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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의 군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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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바탕 | 정열적인 젊음과 패기 |
하단청색 | 영구한 평화 |
표지상단의 적색 | 정열과 복종심 |
7각 | 제7군단의 표시 |
상단의 뾰족한 끝 | 북진의 의지 |
1 개요
1969년 1월 18일 現 제7기동군단의 전신(前身)인 동해안경비사령부로 처음 창설되어, 같은 달 31일 강원도 삼척시로 이동하여 강원도 동해안부터 경상북도 일부지역까지 방어하였다. 당시 동해안경비사령관은 한직이었다고 한다. 동해안경비사령부는 1982년 8월 개편되어 7군단이 되었고 이듬해인 1983년 임무가 바뀌어 공격에만 주력하는 기동군단로 선택되었다. 본부는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에 있다.
대한민국 육군에 존재하는 유일한 기동군단(90년대에 6군단이 기동군단으로 개편된 적이 있으나 다시 통상 군단으로 돌아왔다)으로서 1980년대 초반에 창설된 부대이다. 베트남전 이후 72년 수도사단을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하게 되면서 이후 제20사단을 제20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하고 7군단을 본격적인 기동 군단으로 편성하게 된다.
유사시 북한군이 남침하면 주둔지에서 방어하며 조금씩 물러나 전력을 보충받는 여타 군단들과는 달리, 주둔지를 버리고 북쪽으로 진격하는 유일한 군단이기도 하다.그래서 포병여단 예하 대대는 다른 군단 지역 넘어가서 훈련하고 돌아온다 카더라 때문에 하고 있는 훈련들도 대부분 기동전에 관한 것이며, 방어작전은 거의 하지 않는다. 상급부대 지휘소연습에 참가할 시에는 방어훈련간에는 할 일이 없어서 상급지휘관에게 보고할 것이 없기때문에 온갖 잡다한 것을 상황보고에 끼워넣느라 고생한다. 물론 공격훈련시에는 그야말로 단독주연으로, 혼자서 다해야 해내야 하기 때문에 7군단장은 매우 요직이며, 군단장 역임은 대장진급의 직진신호이기도 하다. 사실상 오로지 공격 뿐인 부대. 아예 경례구호부터가 북진이다. 방어가 주 임무인 다른 군단과는 달리 사령부 시설에 그다지 투자도 하지 않는다. 그 흔한 극장 하나 없으며[1] 사령부 건물도 다른 군단과는 구조도 다르다. 다른 군단 사령부 건물은 죄다 지하에 있어서 밖에서는 어디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반면 제7기동군단 사령부만 유일하게 지상에 올라와 있다. 전쟁나면 버리는 건물이라 시설에 별로 투자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육군에서 장비 보급이 가장 잘 되고 있는 부대이다. 예하의 제20기계화보병사단이 K-1A1 전차, K-21 보병전투차, K-2 흑표 전차를 전군에서 가장 먼저 수령한 부대이다. 예하에 2개더구나 MLRS, K-9같은 장비들이 우선 배치되어 있어 육군 군단 중 가장 화력이 강한 군단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예전에는 전략무기인 현무 탄도 미사일까지 운용한 적이 있다. 7군단 예하 제7포병여단에는 '제7독립미사일대대'라고 하여 현무 운용을 담당하는 부대가 있었다. 유도탄사령부를 창설한 뒤 현무의 운용을 유도탄사령부에서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평시 담당구역이 없기 때문에 각종 훈련 참가, 새로운 시스템 도입을 위한 연구 배당 등이 매우 잦은 편이다. 대표적인 예로, 다른 군단은 몇년에 한번씩 차례가 돌아오는 '군단급 FTX 연습'에 매년 참가한다. 홀수년에는 통제부대, 짝수년에는 실제 훈련부대로 참가하는데, 통제부대든 훈련부대든 힘들긴 마찬가지이다. 특히 사령부 작전과의 업무량이 어마어마한데, 실제로 이쪽 간부들의 경우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는데도 몇 달간 못 보고 사는 경우가 빈번하다. 작전처 간부와 행정병이 함께 늙어가게 된다. 행정병들은 매일 야근을 불려가서 야간점호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며, 작전처나 정보처 내무실들은 전원이 사령부에서 일하느라 점호시간에 아예 한 명도 남아 있지를 않아서 내무실 문을 잠궈놓기 일쑤다. 특히 훈련과 각종 보고가 피크를 이루는 3월-6월 경에는 야간점호나 아침점호를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과 후 본부대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방송은 누군가를 야근으로 부르는 전화가 왔다는 방송이며, 장교들의 인사이동이 있는 늦가을을 제외하면 일년 내내 바쁘다.
사령부의 주요장교들은 소령급인데 소령에서 중령으로 올라서려면 그야말로 피와 살을 깎는 고비를 넘겨야 한다. 특히 육군 주요보직은 보병병과가 차지하기 때문에 기갑병과는 진급이 쉽지 않은데 7군단사령부는 그나마 기갑 병과 간부들이 진급하기 쉬운 곳이다. 가끔은 한 처부에서 중령 진급자가 두 명이나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만큼 요직을 맡기 위한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실제로 소령들끼리 서로 작전장교를 맡겠다고 드잡이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부대 안에 야생화된 흑염소 무리가 산다. (최소한 이준구 중장 이전의 군단장)이 사적으로 기르던 것을 방사했더니 야생화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름에는 낮은 지대-화학대-쪽으로 내려가고, 겨울에는 높은 지대-통신단- 쪽으로 이동하며 사는 듯 하다. 닭도 방사해서 키우고 있다. 토끼도 있다.
