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잉 2707

보잉항공기
민항기
-협동체광동체
쌍발기B717 · B737 · B757B767 · B777 · B787
3발기B727-
4발기B707B747 · B2707
군용기
전투기P-26 · F-15SE
전자전기EA-18G
폭격기B-17 · B-29 · B-47 · B-52
수송기C-135 · VC-137 · VC-25 · C-32 · C-40
조기경보기E-3 · E-6 · E-8 · E-737 · E-767
공중급유기KC-97 · KC-46 · KC-135 · KC-767
대잠초계기P-8
ABLYAL-1 · NHK-135
기타X-32 · E-4 · YC-14
헬리콥터
군용CH-46 · CH-47
보잉의 1954년 이전 주요 모델
B247 · B307 · B377


파일:보잉 2707 1.jpg
트랜스월드 항공 소속의 2707-300 상상도.

Boeing 2707

1 개요

미국보잉에서 설계한 미완의 초음속기이다. 당시 콩코드의 등장으로 인해 미국은 라이벌 의식과, 또 자국의 항공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전폭적으로 지지했지만 빛은 보지 못했다.

2 설계

2.1 초음속 수송기 계획

1960년대 초 콩코드의 개발계획이 발표되고, 덧붙여 소련까지 투폴레프 설계국에 초음속기 개발을 지시하자, 이것을 본 미 연방 항공국은 자국도 발전된 항공기술을 보여주고자 '국산 초음속 수송기 계획(SST 계획)'을 입안한다. 1963년, 존 F. 케네디 정부는 이를 승인하고, 당대에는 우주 경쟁 다음으로 큰 사업이었을 정도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1][2]

이 계획에 보잉록히드가 입찰하였다. 보잉은 2707을 제시했으며 록히드는 L-2000을 제시한다.

2.2 설계

파일:보잉 2707 2.jpg
디자인. 위가 2707-300, 아래가 2707-100/-200의 디자인이다.

1963년 보잉은 2707의 설계를 시작하여 1964년 최초 디자인을 FAA에 제시한다.
날개는 가변익으로 만들고, 콩코드보다 동체를 더 길고 넓게 설계하면서 수송량과 속도는 앞서게 되었지만, 넓어져 광동체가 되어버린 동체 너비와 가변익의 채용은 이륙중량의 증가를 가져왔다.

1966년 2707-100의 목업 모델이 만들어졌고, 동년 12월 심사에서 보잉이 최종 우승하였으나 결국 이륙중량이 발목을 잡았다. 처음에는 동체를 축소하여 2707-200 모델을 설계했지만 거의 달라진 것 없이 이륙중량은 아직도 엄청나서 1968년 결국 엎어버리고 L-2000과 같은 델타익으로 재설계하였다. 그리고 1969년 2707-300의 목업 제작을 완료하였다.

2.3 취소

그 즈음 콩코드의 시운전이 시작되었고, 얼마 안 가 초음속기의 꿈은 산산히 부서졌다. 콩코드의 초음속 운항은 소닉붐을 가져왔고, 환경론자들이 오존층 파괴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석유였다. 말 그대로 초음속기의 실상은 기름먹는 하마. 하마도 넘어서 괴물급 게다가 원래 화물기로 만들려 했던 보잉 747의 여객기 버전이 대박을 터뜨리며 2707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점차 보잉사 내에서도 생기기 시작했다.[3] 여담으로 747 여객기가 예상보다 대박을 터뜨리면서 747 화물기는 사라져버렸다. 후일 생기게 되기는 하나 747-100은 어쨌거나 기본 화물기 버전은 없다.(있는건 개조된 것들)

결국 1971년 3월 미 상원 국회에서 지원금 요청을 거부했다. 이어 5월 20일 하원 국회에서도 자금 지원을 하지 않기로 하면서 SST 계획은 취소되었다. 결국 동년 보잉도 2707의 개발을 취소한다고 발표했고, 이로 인해 보잉 내부에서 6만 명이라는 인원이 감축되었다.

3 형식

3.1 2707-100

파일:보잉 2707 3.jpg
2707-100의 목업.

파일:보잉 2707 4.jpg
유나이티드 항공 소속 2707-100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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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ll 모형에서의 일러스트. 기수를 두 번 꺾은 점이 눈에 띈다.

가변익을 채용하였으며, 객실은 2-3-2 배열로 광동체기였다. 수송인원은 300명 남짓. 엔진은 제너럴 일렉트릭의 GE4/J5 엔진을 채용하였다.[4] 팬암, 아메리칸 항공, 트랜스월드 항공 등지의 항공사에서 주문했었다. 목업은 1966년 공개되었다.

3.2 2707-200

파일:보잉 2707 5.jpg
2707-200의 내부 설계도.

중량 감소를 위해 동체를 줄인 형식으로 최대 수송인원은 277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륙중량은 덜 감소해 여전히 이/착륙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고, 결국 보잉은 가변익을 버리고 재설계해 2707-300을 설계한다.

3.3 2707-300

파일:보잉 2707 6.jpg
2707-300의 목업.

파일:보잉 2707 7.jpg
팬암 소속 2707-300의 상상도.

델타익을 채용해 이륙중량을 꽤 감소시켰다. 게다가 동체를 더 줄여 수송인원은 234명이 되었다. [5] 기수도 한 번만 꺾이도록 줄였다. 목업은 1969년 공개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 보잉 747이 등장하자 항공사들은 747을 선택했고, 결국 1971년 전격 개발 취소되었다.

4 같이 보기

  1. 무려 개발비의 75%를 부담하기로 했다. 상상이 가는가?
  2. 그만큼 최소 요구도 원대했는데, 무조건 콩코드보다 더 크고 더 빠른 기체를 만들라고 했다. 게다가 초음속 돌파 시의 강력한 열을 견뎌야 해서 기체 외부를 티타늄 합금이나 스테인레스 스틸 등의 외장재로 만들어야 했기에 개발비도 엄청났다.
  3. 사실 항공사 입장에서도 747은 상당히 경제적이었다. 속도는 조금 느리긴 해도 항공사에서는 한 번에 승객 4~500명을 수송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4. 사실 이 엔진도 SST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초음속기 전용 엔진이다.
  5. 하지만 동체의 폭은 그대로 냅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