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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이돌 그룹 AKB48의 역사.
목차
1 2005년: 출발
2005년 7월, 아키모토 야스시의 주도로 '아키하바라48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 당시에는 'AKB48'이 아닌 '아키하바라48'이라는 가칭으로 불렸다. 전용 극장 부지로 돈키호테 아키하바라점 8층이 선정된 것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1기생 오디션에 참가한 것은 7,924명이었는데, 이 중 서류 심사를 통과한 45명을 대상으로 최종 심사를 진행하였다.[1] 이 최종 심사를 통해 24명의 합격자가 추려졌고, 그 이후 극장 공연 시작을 목표로 가창과 안무 훈련에 돌입하였다. 훈련 지도를 맡은 것은 모닝구 무스메의 안무가로 유명한 나쓰 마유미 선생으로, 1개월간 나쓰 선생으로부터 집중 훈련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합격자 중 네 명이 탈락하였다. 남은 20명은 11월 23일부터 전용 극장의 스테이지에서 실제 공연을 앞둔 연습을 이어나갔다.
12월 8일, 1기생의 첫 공연인 'PARTY가 시작된다구' 극장 공연이 초연되었다. 원래는 12월 1일에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실력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6일 미뤄진 것이었다.[2] 첫 공연에는 72명이 몰렸으나 극장 관계자와 연예부 기자들을 빼고 실제로 돈을 내고 들어온 관객은 7명에 불과했다. 이 시절의 AKB48은 말 그대로 '지하의 아이돌'이었다. 첫 날 관객은 극장 관계자를 빼면 일곱 명 뿐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관객이 들어차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한 1기생은 이 때를 회상하며 무대에서 춤추는 게 진심으로 쪽팔렸다고 술회하기도 하였다.[3]
이 시기에는 모두들 고생을 많이 하였다. 멤버들은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홍보를 하였다. 이 때 대놓고 비웃는 사람들이나, 면전에서 전단지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 때문에 많이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토가사키 토모노부 지배인 역시 길거리 홍보를 하였는데, 메이드 카페에 놀러온 학생을 붙잡고 '더 재미있는 거(…) 소개시켜줄게'라며 극장으로 안내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다만 이 시기의 AKB48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멤버들에게 고생을 시켰다는 의혹을 받기도 한다. 아키모토 프로듀서의 영향력과 연줄이면 초기부터 여러 방송 활동을 뛰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근거가 전혀 없는 의혹도 아니다.
2 2006년: 팀K의 등장
2006년 2월, 인디즈 싱글[4] <桜の花びらたち>을 발표하였다. 이 곡은 첫 세트리스트인 'PARTY가 시작된다구'에 수록된 곡 중 팬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 것이었다. 첫 싱글을 발표하고 얼마 안 된 2월 26일, 19명의 소녀들이 2기생으로서 AKB48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이후 팀K를 결성하여 팀A와는 별도로 극장 공연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멤버를 1군과 2군으로 나눌 예정이었다. 미디어 활동에는 1군 멤버들만이 나서고, 2군은 팬 투표에 따라 1군 멤버와 자리를 바꾸는 형식으로 멤버를 구성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멤버들의 정신적 피로가 너무 심해진다는 판단 하에 1군-2군 구분이 아닌 팀A와 팀K 구분으로 바뀌게 되었다.
초기의 팀A와 팀K는 비록 1군-2군 관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경쟁 관계였다. 팀A들은 새롭게 들어온 팀K를 견제했고, 팀K는 팀A와 비교당한다는 압박감에 눌리며 활동하였다. 그래서 초기의 팀A와 팀K는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강하였고, 이러한 적대감은 자연스럽게 팀A 팬과 팀K 팬 사이의 신경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팀A 멤버가 나와도 팀K 팬들은 박수나 환호성을 하나도 안 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6월에는 두 번째 인디즈 싱글 <スカート、ひらり>을 발표하였다. 이 곡으로 유명한 음악 방송인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하였다. 당시의 AKB48 인지도를 고려해 볼 때, 뮤직 스테이션이라는 유명 음악 방송에 출연할 수 있었던 건 아키모토 야스시의 막강한 인맥과 영향력 덕분이었다. 8월 22일에는 공식 팬클럽인 '기둥의 모임'을 결성하였다. 기둥이란 전용 극장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일부 좌석에서는 이 기둥 때문에 무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남겨둔 것이었는데 이후 극장의 상징이 되었다.
2006년 10월, AKB48은 소니 뮤직의 서브 레이블인 데프스타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첫 싱글은 <会いたかった>로, 지금은 AKB48의 대표곡 중 하나로 자리잡은 곡이다. 이 시기에는 선발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팀A 멤버 20명이 모두 싱글 녹음과 활동에 참가했다. 따라서 극장 공연은 팀K가 도맡아서 쉬지 않고 이어나가야 하였다. 매일매일 공연을 돌리다보니 팀K에서 부상자와 이탈자가 속출하여 자연히 팀K의 존속 및 극장공연 자체에 무리가 오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대안으로서 팀A와 팀K, 그리고 연구생 일부를 묶어 만든 '해바라기조'가 편성되었다. 해바라기조 공연은 퍼스트 유닛과 세컨드 유닛으로 나누어서 한 명씩 짝을 이루게 한 후, 퍼스트 유닛 멤버 중에서 불참자가 생기면 그에 해당하는 세컨드 유닛 멤버가 등장해서 공연을 메우는 식이었다. 대역을 서는 멤버를 정해놓음으로써 공연을 안정적으로 치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대놓고 퍼스트 유닛의 인기 멤버와 세컨드 유닛의 병풍을 가르는 구조였다. 해바라기조 공연은 2008년 4월을 끝으로 사라졌다. 이 기간 동안에는 팀A와 팀K의 단독 공연이 없었다.
2006년 11월, 첫 단독 콘서트인 '만나고 싶었어 ~기둥이 없다구!'를 열었다. 당시에는 1200석의 티켓을 모두 팔았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티켓이 남아서 천으로 빈 자리를 가렸다.[5]
3 2007년: 메이저 데뷔
메이저 데뷔로부터 2개월 후인 12월 3일, 3기생 오디션에 합격한 20명이 합류하였다. 하지만 합격 직후 사퇴자가 줄이어 나오는 바람에 실제로 3기생으로 데뷔한 것은 13명에 불과하였다. 결국 선배인 우라노 카즈미, 와타나베 시호, 히라지마 나츠미와 함께 16명으로 구성된 팀B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로서 팀A, 팀K, 팀B로 구성된 AKB48의 멤버 체계가 완성되었다. 3팀 체제는 각 팀에 16명의 멤버를 소속시켜서 최종적으로 정규 멤버가 48명이 되는 체제이다. 팀B의 등장에 따라 팀A와 팀K 사이의 노골적인 경쟁 체제가 사라지면서 팀A와 팀K 사이의 갈등은 수그러들었다.
2007년 3월에는 첫 전국 투어인 <봄날의 맛보기 전국투어 ~아직이라구 AKB48~>를 개최하였다. 2007년 12월에는 일본에서 가장 이름난 연말 음악방송인 58회 홍백가합전에 출전하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AKB48만의 힘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주류 매체들은 아키하바라의 오타쿠계 서브컬처에 주목했는데 이것을 '아키바 붐'이라고 불렀다. 이 아키바 붐을 조명하기 위해 아키하바라와 연관이 있는 가수를 부른 것이다. 애니송 가수 나카가와 쇼코, 리아 디존과 함께 메들리 형식으로 무대를 선보였는데, AKB48이 출연한 것은 1분 남짓이었다.
