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진 콴잔 감독 | |
파비오 칸나바로 (Fabio Cannavaro) | |
생년월일 | 1973년 9월 13일 |
국적 | 이탈리아 |
출생지 | 나폴리 |
신체 조건 | 176cm, 75kg |
포지션 | 중앙 수비수 |
선수시절 등번호 | 5번 |
소속 클럽 | SSC 나폴리 (1992~1995) 파르마 FC (1995~200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2~2004) 유벤투스 (2004~2006) 레알 마드리드 (2006~2009) 유벤투스 (2009~2010) 알 아흘리 클럽 (2010~2011) |
국가 대표 | 136경기[1] 2골 |
지도자 | 알 아흘리 클럽 엠버서더 겸 기술고문 (2011-2013) 알 아흘리 클럽 수석코치 (2013~2014) 광저우 헝다 감독 (2014~2015) 알 나스르 FC 감독 (2015~2016) 텐진 콴잔 감독 (2016~ ) |
EURO 2000 BEST XI | |||||||||||
FW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 FW 프란체스코 토티 | ||||||||||
MF 지네딘 지단 | MF 파트리크 비에이라 | MF 에드가 다비즈 | MF 루이스 피구 | ||||||||
DF 파올로 말디니 | DF 파비오 칸나바로 | DF 로랑 블랑 | DF 릴리앙 튀랑 | ||||||||
GK 프란체스코 톨도 | |||||||||||
2006 FIFPro World XI | |||||||||||
FW 호나우지뉴 | FW 티에리 앙리 | FW 사무엘 에투 | |||||||||
MF 카카 | MF 지네딘 지단 | MF 안드레아 피를로 | |||||||||
DF 잔루카 참브로타 | DF 존 테리 | DF 파비오 칸나바로 | DF 릴리앙 튀랑 | ||||||||
GK 잔루이지 부폰 | |||||||||||
2007 FIFPro World XI | |||||||||||
FW 호나우지뉴 | FW 디디에 드록바 | FW 리오넬 메시 | |||||||||
MF 스티븐 제라드 | MF 카카 | MF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
DF 카를레스 푸욜 | DF 존 테리 | DF 파비오 칸나바로 |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 ||||||||
GK 잔루이지 부폰 |
2006 FIFA 올해의 선수상 | ||
수상 파비오 칸나바로 | 2위 지네딘 지단 | 3위 호나우지뉴 |
2006 Ballond'or | ||
수상 파비오 칸나바로 | 2위 잔루이지 부폰 | 3위 티에리 앙리 |
2006 FIFA 월드컵 | ||
골든 볼 지네딘 지단 | 실버 볼 파비오 칸나바로 | 브론즈 볼 안드레아 피를로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 |||||||||||
파올로 말디니 (1994~2002) | → | 파비오 칸나바로 (2002~2010) | → | 잔루이지 부폰 (2010~ ) |
1 소개
공은 내 앞에서 멈춘다.[2]
월드컵을 지배한 수비수
수비수이면서 발롱도르를 수상한 레전드
이탈리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수비수. 역대 세 번째 수비수 발롱도르 수상 이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리고 리베로가 아닌 수비수로는 최초이다. [3] 실력은 동료 국가대표 수비수 알레산드로 네스타에게 접어준다곤 하지만충분히 월드클래스 수비수로 불릴 만한 실력을 지녔다.
2 클럽
칸나바로가 10대 청소년일 때, 칸나바로의 고향 팀 나폴리에서는 축구의 신이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당연히 칸나바로도 축구에 열광할 수 밖에 없었다.
나폴리 유스 팀에 입단한 칸나바로는 곧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딱히 공격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비수를 시키기엔 키가 작은 루저였기 때문에 영 믿음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칸나바로는 뛰어난 위치 선정과 점프력으로 제공권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나폴리에서 재정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칸나바로는 파르마로 이적하게 된다.
