이 보여"이런이런, 이건 신사가 할 행동이 아니지. 왜 그렇게 우느냐?."라고 물었다.
"제가 곧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는데 제가 학교로 가버리면 아무도 저의 두꺼비를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계속 울기 시작하자, 잠시 생각하던 웰링턴 공작은
"걱정하지 말고 학교로 돌아가거라. 두꺼비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라고 대답하고 가던길을 계속 갔다.몇 주 후 학교에 돌아가 있던 소년에게 한통의 편지가 전달되었는데 거기엔 영국군의 육군원수이자 웰링턴 공작인 아서 웰즐리가 소년에게, "두꺼비는 잘 지내고 있음" 이라고 써있었다고 한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시절에 숱하게 싸웠던 니콜라 장드듀 술트가 1838년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때 특별 대사로서 영국에 방문했는데 그를 발견한 웰링턴 공작은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놀란 술트가 그를 쳐다보자 공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드디어 당신을 붙잡았군."
이베리아 반도에서 술트를 이긴 후 그와 벌인 추격전에서 그를 놓친 일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이 후 두사람은 껄껄 웃으며 그 당시의 추억을 회상했다고 한다.
웰링턴 공작이 구제불능이었던 한 병사를 처형하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너를 교육도 시켜봤고 상담도 해봤다. 그리고 탈영할 때마다 징계도 내리고 감옥에 보내기도 해봤다. 너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해봤지만 너는 뉘우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너를 사형에 처해야겠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장교가 급히 웰링턴에게 말했다.
"장군님, 장군님은 물론 군율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하셨습니다. 하지만 장군님께서 이 병사에게 시도하지 않으신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장교의 말을 들은 공작은 크게 감명받았고, 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병사는 완전히 달라졌고, 탈영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누구보다도 용감한 병사가 되었다고 한다.
워털루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축하파티가 열렸는데, 한 시골 병사가 손 씻는 물인 핑거볼을 멋모르고 마셔 버리자 잔치는 웃음바다가 되었다.그러자 웰링턴 장군은 "워털루 전투에서 용맹스럽게 싸워 승리를 거둔 저 젊은 병사와 같이 핑거볼로 축배를 듭시다"라고 말하면서 물을 들이켰다. 이 순간 모든 손님이 핑거볼로 축배를 든 후 장내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에 의해 패배한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을 묻는 질문에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최고의 전략가는 나폴레옹!"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아서 웰즐리만이 아니라 블뤼허 장군의 적절한 증원도착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나폴레옹을 넘어서는 전략가라고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시대의 장군으로서 나폴레옹의 재능을 인정했다고 보는 쪽이 더 가까울 것 같다. 예컨대 이베리아 전역 당시 가까운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군의 졸렬한 움직임으로 피해가 컸던 것을 한탄하며 만일 나폴레옹이 상대였다면 아군은 전멸했을거란 식으로 얘기한 적도 있다. [9]
다만 부하들에게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는지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그가 사람이 없는 호수에서 헤엄을 즐기다가 익사할 뻔 했는데 우연히도 거길 지나던 부하 하나가 그를 구해주었다. 그가 고마워하면서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줄테니 말해보라고 하자 그 부하가 말하길 "누구에게도 내가 장군님을 구했다는 걸 말하면 안됩니다. 내가 맞아죽을지도 모르거든요."(…)
위에서 말했듯 약탈하다 걸리면 범행지역 근처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효수해둘 정도로 엄격했던지라 인기가 없었던 듯하다.[10]
- 출신 배경과 가족 대대로 뼛속까지 귀족이라 하인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직접 말도 걸지 않았다고 한다.
- 4개국에서 작위를 받았다. 영국의 웰링턴 공작위 (1814), 포르투갈의 빅토리아 공작위 (1812), 스페인의 시우다드로드리고 공작위 (1812), 네덜란드의 워털루 공작위 (1815).
- 워털루 전투가 끝난지 어느정도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워털루를 방문했는데, 네덜란드가 세운 사자의 언덕때문에 지형이 변한것을 보곤 "빌어먹을 네덜란드 놈들! 내 전장을 망쳐놨어!"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 자신이 아일랜드 출신이라는걸 별로 자랑스러워 하지 않았다. 실제로 작위를 받을때 아일랜드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성을 냈을 정도. 하지만 훗날 총리 시절에 가톨릭을 해방시킨 덕에 아일랜드에서 더블린에 동상이 세워졌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매우 높다.