팀B까지 만들고 정규 멤버 48명이 전부 꽉 찬 후에도 오디션은 계속 개최되었다. 팀B 이후로 팀4나 팀8를 만들까 하는 의견이 내부에서 나왔지만 그렇게까지 벌리면 비즈니스로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연구생 제도를 신설하게 된다.[6] 연구생에게는 기존 멤버가 방송 활동 등으로 자리를 비울 때 그 대타를 서는 역할이 주어졌다. 정규 멤버가 아닌데다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셀렉션 심사에 합격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떨어질 수도 있는 고단한 입장에 선 것이다.
이 연구생 제도의 첫 대상자인 4기생들은 굉장히 큰 고난을 겪었다. 4기생 18명 중 정규 팀으로 승격한 것은 일곱 명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4기생이 이렇다할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갔고, 그나마 선발급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쿠라모치 아스카와 사토 아미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4기생들은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4 2008년: 고난과 시련
2008년 1월, AKB48의 첫 레귤러 방송인 'AKB 1시 59분!'이 생겼다. 이 방송은 개그맨 듀오인 배드보이즈의 진행 아래 AKB48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각종 미션이나 게임을 진행하는 팬을 위한 전용 방송이었다. 이후 방송 시간을 1시간 앞당겨 'AKB 0시 59분!'으로 리뉴얼하였고, 2008년에는 30분 더 앞당겨서 'AKBINGO!'로 새단장하였다. 이 방송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AKB48의 주요 활동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대중 인지도나 음반 판매량은 늘지 않았다. 메이저 데뷔 이후 2년 여 동안 음반 판매량은 3만 장을 넘지 못했다. 결국 여덟 번째 싱글인 <桜の花びらたち2008> 싱글에는 판매량 증진을 위해 과도한 상술을 부렸다. 싱글에 멤버 44명의 포스터를 랜덤으로 넣고 이 44명을 모두 모아오면 5년 후에 열릴 예정인 '봄의 제전'이라는 행사 초대권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7] 확률적으로 말이 안 되는 기획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지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독점금지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법적 제재를 받았다. 결국 봄의 제전 행사는 취소되고 말았다.[8]
AKB48이 이렇다할 성과를 못 내고 있던 와중에 이런 사건이 발생하자 소니 뮤직은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결국 소니 뮤직은 AKB48과의 음반 계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이후 이어진 8개월 남짓한 기간은 AKB48 역사 최대의 암흑기였다. 상큼발랄한 댄스 곡에 수영복 PV까지 열심히 준비한 아홉 번째 싱글 <Baby! Baby! Baby!>는 CD가 아닌 전자 음원으로 발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킹 레코드와 음반 발매 계약에 성공하였고, 열 번째 싱글인 <大声ダイヤモンド>를 발매할 수 있었다.[9] 지금과 같은 악수회 시스템은 이 싱글부터 자리를 잡았다[10]. 극장반 악수회가 도입된 덕분에 첫 주에만 5만 장을 넘겼고, 곡이 괜찮았기 때문에 총판은 10만 장을 넘겼다. 이로서 AKB48은 반등의 기회를 마련했다.
11월 23일, 데뷔 이후 2년 넘게 열심히 활동해왔던 1기생 다섯 명이 동시에 그룹을 떠났다. 이 날 팀A 극장 공연이 끝나고 난 후 오오에 토모미, 코마타니 히토미, 토지마 하나, 나카니시 리나, 나리타 리사가 팬들 앞에 차례로 나서서 졸업을 고했다. 이전까지도 여러 멤버가 그룹을 떠났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졸업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팬들은 아쉬워했다. 특히 나카니시 리나는 귀여운 외모와 말랑말랑한 음색을 지닌 인기 멤버였기 때문에 아쉬움을 더했다. 슬퍼했던 것은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동기인 미네기시 미나미는 특히 언니같은 존재였던 토지마 하나를 떠나보내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술회했다.[11] 천식이라는 사정이 있던 나카니시를 뺀 나머지 4명은 인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모양새가 정리해고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에 사장님이 애들 군기좀 잡으라고 했는지 무려 우리나라의 해병대 캠프에 보냈다 카더라(...) 1편 2편
5 2009년: 도약
2009년 4월 26일, AKB48 초기의 주요 멤버였던 오오시마 마이가 졸업했다. 연예계 경험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들로 가득했던 초기 AKB48에서 마이는 단연 두각을 드러내며 졸업 전까지 선발에도 계속 들어간 인기 멤버였다. 특히 마이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활약했다. 예능감이나 토크 실력이 좋아서 음악 프로그램에서 사회자와 함께 진행을 맡거나, AKBINGO!에서는 MC를 맡기도 했다. 오죽하면 당시 팬들은 'AKB48에 연예인은 마이마이밖에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AKB48이 아직 무명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능력과 끼를 더 활발히 발산하기 위해서는 AKB를 떠나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2009년 6월, AKB48은 일본 연예계에 전무후무할 이벤트를 기획하였다. 싱글의 선발 멤버를 팬들의 손으로 뽑게 하는 선발 총선거가 시작된 것이다. 팬들 사이에서 싱글 선발 멤버의 선정에 관해 종종 불만이 제기되던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AKB48은 각종 이벤트나 깜짝 발표 등으로 팬들에게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주목도를 높이는 전략을 써왔는데, 그 전략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선발 총선거라고 할 수 있다. 1회 총선거는 아직 AKB48이 대중들에게 완전히 존재감을 각인시키지 못했던 시절에 열려서 주목도는 떨어졌지만, 아이돌 그룹에서 선거로 멤버를 뽑는다는 사실로 인해 AKB48의 이름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처음으로 열린 1회 총선거에서는 부동의 센터 마에다 아츠코가 1위를 차지하였다. SKE48 출신이면서도 AKB48의 선발 멤버로 활동해왔던 마츠이 쥬리나가 19위로 선발 멤버에 진입하고, 4기생 출신으로 그동안 이렇다할 푸시를 받지 못했던 사토 아미나가 미디어 선발권인 8위에 오르는 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토 아미나는 자청해서 연구생 공연의 포지션까지 외우는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팬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1회 총선거의 결과에 따라 선발 멤버를 배치한 싱글 <言い訳Maybe>는 소녀다운 매력이 한껏 살아있는 곡과 뮤직비디오로 지금까지도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회 총선거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AKB48에 다시 한 번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은 8월 22일 열린 무도관 콘서트 'AKB104 내각 조성 축제'이다. 이전까지는 각각 1기생, 2기생, 3기생이 주축이 되었던 세 팀에 각각 아이돌성, 파워풀함, 귀여움이라는 컨셉을 부여하고[12] 컨셉에 맞게 각 팀의 멤버를 섞은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노로 카요, 사토 유카리 등 나이가 많은 일부 멤버들은 새로운 프로젝트인 SDN48로 이적시키고, 그 빈 자리를 6기~7기 연구생이 메우게 되었다. 각 팀별 팬들은 물론, 기존 팀에서 우정을 쌓아왔던 멤버들은 혼란에 빠졌다. 특히 SDN48 이적조와 그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신팀'으로 불리는 제2기 팀 체제이다.[13]
내각 조성 이후 발표한 싱글 <RIVER>는 지금까지의 싱글 표제곡과는 다른 세련된 곡과 강한 안무,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메시지성 강한 가사를 특징으로 내세웠다. 이 곡으로 AKB48은 처음으로 오리콘차트 싱글 주간 1위에 올랐다. 또한 홍백가합전에도 이 곡으로 진출했다. 2007년에도 홍백에 나간 적이 있지만, 순전히 그룹의 인기로 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RIVER>로는 대한민국의 음악 시상식인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도 출연했다.[14]
<RIVER>의 성공으로 기뻐하던 AKB48이지만 이 시기에 문제점이 싹트기도 했다. AKB48은 지속적으로 연구생을 뽑아서, 이 시기에는 연구생만 8기와 9기를 합쳐서 29명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48명의 정규 멤버 자리가 다 꽉 찼고, 선배들이 아직 졸업할 시기가 다가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승격을 할 수가 없었다. 12월 4일, 8기생 10명이 무더기로 셀렉션 심사에서 탈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AKS 측에서는 '8기생이 나태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해고하게 되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로 8기생 중에는 허가 없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등 불량한 태도를 보인 연구생이 있었다. 그렇지만 10명이 전부 다 태도가 불량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 팬들은 연구생이 너무 많아지니까 구실을 붙여서 죄다 해고한 게 아니냐고 반발하기도 했다. 최후의 8기생인 사노 유리코가 2010년 10월 사퇴함에 따라 8기생은 AKB48의 어두운 역사로 남게 되었다.