칸나바로는 파르마에서 영혼의 파트너였던 릴리앙 튀랑과 함께 믿을 수 없는 대활약을 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고, 이러한 활약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 받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98/99 시즌 팀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UEFA 컵 우승을 선사했다. 당시 파르마의 수비라인은 상대팀에게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 미칠듯한 피지컬로 달려드는 튀랑과 바로 옆에서 전부다 컷팅해내는 칸나바로를 겨우 뚫어내면 뒤에는 당시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던 지안루이지 부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세 선수의 엄청난 활약으로 파르마는 중소규모의 클럽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강호들과 함께 7공주라고 불리며 세리에A의 다크호스로 평가받게 된다.
다만, 이후 이적한 인테르 시절은 부상과 그로 인한 컨디션 난조 때문에 다소 부진했다.
2004년 유벤투스로 이적한 칸나바로는 재기에 성공하며 자신의 커리어에서 절정을 맞는다.[4] 잠브로타-릴리앙 튀랑-칸나바로-제비나로 이루어진 유벤투스의 수비 라인은 그야말로 통곡의 벽이었다. 이들을 넘는 것만 해도 빠듯한데, 그 뒤에는 역시 레전설인 골키퍼 잔루이지 부폰이 버티고 있었다. 그의 첫번째 전성기였던 파르마에서의 공포의 라인업이 그대로 재현된것이다. 그것도 더욱 원숙해진 기량으로.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한 칸나바로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는 스쿠데토를 얻었고, 개인적으로도 2005년과 2006년에 2년 연속 세리에A 올해의 수비수 상과 2006년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상을 수상하며 선수 커리어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칸나바로의 하강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다가왔다. 바로 이탈리아 축구 최악의 흑역사였던 칼치오폴리 사건이다. 유벤투스가 세리에 B로 강등되자, 칸나바로는 카펠로 감독을 따라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칸나바로는 레알에서도 2번의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새로운 리그에서의 적응 실패와 30대 중반의 나이로 인해 찾아온 신체적 능력 하락으로 인해서 라 리가에서 제일 쉽게 돌파당하는 수비수로 선정되는 등, 바로 얼마 전 발롱도르를 수상했던 명성에는 걸맞지 않은 모습이었다.[5] 물론 이미 발롱도르를 수상한 시점에 30대 중반이었던 노장축에 들었음은 감안해야 한다. 여하튼 다시 유벤투스로 돌아왔을 때는 노쇠화가 더 진행된 상황이어서 당시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던 팀에 보탬이 되지 못했고 결국 2009년 유벤투스는 칠벤투스가 되었다.
칸나바로의 몰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유벤투스에서 뛰기에는 기량이 갑자기 급하락하여 결국 09/10 시즌이 끝나고 방출, 알 아흘리로 이적하였다. 이어서 1년 뒤인 2011년 6월 21일,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보였다는 사유로 알 아흘리 구단 측이 공식적으로 방출을 선언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비수가 말년에 이렇게 허망하게 은퇴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느정도 리딩능력이 생긴건 말년에 들어서였고[6] 기본적으로 작은 체구에도 적극적인 몸싸움과 뛰어난 운동능력으로 공을 탈취하는 파이터형 이었던지라 나이가 들어 신체능력이 하락하자 급격하게 내리막을 걸었다. 역시나 파이터형 수비수인 리버풀의 제이미 캐러거나 카를레스 푸욜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캐러거는 30대 초반에 확 몰락했고 푸욜은 말년까지 클래스는 유지했지만 크고 작은 부상들을 달고지냈다.