- 입맛이 좀 이상한 게 아닌가 싶다. 아니 이상한 거 맞다(…). 반도전쟁 도중 니콜라 장드듀 술트와 전투를 벌여서 승리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술트가 저녁 식사로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려다가 전투가 벌어져 먹지를 못했다. 식초를 넣는 문제와 양념의 종류에 대해서 요리사와 토론까지 벌이면서 받은 메뉴인데 말이다;;
술트는 부하인 요리사에게 신나게 씹혔다[11]그리고 웰링턴이 전투에서 이기면서 그 스테이크 요리가 웰링턴의 저녁식사가 되었다. 근데 웰링턴이 그 스테이크 요리를 한입 먹더니,
"프랑스 요리 맛있다더니, 정말 맛없다. 고기에 뿌려진 양념 없애고, 거기에 식초 뿌려"
- 라고 요리사에게 말했단다. 설령 요리가 전투 도중에 식어서 맛이 떨어졌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괴이한 취향이다(...). 거기에 1812년에 잠시 파리 대사로 있었을때 프랑스 귀족의 만찬에 참가했다가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해 웰링턴을 초대한 공작이 "아니 맛도 못 느끼면서 왜 파리에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게다가 식사도 불규칙적이고 가끔 계란 몇 개 정도 툭 까먹는 걸로 보아 맛에는 그다지 관심없었을 듯하다.
- 다만 와인은 꽤나 신경쓴 모양. 그런데 그것도 영 아닌 것이 영국산 와인만 마셨다나?
- 전쟁영웅답게 그의 이름을 딴 해군 전함이 여럿 존재했다. '웰링턴'이나 '아서 웰즐리' 대신 그의 별칭인 '아이언 듀크'를 사용, 제일 유명한 것은 1912년에 취역한 동명의 슈퍼 드레드노트 함급의 네임쉽 '아이언 듀크'[12], 가장 최신예 함은 1991년에 취역한 23형 프리깃 HMS 아이언 듀크다.
- 공식 칭호가 끔찍할 정도로 길다. 자국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동맹국으로부터도 주어진 것도 많기 때문이다. 칭호는 다음과 같다;
Arthur, Duke and Marquess of Wellington, Marquess Douro, Earl of Wellington, Viscount Wellington and Baron Douro, Knight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Knight Grand Cross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One of Her Majesty's Most Honourable Privy Council, and Field Marshal and Commander-in-Chief of Her Majesty's Forces. Field Marshal of the Austrian Army, Field Marshal of the Hanoverian Army, Field Marshal of the Army of the Netherlands, Marshal-General of the Portuguese Army, Field Marshal of the Prussian Army, Field Marshal of the Russian Army, and Captain-General of the Spanish Army. Prince of Waterloo, of the Kingdom of the Netherlands, Duke of Ciudad Rodrigo and Grandee of Spain of the First Class. Duke of Victoria, Marquess of Torres Vedras, and Count of Vimiera in Portugal. Knight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the Golden Fleece, and of the Military Orders of St. Ferdinand and of St. Hermenigilde of Spain. Knight Grand Cross of the Orders of the Black Eagle and of the Red Eagle of Prussia. Knight Grand Cross of the Imperial Military Order of Maria Teresa of Austria. Knight of the Imperial Orders of St. Andrew, St. Alexander Newski, and St. George of Russia. Knight Grand Cross of the Royal Portuguese Military Order of the Tower and Sword. Knight Grand Cross of the Royal and Military Order of the Sword of Sweden. Knight of the Order of St. Esprit of France. Knight of the Order of the Elephant of Denmark. Knight Grand Cross of the Royal Hanoverian Guelphic Order. Knight of the Order of St. Januarius and of the Military Order of St. Ferdinand and of Merit of the Two Sicilies. Knight or Collar of the Supreme Order of the Annunciation of Savoy. Knight Grand Cross of the Royal Military Order of Maximilian Joseph of Bavaria. Knight of the Royal Order of the Rue Crown of Saxony, Knight Grand Cross of the Order of Military Merit of Wurtemberg. Knight Grand Cross of the Military Order of William of the Netherlands. Knight of the Order of the Golden Lion of Hesse Cassel, and Knight Grand Cross of the Orders of Fidelity and of the Lion of Baden. |
-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전장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튼의 교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연설을 하던 중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에서(Here)'라고 말한 것을 그 당시의 교장이 윤색을 가해 글을 쓴게 잘못 알려진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1818년에 이튼을 방문했을때 "나의 용기와 기상은 이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얻은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모교에 감사했다고 하는걸 보면 아주 틀린말은 아닌듯.