6 2010년: AKB48의 시대
운영진 측에서는 이 시기 나이가 어린 멤버들을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AKBINGO! 방송의 '에케레인저' 기획을 통해 연구생들의 이름을 알렸고, 코모리 미카는 아예 <涙サプライズ!> 싱글의 선발에 넣어주기까지 했다. 코모리를 비롯해 미야자키 미호, 오오타 아이카, 사토 스미레 등은 실제로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모두 미디어 선발에 들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매력을 잃고 말았다. 대외적으로는 인기를 점점 더해가던 AKB48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기존의 인기 멤버 이외에 새로운 인기 멤버가 나타나지 않는 문제가 이어졌고 결국 이 문제는 2년 후 세대교체라는 이름으로 터지게 된다.
2010년에도 총선거는 열렸다. 이 해에 열린 2회 총선거에서는 오오시마 유코가 마에다 아츠코를 꺾고 1위에 오르는 파란이 일어났다. 이전까지도 마에다와 오오시마는 팬들 사이에서 라이벌로 여겨졌지만, 이 이후 각종 매스컴에서도 둘을 라이벌 관계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마에다와 오오시마의 라이벌 관계는 이후 AKB48이 주목을 받는 계기이자 동력이 되었다.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둘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 다루면서, 이전까지 AKB48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마에다 아츠코'와 '오오시마 유코'라는 이름만큼은 알게 된 것이다.
총선거, 오리콘차트 1위, 홍백가합전 출전 등으로 얻은 지명도를 바탕으로 AKB48은 점점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알려나갔다. 이렇게 상승세에 오르던 AKB48에게 전성기를 가져다 준 것은 2010년 발표한 <ポニーテールとシュシュ>과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이었다. 이 두 장의 싱글은 모두 폭 넓은 계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이전까지 오타쿠 전용 그룹으로 치부되었던 AKB48이 대중들로부터도 인정받았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특히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는 발매 3년이 지난 2013년까지도 노래방 차트 상위권에 드는 등 국민적인 히트곡으로 자리매김했다.
10월에 발표한 싱글 <Beginner>는 <RIVER>를 이어서 격렬한 댄스와 젊은 이들에게 힘을 북돋워주는 가사를 내세웠다. 이 곡은 첫 날 판매량만 56만 장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첫 주에 82만 7천장이나 팔아치웠다. 그 후로도 차트에 계속 진입하면서 결국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악수권 등의 상술이 있다고는 했지만, 음반 시장이 침체된 2010년대에 밀리언 셀러가 탄생한 것에는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해에 총선거에 이어서 AKB48은 새로운 이벤트를 기획하였다. 가위바위보로 선발 멤버를 뽑는 '가위바위보 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5기생으로 그동안 무대 뒤편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우치다 마유미가 가위바위보의 힘으로 센터에 섰다. 가위바위보 대회를 통해서 그동안 선발에 들지 못했거나 극장 한 구석에서 묵묵히 활동하던 비인기 멤버들이 선발에 많이 뽑혔다. 그러나 우치다를 비롯해서 가위바위보를 통해 선발에 든 멤버들은 인기가 그리 늘어나지 않아서, 선발 멤버로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인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선례를 남기고 말았다.
전성기에 오른 AKB48에는 여전히 정규 멤버 자리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이 문제는 이미 2009년부터 불거져서 8기생의 전원 사퇴라는 극단적인 사태로 번졌는데, 2010년에 와서는 오히려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이미 국민적 아이돌이 된 AKB48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메리트가 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졸업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AKB48'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하다못해 새벽 예능프로 게스트로라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것은 8기생과 9기생이었다. 특히 9기생은 일단 승격은 했지만 팀에 속하지 못한 채 '팀 미정 정규 멤버'라는 애매한 위치에서 활동해야 했다. 정규 멤버기는 하지만 소속 팀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취급은 연구생과 똑같았다.
7 2011년: 전성기
2011년 1월, 팀K 멤버 이타노 토모미가 솔로로 데뷔하였다. AKB48 멤버가 정식으로 솔로 음반을 발매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15] 평소 세련된 이미지와 패션 스타일로 여고생들의 지지를 받으며 다른 멤버들과는 차별화된 노선을 걷던 이타노의 솔로 데뷔는 큰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첫 싱글 'Dear J'는 AKB48에서 보여주던 것과는 다른 화려한 일렉트로니카 스타일의 곡으로 호평을 받으며 총 판매량 20만 장을 돌파했다.
2011년의 AKB48은 대규모 콘서트 '다카미나를 따르겠습니다'와 함께 막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일본 열도를 덮친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이 콘서트는 취소되고 말았다. AKB48은 자연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일본에 생기를 북돋우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그 일환으로 활동으로 얻은 수익과 싱글 판매 수익의 일부를 재해 복구를 위해 기부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또한 큰 피해를 입은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를 방문하여 무료 공연을 열면서 상처받은 이재민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6월 열린 3회 총선거에서는 마에다 아츠코가 다시금 오오시마 유코를 꺾고 1위에 올랐다. '헤타레 아이돌' 사시하라 리노는 9위에, 9기생 중 가장 먼저 푸시를 받았던 요코야마 유이는 19위에 올랐다. 2011년 총선 싱글 <フライングゲット>은 첫 날 판매량만 100만 장을 넘겼고, 노래방이나 디지털 음원 차트에서도 오랫동안 사랑받는 등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에 이은 AKB48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6월, 네 번째 팀인 팀4가 만들어졌다. 정규 멤버로 승격을 했지만 자리가 없어서 '팀 미정'이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던 9기생과 10기생 10명을 위해 아예 팀을 새로 만든 것이다. 멤버들은 저마다 승격하고 싶은 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지지기반이 없는 새 팀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당황하였다. 팬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팀에 들어가서 선배들에게 눌리느니 차라리 자기들만의 팀에서 활동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과, 선배가 없는 환경에서 제대로 클 수 있겠냐는 의견이 충돌하였다.
