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중국의 최고지도자 | |||||||||
1대 | 2대 | 3대 | 4대 | 5대 | 6대 | ||||
마오쩌둥 | 화궈펑 | 덩샤오핑 | 장쩌민 | 후진타오 | 시진핑 |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 | |||||||
4대 | → | 5대 | → | 6대 | |||
양상쿤 | → | 장쩌민 | → | 후진타오 |
장쩌민 江泽民 | ||||
중화인민공화국 제5대 주석 | ||||
임기 | 1993년 3월 27일 ~ 2003년 3월 15일 | |||
부주석 | 룽이런, 후진타오 | |||
총리 | 리펑, 주룽지 | |||
중국공산당의 제7대 중앙위원회 총서기 | ||||
임기 | 1989년 6월 24일 ~ 2002년 11월 15일 | |||
중국공산당의 제6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
임기 | 1989년 11월 9일 ~ 2004년 9월 19일 | |||
이름 | 장쩌민 간체: 江泽民, 정체: 江澤民 병음: Jiāng Zémín, 한자음: 강택민 | |||
출생일 | 1926년 8월 17일 ~ | |||
출생지 | 중화민국 장쑤 성 양저우 | |||
정당 | 중국공산당 | |||
학력 | 양주고등학교[1] 중앙대학 상하이자오퉁대학(전기기계학과) | |||
종교 | 무신론 | |||
부모 | 아버지: 장스쥔江世俊, 계부: 장상칭江上青 어머니: 왕저란王者籣, 계모: 우웨칭吴月卿 | |||
배우자 | 왕예핑王冶坪(1928년 2월 12일 ~ ) | |||
자녀 | 장남 : 장몐헝江绵恒(1951월 4월 ~ ) 차남 : 장몐캉江绵康(1954년 ~ ) | |||
가족 | 차남 : 장쩌쥔江泽君(동생) 삼남 : 장쩌콴江泽宽(동생) |
1 개요
중국의 정치인. 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장쑤 성 양저우 출신. 상하이 자오퉁 대학 전기기계학과 출신. 중국 공돌이 집권자의 시작 1세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2세대 덩샤오핑 등에 이은 중국의 3세대 지도자중화제국 5대 황제로 분류된다. 지금은 중국의 태상왕.
2 생애
장쑤 성 출생이지만, 상해교통대를 나오고 상하이시장에서 중앙 정치국으로 진입하는 등 정치적 기반은 상하이. 그를 따르고 지지하는 계파를 보통 '상하이방(上海幇)'이라고 지칭하는데, 이름대로 확실히 그때 상하이 출신 권력자들이 중앙정부에 많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는 상하이가 중국 개혁개방의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도시라는 점도 작용한다.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기가 죽은 편이라지만 후진타오의 공청단파와 대립하며 태자당과 함께 손을 잡고 있다. 이쪽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시진핑.
전반적으로는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가리고 어둠속에서 힘을 기른다"라는 덩샤오핑의 노선을 이었고, 1997년부터는 자신감을 얻어 "대국으로서 책임있는 자세를 가진다"라는 식의 '유소작위(有所作爲)', 즉, 필요한 역할은 한다로 나아갔다.#[2]
최고직인 국가주석(政)에, 중국공산당 총서기(黨)와 공산당 군사위원회 주석(軍)까지 겸임한 최초의 인물. 이전의 국가주석은 실권 없는 자리로 양상쿤이라는 우리 입장에선 듣보잡인 국가 원로가 맡았고[3], 총서기는 당의 최고 직함이 된게 공산당 중앙위 주석이 폐지되며 분리되어 나온 1982년부터이므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계승한 셈이며[4], 군사적 자리인 군사위 주석만 덩샤오핑을 계승한 셈이다. 이 자리는 모두 후진타오에게 계승된다.
다만 중국에서 최초로 당정군의 권력을 모두 장악한 인물이라는 건 사실이 아닌데, 일단 장은 정부의 최고위직인 국무원 총리를 겸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이 당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5], 국무원 총리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 타이틀은 장이 아닌 화가 된다. 어차피 덩샤오핑은 저런 공식 감투가 없어도 충분한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차오스(喬石, 중앙정치국위원, 서기처 서기 - 1980년대 이래 당시 당내 권력 3위)가 그의 권력에 맞섰으나 1998년 이미 그는 재빠르게 권력을 장악했고, 차오스를 은퇴[6]시켰다.[7] 이는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을 영입했던게 절묘했기 때문이다. 쩡칭훙은 리펑과 연대하고 캐스팅보더 리뤼환을 지지시키며 후진타오기의 리커창의 후임도 막아버렸던 "장쩌민의 제갈량"이었다.
