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종

프로야구 선수 박종윤의 개명전 이름이 박승종이다.

朴承宗 (1562~1623)

1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 관료. 자는 효백(孝佰)이며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다. 본관은 밀양이며 시호는 숙민(肅愍)이다. 명종 당시 홍문관, 도승지, 대사헌, 관찰사, 판서 등을 역임한 박충원[1]의 증손자이고, 이와 똑같은 관직을 지낸 박계현[2]을 의 손자이며, 벼슬없이 한량으로 지낸(나중에 받은 지돈영부사는 증손녀가 세자빈이 되면서 명예직으로 받았다박안세의 아들이다. 북인의 핵심인물이나, 이이첨을 제외한 여타의 인물들이 모두 그렇듯 대중적 인지도는 전혀 없다. 사실 광해군의 며느리의 할아버지이고 광해군 말기 5년간 마지막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라 광해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인물이다.

2 벼슬의 시작

23살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별시문과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문명이 높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벼슬길이들의 조선왕조실록 졸기에는 글을 잘 썼다는 평가가 기재되어 있다. 전통적인 글셔틀 집안.이 그러하였듯이 봉교(奉校. 왕의 칙서를 기록), 지제교(知製敎. 왕이 내리는 교서 초안) 등으로 벼슬을 시작하는데, 정여립의 절친인 이진길(李震吉)을 사관으로 추천걔 글솜씨 괜찮으니 한 번 써보시죠한 죄로 한 번 짤리나 곧 복직되고 대사간,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으로 별탈 없이 승진한다. 애초 명론과 교격(矯激; 글과 말을 과하게 화려하게 쓰는 것)을 싫어하는 가풍 탓도 있어 북인에 속하게강제가입, 중요하다. 박승종의 인생은 이후 강제가입으로 점철되게 된다 되는데, 애초 정치색이 크게 없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심지어 생전에는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류, 이귀하고도 은근히 친했다.

3 불운의 시작

북인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으로 갈리고, 소북은 또 강경저지파인 유영경의 탁소북, 온건저지파인 남이공의 청소북으로 갈리게 되는데, 이 때는 또 탁소북으로 강제가입분류된다. 하지만 선조 사망 직후 탁소북 내에서도 광해군을 몰아내는 건 좀 아니지 않냐는 이들이 많아 탁소북은 그냥 자멸하게 되었고, 박승종은 광해군의 처남이자 청소북 소속인 유희분과 손을 잡았다 의외로 광해군 정권은 이이첨이 중심이 된 대북보다는 소북과 남인의 연합정권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광해군의 세자빈 책봉이 이루어지는데, 대북과 소북의 타협 속에서 그나마 온건파인 박승종의 손녀를 세자빈으로 책봉하게 된다.

4 광해군 당시 정치 상황

임진왜란에 따른 전후 복구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치적인 상황은 개판 5분 전 혼란을 거듭하였다. 영의정은 이원익(남인)[3], 이덕형(남인)[4]으로 이어지고, 좌의정은 이항복(서인)인 상황에서 대북은 이들의 집권 내내 극심한 공격을 가한다. 결국 광해군 5년에는 인목왕후의 폐위 문제로 이들은 순차로 사직, 탄핵된다.

그 다음 영의정은 기자헌(대북), 좌의정은 정인홍[5](대북)인데, 문제는 기자헌이 대사헌 때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된 서인을 모조리 탄핵하고, 좌의정 때 선조의 광해군 세자폐위를 극렬하게 반대한 대북(?)은 맞는데, 인목왕후의 폐모론은 물론 영창대군의 피살까지도 반대한 좀 이상한 대북(?)이었다는 것. 결국 대북의 극렬한 공격을 못 버티고 3년만에 정권이 갈린다.

5 드디어 영의정

결국 영의정은 박승종이 되는데, 사람들은 광창부원군 이이첨(李爾瞻 1560~1623, 예조판서 겸 대제학), 밀창부원군 박승종(朴承宗, 1562~1623, 대제학을 거쳐 정승), 문창부원군 유희분(柳希奮 1564~1623, 대사간, 도승지)을 묶어 "삼창"이라고 부르니 일단 이이첨의 일파로 강제가입된다. 실제 맏아들인 박자흥이 이이첨의 딸과 혼인하여 이이첨과 사돈이기도 했다.