10월 10일 팀4의 극장 공연 '나의 태양'이 시작되었다. 이후 AKS에서는 '바카레아 고등학교'라는, 팀4 멤버들만이 출연하는 드라마까지 잡아주는 등 푸쉬를 끊임없이 했지만, 팀4는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헤매었다. 초기 팀들은 극장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지만, 팀4 멤버들은 각자 방송, 싱글, 잡지 활동 등으로 인해 흩어지면서 팀으로서 꼭 필요한 협동심을 가지지 못하였다.[16] 그런 와중에 멤버인 오오바 미나와 모리 안나가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팀4는 위기에 빠지지만, 시마다 하루카의 리더십 덕택에 그럭저럭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2011년 12월 23일 뮤직 스테이션 슈퍼라이브에 참가하여 출연자 중 최다인 3곡을 불렀는데, 인원수가 인원수인 만큼 카메라웍 테러와 음악방송 LED 테러를 당하고 말았다. 일본 세븐일레븐을 비롯한 7&i 홀딩스의 광고 모델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그룹차원에서 크리스마스 케이크 판매 때는 타이업곡을 내는데, 그 위력을 강하게 발휘한다고 한다.[17]
2011년의 AKB48은 아시아를 비롯한 일본 외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우선 싱가포르와 타이페이에 AKB48 관련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점포인 'AKB48 오피셜 숍'을 개점하였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JKT48, 중화인민공화국의 SNH48 등 아시아 각지에서 활동하는 AKB48의 자매 그룹을 만들었다. 이들 자매 그룹은 현지의 여성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며, 그룹의 운영과 자금 조달은 모두 현지 기획사와 스폰서 기업이 맡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구글 재팬은 48 그룹과 협력해서 자사의 구글 플러스를 홍보한다는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12월 8일, 'AKB48 on Google+'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48 그룹에 소속된 모든 멤버들에게 구글 플러스 계정을 만들고 팬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8 2012년: 1830m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콘서트 '업무연락. 부탁한다, 카타야마 부장!'을 개최했다. 이 무대는 여러모로 뜻깊은 자리였다. 우선 AKB48이 데뷔 당초부터 목표로 삼았던 도쿄 돔 공연이 발표되었고[18], 부동의 센터 마에다 아츠코가 그룹을 졸업한다는 것, 그리고 4회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것을 발표했다.
4회 총선거는 오오시마 유코가 2위와 3만 6천여 표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마에다가 불출마를 선언한 이후 1위는 너무나 예견된 상황이었지만, 그 아래 순위에서는 혼전이 계속되었다. 카시와기 유키가 와타나베 마유에게 밀려 3위로 떨어졌고, 사시하라 리노는 4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NMB48의 에이스 와타나베 미유키와 SKE48의 예능돌 하타 사와코가 각각 19위와 25위에 오르는 등 자매 그룹의 활약도 이어졌다. 반면 7기생들과 팀4 멤버 등 AKB48의 미래를 이어나가야 할 멤버들은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8월에는 네 번째 정규 앨범 <1830m>을 발표했다. 1830m는 아키하바라 돈키호테 8층의 AKB48 극장으로부터 도쿄 돔까지의 직선 거리를 뜻한다. 8월 25일 열린 도쿄 돔 콘서트에서는 팀 셔플이 또 한 번 이루어졌다. 제3차 팀 체제는 팀4를 없애는 대신 팀4 멤버들을 팀A, 팀K, 팀B로 분산하고 팀 정원 제도를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대신 인기 여하에 따라 공연에 항상 나갈 수 있는 스탠다드 멤버 16명과 언더 멤버(스탠바이 멤버)를 가르는 '슈퍼 서브' 제도를 도입하였다.[19] 이와 함께 일부 멤버를 HKT48, JKT48, SNH48로 옮기고 SKE48, NMB48에서 겸임 멤버를 들여옴으로써 AKB48의 총 멤버는 73명이 되었다. 도쿄 돔 콘서트와 마에다 아츠코의 졸업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계기로 AKB48의 제1장이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멤버들이 무대 전면에 서는 AKB48 제2장이 시작함을 알리는 것이었다.[20]
9 2013년: 새로운 시작
1월 31일 미네기시 미나미의 스캔들이 터졌다. 대개라면 본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고 그룹 측에서 근신이나 선발 제외, 연구생 강등 정도의 조치(바로 다음날 연구생으로 강등되었다.)를 취하는 정도로 끝났겠지만, 미네기시 본인이 삭발을 하고 눈물과 함께 사죄하는 영상이 유튜브 AKB48 공식 채널을 통해 올라오면서 전 세계인들에게 보여지게 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언론에 보도되었다. 팬들이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는(특히 서양 쪽에서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던지라, AKB48 및 그룹 내의 연애금지 규정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들이 각국에서 쏟아졌다. 논란이 일자 그룹 운영진 측은 문제의 영상을 삭제했고, 2013년 7월 이후 연애금지 규정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21]
5월 6일 AKB 극장 3000번째 공연을 연구생 공연 パジャマドライブ가 장식했는데, 2005년 첫번째 공연 멤버였던 미네기시 미나미도 연구생으로 출연했고 이에 대해 토가사키 지배인은 "미네기시가 무대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극장에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코멘트. 키쿠치 아야카 포지션의 저주
5월 22일 발매된 31번째 싱글 さよならクロール은 첫 주 176만여 장, 총 194만여 장을 판매하며 SPEED가 갖고 있던 여성 아이돌 단일 싱글 판매량(184만 장)과 하마사키 아유미가 갖고 있던 여성 아티스트 싱글 누계 판매량(2141만 장. 갱신 후 2185만 장) 기록을 동시에 뛰어넘었다.
6월 8일 개최된 5회 총선거에서는 사시하라 리노가 스캔들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였다. 새로운 센터의 탄생이 맞긴 한데... 사시하라가 정통 아이돌 스타일의 멤버는 아닌데다가 92년생이라는 나이도 '차세대'로 나가기에는 다소 많은 편이라, 세대교체를 위한 운영진의 노력은 계속될 듯. 그래도 차세대 센터로 불리는 와타나베 마유가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마츠이 쥬리나와 시마자키 하루카 같은 푸쉬멤버들이 꾸준히 순위를 끌어올리고 있어 절반의 성공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7월 20일부터 8월 25일까지 도쿄 / 나고야 / 오사카(쿄세라) / 후쿠오카 / 삿포로의 5대돔 투어 콘서트를 개최했다. 여기서 상당히 많은 변화가 발표되었는데, 우선 기존 13~14기 연구생들을 포함하며 이들과 함께 연구생 공연을 이끌어오던 미네기시 미나미를 캡틴으로 하는 신 팀4의 출범이 발표되었다. 또한 드래프트 제도가 신설되어, 11월 10일 드래프트 회의를 통해 총 20명의 드래프트생이 AKB48 및 자매그룹에 소속되게 되었다. AKB48/드래프트 항목 참조.
