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카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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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 시절에 찍은 유명한 사진.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기념사진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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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약국을 운영하던 모습.

1922년 5월 27일 ~ 2015년 1월 24일 (향년 92세)

1 개요

Otto Carius jr.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의 전차장 에이스다.
150~200대의 적 전차와 IL-2 1기를 격추하며 맹활약했다. 최종계급은 중위로 전쟁후에는 약국을 운영하다가 2015년 1월 24일 향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탑승전차는 LT vz. 38, 4호 전차[2]6호 전차 티거, 야크트티거.

2 대기만성의 에이스

독일 팔츠 주 츠바이브르켄 출생. 첼로피아노를 좋아하여 음악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마음이 바뀌어서 기계공학으로 들어갔고, 군인을 동경하여 1940년에 18세의 나이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왜소한 체격과 그로 인한 저체중으로 인해 입대가 2번 거부되지만, 근성(?) 끝에 육군에 들어가게 된다. 의외로 병과 지망을 대전차로 골랐는데 TO가 비질 않아 일단 보병이 되었다.

하지만 동기들에 비하면 나이도 적고 체격이 왜소해 큰 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다. 오죽하면 사내답게 보이기 위해 수염을 기르려 했는데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서 더 큰 좌절에 빠진 적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행군기관총을 짊어지고 가다가 체력이 딸려 동료의 부축을 받아 복귀하는 등 보병으로서는 그리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중대장이 기갑부대로의 전출을 희망하는 지원자를 모집할 때 참가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카리우스의 아버지[3]가 아들이 기갑병과에 들어가는 걸 극렬 반대했다는 것이다.

전차병 훈련을 거친 후 제20기갑사단 제21기갑연대에 배속되어 독소전쟁에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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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약수 시절의 카리우스(우) 좌측의 인물은 전차장 아우구스트 델러 하사>
사단 특성상 체코제 38(t) 전차에 탄약수로 탑승했다.[4] 여러번 위기상황을 맞이하면서 장갑을 뚫고 들어온 철갑탄이 파편을 일으키는 바람에 치아가 몇 개 부러지는 등 기본적으로 떨어지는 전차의 성능에도 불구하고 실력과 팀워크로 전과를 달성, 1941년 8월에는 간부 후보로 추천받는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와 장교훈련을 받은 오토 카리우스는 1942년 봄, 다시 21기갑연대에 원대 복귀하여 한동안은 전차의 부족으로 제설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새로이 보충차량이 들어오며 자기의 소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소대장으로서의 보병을 지원하는 첫 임무에서 각 전차의 조종수와 탄약수들이 식사추진을 위해 전차를 비운 사이에 소련군이 공격을 해오자 아군 보병들을 나둔채 무방비로 당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전차를 직접 몰아 달아났다. 아직 적은 보이지도 않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소대장 전차가 말도 없이 뒤로 움직이자 다른 소대원들도 당시 메뉴얼 그대로 전차에 탑승해 소대장 전차를 따라 연락이 되지않는 상황에서 소대장인 카리우스의 차량을 따라갔다. 그로인해 갑자기 아군 전차들이 후퇴하는 모습을 본 독일군들은 큰 혼란에 빠졌고 그 모습을 본 카리우스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깨달아 다시 전차들을 원위치 시켰다. 그제서야 보병들도 다시 제대로 싸우기 시작하였지만 전투가 끝난 후 카리우스는 겁쟁이로 취급받았다. 자서전에서 말하길 큰 교훈이 된 경험이었다고....

