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폰 쾨펜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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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f von Köfenhiller (クリストフ・フォン・ケーフェンヒラー)

1 개요

은하영웅전설 외전 5권 <나선미궁>의 등장인물. OVA 외전에서의 성우는 야지마 마사아키[1]

인물 이름을 일본어 발음과 영어 발음으로 뒤섞어 오역,편역한 을지서적 해적판에서는 케펜힐러로 번역했으나 서울문화사와 이타카 정식판에서 제대로 독일어 발음인 쾨펜힐러로 번역했다.

은하제국남작 작위를 가진 귀족가문 출신이며, 원래는 행정관료였으나 모종의 사건 때문에 스스로 군대에 지원했다. 그리고 제2차 티아마트 성역 회전에서 자유행성동맹군포로로 붙잡혀 무려 43년간 송환을 거부하며 자유행성동맹행성 에코니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괴짜 노인이다.

2 생애

2.1 내무성 관료 시절

쾨펜힐러 남작가를 계승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지방행정 쪽이 전문인 내무성의 행정관료였다. 신분제 사회인 은하제국에서 귀족의 경우 공직 진출에 특혜가 있으며, 개념 없는 명문귀족가 자제들이 들어와서 월급도둑질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쾨펜힐러의 경우에는 유능한 관료였다. 그리고 22세가 되던 해에 결혼을 하여 원래대로라면 문벌대귀족 정도는 아니더라도 작위가 있는 귀족이자 제국 내무성의 공무원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었을 인물이다.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23세가 되던 해에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이 들통났고, 아내가 도리어 잘못된 만남을 주장하면서 그와의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에서부터였다. 그리고 쾨펜힐러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아내는 아예 대놓고 내연남과 함께 집을 나가버렸다.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분쟁이긴 한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국은 신분제 사회이고, 쾨펜힐러는 남작이었지만 내연남이 은하제국 명문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즉, 급수가 다른 상대였다! 백작가에서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쾨펜힐러에게 금전, 출세와 같은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어떻게든 이혼을 시키려 들었다. 하지만 법적으로 남편이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고, 쾨펜힐러가 꿈쩍도 안 했던 관계로 결국 이혼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분노한 백작가에서는 내무성에 압력을 넣어 쾨펜힐러를 변경으로 좌천시키려 했다.

백작가에서 무슨 짓을 하건 동요하지 않던 쾨펜힐러였지만 아내가 내연남의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자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백작가의 뒷공작이 성사되어 변경으로 좌천되기 전에 선수를 쳐서 내무성에 사표를 내고, 25살의 나이로 군대에 지원해버렸다.

2.2 군인 시절

기본적인 훈련을 마친 쾨펜힐러는 바로 소령 계급을 받고 복무하기 시작했다. 작중에서 귀족은 특혜가 있어 임관을 신청하면 우대를 받는다는 서술이 있고, 쾨펜힐러의 경우 행정관료 경력까지 있다 보니 특별임관[2] 제도나 혹은 경력직 임관 같은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관한 이후 쾨펜힐러는 공을 세워나가며 빠른 승진을 한 끝에 28세에 대령까지 진급했다. 주요 보직은 나오지 않지만 통수본부에서 크리스토프 폰 미켈젠 장군의 밑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미켈젠 장군은 서로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쾨펜힐러를 잘 대해줬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후 배치가 바뀌어 전선근무를 나가게 됐고 함대 사령관 코젤 대장 밑으로 배속됐다. 하지만 그 전투가 하필 제2차 티아마트 성역 회전이었고, 제국군이 브루스 애쉬비가 이끄는 자유행성동맹군에게 신나게 털린 "군무성이 눈물을 흘릴 40분" 사이에 코젤 대장도 전사했다. 생존한 제국군 지휘부와 참모 일원은 아직 교전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동맹군이 항복권고를 보내자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이 몰렸다는 것을 느끼고 순순히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쾨펜힐러는 자신이 포로가 된 뒤, 동맹군 병사들이 전투에서 이겼는데도 브루스 애쉬비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맹군이 마치 진 것과 같은 분위기에 빠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자유행성동맹은 장교라도 장성급 포로와 비장성급 포로를 별도로 수용하게 되어 있었는데, 대령이었던 쾨펜힐러는 장성급 장교들과 분리되어 에코니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2.3 포로 시절

