決号作戦
1 개요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일본 열도의 절대사수를 위해 수립한 작전계획. 이른바 본토대결전을 위한 방어전략이었다. 결과론적으론 방어전략 수립 및 준비만 하고 미군의 상륙 이전에 항복해서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2 배경
1944년 사이판 전투의 패배로 인한 절대국방권의 붕괴, 그리고 필리핀 해 해전의 참패로 인한 연합함대의 붕괴라는 양대 악재 속에 일본은 1945년 초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자신들이 패전할 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으나, 어쨌든 미군은 본토 턱밑까지 밀고 들어와서 이오지마까지 치고 들어온 상태였고, 전쟁이 지속될 경우 미군이 본토로 직접 상륙할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대본영으로선 현실화된 미군의 상륙 위협에 맞서 상륙군을 격퇴하고 본토를 사수하기 위한 방어전략을 시급히 수립해야 했다.
1945년 1월 20일, 대본영은 제국 육해군 작전계획 대강을 수립하고 우선적으로 천호작전을 수립했다. 이는 제국 본토 바깥에 다시 하나의 방위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쿠릴 열도와 대만, 하이난 섬, 인도차이나 반도, 중국 연안 등지에서 예상되는 연합군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키고 출혈을 강요하여 연합군이 본토 상륙을 하겠다는 의지를 꺾어버리고, 설사 상륙하더라도 그 투입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줄여보겠다는 의도에서 계획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설정한 주요 방위구역을 죄 비켜나가(…) 곧바로 오키나와로 들이닥쳤다. 일방적이면서 압도적인 제해권과 가공할 물량,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보급능력을 가진 미군은 굳이 모든 거점을 공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단번에 일본 본토 코앞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니놈들 생각대로 상대가 움직일 거라는 착각을 포기하지 않을거냐.. 여태껏 그렇게 털려놓고도 고맙게 배운게 하나도 없군.[1] 아래에 나오는 지도에서 보이듯이, 1945년 시점에서 일본 본토가 공격받기 직전인데도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경의 일본군 점령지가 겉보기엔 아직 넓게 확보된 상태인건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 일본의 점령지는 전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3 진행
대본영은 비교적 정확(..)하게 미국의 본토공격 시기를 예측하고 있었다. 대본영은 겨울이 오기 전 빠르면 45년 9월, 늦어도 11월에는 미군이 본토로 직접 상륙해올 것이라고 내다봤는데, 몰락 작전의 1단계인 올림픽 작전이 실제 45년 11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침공시기를 예측한 대본영은 즉시 결호작전을 구상하고, 총 7개의 방어전선을 설정하고 담당부대를 새로이 편제했다.
- 결1호 : 홋카이도 - 제11방면군 편성
- 결2호 : 동북부(도호쿠-고시네츠) - 제12방면군 편성
- 결3호 : 간토 - 제36군 및 제6항공군
- 결4호 : 토카이, 호쿠리쿠 - 제13방면군
- 결5호 : 간사이, 시코쿠, 주코쿠 -제15방면군
- 결6호 : 큐슈 - 제16방면군
이 중 1944년 7월에 편제된 제36군 및 제6항공군을 제외하면 모두 1945년 2월 1일자로 변경된 편제에 따라 새로 편제된 부대들이다.
제주도의 경우는 좀 미묘한데, 명백히 본토결전 계획인 결호작전에 포함되었지만 일본 본토가 아니었으며, 그 소속도 조선주둔군의 후신인 제17방면군에 속한 58군이 맡고 있었다.[2] 이는 제주도가 본토는 아니지만 조선, 중국과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만큼 본토침공 이전에 선제공격이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이 외에 해군은 항공세력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고, 본토 외 지역을 맡은 제10항공함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력을 본토에 결집시켜, 동일본의 제3항공함대와 서일본의 제5항공함대로 재편시켰다.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고 가정할 경우 위의 7개 작전 중 연합군과 교전이 예상되는 지역은 총 4곳이다. 45년 11월에 올림픽 작전에 맞서야 하는 결6호의 제16방면군, 46년 봄에 조공작전인 파스텔 작전을 상대해야 하는 결5호의 제15방면군, 그 직후인 코로넷 작전을 온몸으로 받아내야하는 결3호의 제36군, 그리고 소련군의 남하에 맞서야하는 결1호의 제11방면군이 그 대상이다.