광해군이이첨의 사돈인 박승종이 영의정이 되니, 대북은 이제 잘 될 줄 알았다. 출신이 탁소북이라 좀 찝찝하긴 한데, 그 동안 행보가 yes맨 타인과 다툼을 싫어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니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때도 그냥 조용히 있을 줄 알았다. 박승종은 심지어 인목왕후가 서궁에 유폐될 때도 반드시 은퇴한 명신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다였다.그게 반대의 의사표시이기는 했다. 은퇴한 명신이 대개 북인 꼴보기 싫어 은퇴한 건대 yes할리가 없기는 했다.

6 이이첨과 극한 대립

다 물러나고 혼자만 남으니 박승종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데, 항상 오리알만한 비상여차하면 자결할꺼야을 품고, 대북이 싫다며 대문을 외문이라고 부르며 인목왕후 폐위 및 더 이상의 옥사는 없다며 이이첨과 극한 대립을 선포한다. 애초 정치적 입지가 불안하였던 광해군 14년에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윤인 등이 인목왕후를 죽이려고 한 것을 집안 가솔들을 이끌고 막은 적이 있던 터이라 자신들의 가솔을 데리고 교대로 인목왕후가 기거하던 서궁에 변란이 없는지 보살피도록 한다. 더불어 기존에 계축옥사, 해주옥사[6]등이 반복되는 것과는 달리 더 이상 옥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고변은 철저히 조사하여 무죄방면한다.

7 영의정 당시 대내, 대외 정책

대북의 업적으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뽑는데, 공식기록에는 의외로 대북 관련 관료들은 청나라(후금)와 한판 뜨자는 의견-대북은 원래 성격이 강경파 소장관료라는 사실을 명심하자.-이 많았다. 당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지지하던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는데, 강홍립이 광해군 11년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도 이러한 입장은 계속되었고, 심지어 비변사의 입장 역시 초반에는 강경일변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단 영의정이었던 박승종이 압록강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대인 모문룡을 절대 내륙으로 들이지 말 것, 이미 도착한 후금의 국서는 정식 국서를 보내어 답할 것, 이후 후금에서 사신이나 국서를 보내오면 국경지대 고위층 관료들이 즉시 후금으로 넘어가 답례하도록 할 것(그래야 정식 국서증거를 안 남길 수 있으니), 압록강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는 후금의 정탐목적 때문에 이들이 후금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말해 놓을 것 등을 주장하였고, 비변사가 광해군께 이를 보고하니 광해군은 이를 따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게 과연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생각하고 박승종을 시켜 이를 공론으로 내놓게 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박승종이 중립외교를 생각하고 광해군이 이에 따른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우리들 생각보다는 중립외교라는 것이 대북 내에서도 인기가 정말로 없었다.

대체로 집에서 술만 먹고 놀다가, 이이첨이 서궁을 급습하려거나 옥사를 기획하여 선비들을 떼죽음 시키려 하는 조짐이 보이면 부리나케 관청에 나와 풀어주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이이첨은 이후 자기의 사돈 겸 광해군의 사돈인 박승종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손발이 묶긴 상태가 된다이 때를 전후로 성질이 더 나빠졌다는 기록도 많다. 이 때 또 의외로 남인, 서인 계열이 외직 겸 하급 관직을 많이 제수받는데 문제는 이들이 인조반정의 주축이 된다.

8 대청정책

사르후 전투 이전부터 후금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던 사람이다. 주요 대책은 국경지대에 쫙 깔린 성과 진에 병사를 흩어 놓지 말고 그 중 요충지를 골라 병사와 병졸을 모으고 대비하자 였다. 광해군 집권 초기 병조판서이기도 했고, 광해군일기에는 사관이 병조판서로 일한 적이 있어 병졸들의 신망이 높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사르후 전투로 병사들이 모조리 녹아 내리자 새로 군사를 뽑아 훈련시키기 보다는 각도의 정예병을 한 곳에 모아 즉시 주둔지를 만들고 훈련을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병자호란에서 쌍령전투를 생각하면 흠좀무 광해군과 함께 정충신, 남이흥, 장만, 정준 등 당시 유명한 무장들을 국경지대에 열심히 깔았다. 이괄인조반정 직전에 함경도병마절제사로 임명이 끝난 자[7]인데 국경지대에 안 가고 생까다가 인조반정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국경지대 무장들로 하여금 후금에 사신 혹은 밀사로 자주 다녀오게 했고, 명나라에 들키면 염탐 및 적진을 살필 목적 등도 있다고 잘 설명하라고 지시한다.