수용된 직후 쾨펜힐러도 포로가 된 자신의 신세에 자괴감을 느낀 듯한 묘사가 있으나, 오히려 자신이 죽지 않고 포로로 잡혀 있으니 법적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내연남과 아내는 불륜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정도면 충분히 잔인한 복수라고 판단한 듯 곧 마음을 비운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그는 43년에 달하는 오랜 세월의 포로 생활을 스스로 선택했다. 역대 수용소장들이 쾨펜힐러를 포로송환 리스트 맨 위에 올려줬어도 본인이 극구 사양하고 수용소에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쾨펜힐러는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얻게 되자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단 쾨펜힐러는 수용소 내에서도 터줏대감이라 불리며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장교급 포로와 부사관급 포로, 병사급 포로들이 각기 별개의 자치조직을 형성하는 다른 수용소와는 달리 에코니아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의 자치조직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고, 그가 자치조직의 위원장으로 있는 인물이었기에 역대 소장들도 쾨펜힐러에게 많은 배려를 해줬다. 덕분에 그는 할당받은 독방에서 각종 반입된 책자나 자료를 읽으며 한가롭게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자료들 중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은 취합하여 교차검증하고, 부족한 부분은 취합된 자료를 토대로 추론해 나가면서 알려진 역사 뒤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개연성 높은 무언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일단 장기간 포로수용소에 머물렀기 때문에 유창한 동맹 공용어 구사도 가능했고 내부사정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특히 에코니아 폴리스와 포로수용소에 대해서 비밀통로라든지 건물 내부도까지 동맹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즉, 마음만 먹었으면 수용소를 탈출한 후 은하제국으로 귀환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인물이었다. 물론 앞서 언급된 사정으로 본인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 외에 쾨펜힐러는 동맹 정부와 군부의 사정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고, 소장 버나비 코스테아 대령의 횡령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들을 보면 단수가 보통 높은 인물이 아니었다. 양 웬리표도르 파트리체프 모두 쾨펜힐러의 진면모를 알고 나서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으며 만약 그가 동맹군의 포로로 잡히지 않고 제국군 수뇌부에 있었으면 정보계통을 틀어쥐고 동맹군을 농락했을 인물이라고 평했다. 양 웬리가 부행정관으로 임용하여 에코니아로 올때도 단번에 엘 파실의 영웅이라고 알아봐서 양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했다.

어쨌든 "엘 파실영웅" 양 웬리엘 파실 탈출작전 이후 에코니아 포로수용소에 부임해왔고, 뒤가 구리는 것이 많았던 코스테아가 프레스부르크 중위를 내세워 모종의 사건을 꾸미자 은근슬쩍 개입하여 도와줬다. 덕분에 에코니아 포로수용소 사건은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담당한 무라이 중령이 감사를 표하면서 포상을 약속하자 편안한 여생을 위해 한 일이라며 포상을 거부했다.

결국 상부에서 협의 끝에 쾨펜힐러를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쾨펜힐러는 나이 70 넘은 노인네를 자유랍시며 억지로 내쫓는게 어딨냐며 즉각 거부했으나 그냥 석방이 아닌 공민권 부여, 자유행성동맹군 퇴역 대령 대우로 연금 지급 등의 편의를 봐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맹으로선 코스테어가 꾀하던 막대한 공금 횡령도 막아낸 탓[3]에 그 일부를 선심쓰듯이 주면 그만이었고 어차피 70대 노인인 쾨펜힐러가 오래 살아도 20년 전후였을테니까 이럴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연금도 받기전에 세상을 떠났네 처음엔 차라리 프레스부르크를 송환시켜 달라고 요구했으나 결국 본인도 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석방 이후 그는 포로수용소에 있는 동안 수집한 자료와 기록을 토대로 이를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됐겠지만....그러기도 전에 행성 하이네센으로 향하던 중 중간 경유지인 행성 마스지드 우주항 로비에서 양, 파트리체프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다가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잠자듯이 쓰러져 사망했는데 의사 말로는 사망 직전에 마시고 있던 맥주의 취기가 올라 있었던 탓에 고통없이 마치 잠들 듯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심박수가 빨라져 사망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노렸구나 표도르. 양 웬리의 첫 번째 적군 사상 실적. 자유의 몸으로 첫 새해를 맞이하면서 중간 경유지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 뭔가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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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만에 입어본 양복차림. 그리고 죽기 바로 몇 분전.

알렉스 카젤느의 배려로 쾨펜힐러가 수집한 자료는 양이 가지게 됐고, 쾨펜힐러는 마스지드의 공동묘지에 매장됐다. 묘비에 남길 문구는 양이 직접 써줬으며 이를 제국 공용어로 새긴 까닭에 비용이 더 들었다고 한다.

3 그 외

그냥 장기간 포로생활을 한 괴짜 노인네 정도로 취급됐는데 가면 갈수록 드러나는 진상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더불어 양 웬리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 인물. 브루스 애쉬비의 숨겨진 부분에 대해서도 연구했으며 제국과 동맹 사이에 있었을지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개연성 높은 설을 발굴해내기도 했다.

참고로 양이 브루스 애쉬비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된 계기는 이미 작고한 애쉬비 제독의 부인 명의로 애쉬비 제독이 모살당했다고 주장하는 투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투서의 정체나 목적, 그리고 발송한 사람의 정체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는데 에코니아 포로수용소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 양은 쾨펜힐러에게 당신이 투서를 보낸 것이냐고 캐물었다. 이때 쾨펜힐러 노인의 반응을 보면 양의 추측이 맞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쾨펜힐러가 수집하고 1차로 정리한 자료는 사후에 양 웬리가 완전히 정리했고, '쾨펜힐러 문서'로 명명된 이 자료는 주요사료로 지정되어 봉인조치에 들어갔다. 양은 쾨펜힐러가 다 해놓은 것을 자신은 정리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봉인된 자료는 자유행성동맹이 신 은하제국에 합병당한 이후 공개됐을 것으로 보인다.