임기기간 대부분 동안 넘사벽 덩샤오핑이 배후에 있었기에 덩샤오핑의 그늘에 가려진 느낌을 받는다. 허수아비, 얼굴마담 소리도 들었을 정도. 물론 덩샤오핑이 죽은 1997년부터는 정말로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때부터 후진타오가 크기 시작해서...물론 실권은 후진타오가 주석이 된 이후 2004년까지도 가지고 있었다.[8] 바로 군권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밀땅인 셈인데, 상하이방의 안전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런 옅은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개국된 중국은 바로 이 장쩌민의 시대에 열렸다. 주식시장과 코카콜라, NBA 중계,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개방. 한국과의 수교도 그의 시대에 있었다(1992년). 최초 방한(김영삼), 최초방미(with 빌 클린턴, 최초 방일(오부치 게이조와 함께 # 당시 기사)등 진기록이 넘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위 영상은 2000년 8월 말에 중국의 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미국 CBS의 시사프로 '60분'에 출연해 저널리스트 마이크 월러스와 가진 단독 인터뷰인데 자세히 보면 중간중간에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미국 기자와 대화할 정도로영어에 능통하다. 스스로는 중학교 때 영어를 배웠다면서 자신의 영어 실력에 대해 겸손해 하지만, 통역이 되기도 전에 직접 기자의 말을 알아듣고 즉흥적으로 답하며 때론 직접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 결코 영어 실력이 보통은 아니다.[9] 게다가 천안문 6.4 항쟁 당시의 상황을 추궁하는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시종일관 여유있는 태도를 보일 정도로 멘탈도 매우 강단있는데, 특히 천안문 항쟁에 대한 재평가를 시사하는 발언까지 나와서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기사
여하간 천안문 항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은 직후 집권한 장쩌민에게 있어 사회안정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필수 과제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 공안 이외에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를 확대/개편하였다. 사실상 한국의 전경 내지는 의경과 비슷한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이는 중국 내부의 사상과 자유를 탄압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별걸 다 벤치마킹 장쩌민의 임기 중에 파룬궁 신도들을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탄압하는 정책 역시 시작되었으며 장쩌민은 파룬궁의 대원쑤로 두고두고 욕을 먹게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임기 중 국무원 총리 러닝메이트 파트너는 리펑(李鹏, 전반기 5년)과 누룽지주룽지(朱镕基, 후반기 5년)[10] 참고로 이들 모두 이과공돌이다. 이른바 삼개대표사상을 "주요 전략 사상", 쉽게 말하면 핵심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공산당은항상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社会生产力的发展要求;)
항상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文化的前进方向;)
항상 중국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最广大人民的根本利益.)"
대강 정리하면 경제성장, 문화진보, 민생이랄까. 뒤에보면 알겠지만 후진타오도 한건 했다.
강유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강유는 서강할때 姜씨고 장쩌민(江澤民, 강택민)은 江씨다. 한글 위키백과에만 있던 말로 지금은 사라졌다. 덩샤오핑이 등애의 후손이란 말이 있다.(...)
2011년 7월 6일 사망설이 나돌았었다 심지어는 KBS에도 나왔다.# 다음날 바로 오보였다고 공식 발표했고, 생사람을 잡은 이 방송을 낸 방송국 사장은 사임했잘렸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병원에 입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퇴원했다고 한다.
2012년 들어서는 공식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다가, 2012년 11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 18차 전국대표대회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진타오 주석 바로 옆자리를 배정받아 차기 지도자 시진핑보다도 높은 의전 서열로 그의 권력이 아직 막강함을 보여주었으며, 실제 전국대표대회 결과 구성된 신임 중국 지도부도 그가 이끄는 상하이방과 협력 관계인 태자당 소속 시진핑이 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후진타오로부터 물려받았으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직도 대부분 상하이방과 태자당 소속 인물들이 물려받았다. 이대로라면 죽을 때까지 사실상 태상황 역할을 할 듯.
허나 후진타오가 시진핑에게 군사위 주석직을 바로 넘겨주는 대가로 장쩌민이 정치에 간섭하지 못하도록하는 일종의 물귀신(...) 작전을 감행했으며, 재임 시절 상하이방을 두들겨 패서 입지도 많이 줄어들었기에 정말 막후정치를 할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한다. 그래도 5세대 1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중 4명이(...) 상하이방인데 그 상하이방에 절대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장쩌민의 정계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는 건 어려울 듯하다.