이 일로 인해 체면을 크게 구기고 본부 중대의 공병소대장으로 잠시 활동하였다. 이후 파데보른의 장교클럽 관리관 역할을 맡게 되는데, 때마침 중대원들과 종종 술자리를 열던 502 중전차대대 2중대장과 의기투합하여 합류한다. 자칫 그대로 독일 장교 A로 사라질 뻔한 카리우스에게는 하늘이 주신 기회. 마침내 신형 중전차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티거 중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되니,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자 전설의 시작이었다.호랑이에게 호랑이를 달아주었다

3 호랑이,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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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카리우스가 소속된 부대는 제502중전차대대(그 중 제2중대의 소대장)로써,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최초로 티거를 실전에 운용한 부대이기도 했다. 오토 카리우스에 대한 부대원들의 첫 반응은, 티거가 최초로 보급될 당시 그들의 티거에 대한 인상인 "고놈 참 딥다리 못생겼다."에 버금갈 정도로 안 좋았다. 한마디로 "이렇게 허약하게 생긴 새퀴가 대장 노릇하며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였다.[5] 그러나 이후 먼치킨급 실력을 과시하며 모두를 순식간에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502 중전차대대 2중대의 경우 중대장들이 너무 자주 바뀌거나 혹은 지휘력에 문제가 있어[6] 카리우스가 한동안 중대장 대리로 사실상 지휘를 책임졌다. 카리우스가 당시 소위였는데도 불구하고 중대장 대리같이 행동할 수 있던 이유는 다른 소대장들은 부사관이었기 때문으로 본래 독일군은 개전 이래 만성적인 장교 부족으로 부사관이 소대장을 맡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덕분에 소련군은 오토 카리우스를 직접 지목하면서 그 녀석을 소련군에게 넘겨주면 소련군 보병 30명을 취향대로 골라서 포로로 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 선전방송을 독일군 보병에게 확성기로 외칠 지경이었다. 내용도 말이 안될뿐더러, 소련군이 며칠 동안 계속 떠들어대자 제대로 열받은 독일군은 야포로 확성기를 날려버렸다. 게다가 이 선전방송은 마르나파 전투 한참 전의 상황이므로 해당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는 얼마나 오토 카리우스의 값어치가 높아졌는지 모를 지경이다. 후술하겠지만 오토 카리우스가 부상을 입고 후송되면서 오토 카리우스 소유의 지도판을 분실했는데, 이걸 습득한 소련군 장교가 내가 오토 카리우스를 죽였다고 증거품으로 지도판을 제출했고 이 장교는 소련에서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선전방송이 있었다는 사실을 오토 카리우스가 병원에서 들었다고 한다.

제502중전차대대가 주로 동부전선의 북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발트 3국에서의 지연전에서 활약을 펼쳤는데,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나르바 방어전과 '오토 카리우스판 빌레르-보카쥬 활극'이라 일컬어지는 마르나파 전투[7]가 있다. 이 전투에서 카리우스는 단 8대의 티거로 선발대인 소련 전차 22대를(IS-2 17대, T-34-85 5대) 격파하고, 적 여단장의 시신에서 기동계획이 표시된 지도를 노획하고는 후속하던 본대 28대의 적전차를 매복으로 섬멸, 소련군 1개 전차여단을 격파해버렸다. 이 전투는 당시 소련군의 기습으로 전선이 무너지고 독일군 전체가 공황에 빠져서 도주중이던 상황에서, 전장에서 탈출하던 한 연락장교[8]로부터 단편적인 정보만 전해 듣고 카리우스의 독자 판단으로 본인의 중대만 이끌고 반격에 나서 아무 손실 없이 적 전차 여단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무너진 전선을 틀어막은 것이다.