그리고 48그룹의 근간이 되어왔던 극장 공연이 CD 싱글 발매나 미디어 출연 등에 우선순위가 밀려 몇 년씩 묵힌 세트리스트로 때우는 일이 많아져 진부하다는 비판을 받자, 2014년 중순까지 전 팀의 새로운 오리지널 공연 공개 계획도 발표되었다. 문제는 예정된 날짜에 맞춰 공연이 시작되지 못 할 확률이 극히 높다는 점. 가장 먼저 예정되어있는(그리고 발표 이전부터 오리지널 공연을 주겠다고 공언해오던) 팀N의 신공연도 미루고 미루어진지가 반 년이 넘은 상태니 다른 팀은 말할 나위도 없을 정도. 여기에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뜬금없이 2014년부터 각 극장 공연의 추첨 배율에 따라 팀간 순위를 정하는 페넌트레이스를 펼친다는 발표로 팬들과 멤버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극장 공연의 배율은 각 팀이 잘하고 못하고라는 내적 부분을 떠나 인기 멤버가 공연에 나오나 혹은 신공연으로 눈길을 끌 수 있는가와 같은 외적인 부문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
2013년에는 카미7 멤버였던 1기생 시노다 마리코와 이타노 토모미를 비롯, 2기생 카사이 토모미, 마츠바라 나츠미, 아키모토 사야카까지 총 5명의 1~2기생이 졸업함으로써 그룹의 세대교체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렇게 그룹 내부에 여러 사건이 많은 와중에, 8월에 발매한 5회 총선 싱글의 표제곡 <恋するフォーチュンクッキー>가 <헤비 로테이션>과 <플라잉 겟>을 이어 국민적인 히트곡이 되었다. 밝고 경쾌한 곡에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는 가사, 남녀노소 따라하기 쉬운 춤, 그리고 총선거 1위를 차지한 사시하라 리노의 스토리 덕분에 화제가 되었다. 싱글은 초동 판매량 130만 장을 넘겼고 발매로부터 25주가 지난 시점까지 싱글 차트 50위권에 유지하면서 판매량도 150만 장을 넘기고, 또한 노래방 애창곡으로도 사랑을 받아서 오리콘 가라오케 차트 3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인기곡이 되었다.
9.1 세대 교체 문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AKB48의 전성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카미7로 대표되는 주요 멤버를 대체할 만한 차세대 멤버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다. 4기부터 7기까지의 멤버들 중 선발급으로 오른 것은 쿠라모치 아스카, 사토 아미나, 사시하라 리노, 키타하라 리에, 타카죠 아키 등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현상에 대해 주요 멤버들만이 메이저 매체에 출연하다보니 그 아래 기수 멤버들이 인기를 얻을 기회가 없었다는 의견과, 아래 기수 멤버들의 실력이나 팬 대응이 부족했다는 의견으로 갈리는데, 사실 둘 다 맞는 말이다.
이미지로 승부하는 특성상 여성 아이돌은 활동 기간이 짧다. 그래서 이미 20대 중반에 들어선 주요 멤버들이 앞으로도 활동을 계속하기는 어렵다. AKS 측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기 때문에, 2012년에 들어서 급하게 차세대 멤버를 육성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9기 이후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AKB 제2장'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 일환으로 9기생 시마자키 하루카를 비롯해서 여러 멤버들[22]을 방송에 많이 노출시키고 선발에도 넣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선발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새 멤버를 밀어주다보니 자연히 기존 멤버들이 밀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팬들 사이의 갈등이 생긴다.
- 기존 멤버들의 팬들은 이렇게 말한다.
- 실력도 인기도 부족한 애들을 밀어주려고 인기가 훨씬 많은 애들을 빼는 것은 부당하다. 애초에 아래 기수 애들이 인기가 있었다면 자연히 선발에 들었을 것 아닌가? 차세대를 만든다면서 기존 멤버들을 빼면 결국 AKB48의 인기도 하락하고 말 것이다.
- 차세대 멤버들의 팬들은 이렇게 말한다.
- 멤버들이 인기를 얻으려면 선발에 들어가고 방송에도 많이 출연해서 이름을 알려야 한다. 지금의 선발 멤버들은 위 기수가 없던 시절에 인기를 얻어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지만, 아래 기수 멤버들은 선발 멤버들 때문에 치어서 인기를 얻기 힘든 것이다. 기존 멤버들만으로 계속 꾸려나가도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언젠가는 차세대를 키워야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라 이 논쟁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AKB48의 팬덤에는 그룹 전체의 팬보다는 멤버 몇몇을 좋아하는 소위 '개인팬'이 훨씬 많기 때문에 이 논쟁의 주역이 되는 기존 팬들도 차세대 팬들도, 그룹을 위해서 라는 명분을 차용할 뿐, 정작 그룹 자체의 인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문제. 위의 논거는 "인기멤버 푸쉬 빼면 인기 떨어진다." vs "걔들만 믿고가면 어차피 인기 떨어진다"는 식을 취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오시 왜 안 밀어주냐가 그 근본이기 때문에...
10 2014년: 대격변
2013년의 마지막이자 2014년의 시작을 여는 NHK의 홍백가합전에서 마에다 아츠코가 떠난 이후 에이스 몫을 하고 있던 오오시마 유코가 졸업을 발표했다. 사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누구든 유코가 언제든지 졸업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홍백이라는 자리에서 그룹을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은 꽤나 쇼크였기 때문에 팬덤은 혼란 속에 빠졌다.
2014년 1월 23일 리퀘스트 아워 2014에서는 도요타의 후원을 받아 '만날 수 있는 아이돌'에서 나아가 '만나러 가는 아이돌'이 되겠다며, 이 캐치프레이즈를 직접 실천할 팀8이 만들어진다는 발표가 나왔다. 일본 전국 47 도도부현에서 1명씩 후보자를 뽑아 이 중에서 최종 팀8을 구성한다는 것. 머나먼 여정이었지만 어쨌든 계획대로라면 초반에 기획했던 팀A, K, B, 4, 8 체제가 완성되는 셈이다. 그러나 기존 멤버들의 잇달은 졸업으로 그룹 전체가 흔들리고 밀리언도 깨지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제대로 굴러갈 지는 의문. CM 숫자나 방송 출연횟수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며 AKB48을 때리는 언론의 보도도 조금씩 늘어났다.
점차 차오르는 위기의식 속에 운영진은 2014년 1월 26일 리퀘스트 아워 2014 2일차에서 대조각을 2월 24일에 실시한다는 서프라이즈를 발표한다. 기존의 팀 셔플이 어떠한 예고 없이 조각 당일 바로 실시한 것과 달리 '대조각'을 내걸고 본점만이 아닌 48그룹 전체를 다 섞어버리겠다는 발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대망의 2월 24일, AKB48과 국내외 자매그룹, 심지어 노기자카46까지 포함된 대조각의 결과는 한동안 멤버들과 팬들 모두를 멘붕에 빠뜨렸다.[23]
5월 25일 AKB48 악수회 피습사건이 벌어져 차세대 주요 멤버인 카와에이 리나와 이리야마 안나가 부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악수회장에 전문 경호인력은 한 명도 없었음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사건 이후 운영진의 대처 역시 적극적이지 못하고 사건의 여파를 축소 및 은폐하려는 듯한 움직임만을 보여 팬들은 운영진 측이 멤버 보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며 분노하였다. 이 사건의 여파로 AKB48은 물론이고 자매그룹과 타 아이돌 그룹의 악수회를 비롯한 팬 대응 이벤트가 한동안 취소 및 중단되었고, 아이돌에 대한 안전 대책이 대두되었다. 결국 카와에이는 졸업을 선택, 이리야마 역시 싱글 선발을 스스로 사퇴하는 등 AKB48로서의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차세대 주요 멤버 2명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본점 AKB48에도 큰 타격이 왔다.