광해군과 박승종이 국경지대에 열심히 심어놓은 국경지대 고위층 관료들은 인조반정 직후 모조리 갈린다. 후금과 내통하는 프락치라고 죽은 사람도 많다. 실제 프락치는 맞긴 하다. 명나라 몰래 우린 너희랑 싸울 생각이 없다는 국서를 열심히 보냈으니. 이괄도 부원수로 부임하고 나서는 막상 이들이 없어 곤란했다는 기록도 있다나 혼자 어쩌라고. 그나마 남은 무인들도 이괄의 난 때 한 차례 더 갈리는데, 인조반정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그리고 배신을 때렸던이흥립도 이괄의 난에 함께 참여하였다가 죽는다. 광해군 때 출세했던 사람들인 만큼 애초 북인출신이 많기는 했다.

덕분에 살아 남은 무장은 서인 계열이었던 정충신이항복의 제자이다. 고로 서인이 되었다. 근데 막상 친구들(?)은 다 북인, 사위가 인조반정 참가한 최명길이었던 장만,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운 남이흥 정도인데 이들은 이후 죽을 고생을 하여 정묘호란을 그럭저럭 넘긴다. 나중에 벌어지는 병자호란은 이들의 은퇴 및 사망 트리로 다들 알다시피 대참사.[8]

9 인조 반정 전후

박승종도 인조반정을 손놓고 있지 않았던 것이 당시 한양에 가장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있던 훈련대장은 심복이었던 이흥립을 뽑아 놓았고, 경기감사도 본인의 맏아들이었던 박자흥[9]이었다.

이이반과 김신국이[10] 인조반정 전날 저녁 이후배, 이후원이라는 자로부터 인조반정 사실을 듣게 되고 바로 고변하자, 박승종은 즉시 추국청을 설치하여 이후배를 궁궐마당에 포박하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광해군이 이때 김자점에 매수된 후궁과 잔치를 벌이던 참이라 이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박승종은 이흥립을 불러 '너 혹시 김류, 이귀하고 함께 모반하려고 하냐?'라고 물어보았는데, 이홍립이 '제가 딴 사람도 아니고 공을 배반하겠나이까.'라고 하자 그 말을 믿고 만다. 이흥립은 나중에 인조반정공신목록에서 남우주연상 1등 공신을 받는다. 심지어 이흥립의 사위 장신이라는 자는 이흥립을 추천하였다는 공으로 3등 공신을 받게 된다이괄 지못미.[11]

결국 다음 날 새벽 2시 드디어 인조반정이 벌어지는데, 경황 중에 겨우 몸을 내뺀 광해군의 첫 마디는 '이이첨이 그랬느냐?'였다는데...박승종이 전날 이야기 안했나? 김류, 이귀 싹 잡아들이자고

박승종 역시 손만 놓고 있던 건 아니어서 맏아들인 경기감사인 박자흥에게 낌새가 이상하니 준비하라고 했다. 인조반정이 벌어지자 박자흥은 재빨리 경기감사의 직위로 수원방어사 조유도에게 군대를 이끌고 즉시 한양으로 달려오라고 명령하였고, 당시 5촌 당숙이었던 양주목사 박안례에게도 병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거병하여 달라고 부탁하여 인조반정 당일 이미 병사들이 한양으로 부리나케 뛰고 있었다고 한다. 파주방어사 윤정에게도 병사들을 모집해 한양으로 달려오라고 했는데 여기는 소식이 늦게 도착해서 병사들을 출병하지 못했다. 당시 인조반정 측에서는 수원방어사인 조유도는 인조반정에 참가한 조정의 아들이라 조정이 직접 설득하기로 하고,[12] 양주목사 박안례가 이끄는 군대는 이서가 군대를 이끌고 막기로 한다.