더 무서운 점은, 소련군 전차부대의 집결지를 발견했을 때 카리우스의 2중대는 티거 8대가 가용했지만, 지형이 좋지 않아 기동할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티거 여러 대가 기동하면 서로 걸리적 거린다는 이유로 자신과 알베르트 케르셔 상사[9]의 단 2대만으로 돌진해(!!!) 근접전을 벌였다! 나머지 중대 전차 6대는 주변의 감제고지로 이동해 소련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어찌나 신속하게 파괴해버렸는지 이 선발대는 후속부대에 무전으로 경고도 보내지 못했다.(소련군의 대부분은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전차에서 떠나있는 상태였다.)결국 뒤따라오던 본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당했다. 이 전과로 오토 카리우스는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마르나파 전투를 미하엘 비트만의 빌레르 보까즈 전투와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빌레르 보까즈는 영국군이 제대로 정찰도 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우연히 적의 행군대열 측면에 위치한 비트만이 기습을 가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직접 격파한 영국 전차는 8대, 그것도 티거를 잡기에는 화력이 형편없는 크롬웰 전차나, 아예 무장도 없는 포병관측반용 M4 셔먼스튜어트 경전차가 상당수였다. 흔히 알려진 27대는 중대원 전부가 올린 전과를 합산한 것이다. 물론 이 일격으로 독일군의 빈틈을 노린 영국군의 대규모 포위기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니 전략적 효과는 충분했지만 이른바 원맨 쇼의 상황은 카리우스쪽이 더 높다. 당장 IS-2은 티거를 쉽게 잡을수 있고, T-34-85도 티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해당 전투지역에는 늪지대가 많아서 가뜩이나 무거운 티거가 제대로 기동전을 펼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르나파 전투의 전술적 난이도가 더 높다.

마르나파 전투도 경험이 부족한 소련군이 경험이 풍부한 독일 전차 승무원들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털린 전투라고 보면 된다. 소련군의 선발대가 약탈을 위해 전차를 죄다 떠나서 제대로된 반격도 시도하지 못한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가?
오토 카리우스도 38(t)전차를 몰던 초창기 시절 승무원들이 물자를 구하기 위해 전차를 떠난 상태에서 습격을 받았고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도 못하고 도주하다가 정신차리고 보병과 함께 반격하여 격퇴한 전적이 있다. 즉 경험이 부족한 소련군이 오토 카리우스와 똑같은 실수를 범했고 결국 전차여단의 괴멸이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몇몇 전투에서 구식 큐폴라를 가진 티거들이 큐폴라에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전차장이 부상을 입곤 했는데, 오토 카리우스도 마침 흡연을 하려고 고개를 숙인 틈에 큐폴라에 직격탄을 맞은 적이 있다. 덕분에 전사할 위기는 간신히 넘겼으나 머리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관자놀이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매우 특이한 기록도 세웠다. 1943년에는 포수인 크라머 하사와 함께 IL-2 슈투르모빅을 티거로 잡은 전적도 있다고 한다. 소련기가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고도, 같은 방향에서 매일 날아오자 '포만 잘 쏘면 맞출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하고포수 크라머 하사는 이 육상공격기가 현기증 날 정도로 짜증이 났던지라 둘이 작정하고 매복하여 실제로 격추했다. 전차포로 대공 사격을 해서 실제 격추기록을 세운 매우매우 드문 사례다.[10] 티거 주포 자체가 대공포긴 하지만 조준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비행기를 맞추기는 불가능에 가깝고, 포탄 또한 대공포탄과 대전차포탄의 공격방식이 다른 탓에 터지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과를 올린이유는 크라머 하사가 IL-2 슈트르모빅이 항상 다니던 곳에 주포를 고정해놓았기 때문이다.

1944년 7월 24일, 자신의 전차에서 하차한 후 전선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매복한 적의 공격에 의해 모터사이클이 피격되어 을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다.[11] 하지만 중상을 입은 것치고는 회복이 빨라서 두달 뒤에는 신형 구축전차 야크트티거를 운용하는 제512중구축전차대대 소속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서부전선의 영미군을 상대로 한 방어전을 전개하게 된다. 비교적 날렵하고 기동성이 좋았던 티거에 익숙했던 오토 카리우스는 느리고 육중한 야크트티거를 매우 싫어했으며, 특히 고정식 전투실(포탑)의 전투력 한계와 엄청난 무게에서 오는 변속기와 서스펜션의 고장빈도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야크트티거의 128mm 주포의 화력에 대해서는 매우 만족을 표했다[12].

