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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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세계대전(독일 제국)의 전쟁범죄

사실 독일 국방군의 선배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제국군전쟁범죄에 관해서 자유로울 수 없다! . 1914년 8월 4일 당시, 독일 제국 육군은 슐리펜 계획에 의거하여 프랑스를 치기 위해, 중립국인 벨기에를 불법적으로 침략하는데, 독일 육군이 약체 초콜릿 군대라고 얕본 벨기에 육군에게 뜻밖의 봉변을 당하게 되고,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벨기에 침공 리에주 요새에 대한 자료 참고. 여하튼 리에주 요새를 함락한 이후, 독일 육군은 벨기에인에 대한 증오와 짜증을 품게 되고, 벨기에 빨치산에 의해 독일의 한 육군 병사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무고한 벨기에 민간인들을 죄다 게릴라 세력으로 몰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물론 여기에는 누가 봐도 파르티잔이라고 볼 수 없는 여자, 아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교회 종탑에서 총탄이 날아왔다고 주장하며 사제를 총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을 두고 일명 벨기에의 강간(Rape of Belguim) 이라고 하며, 독일 육군은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을 불태우고 파괴하고 학살을 저지르고 강간을 서슴치 않았다. 벨기에의 강간으로 인해 루뱅(Louvain) 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 370여명이 사망, 그리고 루뱅대학교와 도서관이 불타는 일이 벌어졌으며, 디낭(Dinant)에서는 674명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고의적으로 학살당했다. 이로 인해 독일 제국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는 매우 좋지 않았으며, 영국은 이것을 선전 프로파간다로 아주 잘 써 먹었고, 훗날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이후 독일연방공화국의 국방부 차관이었던 발터 콜보(Walter Kolbow)는 2001년, 디낭 학살 피해자 유족들을 찾아가 직접 사죄를 표하였다. 물론 과거 식민지들 따위는 가볍게 무시

그리고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세계 최초로 민간인을 상대로 무차별 폭격을 가한 나라가 독일인데, 독일 제국 해군은 1915년부터 1918년 4월까지 꾸준히 그라프 체펠린 비행선고타 폭격기파리런던을 폭격한다. 그리고 이는 뻔히 민간인이 다치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 행위이다. 그리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 때에도 민간 상선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격침시켰으며, 이는 수많은 나라를 분노케 하였다. 그리고 독일 제국의 이 어리석은 행위는 결국 자신들의 제국을 파멸로 이끌고 만 원인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최초로 1915년, 제 2차 이프르 전투 때에 헤이그 협약을 어기고 살상용 가스를 먼저 살포한 것도 독일 육군이었다.

그 외에도 독일 제국군만 하더라도 1917년 3월 22일, 러시아 제국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하기도 했다. 바로 쾨니스베르크에 위치한 뮌스터 포로수용소 에서. 뮌스터 수용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제국군들의 구타가혹행위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제국군들은 인종 별로 분명히 목소리 발성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며, 당연히 독일인들이 가장 우월한 발성 능력을 가졌을 것이다! 무슨 마약을 하셨길레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러시아 포로들에게 인종 별로 나누어 노래를 부르게 하였고 그것을 녹음하였는데,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 가운데에는 일본 제국의 압박을 피해 제정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군에 입대한 고려인들도 있었다. 때문에 당시 고려인들이 한국말로 부른 아리랑이나 민요가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김 그레오리가 부른 아리랑. 제국군들은 포로들에게 강제로 노래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사랑 상관없이 그들의 얼굴을 강제로 석고로 본을 뜨기까지 했다. 매일 같이 강제 노동에 시달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러시아군 포로들과 고려인들의 행방은 묘연하였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단, 추측되는 바로는 열악한 수용소 생활로 인해 병사하였거나, 제국군의 생체실험에 이용당해 죽었을 거라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현재 독일 동부지역에는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상당수가 이름 없는. 정확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포로들이다.

