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결렬

(중소 분쟁에서 넘어옴)

영어 : Sino-Soviet Split
중국어 : 中苏交恶
러시아어 : Советско-китайский раско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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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회주의 형제국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이 역사적 앙금, 사상적, 영토적 분쟁으로 인하여 1950년대말 동맹관계를 청산하고 준적대관계로 돌아선 일을 말한다.

양국간 불화는 1971년의 중국-소련 국경분쟁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 뿌리는 매우 깊은 것이었다. 즉, 중공 정권이 수립되기도 전인 1930년대에 중국 혁명에 관한 마오쩌둥코민테른 (즉, 이오시프 스탈린)견해차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깊은 것이었다. 즉 국경분쟁은 그냥 구실일 뿐이고, 실제로는 공산주의의 해석에 관한 문제가 그 뿌리였다. 그러므로 이미 중공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당시 중공과 소련의 결렬은 이미 잠재적으로 그 씨앗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2 배경

중국 공산당은 창립 이후부터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으며 당 노선을 정했다. 이런 배경으로 쑨원소련 외교관 요페의 회담 끝에 소련은 중국 국민당을 원조하고, 국민당과 소련이 함께 반제국주의 노선을 펼치기로 함에 따라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공산당원이 개별적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는 방법으로 일단 국민당이 군벌을 물리치고 중국에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을 돕기로 했다. 이에 따라 소련의 원조를 받은 국민당군은 광둥성에서 출발하는 북벌(장제스의 북벌)을 벌여 각지의 군벌을 격파하고 상하이까지 함락시키게 된다.

하지만 1926년 상하이가 함락되자 장제스는 공산당을 배신하고 숙청을 단행(4.12 상하이 쿠데타), 국민당에 입당했던 공산당원 80%가 처형되고 국공 양당은 원수지간이 된다.

공산당은 이에 따라 복수를 위해 소련식 전략을 추종하여 봉기하지만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 앞에 모두 진압당하고, 소련식 전략 대신 "중국 실정에 맞는 혁명 전략"을 추구하는 마오쩌둥이 특유의 게릴라 전법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또다시 마오쩌둥이 구축한 해방구에 소련식 전략을 추종하는 소련 유학파 중국 공산당원 (소위 "28인의 볼셰비키")를 내보내고, 여기에 전략지도를 위해 프룬제 군사대학을 나온 독일인 오토 브라운까지 함께 보내 마오쩌둥의 지휘권을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전략은 다시 실패로 돌아갔고 중국 공산당은 광서성에서 중국 대륙을 시계방향으로 반바퀴 돌아 산시성까지 도피하는 대장정을 벌이게 되는데, 이 와중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지휘권을 인수했다. 이렇게 경쟁자들의 삽질로 중국 공산당 내에서 신화적인 위치가 된 마오쩌둥은 자신의 사상을 중국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확립하고 점점 소련의 입김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 옅어지게 된다.

하지만 소련이나 스탈린의 권위는 마오쩌둥이라도 쉽게 격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에도 외교적으로는 소련의 입장을 충실히 지지한다(물론 중공정권 수립 후 소련이 여러가지 지원을 해주긴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집권 후 스탈린을 격하할 뿐만 아니라 서방과의 화해를 모색하자 아직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하게 받고 있던 마오쩌둥 및 중국지도부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점점 중소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3 전개

중국이 소련에 실망하게 된 첫번째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스탈린은 원래부터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며,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패망 직전에 이르자 중국측에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끝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유엔군이 압록강을 너머 중국까지 쳐들어올 것을 우려한 중국군은 유엔군의 북진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했고, 빈약한 무장임에도 막강한 병력 수를 앞세워서 선전했지만, 정작 중국군의 참전을 부추긴 소련의 지원은 겨우 공군뿐, 그것도 평양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에만 공습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출격했으며, 그 이남에서 제공권 없이 싸우는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중국 지도부는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인 소련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미군에 맞서기 위해 소련의 MiG-15와 같은 고가무기나 장비[1]를 대량으로 구입해서 참전했지만, 소련은 사회주의 우방국의 우대 가격이라고 중국측에 사기를 치고는 제3세계 국가의 원조 가격보다도 훨씬 비싸게 팔아먹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지도부는 격노했지만, 이때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를 시작한 1955년부터 양국의 긴장은 높아지더니, 1958-1959년부터는 노골적으로 양국이 대립했다. 특히 흐루쇼프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자(당시 중국은 미국에 의해 해상진출이 거의 봉쇄되어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중국측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 원한을 잊지 않았고, 1950년대의 미국의 정책은 중국을 어떻게든 봉쇄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국제적 고립을 염려하게 되면서 소련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1959년에 대약진운동에서 크게 실패하여 대규모 아사자가 속출하며 식량이 부족했는데, 소련은 이런 사정을 잘 몰랐고[2], 식량으로 상환하는 기술 라이센스비를 독촉했다. 이런 가운데 소련은 특히 라이센스 협정에 포함되어 있었던 핵무기탄도탄의 핵심 기술은 알려주지 않았다. 또한 이밖의 여러 사업(전투기, 잠수함, 구축함 등)에서도 소련은 설계도만 달랑 주고 핵심 노하우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합작사업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을 통해 마오쩌둥에 모두 보고되었고, 마오쩌둥은 소련의 불성실한 기술 이전에 크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도 두 사회주의 대국은 번번히 견해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대체로 중국의 공식 이념이었던 마오쩌둥 사상(마오이즘)은 사회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주관적인)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반면, 스탈린주의[3]는 기술을 중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혁명에 대한 관점도 달랐고, 이것이 양국의 결정적인 이념 차이를 만들었다.