1945년 4월 15일에 미군에게 항복하였고, 이로써 그의 전쟁은 끝났다. 전쟁 기간동안 주로 티거를 사용해서 약 150대의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전차 격파수는 당시 독일군 전차 에이스들 전체에서 168대를 기록한 쿠르트 크니스펠 상사에 이은 2위였다. 이 전차 격파수 기록에 대전차포 격파수 같은 다른 기록과, 공인되지 않은 기록을 포함한다면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비인가 기록은 다른 슈퍼 에이스들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전설의 에이스인 만큼 독일군의 유명인사들도 많이 만났고 이를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회고록을 읽어보면 동부 전선을 바쁘게 오가던 발터 모델 원수의 명령을 직접 받은 적이 여러 차례 있고[13] 잘츠부르크 에서 하인리히 힘러에게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4] 힘러에게 실전도 모르는 주제에 허풍만 일삼는 나치 지도자들의 광신성, 그리고 국방군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무장친위대의 특별대우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했는데, 의외로 힘러는 솔직하게 그걸 인정했지만 힛총통처럼 '버티다 보면 신무기가 완성돼서 적을 쓸어버릴 테니 버텨달라'는 현실과는 백만광년 떨어진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비인간적인 줄 알았던 힘러가 의외로 웃기는 양반이어서, 비쩍 마른 카리우스에게 연회장에 있던 뚱뚱한 장군괴링을 가리키며 '이 사람 몸무게의 절반만 따라가라'고 말해 좌중이 폭소를 터뜨렸다는 에피소드도 언급했다. 나르바 공방전에서는 히아친트 그라프 폰 슈트라흐비츠 백작[15]의 전투단과 함께 작전을 짜며 소련군에게 반격했으며.그런데 폰 슐러가 다 말아먹었다 슈츠슈타펠 제 11 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의 사단장 프리츠 폰 숄츠와 만나 협력을 약속하여 노르트란트 사단의 나르바 공방전을 도왔다.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후 잘츠부르크를 관광하고 열차에서 머무를 때 SS 제4기갑군단장 헤르베르트 오토 길레 장군과 자주 전화했다. 복귀하기 위해서 베를린 까지 가는데 친위대 장교들의 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 미 육군 폭격기들이 장교들과 함께 방문했던 로이나 합성석유공장을 향해 융단 폭격을 하는 것을 생생이 목격했다. 감상평은 "설명을 들은 대로 공장에 스파이가 있어야 저걸 재건 기간에 맞춰 박살내지"

전쟁이 후반에 치달으면서 그도 전차 지휘관답게 연합군의 공군더러운 야보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전차가 아무리 뛰어나도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4 종전, 그 후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도 스물 셋의 젊은 나이였던 카리우스는 약사자격증을 취득하여 약국을 차렸다. 전장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전차를 기리는 뜻에서 '호랑이 약국'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9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가 되어서도 계속 운영하였다고 한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2011년부터는 약국 운영자를 따로 뽑아놓고, 자신은 파트타임 근무를 했다.

