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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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린뱌오,

林彪(임표) / Lín Biāo (1907년 12월 5일 ~ 1971년 9월 13일)

중국군인. 정치인.

1 생애

1907년 후베이성황강이란 곳에서 중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대 이 시기의 중국 젊은이들이 군인이 되려면 누구나 거쳐 갔던 황포군관학교[1]에 입학했는데 여기서 저우언라이와 소련군관 바실리 블류헤르를 만나 제자가 되었다.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도 이때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26년, 중국 국민당 소속으로 국민당의 북벌에 참여해 공을 세우면서 고속승진해 나갔다. 소대장이었던 계급이 불과 몇 달만에 대대장에까지 올랐고 이듬해에는 대령으로까지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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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제스가 상하이 점령 직후 공산당원을 대거 학살하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민당에서 탈출해 난창에서 공산당의 8.1무장봉기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후 장시 소비에트홍군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마오쩌둥을 만났고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펑더화이와 함께 홍군 최고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렸다. 이후 대장정에 참여해 옌안까지 가게 된다.

2차 국공합작이후, 1937년 9월 린뱌오는 팔로군 115사단장이 되어 산시성 핑싱관에서 일본군 제5사단의 보급중대를 매복공격해 궤멸시키는데 이것이 공산당의 양대 승전으로 유명한 핑싱관 전투다. 그렇게 따지면 국민당의 승전도 타이얼좡 전투밖에 없지않냐고 따질지도 모르겠지만 국민당은 이후 우한 지역에서 여러번의 소규모 승전을 이루어냈고 창사에서의 공세 역시 3차례나 막아냈었다.

특히 1941년 12월의 3차 공세 방어는 연합국으로부터 '진주만 이후로부터의 연합국의 유일한 승리', '어두운 구름에 가려있는 극동, 장사 상공에만은 빛줄기가 확연히 보인다.'라고 격찬을 받을 정도였다. 유력한 적과 결전을 피한다는것은 결국 국민당의 진지전은 잘못되었고 공산당의 운동전만이 옳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에 정당한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그 주장의 근거로 보는 스틸웰 재평가설의 근원은 뛰어난 야전지휘관인데 그 가설의 심각한 문제는 그 뛰어난 야전지휘관이 어디까지나 워게임에서만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스틸웰은 버마전선의 연합군간의 불화만을 초래했고 무의미한 군대 운용이나 방만한 물자 사용으로 연합군의 작전계획을 크게 지체시켰을뿐이다.

그러나 1938년, 전투에서 노획한 일본군의 망토를 입고 승마를 하다가 그를 일본군으로 오인한 아군의 사격으로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옌안으로 후송되었다가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까지 간뒤 1942년까지 요양해야 했다. 쏜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 부상 후유증[2]으로 전선에서 활약하지는 못하고 항일군정학교와 중앙당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일어난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은 본부인 옌안이 함락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린뱌오가 다시 전선에 투입되어 동북항일연군을 개편한 둥베이 인민해방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만주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국공내전은 공산당쪽으로 흐름이 기울게 되었고 린뱌오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1949년 베이징을 함락시킨데 이어 1950년에는 광시성까지 내려가 장제스대만으로 쫓아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공으로 린뱌오는 당과 군에서 고위직에 올랐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한국전쟁 때는 마오쩌둥이 린뱌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린뱌오는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했고 건강도 좋지 않아 결국 펑더화이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을 맡아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3]

린뱌오가 조용히 있었던 것은 중공정권 창립 이후 최초의 숙청사건이었던 가오강(高崗)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오강은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군부인사들을 포섭하여 류샤오치를 밀어내고 정권을 잡으려고 했는데, 포섭하려던 린뱌오나 덩샤오핑이 이를 마오에게 달려가 일러바치는 바람에, 고립되었고, 자아비판을 하던 도중 권총자살을 기도했다.

권총자살은 실패했지만, 입원 도중 1954년 끝끝내 자결했다.이때문에 가오강 일파에 대한 숙청이 있었다. 린뱌오는 국공내전때 만주지역에 있으면서 가오강과 깊은 관련을 맺었기 때문에, 아무리 나중에 마오편에 섰어도 1950년대 초반에는 몸을 낮출수 밖에 없었다.

1955년 인민해방군이 계급제도를 도입하자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서 10대 원수에 임명되었다. 10명의 원수를 한번에 임명했기 때문에 10대 원수라고 부른다. 린바오 이외에 나머지 9명은 주덕, 팽덕회, 유백승, 하룡, 진의, 나영환, 서향전, 섭영진, 섭검영.