그런데, 궁궐이 완전 점령되고 이미 임금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자 박승종은 양주목사인 박안례에게 이미 임금이 바뀌었으니 더 이상 피를 보지 말라는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내고, 둘째 아들인 영광군수 박자응에게는 너는 자결하지 말고 살아 남아 제사를 지내라는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내고, 맏아들인 경기감사 박자흥에게는 다 끝났으니 즉시 병사를 해산하고 돌아오라는 인편을 보낸 후 박자흥과 함께 자결한다.[13]

10 사극에서

11 그 외

김류이귀는 막상 인조반정 당일 광창부원군 이이첨, 밀창부원군 박승종, 문창부원군 유희분 소위 삼창이라고 불리는 자들 중에서 청소북인 유희분과 박승종이 인목왕후 폐출을 반대했으므로 살려주자고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왜 자살한거지.[14] 실제 박승종에 호응하여 군대를 일으킨 박안례도 그 날 그냥 풀어주었고, 박승종의 동생들은 형하고 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박승종의 둘째 아들인 박자응은 유배다녀온 후 박승종의 동생인 박승조와 함께 살았다훼이크였다. 실제로 유희분은 서인세력들이 반정이후 인조에게 살려주자고 청했지만 인조는 무시하고 유희분과 아우인 유희발 및 소북의 수괴들을 처형하였다

박승종의 직전 영의정이었던 기자헌[15]은 박승종과 비슷하게 인목왕후 폐출, 다른 당색을 가진 정치인들의 옥사에 반대하였던 인물이고 정치에서는 은퇴한지 10년이 다 되가는 터라 인조반정 당시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인조는 이괄의 난 발생 직후 기자헌의 일가족을 젖먹이까지 남김없이 모조리 도륙하였다. 신하들의 반대가 많았고, 기자헌 본인이 자결하겠다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냐는 의견도 많았는데, 인조가 모두 다 죽였다. 이원익과 이귀가 3년 후에 모조리 복권시켜 주키는 한다다 죽고 나서...지못미. 이는 나중에 소현세자 사후 세자빈을 죽인 일과 함께 계속 까였는바, 그 여파로 인조는 시호를 인조(仁祖)로 받게 된다우리 임금님은 참 어지셨어.... 이걸 보면 박승종이 인조가 어떤 놈인지 미리 알고 자결한 것 같기도 하다그래도 이 집안은 둘만 죽고 끝났으니.

박승종의 복권 건의는 이후 꾸준히 이어왔는데, 이게 인조반정 이후 이이첨 같은 놈은 너무 심한 욕[16]이라 적당히(?) 삼창 같은 놈, 유희분, 박승종[17]같은 놈이라는 말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상소가 곧잘 있어 왔기 때문이었다삼창 같은 놈이라고 욕 먹었는데 생각보단 나쁜 놈이 아니네.. 잘 찾아보면 신하들이 서로 비난할 때는 삼창 같은 놈 혹은 유희분, 박승종 같은 놈이라고 디스할 때가 많았고, 반면 임금이나 정권을 비난할 때는 이이첨, 정인홍이 날뛰는 시대와 같다고 디스할 때가 많았다임금에게는 쎈 욕, 지들한테는 약한 욕.