전쟁 회고록으로 《진흙 속의 호랑이(원제 Tiger im Schlamm)》가 있으며, 일본의 유명 감독이자 밀덕후로도 널리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책을 바탕으로 동명의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회고록은 국내에 '진흙 속의 호랑이'란 제목으로 2012년 11월 출간되었다. 정식으로 광고한 것은 아니지만 진흙 속의 호랑이를 주소와 배송비를 첨부해서 카리우스에게 부치자 친필 사인과 함께 다시 보내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싸인 인듯하다. 팔고 있다.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독일군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과 마찬가지로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참여한 인물들이 영웅시되고 있는 것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16] 일선의 장병답게 생생한 전장 묘사와 전차 운용에 대한 기록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점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17] 독일어를 할 줄 알면 직접 독일로 날아가서 대화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직업군인으로 전차장을 희망한다면 전차장에 대한 것도 물어볼 수 있었지만 이젠 다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사망하기 전까지도 자신이 티거에 탑승했다는 사실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며, 1992년에 있었던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선 "현대 독일군레오파르트1 전차는 승무원에 대한 배려가 티거보다 떨어진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8] 심지어 회고록의 한 챕터 제목은 '티거 찬양'이며, 서방 전차의 공격력과 장갑, 기동성의 밸런스가 티거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드러났다고 썼다.[19] 물론 앞서 언급한 구식 큐폴라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비판한다. 그리고 자신이 초반에 탑승했던 38(t)에 대해서는 상당한 혹평을 하였다. 비록 독일군 지휘부는 해당 전차가 3호 전차보다 조금 아래라고 평하고 애용했었지만 카리우스가 탑승한 시기에는 이미 1선용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데다가[20] 2인용 포탑을 써서 전투효율이 안 좋았으므로 실제로 이런 문제를 겪은 카리우스의 입장에서는 쓴소리가 안 나올 수 없을것이다. 더군다나 해당 차량에서 근무하던 도중 부상까지 입었으니.

카리우스는 소련군을 대해서 상당히 높게 평가했는데 대체적으로 과거 독일 국방군 소속들은 소련군에 극도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데 비해, 카리우스는 전후에도 자서전에서 소련군과 소련의 인민들은 적이지만 훌륭한 애국자들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련 국민들의 헌신이나 소련군의 감투정신은 독일군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적이니까 '끈질기다' 식으로 낮춰 표현했지만, 독일인이 같은 일을 했으면 애국적이고 용감하다고 표현했을 것이라고, 다만 자서전 첫장에도 나와있듯이 독일군 참전자들은 천하의 개쌍놈 취급받고 미군이나 소련군에 빌붙은 자들이 애국자 취급받고 있다며 격한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고 국방군 무죄론자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 등의 비인간적 범죄와 국방군이 저지를 범죄 등에 대해서는 그도 군말없이 인정하고 지적한다. 일본군의 범죄와 비인간적 태도를 은폐하고 인정하지 않은 공군 에이스랑은 대조되는 대목이다. 또한 자서전엔 안나와있으나 소련군의 포로 대우는 물론 독일군의 그것에 대해서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독일 국방군슈츠슈타펠에 대해선 상당히 왜곡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외에 적으로 만난 소련군은 이렇게 극도로 칭찬한 반면, 미군에 대해서는 미군 30명이 소련군 5명보다 못 싸운다고 기록했다. 포격지원이나 공군!을 안 부르면 아무것도 못하는데다가 시답잖은 겁쟁이들에다, 전장에서도 민가를 빌려서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려고 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바보들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21] 참고로 라일구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고 실제로 '저렇게 잘 싸운 미군들도 존재하겠지만 내가 본 미군들은 결코 저렇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게다가 독일군과 맹렬하게 싸우고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겪어 본 소련군과 달리, 미군은 독일군을 실제 자신들의 경험이 아니라 상부의 악의적 선전에 근거해서 맹목적으로 증오하고 학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근데 그런 악행을 저지른건 맞다는게 함정