3 대중문화 속의 아서 웰즐리
- 나폴레옹 전쟁이 배경인 만큼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도 등장. 영국을 침공한 프랑스군을 대상으로 활약하고, 보수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인지 로렌스와 테메레르에 대해서는
츤츤못마땅하게 말을 하지만, 꽉 막히고 무능한 높으신 분은 아니라서 용권신장 요구를 일부 받아들이고, 여자인 제인 롤랜드를 상원의원으로 추천하는 등의 모습도 보인다.
나폴레옹시대를 다룬 게임에 나올 경우 대부분 나폴레옹 다음가는 능력을 보유한다.
랑펠로에서 능력 A가 넷인 인물은 이 둘뿐이다. 셋인 인물은 메테르니히 뿐이고 피트, 다부, 카를, 쿠투조프같은 인물들도 둘 뿐이다.
나폴레옹 : Politics B Finance C Supply B Build A Leader A Infantry A Cavalry C Artillery A
웰링턴 : Politics B Finance B Supply A Build A Leader A Infantry A Cavalry B Artillery B
능력치를 합해보면 오히려 웰링턴이 더 좋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포병능력 A가 압박.
- 보드게임 나폴레오닉워에서 장군의 능력은 전투능력-지휘능력으로 돼있는데 나폴레옹이 4-8으로 최고이고 웰링턴이 4-6으로 그 다음이다. (3-6인 다부, 술트, 쿠투조프가 그 다음) 이 작품의 후속작은 "웰링턴"인데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1812년에서 1814년을 다루고 있고 당연히 주인공. 술트와 함께 독보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웰링턴만을 위한 이벤트카드도 따로 존재한다.
- 버나드 콘웰 경의 소설인 샤프 시리즈에 등장한다. 주인공 리처드 샤프의 은사로서, 인도에서 샤프에게 목숨을 구해진 후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준다.
-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 영국군 원수로 등장. 각 나라 별로 한 명씩 있는 원수[13] 중 한 명이며 만렙에 가까운 지휘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처음 영국에 주어지는 육군 지휘관들의 능력이 죄다 고만고만해서 다른 장군들[14]을 고용하기 전까지는 프랑스를 상대로 이리저리 굴려질 운명이다. 물론 다른 장군들이 있어도 맹활약하긴 하는데 일단 전장에서 한 번 당하고 나면 능력치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 소설 혼블로워에 가상의 여동생인 바바라가 주인공인 혼블로워와 결혼하며 직접 나오지는 않으나 여동생을 통해 많이 언급된다.
4 기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는 웰링턴 공작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문제는 웰링턴 공작이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그리 예뻐하지 않는 잉글랜드인(정확히는 아버지대에 아일랜드로 이주한 잉글랜드인)이라는 점. 자기네 앞마당에 잉글랜드 영웅의 동상이 떡하니 놓여져 있는것에 배알이 꼴린 스코틀랜드 시민들은 그렇다고 무식하게 부술수는 없고,[15] 대신 머리에 교통 고깔을 씌워놓았다(...) 영어권의 묘사에서 찌질이나 덜떨어지는 사람 또는 수업때 벌을 받는 학생이 dunce(멍청이)라고 쓰여진 고깔모자를 쓰는 묘사가 있는데 그런 점을 활용한 일종의 영국식 조크인 셈. 교통 고깔이 처음 발견된건 1980년대라니 나름 전통있는 장난이라 할 수 있다.
행정 당국은 고깔을 벗겼지만 몇 번이고 다시 고깔이 씌워지는 바람에 고깔을 치우는 비용으로만 연간 10,000 파운드나 들어갔다. 결국 보다못한 글래스고 시의회는 동상 훼손과 시민들이 다칠 것을 우려해 동상을 높이려고 계획한 적도 있으나 '고깔을 지키자'는 글래스고 시민들의 시위에 무려 72,000명이나 모이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웰링턴경 동상의 고깔 씌우기는 글래스고의 명물이 된 셈. 참고로 웰링턴 공작의 동상은 런던과 맨체스터, 햄프셔 주 등 영국 각지에 있지만 이런 수모를 겪는 곳은 오직 글래스고 뿐이다. 그러게 왜 스코틀랜드에 세워 놔서....
그의 이름을 딴 블랙프린스급 전열함 웰즐리 함이 1815년 진수되었는데, 백이십년 넘는 세월 동안 영국해군의 최고참 중 하나로 활동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나치 독일 공군 슈투카의 폭격으로 침몰했다(...). 전열함 중 최후로 격침된 전열함이자[16], 항공 폭격으로 격침된 유일한 전열함으로 기록되었다.