게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동부전선의 독일 제국군이 죄다 서부전선으로 재배치받기 전, 우크라이나 민간인들로부터 온갖 생필품을 강제로 빼앗았으며, 사람들까지 잡아가서 강제 노역을 시켰던 전적도 존재한다.

아무튼 나치즘도 아닌 평범한 제국주의 물론 유독 군국주의적이긴 했지만 국가였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제국군도 저 정도였는데, 보다 악랄했던 2차 대전의 독일 국방군이 착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2 2차 세계대전(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2.1 홀로코스트

2.2 슈츠슈타펠의 전쟁범죄

2.3 국방군 육군의 전쟁범죄

2.3.1 민간인 및 포로 학살

당장 대전 초기인 폴란드 침공 당시만 놓고 보더라도 국방군은 폴란드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인간방패로 삼는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폴란드 침공 당시 벌어진 전체 민간인 학살 행위의 60%가 국방군에 의해 벌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민간인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그 중 10만여 명은 공습으로, 2만여 명은 국방군과 친위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또한 적어도 3천여 명 이상의 폴란드 포로들이 학살당했으며, 적게는 수십여 명 규모에서, 많게는 독일 육군이 행한 쳉스토호바(Częstochowa) 학살 사건에서처럼 1천여 명이 넘게 학살당하는 일이 매우 자주 벌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폴란드 침공 항목 참고할 것. 반대로 육군상급대장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장군처럼 친위대의 학살, 약탈 만행을 히틀러에게 보고하며 이를 금지할 것을 호소했다가 이후 진급에 실패하고 힘러에게 낙인이 찍혀서 한직에만 떠돌게 된 경우도 있다.

특히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대부분이 발생한 독소전쟁의 남부집단군 전역의 경우, 당시 육군 제6야전군사령관이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장군은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은 유대인-볼셰비즘을 말살하는 전사로 싸워야 하며, 이는 통상적인 전쟁방식을 벗어나도 무방하다," 즉 학살을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소위 "강조명령"을 예하부대에 내렸으며, 그의 상관인 남부집단군사령관 룬트슈테트 장군이나 11군사령관 만슈타인 장군은 이 강조명령에 별도의 지지성명까지 발표했다. 중부집단군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 장군이나 북부집단군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장군 같은 일부 지휘관들은 여기에 반대를 표명했으나, 남부집단군엔 이런 지휘관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대규모 학살이 발생하게 된다. 라이헤나우 장군 사후, 그의 후임이었던 육군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은 라이헤나우 장군의 강조 명령을 폐기했다.

또한 대표적으로 키예프 포로 학살이 있는데, 포로중 유대인이나 공산당원으로 판명된 자들은 재판없이 즉결 처형하였는데, 이는 국제법상 명백한 전쟁범죄이다. 홀로코스트 명단이 정확하지 않은 게 이때 사살된 유대인을 홀로코스트 피해자로 보느냐, 그냥 학살 피해자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방군이 직접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국방군 점령지 하에서 벌어진 SS 소속의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을 모른체 하거나 구경만 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살인방관행위에 해당하는 전쟁범죄이다.[1] 독일판 신멸작전 혹은 난징 대학살이라 불리는 대규모 제노사이드인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을 저지른 것도 육군이였다.

2.3.2 무차별 강간

잘못 알려진 상식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들은 슬라브인에 대한 나치의 인종적 편견때문에 독일 국방군은 민간인 학살은 했지만 강간은 빈도가 드물었다고 주장한다.[2] 학살이 강간보다 가볍다? 그러니까, 슬라브인은 짐승이나 다름 없는 존재라는 나치의 세뇌에 장병들이 수간을 하고 싶지 않은 나머지(...) 강간을 피했다는 말이 있는데, 물론 둘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종전 이후 반공적인 영미 언론에 의해 널리 선전된 베를린 강간의 임펙트에 묻힌 감이 없잖아 있지만 동부전선의 국방군 역시 그보다 훨씬 더한 전방위적 강간을 자행했다. 독일군의 강간은 대전 초기부터 심각할 정도로 벌어졌으며, 폴란드에서는 소녀들을 납치하여 위안부로 만드는 일본군 못지 않은 만행을 저질렀다.[3] 동부전선에서는 수천에 달하는 소련군 간호사와 간호병이 포로로 사로잡힌 채 강간의 희생양이 되었고, 그 뒤에는 대부분 살해당한 채 길거리에 버려졌다. 여성 파르티잔은 아예 강간후에 유방을 도려내거나 국부를 대검으로 찌르는 등의 고문을 가한후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으며, 히틀러의 군대를 위한 창녀들이란 푯말을 시신에 걸기도 했다.