6월 7일 6회 총선거에서 와타나베 마유가 최다 득표수 기록을 깨며 데뷔 첫 1위를 차지했다. 어린 나이에 데뷔하여 차세대 에이스로 주목받고, 1회 총선거부터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으나 1위와는 인연이 없었는데 감회가 남달랐을 듯. 총선거 사상 첫 2연패 가능성이 점쳐졌던 사시하라 리노는 2위로 밀리면서, 마에다 아츠코 vs 오오시마 유코를 잇는 새로운 총선거 라이벌리의 시작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와타나베 마유가 센터를 선 총선 싱글 <心のプラカード>는 바이럴 마케팅 등 다양한 마케팅 수단에도 불구하고 iTunes 차트나 레코초쿠 차트 등 곡의 인기를 나타내는 차트들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인기 멤버들의 졸업으로 인해 악수회 판매량도 급격히 저하해서 팬덤의 화력을 나타내는 피지컬 싱글 판매량도 가까스로 100만 장을 넘는 등, 역대 총선거 싱글 중 최악의 성과를 내고 말았다. 이전 해 총선 싱글의 성공에 고무됐었던 것인지, 전년도와 너무 비슷한 컨셉을 밀고 간 것이 패인으로 지적된다.
한편 싱글 발매 정책에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5회 가위바위보 대회가 기존의 선발 멤버 선정이 아닌 우승자의 솔로데뷔를 걸고 진행되었고(이에 따라 가위바위보 싱글 및 선발은 없어졌다), 싱글 발매시기 역시 10월과 12월이 아닌 11월로 결정되면서 2010년 이후 매년 5개의 싱글을 발매해 오던 AKB48이 4년만에 싱글 수를 4개로 줄이게 되었다. 피습사건 이후 악수회가 연이어 연기되면서 싱글 발매일 기준으로 최대 6개월까지 악수회가 연기된 것과, 이와 무관하지 않을 싱글 판매량의 하락세가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파생 유닛들이 줄지어 해산을 발표한다. 2013년 12월에 해산을 발표한 와타리로카하시리타이가 베스트앨범 渡り廊下をゆっくり歩きたい을 발매하고 2월 9일 Zepp 도쿄에서 열린 해산콘서트를 마지막으로 AKB48의 파생 유닛으론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산한다.
이후 DiVA 또한 8월 13일 AKB48의 라디오 방송 올 나잇 니폰에 출연하여 공식적인 해산을 발표한다. 이후 싱글 Discovery와 정규 1집 DIVA를 발표한다. 이후 11월 30일 마쿠하리 멧세에서 열린 해산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해산하게 된다.
Not yet도 멤버 오오시마 유코의 졸업 발표로 인해 해산이 어느정도 예상되었다. 이후 발표를 통해 정규 앨범 Already를 발표하고 단독 라이브를 개최하는 해산의 루트를 탐에 따라 공식적으로 해체되는 것인가 예상했지만 공식적인 해산을 발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력 멤버의 졸업에 따라 활동이 힘들어 진다는 건 어느정도 예상되는 바이다. 프렌치 키스만이 새로운 싱글 思い出せない花를 발표하며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며 노스리브스의 활동은 없었다.
공식 파생 유닛들이 줄지어 2014년 해산을 발표함에 따라 새로운 변혁이 필요한 시기임이 입증되었다.
12월 8일 AKB48 극장 9주년 기념공연에서 총감독이자 팀A의 캡틴인 다카하시 미나미가 2015년 12월 8일 극장 10주년 공연을 마지막으로 AKB48 졸업을 선언하고 차기 총감독으로 요코야마 유이를 지명하였다. 예상된 지명이고 요코야마 유이 본인이 인기나 멤버들의 신망이 두터운 것을 감안하면 AKB48그룹 제2막의 마지막 퍼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11 2015년: 그리고 10주년
2015년 1월 23일 리퀘스트아워 3일차 공연에서 5월 10일 제2회 드래프트 회의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였다. 전년도의 1회 드래프트 회의 때는 연구생 기간 없이 즉시전력감을 뽑는다는 성격이었기에 팬덤의 반발도 컸으나, 2회 드래프트 회의는 48그룹 각 팀에 소속된 연구생을 뽑는다는 것으로 변화를 주었다. 1회 드래프트 때엔 실제 일본 프로야구의 드래프트 회의처럼 지명이 겹쳐 추첨을 통해 우선권 교섭[24]이라는 스토리가 있었고, 드래프트 멤버들 중에서도 각 그룹별 싱글 선발에 뽑힐 정도 활약을 보여준 것이[25] 2회 드래프트 회의의 개최에 이어졌다. 2월 8일엔 오사카 성 홀에서 열린 NMB48 아레나 투어 공연에서 연구생 전원이 승격하는 것이 발표되면서 드래프트 회의 체제로 신멤버를 뽑겠다는 운영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2015년 2월 25일, AKB48 전용 극장의 누적 관람객 수가 100만명을 돌파했다. 100만번째로 입장한 관람객은 오사카에 거주하는 여성으로 대학교 1학년생이었다. 이 관람객은 이전까지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선물로 평생 AKB48 극장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프리패스 티켓이 주어졌다.# 2월 25일까지 AKB48 극장에서는 3,658회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3월 25일, 26일 양일간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영멤버 전국투어 및 봄의 단독콘서트가 열렸다. 영멤버 전국투어를 통해 레전드 멤버가 없는 영멤버만의 콘서트를 열고 영멤버들의 매력발산 및 경험을 쌓게하는 차원에서 개최되었다. 영멤버 콘서트에서 '텐토무츄'의 AKB48 싱글 커플링곡 수록결정 및 '덴덴무츄'의 결성이 발표되었다. 봄의 단독콘서트에서는 콘서트 말미에 각 그룹들의 공연이 끝나고 봄의 인사이동이 발표되었다. 많은 멤버들의 팀 이동, 겸임 및 겸임해제가 발표되었으며, 특히 카와에이 리나의 졸업 발표 및 키타하라 리에의 NGT48 이적이 가장 큰 뉴스가 되었다.
6월 6일 7회 총선거에서 사시하라 리노가 종전 최다 득표수 기록을 깨며 1위에 복귀했다. 중국발 표들이 와타나베 마유 및 마츠이 쥬리나로 몰렸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바 사시하라 리노의 1위 재입성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2위 카시와기 유키의 167,183표를 한참 넘어서는 194,049표라는 압도적 1위의 결과. 다카하시 미나미의 마지막 총선, 카시와기 유키의 NGT겸임 후 선거 등 다양한 내러티브가 있어 팬들의 화력집중이 예상되었기에 사시하라 팬들의 연령 분포 및 그에 따른 총선화력, 그리고 활동거점 후쿠오카라는 요소가 사시하라 리노의 1위 등극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구팀B 출신이 1, 2, 3위의 굳건한 순위를 유지하며 상위권의 높은 벽을 실감케 했다. 그 외의 이야기는 총선 후 이야기 참조.