결국 철종에서야 다시 영의정으로 복권되고, 흥선대원군 때 정책적으로 북인, 남인 출신을 등용하기 위해서 대거 사면이 이루어지면서 이미 복권이 이루어진 박승종에게는 숙민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린다하지만 조선왕조 이미 the end.
  1. 영월에서 관리들이 족족 죽어나가는 일이 있자 박충원을 미워한 윤원형의 심복 임백령이라는 사람이 박충원을 영월군수로 좌천 보내었는데, 단종의 묘소를 가꾸고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고 제문을 지어 위로하여 곱게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졸기에 있는 공식 귀신 이야기이다. 흠좀무.
  2.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三上(중상보다 딱 한 단계 더 높은 점수)을 받자 임금과 대신들이 박충원의 아들이라 평소 글솜씨가 뛰어난 자이고 위 답안도 아주 우수한데 그날 시험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채점이 개판이었다고 깐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아버지와 함께 공문서 작성에는 유능하기로 명성이 있던 자였다.
  3. 남인으로 분류되기는 한데 영 이상하게 남인이 되었다. 본래 본인은 당색이 그다지 없었으나 스승인 이준경이 이이를 엄청 깐 탓에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남인 주류인 이황의 제자와도 학맥이 완전히 다르고, 스승의 가르침이와 더불어 본인의 오타쿠 기질로으로 이황의 제자들과도 교류가 없었다. 오타쿠 기질 탓에 외직으로 밀려난 이원익을 번번히 중앙요직으로 임명하여 출세길을 열어준 것은 막상 이이였는 것이 또 개그.
  4. 남인으로 분류되기는 한데 장인은 북인의 대부 이산해, 절친은 서인 계열의 이항복이었다. 심지어 이산해의 연줄로 정인홍 밑에서 배운 적도 있다. 왜 남인인지 이해불가. 다만 상대적으로 북인에 비해 온건한 태도를 보였고,분당 초기라 남인으로 여겨진다.
  5. 좌의정이긴 했는데 편지만 보내고 한양에는 안 왔다. 생각보다 좌의정은 오래 하셨다.
  6. 해주옥사 때 소북이 엄청나게 제거되기는 했다.
  7. 이전에는 제주목사였다. 향후 전망을 보아 쌈 잘할 것 같아 보여서 승진시킨 것이라고 되어 있다. 제주도에 짱박혀 있던 이괄을 부른 것은 결국 광해군에게나 인조에게나 대재앙이 된다.
  8. 그나마 장만은 본래 문관이여서 무에 능하지 못 했다. 그탓에 후에 이괄의 난이나 정묘호란때 미흡한 대처로 욕을 많이 먹었다. 남이흥은 정묘호란 당시 분전끝에 전사했고,정충신은 능력에 비해 상부에 미움을 받아 외직을 전전하다가 쓸쓸히 죽고 만다.
  9. 박자흥은 경기감사가 되기 직전 벼슬이 대사성(성균관에서 제일 높은 벼슬)이었는데 병졸의 선발 및 배치 업무를 담당한다. 비변사에서 병조판서도 아닌 사람이 왜 병졸의 선발 및 배치 업무를 하냐고 대차게 깐 기록이 있다.
  10. 이이반은 반정 직후 참살되고,김신국은 폐모론에 소극적으로 참여했음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목숨을 부지하고 재등용된다.
  11. 장신은 반정의 일원인 형 장유의 덕을 입은 것도 크다. 후에 병자호란때 김경징과 함께 강화도 방어를 책임졌으나 실패하고 그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12. 얄궂게도 조유도는 유희분의 사위이자,폐모론에 동조한 사람이였다.
  13. 상술했듯이 박승종은 여차하면 자결하려고 비상을 항시 소지했는데 급리 도망친터라 비상을 잃어버린 후였다. 결국 노끈으로 충직한 하인을 시켜 목을 메 자살했다. 반대로 연산조 때 윤필상은 제 때 비상을 먹었으나 효과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목을 메 고통스레 죽었다.
  14. 그러나 반정세력의 립서비스일 수도 있다. 일찍이 중종반정 당시 중종의 장인 신수근도 반정세력에 권유를 받았으나 반대했다고 살해당했다. 게다가 박승종은 손녀가 폐세자 이지의 빈이였고, 이 부부는 귀양지에서 땅굴을 파다가 들통이 나 폐세자는 처형당하고 세자빈은 자결했다. 살아있어도 이 일에 연루되어 피해를 받을 공산이 크다.
  15. 대북이긴 한데 기대승과 친척이다. 정확히는 형인 기진의 아들이 기대승이고, 동생인 기준의 증손자가 기자헌이다. 기대승이황과 사단칠정론을 벌인 대학자로 이는 나중에 서인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할아버지인 기대항은 1563년 서인의 창시자(?)인 심의겸의 지시를 받고 사헌부의 죄상을 모조리 탄핵한사헌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적이 있던 사람이다. 의외로 붕당 초기에는 서로 족보가 꼬이는 경우가 많다.
  16. 이이첨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상대방이 적당히(?) 싫을 때 멸문지화를 당해야 할 놈이라는 욕을 쓰기에는 많이 곤란했다.
  17. 삼창은 곧 탐욕스러운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찍혔는데, 막상 박승종이나 박자흥이 매관매직이나 비리를 저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둘 다 선덕비까지 받았다. 박자흥이 수원부사를 지낼 때에는 임기가 다 되자 그 지역 사람들은 1년 더 냅두면 안 되냐는 상소까지 올린 기록도 있었다. 집안이 몰락하고 살아 남은 일가친척들은 모두 이들이 고을 수령으로 지냈던 동네 중 하나를 골라 뿔뿔히 흩어졌다한 동네로 몰려가 살면 민폐이니. 기자헌이 다 함께 살다가 일가친척이 모조리 몰살당한 것과도 대비된다. 여러모로 치밀하다. 이 집안은 징크스인지 박충원부터 박자흥까지 모두 외직에서는 지방민으로부터 평판이 좋았고, 내직에서는 어이없는 큰 실수 한 두 번씩 해서 삼사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재미있는 실수들이 많다.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진상품 잃어버리기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