3 은퇴 이후
파일:DS6CMQG.jpg
2011년 8월, 은퇴 후 곧바로 알 아흘리 에서 기술 이사 겸 엠버서더 직으로 2013년 7월까지 2년동안 활동했다. 그 후 2013/14시즌 알 아흘리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알 아흘리를 UAE 프로 리그와 UAE 리그 컵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2014년 11월 5일 스승 마르셀로 리피 감독의 뒤를 이어 광저우 헝다 감독에 선임되었다. 광저우 헝다의 감독으로 활동하던 도중인 2015년 2월, 탈세 혐의로 나폴리 법원으로부터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2015년 6월 5일, 광저우 헝다 감독직 수행 6개월 만에 경질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했고 리그에서 잠시 주춤한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리그 1위 자리는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행보에 물음표가 붙는 상황인데, 광저우 구단에서는 경력이 일천한 칸나바로를 완전히 신임하지 못해 리피가 총책임자로 구단에 계속 남아 있어주길 바랬지만 리피는 지난 2월 광저우를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리피의 비호를 받지 못한 칸나바로는 바로 경질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2015년 10월 26일 사우디 프로리그의 알 나스르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전 시즌 우승팀인 알 나스로를 시즌 중반 리그 6위로 추락시킨 책임으로 2016년 2월 11일 4개월만에 경질되었다.
은퇴 후 체계적인 지도자 코스를 밟지 않고 광저우 헝다와 알 나스로 등 아시아와 중동 리그를 떠돌면서도 2번 연속으로 감독직에서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걱정을 하는 팬들도 많다.
2016년 6월 10일 중국 슈퍼리그의 텐진 콴잔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2년6개월.
4 국가대표
2006 독일 월드컵의 영웅
유로 2000에서는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네스타와 함께 카테나치오의 축을 이루어 이탈리아의 준우승을 이끌면서 세계적인 센터백으로 거듭난다. 결승전에서 간발의 차로 프랑스에게 아깝게 패배하긴 했지만, 이때 보여준 카테나치오의 위용은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철의 4백과 함께 대회 최고이 수비라인으로 평가받기 충분했다. 특히 4강 네덜란드전에서 한명이 퇴장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지를 잃지않고 보여준 말그대로 온몸을 내던지는 칸나바로와 이탈리아 국가대표의 수비력은 당시 축구팬들에게 전율을 주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조반니 트라파토니감독은 3-4-1-2 포메이션을 사용했는데, 파올로 말디니 - 알레산드로 네스타 - 파비오 칸나바로라는 정신나간 조합이 완성되면서 극강의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트라파토니 감독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선에서는 4-4-2를 사용했는데, 칸나바로는 네스타와 조합을 이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나 이탈리아의 경기력은 저조했다. 네스타가 도중 부상으로 아웃되고 칸나바로는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경고를 받으면서 16강 전에 출장정지를 먹는다. 그렇게 네스타와 칸나바로가 빠진 이탈리아는 대전에서 한국과 16강전을 치르게 되었고... 이탈리아는 강력한 수비 전술을 구사했지만 8강에 가는 일은 없었다. 공격수만 6명이 투입된 한국에게 거짓말처럼 1:2 역전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하필 칸나바로의 빈자리로 들어간 파누치가 삽질을 퍼 설기현에게 동점골을 허용한 것이 치명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칸나바로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주장으로 출전한 칸나바로는 그의 본 파트너였던 네스타가 부상으로 인해 함께 수비라인을 형성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비수가 보여줄 수 있는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이탈리아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칸나바로의 플레이는 통곡의 벽을 넘어서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 어떤 식으로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그 특유의 과감한 컷팅과 아크로바틱한 클리어링로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내며, 그의 광고 문구 처럼 '공은 내게서 멈춘다'라는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파비오 그로소-마르코 마테라치[7]-잔루카 잠브로타와 함께 다시 철의 4백을 형성, 젠나로 가투소가 4백을 보호하고, 그 뒤를 이들 4백이 지키고, 그 뒤에는 부폰이 버틴 이탈리아는 무시무시한 수비력으로 역대 최소 실점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다.[8] 칸나바로는 말도 안되는 퍼포먼스와 주장으로서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석권하며 선수 인생의 정점에 올라선다.