후진타오 옆자리를 차지한 장쩌민, 장쩌민이 현임 지도자 같은 인상을 보여준다.
참고로 집권기간을 살펴보면 마오쩌둥(27년) 다음으로 2위(15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간은 넘사벽. 이건 덩샤오핑이 81년에야 주석이 되어 8년 만에 자리를 물려준 탓이 크다. 거꾸로 말하면 천안문 사태가 아니었으면 이런 승계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의 부친과 그에게 친일-소련 스파이란 혐의를 씌우는 글도 있는듯 하다.출처 중국의 역사학자 즉,중국 2차세계대전사연구회 회원 뤼자핑(呂加平)이 그의 실체를 폭로한 글을 썼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지나친 비약이라는 반박도 존재한다.
2015년 8월 24일, 장쩌민이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전격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떴지만 결국 카더라로 밝혀졌다. 승전 70주년 열병식에서 후진타오 전 주석과 함께 참석한 것이 생중계로 잡혔다.[11]- ↑ 江苏省扬州中学
- ↑ 그 뒤가 후진타오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우뚝 섬)이며, 후진타오 후반은 돌돌핍인(咄咄逼人, 기세 등등한 힘의 외교)이라는 말도 나온다. 여하간 도광양회의 기조 속에 슬슬 유소작위를 갖추는건 지금까지도 중국 패권의 기본 원리이다.
- ↑ 이건 북한도 그래서 김일성이 주석으로 전면에 나선건 1970년대고 그이전엔 주석제가 아예 없었고, 북한 헌법상 국가 원수는 김두봉 같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맡았다. 김일성은 내각 수상이었고 이는 행정 수반에 해당한다. 물론 조선노동당 총비서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노동당에 장악된 최고인민회의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당 주석 직은 군사위 주석보다 서열이 높아서 실제 서열과 모순이 컸으므로 총서기를 따로 분리하여 덩샤오핑이 후계자를 기르는 직위로 이용했다. 당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 회의란 기형적 회의체를 통해 참석권이 없는 덩샤오핑의 말을 들었다. 여러모로 실권자와 당직이 모순이 된건 사실이었던 셈.
- ↑ 당시 국가 중앙군사위원회는 없었음
- ↑ 73세로, 70세 이상가 넘어 은퇴
- ↑ 차오스는 장쩌민과의 대립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파룬궁(무해백익이라고도 말했다.)에 긍정적이고 인권을 강조하던 면이 있던 인물인지라 서구측에서는 안타깝게 여기던 감이 있었다. 물론 최근 나온 그의 최고록에서도 천안문 사태는 빼고 있지만(...)
- ↑ 시기 차이로 중공 중군위 주석은 2005년까지.
- ↑ 실제로 장쩌민은 1990년 미국 ABC의 유명 앵커 바바라 월터스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천안문 항쟁 당시 탱크를 막아섰던 전세계 화제 인물인 왕웨이린의 생사를 의심스러워하는 서방측을 향해 어느 정도 실마리가 되는 답을 직접 영어로 미국 기자에게 전하기도 했다.
- ↑ 이름가지고 농담이 많긴 했지만 현대판 포청천으로 "100개의 관을 준비해라. 99개의 관은 그들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 것이다"라며 죽기 살기로 부패와 싸워온 이미지의 인물. 이 이미지는 원자바오가 계승했다.
물론 중공이란 근본적인건 바뀌지 않았지/청백리는 부패한 시기에 유명해지는 것정작 이미지 후계자라는 인간은 임기 말에 일가의 재산축적 의혹이 터진 건 덤이다.리펑은 자오쯔양 때부터 러닝메이트로 자오쯔양보다 덩사오핑의 지지로 실권이 강했으며, 주룽지 역시 실권이 강한 편이라서 얼굴 마담들은 아니었다. - ↑ 시진핑이 권력확대로 일인체제-장기집권을 도모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게 불가능한 이유 중 하나가 중국지도자들이 전임자의 권위를 상당히 중시하고, 과거 권위를 자신의 집권 정당성의 방편으로 삼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하이방이 태자당과 대립한다고 해도 시진핑이 장쩌민을 체포한다는 것은 중국 정치를 조금만 알면 말도 안된다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전임지도자의 권위를 훼손했다가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중국 지도자들은 이점을 철저히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다. 마오쩌둥에 박해당한 덩샤오핑조차도 마오쩌둥를 국부의 자리에서 내리지 못한 것을 상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