대본영은 이를 위해 육해군 총합 500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결호작전이 의논되기 시작할 무렵 본토 내 제국군은 50만 명도 안되었으며 나머지 300만은 다 중국과 만주와 태평양/동남아 점령지에서 뻘짓하고 있었다. 때문에 결호작전에 있어 최우선적 과제는 작전수행을 위한 충분한 병력 확보였다.
때문에 대본영은 45년 2월 28일 제1차 병비를 발표하고, 4월 2일 제2차 병비, 5월 23일 제3차 병비를 발표하여 총 54개 사단을 신설하고 징병제를 강화하여 병력을 충당했다.
해군도 본토결전 준비에 착수했으나 사실 이 시점에 이르러 제대로 된 전함이나 항공모함 한 척 없이 간신히 살아남은 주력함들도 미 해군이 무서워 + 기름이 없어서(…) 항구에 짱박혀있어서 제대로 된 해상작전이 불가능했다. 이에 해군은 수상전투함 대부분을 해안에 좌초시켜 고정포대로 활용하고, 기동성 좋은 소형함들 위주로 상륙함대에 대한 게릴라식 공격을 기도할 계획이었다. 또한 상륙함대에 대한 카미카제 공격도 해군이 맡기로 되어있었다. 이를 위해서 해군은 신요, 가이텐, 카이류, 후쿠류 등의 자폭병기(?)를 연달아 개발했다. 하지만 실상은 이뭐병.
...그러나 해군은 이 최후의 작전마저 구레 군항 공습으로 거의 모든 잔존 주력함들이 작살나면서 무산되었고, 제국 해군은 말그대로 약소국 수준으로 와해되었다. 안습.
한편, 해안에 가까운 수도 도쿄가 미군의 직접적 침공 위협에 노출됨에 따라 유사시 왕실과 정부, 대본영 등 군 지휘부가 옮겨가기 위해 나가노 현 산악지대에 대규모 지하요새를 건설하니 이것이 마츠시로 대본영이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항복 당일까지 완성되지 못했으나 패색이 짙어지면서 일본은 안 그래도 없는 물자와 인력을 몰빵해서 마츠시로 대본영 공사에 투입하는 중이었으니 미군이 침공해올 시점 즈음이면 기본적인 완성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전략
그런 거 없다.야 작전이라면서 그런 게 없다니... 왜 그런 게 없는지는 내용을 보자. 숫제 전략은커녕, 전술도 그런 거 없다.
처절하기 그지 없게도 결호작전의 핵심은 상륙하는 미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인다는 것이었다. 이긴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냥 최대한의 출혈을 미군에 강요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최소한의 항복 조건을 관철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최소한의 항복 조건이라는게 천황제 유지, 개전 이전 식민지 유지 등등이라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실제 무조건 항복 선언 전까지 다른 조건들은 차례 차례 포기하면서도 물밑 외교 접촉에서 끝까지 요구한게 천황제 유지였다. 이것에 대한 연합국의 반응은 소련군 참전 선언과 원자폭탄.
때문에 결호작전은 철저하게 카미카제와 결사항전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그마저도 준비가 여의치 않았다. 자살특공병기를 대량생산하는 것도 한계에 부딪쳐서 제대로 된 타격을 가할 만큼의 자살병기를 배치하지조차 못했으며, 결호작전에서 요구하는 500만의 병력도 서류상으로나 확보했지 실제로는 100만 명 내외에 불과했다. 아니 뭐, 국민의용대란 이름으로 2,800만 명의 민간인을 전장에 내보내려 한 계획도 있으니….그 총알받이들에게 쥐어줄 총 한 자루 없어 목창깎고 있었다는게 함정
이런 준비과정의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당장 어떤 식으로 미군에 맞서냐는 것부터가 논의되지 않았다. 이오지마, 오키나와와 같은 섬과 달리 후방의 공간이 있는 본토에서 어떤 전략을 쓰냐를 두고 극심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이오지마, 오키나와에서 효용성이 입증된 내륙에서의 지연전을 제창하는 부류가 있던 반면, 제국 본토에 한 발자국도 내딛게 해선 안된다며 사이판에서 사장된 해안선 사수론이 나오는 등등.. 그나마 수도 도쿄와 덴노를 보호해야하는 간토의 제36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의 방위태세는 이뭐병이었다.
