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동산

(화원유원지에서 넘어옴)

花園東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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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홈페이지

1 개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1길 40-14(구 성산리 310)에 있는 공원이다. 대구광역시 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2015년 1월 1일부터 달성군 시설관리공단으로 관리 주체가 넘어갔다.

유원지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화원유원지(花園遊園地)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화원동산이 맞다. 다만 인지도는 화원유원지 쪽이 높고 버스 행선지에도 화원유원지라고 표기하며 결정적으로 관리 주체측인 달성군 시설관리공단 측에서도 화원유원지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이 항목은 화원유원지로도 올 수 있다.

정상에는 신라 경덕왕이 이 곳의 경치에 반해 감상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상화대(賞花臺)가 있으며 상화대 위에 팔각정이 우뚝 서 있어서 낙동강을 비롯한 주위 경관을 바라볼 수 있다. 낙동강 본류와 금호강, 대명천이 합류하는 풍경이 일품. 강정고령보도 멀리서 바로 보인다. 성산리(城山里)는 신라 선덕여왕 때 조성된 성산토성이 있다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인근에 있는 구라리(九羅里)는 경덕왕이 이 지역의 풍경에 반해 9번 왔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성산에 자리 잡고 있는 성산토성은 그 모양이 잔과 같이 생겼다 하여 ‘배성’ 또는 ‘잔뫼’라고도 부르는데 간간히 흔적이 남아 있다. 배성 주위 일대에는 30여 기의 성산리 고분군[1]이 산재해 있는데 당시 호족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1928년 유원지로 개발되었으며, 당시에는 찾는 이가 많아 일제강점기 말기까지 번창하다 광복 후에는 관리가 되지 않아 방치되어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1979년 지역 주류 기업인 금복주에서 다시 조성하여 동물원, 연못, 잔디광장, 야생화단지, 야외수영장 등이 들어섰으며 리즈 시절이었던 1980년대에는 소풍, 행락객, 피서객 등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1993년 대구직할시로 기부채납 되어 대구광역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수탁 관리했다.

시설이 오래되어 동물원의 상태[2]라든가, 야외수영장의 상태라든가 상당히 안습하며 점점 이용자들이 줄어들어 야외수영장이 폐장하는 등 침체기에 있어서 재개발하여 종합 레저문화단지로 개발할려고 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관리 주체가 달성군으로 다시 넘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개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2011년 이후 사실상 폐장한 야외수영장이 2015년 7월 8일부터 워터파크로 새단장하여 재개장하였다.

여담으로 대구 시가지에서 가장 가까운 낙동강 강변이다. 대구 시가지 중심을 금호강과 신천이 꿰뚫고 있고, 정작 낙동강은 대구의 외곽지역, 즉 달성군 경계선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달성군민을 제외하고(물론 가창면은 제외) 대구 시가지에 사는 대부분 시민들에게 낙동강은 심리적 거리상 다소 멀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화원동산이 있는 사문진은 화원읍 내에서도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화원읍 자체가 대구 시가지(월배 지역)와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접근성이 좋아서 적지 않은 대구 시민들이 많이 찾았다. 하지만 강정고령보의 개설로 대구 시가지와 가까운 낙동강변이 하나 생기면서 낙동강변을 이용하는 대구 시민들도 점차 더 늘어날 전망이다.

2 부활의 날개짓과 사문진(沙門津)

사문진은 조선 시대 전기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나루였다. 낙동강은 일본 무역상들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 물품 수송로이기도 하였는데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1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를 잇는 사문진이 가장 번창해 1486년(성종 17년)까지 대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무역의 발달로 15세기 후반부터 쇠퇴했지만 해방 이후까지 부산의 구포와 경상북도 안동시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다. 사문진은 대한민국 최초로 피아노를 운반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1900년 3월 26일 미국선교사였던 리차드 사이드보텀(Richard H. Sidebotham, 1874~1908)[3]이 이른 아침 어프하게 포장한 피아노 1대를 인부 30여 명이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나무토막 안에 죽은 귀신이 들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며 '귀신통'이라고 부르며 신기해 했다고 한다. 사문진을 통해 대구로 운반된 피아노의 주인은 동산의료원을 세운 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4]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1940년 초까지 사문진을 통하여 전국의 물자들이 대구로 운반되었으며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을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오갔었다는 기록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름철이면 대구 주민들이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는데 다산면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78년 8월에는 모래찜질이나 목욕을 하기 위해 사문진을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덕분에 화원동산도 유명해졌고 금복주에 의해 유원지가 조성된 것이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 개통 후 사문진은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 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대구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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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 후 입구에 무분별하게 있던 식당가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화원나루공원을 비롯하여 옛 사문진[5] 주막을 복원한 사문진 주막촌과 '달성호'라는 중형 유람선을 운항하는 사문진 선착장이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근처 화원체육공원을 비롯해 여름이면 행락객들이 많다. 최근 일대에 피아노박물관을 세우는 것을 추진 중이다.

3 대중교통

사문진교를 건너면 고령군으로 화원옥포IC에서 사문진교를 찾아오면 된다. 이 곳을 운행하는 시내버스 노선은 650번, 달서3번, 달성1번이 있는데 화원동산이 종점[6]인 노선은 달서3번뿐이다. 노선들마다 문제점이 있는데 650번은 대구 도시철도 1호선 화원역 방면과 시내 방면에서 직통으로 올 수 있지만, 한때 다산 방면이 화원동산입구 정류장에 정차하지 않아 시내 방면에서 오려면 홍천사[7]에서 내려서 걸어와야 했다. 현재는 650번도 양쪽으로 화원동산 입구에 정차한다. 달서3번은 배차간격이 좀 길고, 상인역에서 직선으로 오지 않고 대곡지구, 정부대구합동청사, 대곡지구 굴곡이 있다. 달성1번은 1일 9회 운행이다.

도시철도로는 대구 도시철도 1호선 화원역에서 가장 가까우며 650번, 달성1번, 달서3번으로 환승하면 된다.
  1.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에 있는 성산리 고분군과 구별하기 위해 설화리 고분군이라고도 한다.
  2. 후문 옆에 있는데 사실 동물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규모도 작고 또 철장의 상태도 매우 좋지 않다. 정문 쪽은 사문진 주막촌, 사문진 선착장, 화원체육공원이 들어서서 활기차지만 후문 쪽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유천교에서 사문진교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를 타면 이 곳으로 오게 되는데 밤에 오면 상당히 으스스하다.
  3. 한국명으로는 사보담(史保淡)이다. 개항기 부산에서 활동했던 북장로교로 1874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목사가 된 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으로 1899년 조선으로 와 1907년까지 대구와 부산에서 활동했다. 대구에 한국 최초로 피아노를 운반해 온 것을 시작으로 첫 1년 동안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 후 부산으로 거점을 옮겨 7년 동안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벌였다. 1907년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었지만 지속적인 선교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한국 선교를 위한 기금모금 중 1908년 12월 3일 우연한 가솔린 폭발사고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후 한 세기가 지나 외손녀인 사라 커티 그린필드(Sara Curtice Greenfield) 박사가 자신의 어머니가 태어난 부산을 방문하여 외조부모의 귀중한 유품을 부산박물관에 기증했다.
  4. 한국명으로는 장인차이다.
  5. 사문진 나루터는 틀린 말로 이미 나루 진(津)이라는 한자가 나루터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6. 정확히는 회차지이다.
  7. 정류장 이름은 용천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