43년이나 포로로 있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온 제국군 장교들 중 귀족도 꽤 있었을 것이고 그들 입을 통하여 자신의 아내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명을 달리하기 전, 아내는 자신이 죽지 않아 이혼도 못 해서 애를 낳은 뒤에도 결혼할 수 없었으며, 아이는 사생아가 되어 귀족계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흥미거리로 언급되고 있기에 여전히 고생한다고 말했다. 확실히 전 마누라에게 최대한 복수를 했다. 제국의 힘이 미치는 범위라면 백작가의 권위를 내세워 어떻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쾨펜힐러는 동맹에 포로로 잡혀 있고 버젓이 포로 명단에 있는 인물이다. 결정적으로 하위귀족이긴 해도 쾨펜힐러도 남작 작위를 이어받을 몸이었기에 별다른 권위도 없는 제국기사같은 말만 귀족인 경우나 평민과 확실히 다르다. 공문서 위조 등을 통해 사망으로 처리해버리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다른 귀족의 약점이 될 만한 건이 있으면 그걸 트집 잡아서 공격하는 동네가 은하제국이다 보니 아무리 힘 있는 백작가라도 그건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황제의 칙명이나 관료 귀족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는다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4]이니 그저 안습.

뭐 그가 결국 죽었으니 전 아내는 비로소 내연남과 결혼할 수 있게 되긴 했다. 그나마도 동맹에서 죽은 사람 소식이 제국에 제대로 전해질지도 미지수지만, 일단 전해졌다고 가정한다면. 하지만 이미 무려 43년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고, 적게 잡아도 60대 후반인 몸으로 정식 결혼 및 혼인신고를 할 수 있게 되어봤자 이미 꽃같은 세월은 다 지나버렸다. 게다가 그 오랜 시간 실컷 귀족계에서 입소문이 나고 흥미거리로 언급되었으니 쉽게 잊혀지지도 않아 고생을 계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쾨펜힐러 본인은 이런 점을 언급하지도 않으며 아내를 용서하네같은 마음이나 말도 비치지 않았으니 끝까지 용서하지 못한 듯.

이런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포로들이 고향에 남겨둔 아내나 약혼자를 그리워하며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두고 "그녀가 배신할 수도 있잖아?"라며 삐딱하게 또는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했다.[5]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으로만 했을 뿐이라 고향에 둔 이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탓하거나 자신의 예를 들며 비꼬거나 하진 않았다. 또 자신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포로로 죽었을 경우 다른 이들처럼 그리워하고 슬퍼하며 죽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포로생활 중 죽은 다른 포로들의 편지와 유품을 제국으로 보내는 일도 솔선수범으로 맡았는데 1년쯤 지나 죽은 다른 포로의 미망인이 쓴 감사의 답장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이걸 받곤 포로 부인들이 죄다 배신한 것은 아니구나 생각도 했을 것이다.

  1. 1932년생의 원로 성우. 각종 프로그램의 나레이터로 많이 활동했으며, 애니메이션보다는 외화 더빙에서 더 커리어가 많다.
  2. 비슷한 사례로 백작가의 아들인 칼 마티아스 폰 포르겐이 있다. 비사관학교 출신이고 그저 군무성 행정직 경험밖에 없는데 나이 서른에 대령 대우로 강제전출됐다.
  3. 정확한 금액이 나오지 않지만 코스테어가 삥땅치려던 금액에 대하여 역시 쾨펜힐러는 꽤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대령인 코스테어가 퇴역하여 받는 연금의 수백배를 처먹고도 남는다고 말했다. 즉 동맹 측에서 이러한 돈도 확보했고 코스테어는 불명예 퇴역에 쇠고랑 신세이니 연금도 박탈, 코스테어에게 원래 줘야할 연금을 보답이랍시고 쾨펜힐러에게 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말기의 동맹이 아무리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더라도 명색이 인구 수백억대의 국가인데, 한 사람 몫의 연금을 두고 부담을 느끼네 어쩌네 할 수준은 아니다.(...)
  4. 베네뮌데 후작부인에게 정치적인 역공을 가할 당시 로이엔탈이 말하듯이 제국 귀족계에서 가장 큰 무기가 바로 입소문이라고 나온 걸 보면 이러한 사생활적인 일은 귀족계에서 절대로 암묵적으로 넘어가기 어렵다. 지존인 제국 황제조차도 온갖 입소문이 떠돌고 있는 와중이니.
  5. 외전 3권인 <율리안의 이제르론 일기>에서 포로교환 당시 포플랭이 제국군 포로들을 두고 "마누라가 도망가거나 집이 불타 없어졌거나 하는 놈들도 있을걸"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 꼴이었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