건강 때문에 정치나 군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던 린뱌오는 1959년 려산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몰락하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을 비판한 펑더화이를 축출하고 펑더화이가 맡던 국방부장직을 린뱌오에게 주게 된다. 이때부터 린뱌오는 마오를 잘 잡아야 권력이 온다라는 신념이라도 생겼는지 본격적으로 마오의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 당시 그가 마오쩌둥에게 아첨하기 위해 펴낸 책이 마오쩌둥 어록(정식명칙: 마오주석 어록)이다. 이 서문에서 린뱌오는 "마오쩌둥 주석은 천재이며, 그의 한마디는 다른 사람의 만마디의 말에 맞먹는다."라는 소리를 했다.

이런 가운데 1962년 중국과 인도 사이에 국경분쟁(중인전쟁)이 발생하고 양측이 충돌하자 린뱌오는 다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인도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1967년 문화대혁명에서는 류사오치를 물고 늘어져 결국 류샤오치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로 인해 마오는 린뱌오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지면서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린뱌오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류샤오치 실각 이후로 폐지된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추진한 것이었다. 마오를 국가주석직에 앉히고 자신은 부주석직에 앉아 확고한 후계구도를 만들려는 게 린뱌오의 생각이었다. 여기에는 마오의 부인인 장칭에 대한 우려가 한몫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린뱌오의 이런 주장을 마오쩌둥이 제동을 걸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공산권 국가에서 군 실력자가 후계자를 자처할 경우 필연적으로 숙청대상이 되기 쉽다. 괜히 스탈린이나 트로츠키보나파르트주의 운운하면서 군인사들을 숙청한게 아니다. 심지어 전쟁 영웅 주코프조차도 보나파르트주의자로 몰려서 전후 찬밥을 먹게된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해 점점 린뱌오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이에 린뱌오는 1971년 3월, 공군부장으로 있던 아들 린리궈, 아내 예췬, 이외 수하들과 함께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쿠데타 계획을 수립하여 같은 해 9월 마오쩌둥이 지방 도시들을 시찰하고 있는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실패했다.[4]

한편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린뱌오는 도망치기로 하고 소련으로 망명하려다 타고 있던 비행기가 몽골 영공에서 폭발하면서 6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5]

여담이지만, 린뱌오가 죽은 후 군에 대대적으로 린뱌오파 숙청작업이 벌어졌으나 처형된 이는 거의 없었다. 홍콩으로 도피하려던 수십명의 장성들이 체포되었고, 린뱌오 아들 린리궈의 개인왕국이었던 공군의 고위지휘부도 연루유무에 관계없이 모조리 체포되었고, 린뱌오의 직속 부관도 헬기를 타고 몽골로 도망치려다가 연료가 떨어져 체포되었는데 자기의 직속부하가 자기를 죽이려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마오[6]가 "꼬붕들이 뭐 죄가 있겠냐..그냥 피보지 마라"고 지시해서 대부분 목숨을 건졌고 몇 년후에 풀려났다. 마오가 착해졌어요.

2 평가

전쟁에 있어서는 매우 뛰어난 장군이었고 전략적인 식견도 있는 인물이었다. 매사에 자신감이 부족하고 내성적, 소극적 성격이어서 용장(勇將)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지장(智將)으로서의 면모는 탁월했다 할 수 있다.

혹자는 군사적으로 뛰어났지만 토사구팽 당한 점 때문에 영포한신에 비유하기도 한다. 린뱌오의 경우 논란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섬기던 주군(마오쩌둥,유방)을 상대로 반란을 도모하려다 실패하여 최후를 맞았다는 점도 비슷하고.