본토결전을 하겠답시고 실시한 세 차례의 병비계획도 항복 당일 기준으로는 택도 없었다. 신설한 54개 사단 가운데 편제정원을 갖춘 사단이 단 1개도 없었다. 그나마 1차 병비때 창설된 사단은 편제라도 정상적이었지, 오키나와 전투의 긴박함중에 이뤄진 3차 병비때의 신설 사단은 축소편제로 이루어져 보병연대 3개로 전부에 포병이 없어서 투석기를 포병으로 쓰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다. 그나마 편제 인원의 반도 못채웠고 소총 등 개인화기나 군복 등 피복류마저 턱없이 부족했다.
기갑세력도 암울한 건 마찬가지여서, 그 귀여운카와이 97식 전차조차 없어서 89식 중전차로 기갑여단을 창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미군이 몰락 작전을 개시했을 경우 들고올 전차는 M4 셔먼도 아니고 판터, 티거 전차와 맞짱 뜬 M26 퍼싱. 그뿐 아니라 T29, T34 같은 괴물급 전차들도 몰고 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차라리 전차전이라도 하다 털리면 다행이지, 분명 상륙군에 대한 기동타격을 목적으로 창설한 기갑여단들인데 기름이 없어서 고정토치카로 용도 변경되었다.(…)
연료의 경우 남방 점령지에서의 운송도 차단된 지 오래여서 본토에서는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진유따위를 쓰고 있었다. 얼마나 막장이었으면 잠수함을 이용해 남방점령지에서 소량의 원유라도 들고오는 것을 고민했을까... 그런데 일본의 대표적인 원유 공급지인 보르네오 섬의 브루나이 일대가 45년 6월 오보에 작전으로 공격받아 빼앗겼기 때문에(...) 잠수함을 이용한 원유 공급이라는 망상조차도 제대로 실현할 수 없었다. 남은건 보르네오 섬보다 거리가 더 먼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유전이었다. 더구나 동 시기 일본 본토의 정유공장들은 최우선적으로 폭격받고 있었다.
연료와 탄약의 재고도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무엇보다 병력에게 가장 필요한 식량조차 바닥 상태였다. 이미 일본 국내의 식량 생산력은 바닥을 드러낸지 오래였고, 국내의 물류 이송 능력도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철도 등 육상 수송 능력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지 오래였고, 연안 해운의 경우 미군이 잔뜩 깔아 놓은 기뢰들로 일본 연안이 가득찬 상태여서 선박 운항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였다. 일본이 의지하고 있던 마지막 식량 공급처였던 조선과 만주도 마찬가지로 생산 능력이 바닥을 달리고 있었고, 이마저도 1945년 6월에는 미국 잠수함들이 동해까지 진출하면서 완전히 끝장났다. 당시 군산과 부산 등 조선의 주요 항구에는 쌀을 포함한 각종 식량이 창고가 터질 정도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일본으로 보내고 싶어도 배들이 출항을 못하다보니...(...)
1945년 6월 9일, 만주와 중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은 천황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만주와 지나(중국)에 있는 병력은 다 합쳐도 미국의 8개 사단[3]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탄약 보유량은 근대적 대전투를 벌일 경우 1회분 밖에 없습니다. |
불과 사흘 후, 천황의 특명을 받고 일본 본토의 병기창들과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마이즈루의 해군및 항공기지를 석달동안 시찰하고 돌아온 하세가와 기요시 해군 대장도 이런 보고를 하게 된다.
자동차의 낡은 엔진을 떼다 붙여서 만든 작은 배가 특공병기라며 몇백 몇천씩 준비돼 있습니다. 이런 사태 자체가 벌써 걱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간단한 기계들을 조작하는 나이 어린 대원들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훈련이 부족하다고 밖에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동원계획 그 자체도 정말이지 엉성하기 그지없습니다. 계획은 치밀하지 못하며 중복된 것이 많습니다. 게다가 기동력은 공습이 올 때마다 악화되고 감퇴되어 전쟁 수행능력은 매일같이 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
결호작전을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평할 수 있다.