국방군 지도부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소련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장병들을 처벌할 필요가 없다는 방침을 세웠고 그런 마당에 민간인이라고 성폭행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독일 장병들은 마치 가로수의 열매를 따먹듯 점령지의 여성들을 겁탈했으며 그것을 마치 자랑거리인 양 떠들고 다녔다.

윌루스: "바르샤바에서 우리 장병들은 여자들이 있는 한 건물 앞에서 길게 늘어서 기다려야 했다. 무작위로 첫 번째 방이 가득 찼고 그 사이 밖에서는 트럭 하나를 다 채울 정도의 사람들이 줄서 기다렸다. 여자 한 사람마다 시간당 14명에서 15명의 남자를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이틀마다 여자들을 교체했다.
뮐러: 내가 하르코프[4]에 있었을 적 도시는 중앙 광장을 제외하면 전부 잿더미가 되었다. 그곳은 정말 멋진 도시였고 멋진 기억들이 가득했다. 그곳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운 독일어를 약간 구사할 줄 알았다. 그리고 타간로크[5]에는 멋진 극장들과 멋진 해안 카페틀이 있었다. 나는 트럭을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우리가 본 것은 여성들이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파우스트: "오, 세상에!"

뮐러: "그녀들은 강제로 길을 닦고 있었다. 정말 쭉 빠진 환상적인 소녀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들을 강제로 트럭에 태우고 마구 겁탈한 뒤 다시 트럭 바깥으로 내던졌다. 제군들, 내가 장담컨데 그녀들은 분명 우리를 저주했을 것이다."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1942년 독일 국방군 기록에 따르면 소련 한 국가에서만 1천만 건이 넘는 집단강간과 간살(강간 후 살해)이 발생했고 그 해에만 강간을 통해 75만~100만에 달하는 신생아가 탄생했다고 한다. 물론 밝혀진 것만 이 정도고 드러나지 않은 행위가 얼마나 더 많았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러시아인들이 독일인에게 당한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면 독일인은 멸종했을 것이다. 그나마 요식행위로 한 얘기지만 "독일인에 대한 보복 금지"를 공포한 스탈린과 기강 해이가 조직력 붕괴로 이어지기 전에 보복 행위자들을 즉결처형하고 효수한 NKVD와 정치장교들 덕택에 동독인 전원이 소련 부친을 가지지 않았다.

