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익(삼국지)

張翼
(? ~ 264)

1 개요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는 백공(伯恭).

2 생애

조상 대대로 에 충성한 집안[1]으로 젊었을 적 효렴에 추천되어 유비가 서촉을 정벌하자 그의 수하가 된다.

유비가 익주목이 되었을 때 서좌(書佐)가 되었다가 강양현장, 부릉현령, 광한, 촉군태수를 거친다.

231년에 내항도독 겸 수남중랑장이 되나 장익은 평소 성격이 엄격하고 강직해 이민족들이 호응을 하지 않아 통치하는데 많은 애로사항을 겪는다. 결국 이민족의 수령인 유주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마충을 내항도독을 대신 맡기고 장익을 중앙으로 소환한다. 그런데 장익은 "나를 대신할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임무를 방치하고 함부로 전장을 이탈할 수 없다"며 바로 소환에 응하지 않고 마충이 도착할 때까지 군대를 통솔해 이것을 기반으로 마충은 유주의 반란을 진압한다.

이 공로로 승상 제갈량의 눈에 띄어 전군도독 겸 부풍태수에 임명된다.[2]

이후 비의 시절, 248년,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는데, 전임자가 모두 북벌 책임자들인 위연, 강유다. 장익도 북벌 쪽에 얽히긴 했던 듯. 253년, 대장군 비의가 위의 항장 출신 곽순에게 정월에 살해당한 뒤, 254년 강유가 출병하려 할 때, 장익은 홀로 강유와 논쟁을 벌인 기록이 <장익전>에 있다. 당시 장익의 논리는 "아직도 영토는 협소하고 백성들은 피곤하니 무리하게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였다. 그러나 강유는 그의 의견을 묵살하고 싫다는 장익에게 진남대장군으로 승진을 시킴과 동시에 그를 전장에 대동하고 다닌다.[3]

254년, 반대하는 장익을 승진시켜가며 북벌에 끌고 가는 데에 성공한 강유는 위의 옹주자사 왕경을 적도에서 격파하고 많은 위군을 무찌른다.[4]

하지만 딴지쟁이 장익은 지금은 군대를 물려야 하며, 만약 더 전진하면 그간의 공로를 훼손하게 될 것이라며 고집쟁이 강유를 만류하지만 강유는 장익의 의견을 무시한다. 그러나 강유는 결국 적도에서 농성하는 왕경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장익 말대로 군대를 철수시킨다.

259년에 장익은 좌거기장군 겸 기주자사로 승진한다. 그리고 263년, 위의 정촉(征蜀) 당시 강유와 함께 검각에서 종회군에게 저항하던 중, 성도의 유선이 항복하자 종회에게 항복한다.

264년에 야심을 품고 촉을 기반으로 사마소와 위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운 종회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 와중에 휘말려 성난 병사들에게 살해된다.

비록 강유와는 물과 불처럼 의견이 자주 충돌하고 사이가 나빴으나, 강유가 억지로 장익을 전장에 대동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강유도 장익의 실력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익은 불평 없이 강유를 수행해 공을 세웠다. 츤데레?

그의 아들은 서진에서 광한 태수를 지낸 장징, 손자는 동진에서 강양 태수를 지낸 장계(張啓)가 있다.

3 기타

때로 장익을 또다른 촉의 명장인 장억과 헷갈려하는 사람이 꽤 된다.

덤으로 요화내민 등에 가려지기는 하지만 이 사람도 장난 아니게 오래 살았다. 유비가 익주목이 되었을 때(214년경) 관직을 받은 기록이 있으니 그 이후 무려 50년 가량을 촉에 충성한 것이 된다.

4 미디어 믹스

4.1 삼국지 시리즈

Zhangyi-rotkxi.jpg
삼국지 10,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올 능력치들이 70대 초반의 만능형 장수다. 얼핏 보기엔 뭐하나 쓸데가 없어보이지만, 후기 시나리오 장수에, 이릉 이후에 가장 인재난에 시달리는 촉에서 몇 안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빛을 보는 편. 후기 시나리오가 없어서 웁니다

삼국지 3에서는 72/42/36/76/75/71의 평범한 무장으로 나온다. 근데 출생이 158이라서 시나리오 6에서 죽어서 안 나온다. 이후 삼국지 4부터 출생이 178으로 고쳤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6/74/71/68. 분투와 연사를 가진 좋은 장수. 9의 경우 익주쪽 장수들은 기병, 궁기계 병법을 가진 장수가 없는 대신 분투와 연사, 특히 연사는 거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게 특징이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7/74/71/68/70으로 고만고만.

삼국지 11에서도 75/74/71/72/70의 괜찮은 능력치이지만,특기가 잉여인 친만. 다른 이민족 킬러 장수들은 답파인데 안습. pk버전이라면 특기를 다른 것으로 바꿔주자.