이건 마치 12세 소녀에게 애를 낳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 당시 대본영 기밀일지 기록 中[4][5] |
정말이지 비유도 대본영답다. 실제로 저런 짓을 하기도 했고.
5 결과
실제 전투를 치룬 것이 아니니 무어라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몰락 작전 항목과 이 항목을 같이 읽어보면 답은 뻔하다. 사실 제대로 된 방어전략도 준비하지 못한채 본토결전을 치뤄야 할 상황이었으니 진짜 차라리 핵폭탄 맞고 항복한게 더 다행인 지경. 진짜로 항복 안하고 버텼으면 커티스 르메이의 말대로 레알 석기시대를 맞이했을 듯.(…) 더 몰고 갔으면 몰락 작전이 진짜 실행되면서 윌리엄 홀시 제독의 말대로 그 날 이후 일본어라는 언어는 지옥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언어가 됐을지도..
일본 우익들은 이오지마 전투나 오키나와 전투의 사례를 들며 만일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면 수십 만명의 전사자를 냈을것이 자명했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을 수도 있다. 당장 압도적인 교환비를 내며 일본군의 강냉이를 제대로 털어버린 필리핀 탈환전부터가 지역이 넓어서 상륙한 미군이 전차 등의 기갑장비를 제대로 굴릴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 즉, 이오지마나 오키나와 같은 경우에는 협소한 지형에 대규모 상륙을 시킬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때문에 나온 결과라는것. 게다가 필리핀에 투입된 일본군은 결호작전에 동원될 예정이었던 신편 부대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정예부대에 상대인 미군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정규군의 모습은 하고 있는 포병과 전투지원부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도 그런 결과가 나왔는데 본격적으로 중전차들을 상륙시켜 대규모로 굴릴 예정이었던 몰락 작전에서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한가지 더, 당시의 미군에겐 정 안되겠다면 일본을 봉쇄 시켜 덴노를 포함한 일본 전국민을 굶겨죽인다는 선택지도 있었다.[6] 당시 미국 국민들이 전쟁이 길어지는것에 염증을 내고는 있었지만 프로파간다 선전 등으로 버틸만은 했고[7], 구레 군항 공습 이후로 일본의 해양 진출력은 소멸했으므로 미군으로서는 적당히 군 규모를 줄이고 해상봉쇄에 필요한 전력들만 남기면 국민의 부담감도 덜고 군비도 덜수 있었다. 일본에겐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8]
- ↑ 웃기는 건, 저 전술이 알고 보면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이 썼던 전술이라는 사실이다.
- ↑ 실제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제주도 방위계획인 결7호 작전을 본토결전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 편이다.
- ↑ 병력의 단순 머릿수를 말하는게 아니라 실질적인 전투력을 말한다. 만주의 관동군+만주군 병력만 해도 70만이 넘는 대병력이었지만 장비와 훈련 수준 등을 감안하면 미군에 비해선 껍데기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 ↑ 출처 : 쇼와사, 한도 가즈토시 저
- ↑ 당시에는 전반적인 영양상태가 나빴기 때문에 저런 말이 나왔겠지만, 현대에는 12세면 충분히 초경이 가능하다. 또한 대전시기 폴란드에서 12세 소녀가 병사들에게 당해 임신한 기록도 있다. 어쨌든, 당시 일본군의 상태와 작전목표 사이의 괴리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비유다.
- ↑ 실제로 몰락 작전의 내용 중에 이런 작전도 있다. 식량 운송을 막기 위해 해군이 담당한 기뢰 부설 작전. 일명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이 그것.
- ↑ 미국 여론이 전쟁을 완강히 거부했다면 루즈벨트의 4선은 실패했을것이다.
- ↑ 실제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 이후 미국내에서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다. 어차피 전쟁의 승패는 결정난 상황인데, 뭐하러 저런 광신도들이 득실대는 곳에 직접 들어가서 헬게이트를 여냐는 주장이다. 기뢰로 일본열도 주변 해역을 도배하고, 1~2달 뒤에는 쌀 수확철이니 수확하기 전에 농약을 대거 살포해서 일본내 모든 농작물을 말려 죽이자는 계획까지 제안되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