전체적으로 그가 국방군에 대해서 취하는 입장은 국방군 완전 무죄설자들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으나[22] 국방군 무죄설을 주장하지는 않으며 그렇다고 국방군을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대대에는 나치 당원도 있었고 반나치주의자도 있었다고 하며, 국방군이 저지른 몇몇 범죄에 대해서는 인정하나 국방군=나치 등식은 성립하지 않으며 국방군은 기본적으로 군대일 뿐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프랑스에서 실수로 기관총 사격장에 들어온 마을 농부의 닭을 짓궂은 마음으로 쏘았다가 상관에게 크게 혼쭐이 나고 군에서 배상해주어야 했던 일화 등을 국방군이라고 전부 막장인건 아니었다는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즉, 카리우스는 국방군을 나치와 분리시켜서 생각하기는 하지만 국방군 무죄론 자체는 부정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많은 군대들이 그렇겠지만 그도 후방의 안전한 보직들, 특히 허풍을 일삼는 선전선동 담당 보직이나 나치 간부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경멸을 드러내고 있으며, 많은 대대원들이 같은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런 부분들이 카리우스의 회고록에 신뢰성을 준다.[23] 그외에도 미군에게 항복했을 때 미군+독일군이 연합해 소련군을 막겠구나! 라고 기대한 적이 있다고 나오는데, 이는 카리우스 뿐 아니라 당시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의 고위층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미국과 소련이 수십년간 대립하기는 했어도 나치와 협력하는 일같은건 없었지만.근데 고위층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알고도 진짜 그렇게 믿은건가

회고록에서 묘사되는 카리우스의 전쟁기는 독소전쟁의 최전선인만큼 무시무시한 일 투성이지만, 계속 진흙탕에 빠지는 등 비전투 사고를 일으켜서 정비병들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라고 불렸던 고문관 티거 전차장 헤르만 상사의 일화나,얼마나 고문관이었으면[24] 지휘력이라곤 쥐뿔도 없는데다 민간인 여자나 건드리는 무능한 상관 폰 슐러 대위에 대한 가차없는 디스 등 여러모로 군필자라면 공감하며 쓴웃음을 지을 만한 군생활 에피소드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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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가 현역 때 타던 거여. 타미야제 티거1 프라모델을 들고 있는 오토 카리우스.

오른쪽 사진에서 같이 사진 찍은 사람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와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데, 밀덕인 하야오가 독일에 와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바로 카리우스라고 한다.

월드 오브 탱크이름을 딴 훈장이 있다.
2012년 9월에 월드 오브 탱크의 베타테스터 한 명이 이 사람의 집을 방문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약간의 심장 질환을 빼고는 정정했다고. 3시간 조금 넘게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진열장에 선물 받은 티거 모형이 그득 실제로 전세계 각지의 밀덕들이 위와 같이 선물을 보내와서 창고에도 가득 있댄다… 더불어 자서전에 사인을 해달라고 많이 보내와서 힘들다고…

2013년 4월 4일 날짜로 약국에서 근무 중인 카리우스에게 사인을 받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2015년 1월 24일에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국내 기사는 여기로

5 진흙 속의 호랑이 국내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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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의 번역자는 발번역으로 유명한 이동훈인데, 당연히 오역이 상당히 심하다. 함께 번역된 그나마 이 발번역물의 유일한 가치인 티거 피벨이 별책부록이니 관심있는 사람은 구매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6호 전차 티거 항목 참조.

논란이 지속되자, 이동훈은 "해당 번역본이 오역이 심하다 하지만 이는 독일어 원판이 아닌 영어 번역판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어 번역판 자체 오역문제에 따라 생긴 문제라 볼 수 있다."라고 변명하지만, 그 수많은 영문 번역본 중 엉터리 번역판을 고른 건 발번역가 자신이므로 발번역가 스스로의 자아비판일 뿐이고, 오역을 지적한 사람은 원판과 영어판의 문제는 접어두고 영어판을 번역한 결과물 자체가 엉망임을 지적했을 뿐이므로 상당히 뜬금없는 변명이다. 심지어, 원래 이 책은 독일 현지에 거주중인 한국인 독일어 번역가에게 발주하려 했던 것을, 이동훈이 "오토 카리우스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번역본 감수도 한 바 있으므로 영어판을 중역해도 아무 문제 없고, 그 독문 번역가는 밀덕이 아니라서 군사용어에 무지하므로 내가 해야 한다."고 길찾기에 이간질을 하여 따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더더욱 욕을 먹었다.이딴 걸 내놓고도 자신이 꿈꿔오던 숙원 사업을 해냈다고 자랑만 해댔다.