그러나 삼국지 12에선 엄청나게 쓸만한 전법인 전공성강화가 생겨서 평범한 무장에서 쓸만한 무장으로 위상이 올라갔다. 능력치는 여전하다(75/74/76/72). 물론 본인은 공성(특기)없음에 궁병이라서 파괴력이 약하지만 다른 무장들에게는 좋은 편이라서 팀의 파괴력을 책임지는 무장이다. 지력도(76)이라서 나쁘지 않다. 게다가 제갈량팔진도와 합치면 아군에게 주는 파괴력이 세지고 공성 특기을 가진 무장들을 완벽한 공성병기으로 진화시켜 준다. 그래도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는 낙읍(낙양) 재야로 등장하는데. 이는 장량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는 장막도 마찬가지)

삼국지 13에서도 능력치는 전작과 동일하다, 전법은 사기회복으로 전법 포인트 1로 사기 2단계(자신의 사기 50 상승)를 올려주는 전법인데 아무래도 전작보다 전법이 부실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포인트 부담없고 사기 많이 차서 앵간해선 장익의 부대는 궤주할 일이 없긴 하다.

4.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영걸전에선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삼국지 공명전에선 면죽관 전투 이후에 오의, 오반과 함께 합류하지만, 천대받는 클래스인 보병계에, 레벨도 낮고, 능력치도 구리며, 일기토조차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엄, 하다 못해 (지력이 좋아 책략이 편한) 마속을 키우면 키웠지 장익을 키우는 사람은 일부러 어렵게 게임을 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없다. 외척잉여 같은 장씨 돌림인 장억의 활약에 비하면 더욱 묻혀보인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가상모드에서 조조에게 단칼에 썰리는 것도 모잘라 송사리 취급당한다... 결국 장억은 분노. 하지만 장억도 썰린다.

4.3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줄곧 클론 무장으로 나오다가, 모바일 게임인 진삼국무쌍 BLAST에서 첫 참전. 조비와 비슷한 느낌의 차가워보이는 미청년으로 등장했다. 정작 후반기 콤비인 요화는 중후한 노장으로 나오거늘... 더구나 정사에서는 요화보다 장익이 먼저 등장했다.

무기는 장성채와 동일한 순패검. 생긴 것도 그렇고 복장도 그렇고 어째 성채의 TS버전같다. 그리고 둘다 장씨다 이 외에도 전국무쌍 시리즈타케나카 한베에와 닮았다는 의견도 보이는 편.

아직 본편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클론들이 대축제를 벌이는(...) 진나라 스토리에서 요화, 제갈각 등과 함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클론으로 등장하기에 참전할 여지는 어느 정도 있다.

4.4 삼국전투기

레옹으로 패러디. 소개 컷에서는 화분을 들고 있다.

4.5 삼국지평화

삼국지평화에서는 이름의 한자가 날개 익이 아닌 유익할 익으로 나온다. 조운보다 강하고 장비와 천합을 겨루는 촉의 명장으로 나오며(...) 삼국지연의에서는 탁응과 함께 낙성을 지키던 유괴의 지원군으로 파견되면서 등장하며 장임이 전사한 후에도 끝끝내 항복하지 않고 항복한 엄안을 욕하는 유괴를 죽이고 항복해 유비의 부하가 된다. 장익이 아니고 장억이었다면 완벽한 고증인데
  1. 선조를 거슬러가면 한삼걸장량까지 이른다.
  2.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 이 부풍태수 직책이 중요한데, 부풍군 안에 오장원이 있기 때문이다. 오장원 일대의 둔전을 맡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추측일 뿐 정사에 확실한 근거가 없음은 주의하자.
  3. 이 상황은 초주의 구국론과 함께 이해하면 더욱 잘 이해가 되는데, 진지와 초주가 함께 작성한 <구국론>이 등장한다. 그런데 강유가 본격적인 북벌을 행한 시점이 253년 비의 사후라는 점, 진지 사망이 258년, <구국론>의 핵심 생각이 "작은 나라는 백성이 피로하지 않게 풍족하게 된 연후에야 큰 나라를 칠 수 있다"로 장익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점, 또한 장익 역시 진지와 마찬가지로 상서에서 일한 경험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256년 무렵 강유가 조정에서 적도 전투의 당위성을 주장하자 장익-진지-초주 등이 나름의 논리를 함께 세운 다음 강유의 주장에 조정에서 함께 저항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도 있다. 이 와중에서 진지 쪽은 강유에게 논파되고 장익만 홀로 남아 강유와 언쟁을 벌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각 사건의 선후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한 추측임도 유의하자.
  4. 이는 강유 최대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전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