국공내전 당시 린뱌오가 도시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펑더화이는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마오가 린뱌오의 손을 들어 도시에서 철군해 농촌으로 이동한 뒤 농촌의 지주들을 숙청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국공내전의 흐름이 바뀐 일을 보더라도 그의 식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린뱌오를 "장군 15명을 합쳐도 린뱌오 한 사람을 이길 수 없다."라고 극찬했고, 적이었던 장제스"저놈은 전쟁의 마귀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사실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부터 린뱌오의 재능을 알아보고 "황푸가 배출한 가장 우수한 군사가는 4기생 린뱌오"라고 했다. 그리고 항일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5월에 린뱌오가 동북(만주) 지방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자 "린뱌오가 갔다면, 앞으로 동북은 편할 날이 없겠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웬지 한신을 놓친 항우가 연상된다. 아 근데 항우는 한신을 무시하지 않았나..그래도 장제스가 인재보는 안목은 있었던 모양

그러나 이렇게 군사적으로는 천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역시 노회한 마오쩌둥을 당할 수 없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카리스마, 저우언라이의 중후함, 덩샤오핑의 비전 같은 것을 갖추지 못했으며, 기껏해야 군 총사령관 정도의 재목이었지 천하를 다스릴만한 인재는 아니었다. 펑더화이에 비해서도 정치적인 안목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인데 펑더화이는 인민을 걱정해서 마오에게 쓴소리를 하다가 실각한 반면, 린뱌오는 마오의 개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마오를 배신해 망했기 때문에 높이 평가되기 힘들다.

그래서 펑더화이는 마오 사후 복권되었으나, 린뱌오 및 그 일당은 아직까지도 대한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도 린뱌오를 펑더화이 마냥 복권은 안되어도 어느 정도 재조명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 덕인지 80년대만 해도 기록말살형(인민의 브러쉬질)에 처해진 린뱌오는 각종 항일영화나 국공내전 관련 영화에서 그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90년대부터는 그래도 나오는 편이다.

3 그 외

권력욕이 있는 인물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좀 히키코모리적인 성향도 있었다고 한다. 린뱌오의 평생 모토가 한밤 중의 외로운 처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공산정권 수립 이후 열린 원수 추서식에도 아프다는 핑계로 불참했고 옛 부하들이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나가기 귀찮아

이런 성격은 그가 타고난 약골이었던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황푸군관학교 재학 시절에도 새벽 구보에서 걸핏하면 낙오해서 따귀를 얻어맞는(...) 고문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정치부 교관이던 녜룽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부터 "말수가 적고 매사에 소극적이었다. 웃거나 찡그리는 법이 없고, 돌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이런 기질이 더욱 심해진 것은 일본군으로 오인되어 큰 부상을 입은 뒤 모르핀 과다투여로 중독된 탓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한 신경 이상으로 한동안 물과 바람, 햇빛을 두려워했고 산수화조차도 보기 싫어할 정도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심지어 일상적인 수분섭취조차도 어려워할 정도라서 궁여지책으로 물만두(의 육즙?)로 수분을 보충했다카더라. 모르핀 중독에다 2인자를 노렸다는 점에서 그 나라뚱땡이 덕후와 비슷하다..?! 거기다가 아들 린리궈가 공군을 개인왕국처럼 지배했다는 점에서도 괴씨와 비슷하다.
  1. 정식명칙은 중국국민당 군관학교이다. 초대 교장 장제스에 정치주임 저우언라이였다.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 군벌을 막론하고 중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을 다수 배출했으며 의열단을 비롯한 조선인도 상당수 여기서 공부했기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참고로 린뱌오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원봉과 동기생(4기)이다. 여기를 거쳐갔던 독립운동가로는 주로 북한쪽으로 간 이들이 많다. 6.25때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최용건은 여기서 교관을 지냈다.
  2. 치료 과정에서 모르핀 중독에 빠졌다는 설도 있다.
  3. 이런 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방에서는 린뱌오가 총사령관인 것처럼 오인되었다. 실지로 70년대 나온 한국전쟁을 다룬 한국과 미국의 저서에는 하나같이 사령관 임표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4. 쿠데타의 범위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아예 공상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부터 나름 실제적인 계획이 있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대체로 아들이 주도한 것은 정설이지만, 린뱌오가 여기에 주동적 역할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5. 린뱌오의 죽음에 대한 일련의 기록들이 그나마 공정성을 가지고 알려진 것은 80년대 이후이다. 그전에는 비행기 폭발 사고설, 소련 망명설, 밥먹다가 바주카포(...)에 맞아서 일가 몰살했다는 설까지 돌았다. 80년대 말 한국에서 나온 반공서적에는 비행기 사고는 페이크마오와 그 일당에게 천안문 지하로 끌려가 고문당하다 죽었다라는 이야기도 실렸다. 근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6. 홍위병에게 박해를 당한 펑더화이나 다른 원수들은 그냥 마오쩌둥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초를 당한 것이지만, 린뱌오는 정말로 모반을 했다는 점에서 마오가 받은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