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도

1 남성 이름

Bernardo

버나드(영어) 및 베르나르(프랑스어)의 이탈리아스페인식 바리에이션으로, '처럼 힘이 세고 용감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베라르도(Berardo) 등의 변형이 존재하며, 여성형으로 베르나데타(Bernadetta)[1]나 베르나르디나(Bernardina), 애칭으로 디노(Dino) 등이 있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베르나르'든 '버나드'든 모두 '베르나르도'로 명칭을 통일하는데, 예를 들어 아래의 유명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성 베르나르도'라고도 부른다.

2 이 이름을 가진 실존인물

2.1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프랑스어: Bernard de Clairvaux
라틴어: Bernardus Claraevallensis
영어: Bernard of Clairvaux


1090년 프랑스 퐁텐 레 디종 출생, 1153년 8월 20일 프랑스 클레르보에서 선종.

가톨릭수도자이자 시토회[2]수도원장, 성인이자 교회학자로서 축일은 8월 20일. 상징물은 시토회의 하얀 수도복과 사슬로 묶인 악마, 하얀 , 꿀벌통이며, 양봉업자, 양초 제작자, 성전기사단, 부르고뉴, 지브롤터수호성인이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라는 명칭은 한국 천주교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프랑스어 발음을 살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라고도 한다. 클레르보는 베르나르도가 시토회 수도원을 세운 곳으로, '빛나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로 마지막 교부(敎父)라고도 일컬어지며, 반대로 스콜라 학파의 유명론[3]자인 피에르 아벨라르와는 보편논쟁으로 대립했다. 그는 말년의 아벨라르에게 너 이단 이단 혐의를 제기하여 골치를 앓게 만들었다.

디종의 귀족 가문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국사에 바쁜 아버지 대신 영주의 딸로서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샤티용에서 공부하던 1107년에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 20세가 되던 1111년 시토회에 입회한다. 그는 시토회의 설립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입회로 인해 그의 형제 4명, 2명의 삼촌을 비롯한 30명의 친구들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줄줄이 들어왔기 때문에 쇠퇴해 가던 시토회에 큰 활력을 되찾은 결과를 야기한다. 베르나르도는 봉쇄 수도회의 엄격하기 짝이 없는 규율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그것보다 더한 고행도 자처했고, 언제나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Ad quid venisti)"고 자문하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1115년 수도 사제가 된 베르나르도는 신학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하며 운둔생활을 하다, 성 스테판 하딩의 지시로 클레르보에 파견되어 수도자들을 스카우트하고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1125년에 베르나르도는 그곳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클레르보 시토회는 원래 분원이었지만, 베르나르도의 성덕으로 인해 본원 이상으로 중요한 곳이 되었다.

베르나르도는 수도원의 일뿐만이 아닌 교황의 조언자로서의 일을 하게 되었다. 38세 때 트로아에서 개최된 성직자 회의에서 성전기사단의 혁신을 위탁받은 것을 시작으로, 교리 논쟁 같은 교회의 중대한 문제에 하나하나 개입했다. 1130년 2월 14일 교황 호노리오 2세가 선종하자 교황이 2명으로 분열되었는데, 이 때 베르나르도는 9월의 에탕프 공의회에서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를 비판하고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옹립했다. 결국 다음해인 1131년 새로운 교황 선출은 그의 의사대로 잘 진행되었다. 1140년부터는 여러 지역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설교와 강론 활동을 벌였고, 피치 못해 발이 닿지 못하는 곳에는 무려 도합 500여 통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시토회 수도자이자 베르나르도의 추종자였던 피사의 베르나르도가 에우제니오 3세[4] 교황으로 선출되자 베르나르도는 그에게 교황이 해야 할 일과 주의해야 할 일을 당부했고, 에우제니오 3세는 1145년 12월 칙서를 통해 베르나르도에게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위한 십자군 모집을 맡겼다. 베르나르도는 각지에서 프랑스루이 7세콘라트 3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모았으나, 그들의 속셈이 너무나 제각각이어서 결론적으로 크게 깨졌다.

1153년 8월 20일, 제2차 십자군 원정의 대실패에 큰 쇼크를 받은 베르나르도는 왜 하느님이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고민하며, 십자군의 타락에 괴로운 죄책감을 느끼며 세상을 떠났다. 그는 1174년 1월 18일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830년 교황 비오 8세로부터 교회학자로 선포될 때 '꿀처럼 달콤한 박사(Doctor Mellifluus)'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유명한 저서로는 《아마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신애론》, 《아가 강론집》 등이 있다.

성 베르나르도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천국편에서도 가장 높은 최고천에 등장하여, 단테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준다. 《괭이갈매기 울 적에》에는 클레르 보브 베르나르두스TS오마주되었는데, 실존인물 베르나르도라기보다는 신곡의 베르나르도가 모티브이다. 일명 야스.

3 이 이름을 가진 가상인물

3.1 건슬링거 걸의 등장인물

베아트리체의 담당관으로 말수가 적고 감정 자체가 희박한 그녀에 비해 상당히 말이 많은 편이다. 이런 설정 때문인지 그의 입을 통해 해당 사건과 연관이 있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명소 등을 일부분이긴 하지만, 꽤나 자세히 설명해준다. 성인 베르나르도에서 이름을 따온것으로 보이며, 붉은 머리칼이 매우 특징적이다.

어느정도 희생을 각오하고 수행하는 피렌체 종탑 습격작전에서 베아트리체에게 "마이크로 Uzi 탄창은 충분히 챙겨둬" 라는 사망 플래그를 꽂았고, 결국...
  1. 옛날 한국에서는 '벨라뎃다'라고도 불렀다.
  2. Ordo Cisterciensis(OCist). 베네딕토회에서 파생된, 자급자족을 철칙으로 하는 봉쇄 수도회 중 하나. 성 노르베르트가 설립자이지만, 성 베르나르도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베르나르도회(Bernardines)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3. '보편'의 개념이 단어에 불과하며 실재하는 것들과는 상관 없다는 이론. 반대개념은 '보편'의 개념이 실존하며 실재하는 것들을 아우른다는 실재론이다.
  4. 인노첸시오 2세와 에우제니오 3세 사이에 첼레스티노 2세와 루치오 2세 교황이 있는데 모두 재위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다. 에우제니오 3세는 1878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