그러나 2010년 들어 유벤투스에서도 노쇠화 때문에 기량이 예전 같지 않다는 비판에도 칸나바로는 2010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했고, 이건 거의 재앙 수준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탈리아 4백은 꿀 대진 취급받았던 조별리그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슬로바키아에게 3골이나 허용한 것은 칸나바로의 빛나는 축구 인생의 흑역사. 끝내 2:3으로 패배하였고, 팀의 광탈을 막지 못한 채 눈물을 훔치고 쓸쓸하게 라커 룸으로 퇴장하는 칸나바로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불과 4년 전 대회에서 이탈리아의 4번째 우승의 최고 주역이자 팀의 주장으로서 월드컵을 번쩍 들어올렸던 영광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처절한 몰락이자 캐안습. 박수칠 때 떠나라는 진리를 몸소 일깨운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사실 당시에는 칠벤투스가 되버린 유벤투스 위주의 선수를 뽑는다고 대표팀에 말이 많았다. 그럼에도 마땅한 대체자도 못찾고 결국 재앙이 온 것. 실로 마음 아픈 국가대표 경력의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5 여담
본격적으로 해축이 보급된 시절의 이미지 덕분에 대머리로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지만 나폴리, 파르마, 인테르 초반 시절에는 풍성한 머리칼을 자랑했었다. 찰랑이는 머리칼에 짙은 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로 한떄는 최고의 미남 축구선수를 뽑을때 항상 거론되는 이름 중 하나였다. 다만 유벤투스 이적 후 긴 머리가 경기에 방해가 되서 삭발을 했고, 덕분에 국내 축구 팬들에게 미남은 커녕 대머리 이미지로 각인되어 버렸다... 은퇴 이후에는 다시 머리를 기르고 있는 중이다.
센터백으로는 보기 드문 루저(176cm)이다.(동생한테 5cm만 뺏어오지..)[9] 하지만 뛰어난 위치 선정과 엄청난 점프력으로 인해 결코 제공권에서 밀리지 않으며, 작지만 단단한 몸을 바탕으로한, 특유의 끈질기고 적극적인 대인 방어도 아주 탁월했다. 특히나 대담하고 민첩한 움직임과 판단력으로 언제나 공격수들 보다 한발 앞서는 태클과 컷팅은 당대의 다른 수비수들중에서도 최고로 평가 받았다. 이탈리아 수비진을 지휘했다는 점에서도 커맨더형 수비수로도 탁월.[10] 순수한 수비수로서 유일한 발롱도르 수상, 월드컵 우승, 포포투가 뽑은 80년대 이후 가장 위대한 센터백 1위에 오른 것 등, 세월은 이기지 못해 아쉬운 말년을 보냈지만, 칸나바로가 가장 위대한 수비수 중 한 명으로 남을 것은 분명하다.
그를 상징하는 장면은 바로 오버 헤드 킥으로 공중 볼을 처리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아크로바틱한 클리어링. 칸나바로는 수비수로서는 작은 키라는 단점을 뛰어난 위치선정과 점프력뿐만 아니라 이런 유연하고 창의적인 플레이로 극복해냈다. 오버 헤드 킥을 하면 시야와 몸의 균형이 사실상 무너지는데 칸나바로는 그럴 경우에도 언제나 정확한 타점으로 깔끔하게 공을 처리했다. 이런 아크로바틱한 플레이를 가능케했던 전성기 칸나바로의 운동능력과 판단력은 정말 대단했다. 괜히 그 작은 키로도 역대 최고의 센터백중 한명으로 꼽히는게 아니다.
반면 라 리가 시절에는 칸나바로의 약점을 많이 보여줬는데, 이미 노쇠한 나이기는 했으나 라 리가의 수비 방식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단순한 대인마크가 아니라 수비수들이 라인을 올린 상황에서는 공간을 막아야 하는데 막으라는 공간은 안 막고 헤매기만 했다.