7~8월, 총 6명이 AKB48을 떠났다. 하시모토 히카리, 카와에이 리나, 코바야시 마리나, 쿠라모치 아스카, 우치다 마유미가 졸업 공연을 가졌고 키타하라 리에가 팀K 센슈락에서 송별회를 가지며 NGT48로 이적했다. 당시 센슈락과 특별공연의 준비로 인해 발표와 졸업 공연의 텀이 짧다는 아쉬움을 남기며 AKB48의 전성기를 이끌어 온 키타하라 리에와 함께 중견 멤버의 이탈이 줄지어 진행되었다. 11기 에이스로 손꼽힌 카와에이 리나의 졸업으로 11기에는 2명 만이 남게 되었다. 타카죠 아키만이 재적하고 있는 6기를 제외하고 가장 인원이 적은 깃수이며 9기 이후 뽑힌 차세대 깃수 중에는 가장 소수 인원으로 구성된 깃수가 되었다.
8월 20일, AKB48 내 파생 유닛 중 현 활동을 진행 중이던 프렌치 키스가 해체를 발표한다. 멤버인 쿠라모치 아스카의 졸업 이후 활동여부에 관심이 모였으나 동일 최초이자 최후의 앨범이 될 'French Kiss'를 발매함과 동시에 동년 11월 5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리는 「French Kiss Live ~LAST KISS~」라는 이름의 해산 라이브를 개최함이 또한 발표되었다. 그룹 내 노스리브스와 Not Yet를 제외한 유닛 그룹 전체가 해산을 선택하였다.
9월 16일 AKB48 가위바위보대회가 열렸다. 우치다 마유미의 사퇴 및 시마자키 하루카의 건강악화로 인한 불참이 화제가 되었던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후지타 나나가 우승하였고, 솔로싱글에 수록될 커플링곡 센터는 나카니시 치요리로 결정되었다.
10월 15일 극장 특별공연인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토리 와카나의 졸업 소식이 전해지면서 11기는 코지마 나츠키만이 남게된다. 타카죠 아키만이 남은 6기와 함께 재적 멤버가 한 명 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특히 6기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뽑은 멤버의 수가 적었지만 11기의 경우 차세대 중에서 특히 올해들어 4명이 연달아 졸업을 선택하며 현재 AKB48에 있어서 낀세대라 할 수있는 멤버들이 자신의 길을 떠나는 아쉬움을 자아냈다.
11월 18일, 神曲たち 이후 오랜만에 베스트 앨범이 발표된다. 수록곡은 Type A는 주간 차트 1위 획득 곡, Type B는 밀리언 획득 곡, 싱글 컴플리트반은 지금까지 AKB48가 인디즈부터 발매한 싱글 전 곡이 수록된다. 특이점으로는 싱글 컴플리트반에 수록되는 인디즈 싱글 桜の花びらたち, スカート、ひらり은 2015년 Best 버젼으로 함께 수록된다. 또한, 베스트 앨범에 수록되는 곡은 솔로곡 없이 듀엣곡과 팀곡, 유닛곡, 차세대 유닛 텐토무Chu!와 덴덴무Chu!의 신곡이 수록된다.
12월 6일, 과거 포토앨범 특전으로 제공되었던 AKB48 10주년 기념 이벤트가 열렸다. 입장한 관객들은 그당시 앨범을 구입한 팬들과 0과 1사이 앨범을 구입한 사람들 중 추천을 통해 선정된 팬들이었다. 그 당시 재적멤버를 기준으로 졸업멤버 및 현역멤버들이 무대를 꾸몄다.
12월 8일, AKB48 10주년 기념 극장 공연 행사가 열렸다. AKB48에 재적했던 졸업 및 현역멤버들이 총출동해서 단체곡 및 유닛곡 무대를 선보였고, 후반부에는 다카하시 미나미 총감독이 요코야마 유이에게 총감독직을 계승하는 행사를 통해 총감독직이 요코야마 유이에게 넘어갔다.
12 2016년: 뉴에이지
2016년 1월 1일 간탄공연(설날공연)을 시작으로 재출발을 시작하였다.
설날 공연에 나온 멤버는 차세대로 분류되는 멤버들이 전부였다. 초등학생 멤버들 치바 에리이, 쿠보 사토네, 니시카와 레이 같은 멤버들과 고등학생 멤버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설날부터 "차세대 위주로 힘내보자!" 이런 의미였다고 보면 된다.
2016년 현재 AKB본점 상황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라 요코야마 유이를 중심으로 차세대 AKB 멤버를 뭉치겠다는 의지가 강해보인다. 작년 팀A 신공연 발표도 그렇고 AKB 내부 수정을 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에 발맞춰 AKB는 9기 이후 차세대 위주로 흘러가고 있고 당연히 선배 기수의 졸업이 발생하고 있다.
이미 이 시점에서 1기생 1대 총감독 '다카하시 미나미'는 졸업생으로 분류되어 사실상 AKB48 활동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1월~ 4월 사이 이와사 미사키, 이시다 하루카, 이와타 카렌 졸업발표, 우치야마 나츠키 졸업 등이 이어졌다.
1월의 대부분은 리퀘스트아워 리허설로 멤버들은 바쁘게 보냈다. 이번 리퀘스트 아워는 특이하게 진행되는데 AKB 단독 리퀘스트아워와 AKB48그룹 리퀘스트 아워로 나뉜다는 점이다.[26]
1월 16일 ~ 18일, AKB 단독 리퀘스트아워가 TDC홀에서 개최, 대상곡은 543곡, 2위는 팀8의 「47の素敵な街へ」, 1위는 「赤いピンヒールとプロフェッサー」 - 마츠이 쥬리나의 곡이 선정되었다. 쥬리나는 AKB48 겸임을 풀고 SKE48에 전념하기로 했기에 팬들이 보낸 마지막 선물이었다.
1월 21일 작년 졸업을 발표한 타카죠 아키와 나가오 마리야가 도쿄돔 시티홀에서 합동 졸업콘서트도 있었다. 이례적인 것으로 다른 시기에 데뷔한 두명의 멤버가 같은 콘서트에서 졸업을 한 특이한 케이스다.
6기생 타카죠 아키도 거의 모든 활동을 마무리 지어서 곧 6기생도 0명이 되어버린다. 나가오 마리야 역시도 9기생 푸쉬 멤버중에서 가장 먼저 졸업했다. 나가오가 속한 9기 역시 벌써 7년에 가까운 활동, 9기는 굉장히 대선배의 기수여서 언제 누가 졸업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1월 22일~24일 AKB48그룹 리퀘스트 아워가 열렸고 「奇跡は間に合わない」가 1위를 차지하며 미야자와 사에의 졸업 기념 1위곡이 되었다.
또한 이번 리퀘스트 아워를 거치면서 미야자키 미호에 대한 광푸쉬가 시작되었다. 말그대로 뜬금 푸쉬였는데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 리퀘스트 아워 종합사회를 하면서 기억이 안날 정도로 바쁜 날을 보냈다.
2월16일~28일 AKB극장에서 다카미나가 모든 공연에 나오는 다카하시미나미 프로듀스 공연이 시작되었다.
3월9일 43번째 싱글 「 君はメロディー 」가 발매되었다. 공지한 대로 졸업생이 참가. MV와 뮤직스테이션에 나왔다. 곡 자체는 심플하게 잘나왔지만 대중들에겐 그다지 먹혀들지 않았다. 팬덤내에서도 너무 무난해서 별로 느낌이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도 무난하게 초등 113만을 넘으면서 전작에 깨진 초등 100만은 다시 회복하였다.