2014~2030 국방개혁 중기계획에 따라 곧 제 30기계화보병사단을 배속 받아 예하에 3개 기계화보병사단을 편재할 예정이다. # [2]
2 예하 부대
- 상비사단
- 군단 직할부대
- 본부근무대
- 제107정보통신단
- 제517방공대대
- 제7강습대대
- 94년 개편 이전에는 707 특공공정연대였다. 현재는 특공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 않으나 병과는 엄연히 특공이다. UH-60(매우 가끔 CH-47도 탄다)을 이용한 공중강습을 통해 기계화사단의 진격로를 확보하는 기동보병의 임무에 특화되어 있다. 이를 이용한 다른 주임무중 하나가 국군교도소 탈옥수 추적임무다. 명칭이 제707특공공정연대였던 시절엔, 군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름이 비슷한 707특임대를 나온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707특임대는 특전사 예하의 대대다.
- 제7강습대대의 군기는 상당히 쎈데 2010년 이후에도 구타가 있었다. (강습대대로 개편된 초기, 워낙 많은 구타사고가 있어와서 말썽의 화근을 없애고자 특공연대를 대대로 쪼개버렸다는 카더라가 인근 직할대에 돌았을 정도였다). 2012년 당시 타 대대 목격자에 의하면 짬축구(이등병 골키퍼 시키고, 상대팀에서 병장이 공 몰아서 절대 못막게 하는 기막힌 축구)를 기똥차게 하고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는 추가바람.
- 7강습대 출신 어느 한 예비역의 노력으로 2011년부터 경찰특공대 응시자격 갖추게 되었다.북진강습 카페
- 제17화학대
- 헌병대
여담으로 인근에 육군정보학교, 국군교도소 등 누설되면 안되는 무언가를 지닌 부대들이 밀집해 있다.
3 출신 인물
3.1 7군단장 출신 인물
7군단장을 역임한 인물은 거의 대부분 대장으로 진급한다고 알고 있는 인원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1년 취임한 23대 군단장 김장수 중장 이래 2013년 현 지휘관인 30대 박찬주 중장까지 군단장을 역임한 총 8명 중 대장까지 진급한 인물은 4명이다. 즉 역대 군단장 가운데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 더 높은 계급으로 진급한 인물이 있다는 것이지 무조건 7군단장을 역임했다고 해서 대장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 하지만 다른 보직에 비해 대장 진급에 유리한 위치의 보직인 것만은 확실하다.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군단장.
- 이현부(육사 20기)
- 제19대 군단장. 기계화보병의 아버지. 부임한지 얼마 못가 순직했다.
- 김장수(육사 27기)
- 제23대 군단장. 대장까지 진급하여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후 예편[3], 국방부 장관까지 올랐다. 2013년 2월 신설된 국가안보실의 초대 실장에 임명되었다.
- 김병관(육사 28기)
- 제24대 군단장. 대장까지 진급하여 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한 후 예편했다. 이분은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화공과를 한 학기 다니다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 진로를 바꿔 육사에 지원해 수석으로 입학후 수석 졸업까지 했다. 한국경제 기사 심지어 곧바로 육사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대를 한 학기 다녔다가 들어간 이유에 대해 "고등학교에서 워낙 입시 위주 교육만 받는 바람에 사회성이 부족하다 싶어 1년 쉬었다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新東亞 인터뷰 또한 손자병법에 통달한 전술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데 2사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오전 8시에 시작한 전술 강의를 오후 6시에 끝낸 것은 유명한 일화로 회자된다. 2013년 국방부 장관으로 내정되었으나 방산업체 로비문제가 불거져서 자진 사퇴하였다.
- 김근태(육사 30기)
- 제25대 군단장. 대장까지 진급하여 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후 예편했다(이근안에게 고문당했던 민주화운동가/정치인인 故 김근태와는 무관한 동명이인). 전역 후 새누리당에 입당해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고 자격을 상실했다.
- 박성규(3사 10기)
- 제27대 군단장. 3사 출신 가운데 2번째로 대장에 진급한 동시에 이 출신 최초로 1야전군사령관에 보임되었다.
- 이준구(육사 34기)
- 제28대 군단장.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장비정비처장,39사단장,국방부 군수관리관 등을 역임하였다.
- 임국선(학군 17기)
- 제29대 군단장. 이분은 소장이었던 20사단장 시절 예하부대를 순시 중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노인을 발견하고 직접 물 속으로 뛰어들어 구조해내어 유명해진 인물이다. 기사 전문 2013년 4월 군단장 임기를 마치고 2작사 부사령관으로 영전했다. 대장 진급에는 실패했했지만 최종 보직은 육군 본부 정책관이다. 학군 17기로 임관했는데 특이하게 임관하자마자 특전사 부중대장이 된 탓에 소대장 경력이 없다.
- 제30대 군단장. 기갑 병과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대장에 진급했다.
3.2 7군단 출신 인물
- 강은탁(영화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