또한 선수생활 내내 국가대표 파트너이자, 최고의 수비수를 꼽을때 라이벌로서 자주 비교되어왔던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플레이 스타일에 있어서 칸나바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태클이나 수비 라인 조율등, 수비 기술적인 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기에 네스타의 플레이를 좋아하는 축구팬들은 칸나바로보다 네스타가 기량적으로 더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비교와 비판을 받아왔기 때문에 말년과 은퇴 후 한때 국내 축구팬들에게 이미지가 많이 깎이기도 했다. 거기다 네스타가 선수 생활 말년까지 뛰어난 기량을 유지한데 비해서 칸나바로의 말년은 워낙 안좋았으니...
현역 시절에 가장 많이 비교되었던 또 다른 선수는 아르헨티나의 로베르토 아얄라였다. 단신이지만 월드클래스 센터백으로 군림했다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얄라는 얄미울 정도의 지능적인 파울과 컷팅을 주무기로하는 좀 더 테크닉적인 수비수에 가까웠다면 칸나바로는 피지컬을 이용한 적극적이고 화려한 수비를 하는 파이터형 수비수에 가까웠다.
동생 파올로 칸나바로도 축구선수이며 고향팀인 SSC 나폴리를 거쳐 US 사수올로 칼치오에서 수비수로 뛰고 있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3포트 추첨을 해 대한민국에게 꿀 조(?)를 편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반대로 호주, 코스타리카, 미국에게는 지옥을 선사했다 고마워요 칸나바로 형 월드컵만 되면 한국을 도와주는 이탈리아 하지만 한국은 그 꿀 조에서 처참하게 털렸다.
6 기록
6.1 리그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 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92/93 | SSC 나폴리 | 세리에 A | 2 | 0 | 1 | 0 | 0 | 0 |
1993/94 | SSC 나폴리 | 세리에 A | 27 | 0 | 2 | 0 | - | - |
1994/95 | SSC 나폴리 | 세리에 A | 29 | 1 | 4 | 0 | 3 | 0 |
1995/96 | 파르마 FC | 세리에 A | 29 | 1 | 0 | 0 | 6 | 0 |
1996/97 | 파르마 FC | 세리에 A | 27 | 0 | 1 | 0 | 2 | 0 |
1997/98 | 파르마 FC | 세리에 A | 31 | 0 | 6 | 0 | 7 | 0 |
1998/99 | 파르마 FC | 세리에 A | 30 | 1 | 7 | 0 | 8 | 0 |
1999/00 | 파르마 FC | 세리에 A | 34 | 2 | 3 | 0 | 9 | 1 |
2000/01 | 파르마 FC | 세리에 A | 34 | 0 | 7 | 0 | 6 | 0 |
2001/02 | 파르마 FC | 세리에 A | 31 | 1 | 5 | 0 | 9 | 0 |
2002/03 | 인테르 밀란 | 세리에 A | 28 | 0 | 0 | 0 | 12 | 1 |
2003/04 | 인테르 밀란 | 세리에 A | 22 | 2 | 3 | 0 | 9 | 0 |
2004/05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8 | 2 | 0 | 0 | 9 | 1 |
2005/06 | 유벤투스 | 세리에 A | 36 | 4 | 2 | 0 | 9 | 0 |
2006/07 | 레알 마드리드 | 프리메라 리가 | 32 | 0 | 1 | 0 | 6 | 0 |
2007/08 | 레알 마드리드 | 프리메라 리가 | 33 | 0 | 1 | 0 | 6 | 0 |
2008/09 | 레알 마드리드 | 프리메라 리가 | 29 | 0 | 1 | 0 | 7 | 0 |
2009/10 | 유벤투스 | 세리에 A | 27 | 0 | 1 | 0 | 5 | 0 |
2010/11 | 알 아흘리 클럽 | 아라비안 걸프 리그 | 16 | 2 | 0 | 0 | 0 | 0 |
6.2 개인 수상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 2005/06
-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 : 2004/05, 2005/06
- 이탈리아 올해의 선수상 : 2006
- UEFA 올해의 팀 : 2006
- 발롱도르 : 2006
- FIFA 올해의 선수상 : 2006
- FIFA/FIFPro 월드 XI : 2006, 2007
- UEFA U-21 챔피언십 MVP : 1996
- 유로컵 올스타 팀 : 2000
- FIFA 월드컵 실버볼 : 2006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 2006
6.3 우승 기록
- 파르마 FC (1995/96 - 2001/02)
- 코파 이탈리아 : 1998/99, 2001/02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 1999
- UEFA컵 : 1998/99
- 레알 마드리드 CF (2006/07 - 2008/09)
- 프리메라 리가 : 2006/07, 2007/08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 2008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U-21 챔피언십 우승 : 1994, 1996
- 유로 2000 준우승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우승
-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출전 역대 2위
- ↑ The ball stops here. 칸나바로 본인이 한 말은 아니고 나이키에서 광고에 삽입해 준 문구이다. 유래는 미국 전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상징과도 같은 명언인 'The buck stops here.'