3월26일 (토) , 3월27일 (일) 동서가합전, 다카하시 미나미 졸업콘서트 등의 3개 콘서트가 열렸다. 마지막날 1기 레전드 멤버들과 오오시마 유코 , 아키모토 사야카 등의 2기생 멤버들이 찾아왔다. AKB에게 있어서 중요한 두번의 사건이 끝이 난것.[27] AKB는 완전히 차세대들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3월 31일 2기생으로 SKE로 이적한 미야자와 사에, NMB로 이적한 우메다 아야카, AKB48 마지막 2기생 코바야시 카나 모두 졸업 하였다. 모든 2기생 0명 전원 졸업. 그렇게 전설을 써온 팀K 멤버들이 극장을 떠났다.[28]
1기생 전설적인 멤버 다카하시 미나미가 4월 8일 자신의 생일을 기점으로 길고도 긴 AKB48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무려 10년이 넘는 활동기간을 자랑했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졸업,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총선거가 6월 18일 개최되는 것이 발표되었다.
4월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AKB는 완만한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인지도 있는 멤버가 줄어들고 있는것. 대중들이 AKB48라고 하면 기억하던 멤버들이 너무 많이 졸업하고 말았다. 판매량이나 흥행을 떠나서 AKB붐을 지지하던 것은 '인기멤버'들이었기에 그들이 떠난 자리를 쉽게 메울 수 없다. 「 君はメロディー 」에서 졸업생을 쓴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팀으로 보면 AKB 팀A에 신공연 <M.T에게 받친다>가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차세대 히와타시 유이를 32인 선발에 넣기도 했다. 팀K는 무카이치 미온으로 대동단결. 팀B는 여전히 더블에이스 체제다. 팀4도 나름 잘 적응하고 있고 팀은 유기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공연숫자가 문제일뿐)
2016년 6월 18일 열린 제8회 AKB48 총선거는 AKB48의 세대교체를 예고하였다. 팀A,K,B,4,8 중 팀4가 가장 많은 권내 숫자인 9명을 기록하며 차세대 멤버들의 약진을 보여주었다. 또한 선발멤버 중에서도 12기 이하 멤버들이 4명이나 들어가면서 세대교체에 대한 운영의 부담이 조금 덜하게 되었다. 다만 와타나베 마유가 2위를 기록하며 1위 탈환에 실패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8월 14일, 16기 오디션 개최가 발표되었다. 모집 응모 간은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이다.[29] 10월8일 오전 9시부터 10월 13일 오후 10시까지 쇼룸에서 16기 후보생(총 69명)들이 방송한다고 한다.- ↑ 오디션 상세 - AKB48 공식 블로그
- ↑ 이번 달도 - AKB48 공식 블로그
- ↑ 출처는 AKB48 공식 히스토리 북
- ↑ 인디라고 해서 인디 록밴드 같은 게 아니라, 정식 레이블을 거치지 않는 자체 유통 음반을 말하는 것이다.
- ↑ AKBINGO! 2010년 7월 14일
- ↑ 토가사키의 말에 따르면 세트리스트 하나에 들어갈 곡과 안무, 의상을 짜는 데에만 3천에서 4천은 족히 들어간다고. 당연하지만 엔이다.
- ↑ 오타쿠 눈물! AKB48 특전을 전부 모으면 '봄의 제전'에 초대 - 나탈리
- ↑ AKB48 화제의 이벤트 '봄의 제전'이 갑자기 중지되다 - 나탈리
- ↑ 데프스타는 AKB48이 경쟁사 킹 레코드에서 대박을 쳐버리면서 완전히 뒷목을 잡았고, 결국 데프스타 시절의 AKB48 음반을 묶어서 세트로 낼때 제목이 '놓쳐버린 물고기들'이었다. 나중에 노기자카46를 영입하기는 했지만.
- ↑ 이전에도 악수회 자체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체게적인 시스템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 ↑ 이후 코마타니와 토지마는 SDN48의 3기생으로 48 그룹에 돌아왔다. 한편 나카니시 리나는 이후 집안 사정이 안 좋다는 풍문이 떠돌았는데, 2010년 야마구치 리코라는 이름으로 AV에 데뷔했다.
- ↑ 내각 조성 이전에도 각 팀에는 저런 색깔이 있었지만, 내각 조성을 통해 팀별 색채를 더욱 부각시킨 것이다.
- ↑ 이후 2012년 제3기 팀 체제가 발표되면서 이 시기의 팀 체제는 다카하시 팀A, 아키모토 팀K, 카시와기 팀B으로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 하드코어 오타들은 '그런 식이면 오리이 팀A, 노로 팀K, 우라노 팀B도 있냐'라고 비꼬기도.
- ↑ 내한 무대를 가진 것은 아니고, 마루노우치 빌딩 1층과 위성 생중계를 통해 무대를 선보였다.
- ↑ 오오호리 메구미가 '오오호리 메시베'라는 이름으로 '달콤한 고관절'이라는 음반을 발매한 적이 있지만, AKBINGO! 방송 내부에서 기획한 이벤트성 싱글이었다.
- ↑ 이것은 초기 팀B도 마찬가지였지만, 팀B는 히라지마 나츠미를 비롯한 선배들의 도움 덕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 ↑ 일본 2위 유통그룹으로, 자회사는 이토요카도, 세이부백화점, 소고백화점. 1위는 이온.
- ↑ AKB48 공식 블로그의 부제가 'TOKYO DOME까지의 궤적'이었다. 도쿄 돔 공연이 성사된 후에는 '1830m으로부터'로 바뀌었다.
- ↑ 정규 멤버라고 해도 인기가 없으면 공연에 못 나가는 살벌한 체제이다. 공연에 나가야 인기를 얻는데 공연에 못 나가게 하면 그냥 제 발로 나가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반면 연구생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연구생 전용 공연이 있기 때문에, 비인기 정규 멤버보다는 연구생이 더 유리하게 되었다.
- ↑ 실제로 다카하시 미나미를 비롯한 멤버들이나 운영진, 각종 언론에서도 'AKB48 제2장'이라는 언급을 많이 했다. 2012년 홍백가합전에서 선보인 메들리의 제목도 'AKB48 홍백2012 스페셜 -제2장-'이었다.
- ↑ 2013년 7월 사시하라 리노가 TV프로그램에서 연애문제는 자기책임제가 되었다고 언급
- ↑ 이리야마 안나, 카토 레나, 카와에이 리나, 나가오 마리야가 있다. 중견 기수 중에서도 나이가 많지 않은 키쿠치 아야카, 후지에 레이나를 밀어주고 있다.
- ↑ 대조각의 자세한 결과는 여기를 볼 것.
- ↑ S, KⅡ, N의 스토 리리카, B, S, KⅡ, E, H의 카와모토 사야 등
- ↑ AKB48의 카와모토 사야, SKE48의 소다 사리나, NMB48의 스토 리리카, HKT48의 야마모토 마오
- ↑ 본점 차세대를 위한 운영의 계획이었다고 생각된다.
- ↑ 마에다 아츠코의 졸업과 다카하시 미나미의 졸업.
- ↑ 사실상 마지막 공연은 2기생 10주년 공연인 4월 1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 먼저 발표한 SKE48 8기 오디션은 8월 10일부터 9월 9일까지 인걸로 보아 오디션 응모기간을 일부러 겹치게 한거라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