- ↑ 다만 그렇다고 공격 능력이 약했던 것도 아니다. 단지 대부분의 경우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신중하게 행동하다보니 수비적으로 싸운 결과이다. 살라망카 전투같이 기회가 보이면 적극적으로 공격해 승리하기도 했다.
- ↑ 정확히는 Governors of the Presidency of Fort William (Bengal)로 벵골지역에 있던 윌리엄 요새의 지사였다. 인도 총독의 전신격이 되는 지위로, 당시에는 동인도 회사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 ↑ 마라타는 인도 중부에 있던 국가이다. 인도군이라고 하면 구시대적인 동아시아군대를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이들은 유럽인들에게 훈련받아 유럽군대와 같이 싸울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사예전투 승리 후 전리품인 대포를 조사해보니 프랑스 표준 방식으로 운용했다고 한다.
- ↑ 신트라 협약. 쥐노 휘하의 포트루갈 주둔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에서 그냥 물러나는 대신 "자신의 약탈품을 포함해 자신들을 영국 해군이 프랑스로 수송해주는" 협약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비메이라에서 크게 패해서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즉, 계속 공격했으면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상황. 이런데 저런 협약을 맺어버렸으니...
- ↑ 당시 프랑스군이 노략질 해가던 스페인의 보화들은 당시 화폐 가치로 최소 5백만 파운드로 추정되고 정확한 액수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이 중 웰링턴이 공식적으로 회수 한 것은 고작 2만 5천 파운드 정도였고, 영국군 병사들이 약탈한 액수는 대략 1백만 파운드로 추정된다. 심지어 영국군 95 연대의 에드워드 코스텔로라는 병사는 개머리판 몇번 휘둘러 1천 파운드를 털었다는 무용담 아닌 무용담도 구체적으로 전해질 정도(....) 사실 백만파운드를 약탈한 영국군 병사들은 세번째 약탈자들이였는데, 첫번째는 물론 영국군에게 뒷통수 맞고 패주하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챙길껀 챙겨갔던 프랑스 병사들이고, 두번째는 주변에 살던 비토리아의 주민들이였다(....) 팀킬과 살인 약탈 방화가 난무하고 무지한 병사와 주민들이 명화백의 그림들을 뜯어서 은그릇과 보석을 포장하는데 사용하는등 완벽한 개판이었다.
- ↑ 현대에도 전시의 약탈을 막으려고 애를 쓴다.
- ↑ 웰링턴의 이베리아반도에서 활약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 항목에 조금 더 자세히 나와 있다..
- ↑ 대표적인 게 스윙 폭동(Swing Riots) 대처.농업구조변화와 전쟁으로 세금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농업 노동자들이 탈곡기 파괴운동을 벌여 사회가 불안정해졌는데,거기서 현재 개선할 건 없다고 발언했으니(..)이 발언이 알려지자마자 런던에 있던 그의 집이 털렸다.
- ↑ 영국이 나폴레옹을 띄워 주는 것은 결국 그를 이긴 대영제국을 에둘러 자화자찬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 자체는 그 시대의 모두가 인정했다. 심지어 나폴레옹 때문에 군대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고 직장을 잃어버린 클라우제비츠나 덤으로 목숨마저 잃은 샤른호르스트 같은 사람들도 나폴레옹을 미치광이 전쟁광이라고 욕할지언정 전략의 천재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웰링턴 자체가 고지식한 군인 타입인지라 상대를 높이면서 자기를 높이는 식의 교묘한 말을 하는 타입으로 보기도 어렵고.
- ↑ 이 일화는 웰링턴 장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유머 이야기로 쓰이기도 한다.
- ↑ 샤프 시리즈에 이 내용이 나온다.
- ↑ 유틀란트 해전 당시 영국 대해군 총기함.
- ↑ 전장에서 쓰러져도 부상으로 처리되어 수도에서 부활한다. 이외의 장군들은 얄짤없이 전사 처리. 프랑스의 경우 당연하게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다.
- ↑ 토머스 픽튼이라든지 칼 베레스포드 등 괜찮은 장군들도 있다.
- ↑ 그렇다고 글래스고 시민들이 정말로 동상을 세운게 화났다는 건 아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코틀랜드 연대도 영국군 소속으로 열심히 싸웠고, 그 중에서도 79와 92 하이랜더 연대는 워털루 전투 당시 가장 격전을 치룬 부대 중 하나였다. 실제로 글래스고에서 웰링턴 공작의 동상을 부수거나 이전하자는 이야기가 진지하게 나온적은 한 번도 없다. 이 건은 어디까지나 유머이자 장난일 뿐이다.
- ↑ HMS 푸드로얀트는 1949년 자침, HMS 빅토리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