결국 독자들의 여러 비난을 받고 출판사인 도서출판 길찾기에서는 더 이상 이동훈을 쓰지 않기로 했으며, 이 일로 인해 2판을 인쇄하게 될 시 다른 번역가를 선정하여 독일어 원서를 재번역하여 2019년에 발매하겠다고 하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건 모른다 .또한, 2014년 12월에 정발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회고록도 많은 이들이 출간 전부터 "또 이동훈 시켜서 중역본 발번역한 거 아니냐?"며 묻는 통에, 길찾기 직원들이 "이동훈도 아니고, 독어판 원서를 직역한 것이니 안심하라."고 답변하며 진땀을 빼야 했다.

  1. 착용하고 있는 흰색 옷은 육군 상사 이상에게만 지급된 흰색 면직으로 된 육군 하예복이다.
  2. 죽기 직전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4호 전차의 전차장으로 배속받았다고 말했다. 자서전엔 어떤 전차의 전차장으로 탔는지가 언급이 되지 않아서 그가 4호전차에 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인터뷰에서 4호 전차의 포탄으론 T-34의 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단포신이던 초기형을 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그게 형식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3. 예비역 육군 공병 소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소집되어 재복무했으며, 무사히 생존했다. 참고로 카리우스의 동생 볼프강 카리우스 또한 기갑부대 소대장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고, 카리우스 일가는 종전 1년 뒤에 다시 만나게 된다.
  4. 2차 대전 초기 10개 사단 중 3개 사단(6, 7, 8기갑사단)에 이어서, 1940년 후반에서 41년 사이에 추가 창설한 4개 기갑사단(12, 19, 20, 22기갑사단)은 독일의 전차공급능력 문제로 체코제 전차로 무장했다. 다른 사단들도 기갑사단의 확대개편 과정에서 전차 정수를 절반까지 줄였다.
  5. 델차이트 상사와 제프 리거 상사가 이렇게 노가리를 깠지만 나중에는 둘도 없는 전우가 됐고 종전 이후에도 매번 만났다.
  6. 대표적인 인물로 폰 슐러. 무전수 쇼트로프가 그의 뻘짓에 열받아 욕설을 퍼붇고 폭력을 시도하다 구금된 사례와 슈트라흐비츠 작전을 시원히 갈아마시고 백작에게 신나게 욕을 먹었다. 다만, 그 상황이 백작이 부재중이라 군법회의는 열지 않았다.
  7. 여기서 오토 카리우스는 IS-2 전차를 처음으로 보았다. 처음에는 티거 2를 소련군이 노획한 줄 알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군이라고 생각해서 잠시 발포를 망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8. 이 사람은 당연히 카리우스가 적진으로 가는걸 말렸는데 무시하고 반격하러 가니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전장에 뒤따라 왔다가 경악을 하게 된다.
  9. 1916.3.29 출생– 2011.6.12 사망. 바이에른 바바리아 출신,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인물로 케르셔 역시 100대 이상의 전차를 격파하여 격파 순위 12위의 에이스이다. 전후 카리우스가 보증을 서서 자녀들과 취업하여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났다. 처음 만났을때 카리우스는 케르셔의 집안사정을 보고 충공깽했다고 한다.
  10. 초탄은 빗나가고 두 번째로 쏜 포탄이 날개에 제대로 명중.
  11. 이때 몸무게가 39kg까지(!) 빠진다. 이미 카리우스는 그 전에 4번이나 부상을 당했고 이때는 다리 1발, 등 4발, 왼팔 1발, 목 1발(!!!)의 총 7발의 총상을 입었는데 살아남은게 흠좀무. 오토 카리우스를 죽이려던 소련군 장교가 독일군이 오는 걸 알고 급히 쏘다 한발은 빗나가고 한발은 경동맥을 피해갔다.
  12. 실제로 어느 집 뒤에 숨어있는 셔먼을 집을 뚫어버리고(!!!) 격파했다.
  13. 나르바 전역에서는 '태어나서 그렇게 호된 비난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할 만큼 혼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카리우스는 모델 원수가 전장의 병사들에게 존경받고 있다는 것과 그 또한 병사들에게 너그러웠던 유능하고 책임감 강한 지휘관임을 언급하며, 루르 고립지대에서도 모델 원수의 지휘를 직접 받았던 만큼 그의 최후를 굉장히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14. 원래 히틀러에게 받아야 했었지만 전쟁통이라 바빠서 힘러에게 받았다.