- ↑ 다만 이 발롱도르가 몇몇 축구팬들에게는 칸나바로의 기량에 대해 논쟁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몇몇 축구팬들에게 월드컵 활약으로 수상한 발롱도르로 순수 기량이 과대평가된다는 평을 받으며, 월드컵 직후 레알로 이적하여 시원찮았던 것은 이를 증폭시켰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칸나바로는 73년생으로 2006년에 이미 만 33세였다. 오히려 그 나이까지 꾸준히 정상의 기량을 유지하다가 월드컵에서 역대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것이 대단한 것이며, 자세히 따지고 본다면 그의 전성기는 한참 전인 90년대 후반 파르마 시절이다. 칸나바로와 연배가 비슷한 명망있는 센터백은 릴리앙 튀랑, 야프 스탐, 파올로 몬테로, 솔 캠벨 등이 있다. 단순히 말년의 좋지 못한 모습, 선수 경력에 있어 극히 일부분만 보고 선수의 기량을 의심하는건 잘못된 생각이다. 특히 수비 스타일에 있어서 민첩하고 유연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아크로바틱한 수비가 주무기였던 칸나바로에게 나이로 인한 신체적 능력 하락은 치명적이었으며, 전성기 기량이 지난 이후의 한번도 뛰어보지 못한 스페인 리그에 대한 적응 실패 또한 부진의 원인중 하나였다. 칸나바로는 은퇴 후 인터뷰에서 라리가와 세리에의 수비방식과 전술이 지역방어와 대인방어의 면에서 현저히 달랐다면서 적응하는데 몹시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 ↑ 이적 과정에서 루치아노 모지의 협박이 있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내용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너 유벤투스 안 오면 그날로 국가대표팀과는 영원히 이별이다."
- ↑ 후일 칸나바로는 레알 시절에 대해서, "유벤투스에서는 수비가 우선이고 공격이 먼저였지만 레알에서는 공격이 먼저고 수비가 후순위였다. 어느 것이 옳고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의 차이였고, 그 차이가 나에게 맞지 않았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 ↑ 그렇기에 30대 중반에 들어서던 월드컵에서 절정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었다. 짝으로는 신체 능력과 어그로능력을 매우 잘 활용하는 마테라치가 있어줬고 그로소와 잠브로타 역시 매우 좋은 활약을 해줬기에 칸나바로가 최고의 활약을 할 수 있었으나...
- ↑ 네스타는 또 조별리그에서 부상당했다(...)
- ↑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7경기 동안 총 2골을 실점했는데, 그마저도 조별리그에서 크리스티안 자카르도가 넣은 자책골과 결승전에서 지네딘 지단에게 내준 PK골이 전부였다. 즉, 필드골에 의한 실점은 없었다는 소리다...
- ↑ 비슷한 선수로 FC 바르셀로나의 주장 카를레스 푸욜(178cm), 로베르토 아얄라가 있다.
- ↑ 네스타랑 있을 때는 네스타가 지휘했고, 수비수로서 완숙한 후에, 그러니까 나이가 꽤 들고 나서야 지휘력을 갖추고 발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