2.4 국방군 해군공군의 전쟁범죄

이런 대다수의 범죄는 그 특성상 국방군 가운데서도 육군에 의해 주도적으로 저질러졌지만 해군과 공군 역시 전쟁범죄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일반적인 경우 공군은 그 군종의 특성상 전쟁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적은편이기는 하다.[6] 그러나 헤르만 괴링의 욕심으로 공수부대 뿐 아니라 공군 야전사단 같은 비정상적인 편제가 등장할 만큼 대규모의 지상전 병력을 보유한 데다, 이들이 육군의 집단군 등에 배속되어 지휘를 받았고, 항공기 승무원 및 조종사들 역시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 임무(ex:민간인 거주 구역의 폭격, 병원선 등 의료 시설 및 인원에 대한 공격 등)를 맡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작정 깨끗한 군대라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일단 괴링이 이런 잔혹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키기도 했던지라 동부전선에서 육군이 아닌 공군에게 사로잡힌 지상군 포로들[7]이 상대적으로 관대한 대우를 받은 편이었고,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혐의는 육군에 비하면 확실히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해군은 규모 자체가 미약했고 당시 해군들이 서로에게 상대적으로 신사적이었던지라 공군과는 다른 이유로 전쟁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적다. 3군 가운데서 공격이 끝난 후 포로나 민간인 피해자 등을 구조하는데 그나마 적극적이었던 군종이 해군이었으며, 이는 독일 해군과 교전 혹은 일방적으로 공격당했음에도 많은 연합군 해군 장병이나 상선사관 등 참전자들이 크릭스마리네 출신자들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심지어 변호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는 크릭스마리네가 특별히 깨끗한게 아니라 2차대전 기간 동안, 전반적으로 해상전 분야가 육상과 항공전 분야에 비해 좀 더 분위기가 인도적인 편이었던 이유가 크다. 태평양 전쟁의 경우 일부 일본 해군의 또라이짓과 이 때문에 열받은 미 해군이 교전이 끝난 일본 해군의 구조를 거부하는 등의 사례도 있었으나, 그래도 대부분 일단 익수자라면 피아 구분없이 적극적으로 구조하는 등 일단 교전이 종료되면 해상에서는 적 항공기나 잠수함의 위협 등(이는 적뿐 아니라 표류중인 아군에 대한 구조까지 포기된 경우도 있다.)으로 인해 급히 철수하지 않는 이상 어느 국가든 최대한 적극적으로 구조에 임했으며, 이 때문에 육공군에 비해 보다 적성국 장병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편이다. 또한 라코니아 사건과 같이 자함이 격침될 수도 있는 위기에서도 침몰시킨 선박의 승객과 승무원들을 적극적으로 구조한 사례도 있다. [8]

그러나 국제법을 위반하고 중립국의 민간 상선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점이나[9] 위의 리코니아 사건 이후 되니츠는 인도적 구조활동을 금지시키는 지시를[10] 내리기도 했으며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 역시 존재했다는 점에서 크릭스마리네도 마냥 깨끗했다고 볼 수 있는것은 아니다. 따라서 크릭스마리네 또한 육공군과 마찬가지로 무작정 정의의 군대 같은 시선을 보내는 건 위험하다. 애초에 나치 독일군인 시점에서 정의의 군대가 되는게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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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게다가 국방군이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2. 독일 국내의 유대인으로 한정하면 이건 말이 된다. 나치는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독일 국내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여러 번 집단 박해(pogrom이라고 하며, 원래는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집단박해를 말하는 단어다)하였는데, 유대인을 죽인 나치 당원은 무죄로 방면되었지만 강간한 나치 당원은 출당되었다.
  3. 이것은 독일에서도 꽤 알려졌는지 히틀러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였던 백장미의 팜플렛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4. 현재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즉 당시의 소련 영토
  5. 러시야 영토
  6. 직접 적과 전투하는 인원은 비교적 소수인 전투조종사들이고 대부분의 지상요원은 기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직접 교전할 일 자체가 적다.
  7. 소련 해공군 조종사나 항공기 승무원들의 경우 주적이 주적이었던지라 마찬가지로 학대받은 경향이 크다.
  8.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 장보고급 잠수함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접한 유보트 전사 등을 통해 인수단원을 통해 꽤 긍정적인 이미지로 크릭스마리네가 국내에 소개된 점, 우방국 군대인 미합중국 해군 등도 크릭스마리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하는 분위기가 대세인 점 등으로 인해, 3군 중 가장 우호적인 시선을 받는 경향도 있다.
  9. 이건 국제법을 장식으로 아는 히틀러조차도 하지 말라고 했던 짓이다. 물론 히틀러가 그렇게 말한건 이게 미국을 자극할 수 있어서기는 하지만.
  10. 물론 이 경우 구조활동중 공격을 받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공식적인 명령으로 구조활동을 금지시킨게 잘한건 아니다. 다만 되니츠도 명령은 했으나 구조활동을 하는걸 묵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