  15. Hyacinth Graf Strachwitz von Groß-Zauche und Camminetz, 1893.7.30 ~ 1968.4.25. 최종 계급 예비역 중장. 다이아몬드 곡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 서훈자. 슐레지엔의 전통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원래는 승마에 능해 1914년 베를린 올림픽 국가대표로 지명됐으나 하필이면 그해 전쟁이 터져 장교로 종군하다 막바지에 포로가 돼 프랑스군이 그를 파르티잔으로 오해하여 사형선고 까지 받은 적도 있다.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예비역 장교로서 종군하였다. 12회의 전상을 입으며 프랑스 침공을 비롯 바르바로사 작전이후 키예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나르바 등 격전지에서 싸웠으며 종전후 시리아 육군 고문으로 지낸후 공군 고문은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에이스 마토 두코박 서독으로 돌아와 생활하다 폐암으로 사망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관급 장교 에른스트 폰 슈트라흐비츠와는 먼 친척관계라고 하며 현재도 슈트라흐비츠 가문은 잘 유지되고 있다.이 가문에서 최근 힙합가수로 데뷔한 양반도 있더라
  16. 정확히 말해 아주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일선에서 싸운 장병들보다 특별히 영웅시될 이유는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나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도 주로 군국주의자들이었던 공모자들의 사상이나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의 부당성을 들어서 히틀러 암살 음모는 자주 비판받는 편이므로, 군인정신을 중시하는 카리우스의 주장은 상식적인 편이다.
  17.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현지인들의 유대인 습격에 대해서는 수정의 밤 사건과 연관지어 조금이나마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긴 하다. 그리고 힘러의 친위대로의 전군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했다.
  18. 레오파르트1은 2세대 전차의 특성상 원본과 개량형이 전부 동시대 전차포를 표준 교전 거리에서 막지 못하는 종이장갑 신세였으므로 일리있는 비판이다.
  19. '소련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넘는 무기 체계를 선보였다'며 제외.
  20. 3호 전차보다 조금 아래라는 평을 받았는데 3호 전차는 개량을 통해서 성능향상이 가능했지만 이건 그것도 안되는 물건이었다.
  21. 하지만 그 당시 셔먼이나 헬캣, 울버린의 경우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야크트티거를 뚫지는 못해서 직접 싸울려면 죽어나가면서 우회를 한다던가, 아니면 안전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직접 싸울 필요 없이 공군이나 포병을 부르는 것이 있다. 현명한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22. 국방군과 나치를 완전히 분리하는것. 그러나 카리우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떠드는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럽 입장을 취한것이며 국방군의 전쟁범죄 자체는 인정한다는 점에서 국방군 무죄설자들과는 다르다!
  23. 대체로 많은 수의 군인들이 낸 자서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국군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선 은근슬쩍 묻어나가거나 상대편에 대한 증오감만 써놓는 경우가 꽤 많다. 서로 증오를 담아 싸워댔던 소련군의 전투력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전투 동기도 폄하하는 경우가 많으며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당시 장성출신들의 회고록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국방군의 범죄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소련군의 전투의지와 애국심을 칭찬하는 카리우스의 회고록은 이채로운 부분이 있다.
  24.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소비에트연방영웅훈장은 소련 최고의 훈장으로(...) 게오르기 주코프, 바실리 추이코프, 이반 코네프같은 명장들이 수여받은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