1959년 흐루쇼프는 중국을 10월 방문했는데, 마오쩌둥과 서로 계속 의견 충돌을 빚었고, 양국은 화해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우리 합작사업 다 파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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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쩌둥(左)과 흐루쇼프(右)의 만남. 서로 웃고 있지만, 이 만남 이후 중소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결국 1959년 소련과 중국은 여러 합작사업을 파기하고, 중국은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으며, 특히 1962년에 벌어진 중인전쟁에서 소련이 인도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양국은 완전히 적대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추가중

4 결과

소련과 중국은 1960년대 이후부터 국경뿐만 아니라 1980년대 말까지 전 세계에서 으르렁거리게 된다. 1970년대 내내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만주 접경에서는 양국 국경수비대 간의 작은 교전이 자주 벌어졌다. 하지만 1971년중국-소련 국경분쟁과는 달리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는 양국이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을 확대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

소련이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지원하면 중국은 오히려 반동 세력을 지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옌데 정권이 몰락한 후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소련은 칠레와 단교했으나, 중국은 오히려 극우정권인 칠레를 지원했다. 한편 소련은 마오이즘에 호의적이었던 체 게바라를 못마땅히 여겨서 체 게바라가 벌이던 제3세계의 혁명운동에 싸늘하게 대했고, 결국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CIA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또한 중국과 소련의 전폭적 지원으로 북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을 전복하고 접후한 이후, 민족주의파와 친소파가 득세하면서 베트남이 친소노선으로 기울어졌고, 특히 친중정권인 캄보디아크메르 루주폴 포트 정권을 전복시키자, 중국은 베트남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위해 베트남과 한바탕 전쟁을 일으켰다가 제대로 카운터를 엊어맞고 별 소득없이 철군하기도 했다. 이후 베트남을 괴롭히기 위해 미국과 함께 크메르 루주를 1980년대 중반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 전까지 이어진 미중 밀월도 바로 중소결렬의 결과이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1950년대 이래 중국을 봉쇄하던 전략을 180도 전환해1970년대 닉슨 대통령의 주도로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었고, 1979년에는 중화민국과 단교하면서 중국과 정식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미중간 군사협력까지 이뤄질 정도로 우호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냉전이 해소되고, 더 큰 적이던 소련이 막장화되자 미중관계는 갑자기 얼어붙게 되었고, 군사협력은 취소된다.

5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해소된 이후 소련이 몰락하고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포기하면서 양국의 공산주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여지는 없어졌으며, 소련의 후계국 러시아는 유럽방면에서, 중국은 남중국해 방면에서 미국 및 서방에 봉쇄되어 있기 때문에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냉전초기에도 실시되지 않았던 합동 군사훈련을 하는 등, 공동의 적을 두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 그렇다고 소련이 고가 무기를 재대로 판 것도 아니다. 6.25 때 UN군은 2차대전 때 사용하던 구형 M4 셔먼전차와 M26 퍼싱 전차, 냉전 후 등장한 최신형의 M46 전차와 초기형 센츄리온 전차를 주로 사용했는데 당시 소련에는 M4나 M26 같은 구형전차는 물론이고 M46이나 초기형 센츄리온 같은 UN군의 신형 전차마저도 압도할 정도의 성능을 가진 T-54IS-3, IS-4 같은 강력한 중전차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전차들을 전혀 판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6.25 때 공산측 전차는 T-34IS-2 같은 2차대전 시기 전차들만 등장했다. 전차는 고사하고 소화기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2. 이는 중국이 체면 세운답시고 정확한 실상을 타국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사실 여기에 대해서 딱히 할 말은 없다.
  3. 흐루쇼프 이래로 스탈린이 격하되고 스탈린식 통치 체제가 완화되기는 하지만 소련의 공식 이념은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기 전까지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스탈린주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