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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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시립교향악단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관현악단이다. 서울시향이라는 약칭으로도 불린다.

서울시립교향악단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창단1948년
공연장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상임 지휘자공석
음악감독공석
상임 작곡가진은숙
부지휘자최수열
[홈페이지]


2 연혁

해방 후 한반도에서는 다양한 음악 재건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정규 관현악단의 창설 운동도 있었다. 1945년 10월에 작곡가 현제명과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의 발의로 해방 후 최초의 관현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이 창단되었는데, 3년 뒤 운영난과 악단 내부의 분란 등으로 인해 해체되고 잔존 단원들과 서울관현악단의 단원들이 모여 서울교향악단이라는 악단이 탄생했다.

이 악단이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었고, 공식 창단 연도도 1948년으로 인정되고 있다.[1] 초대 상임 지휘자는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인 김생려가 맡았는데, 2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악단도 해산되고 말았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단원들이나 관계자들은 북한군의 서울 점령 후 월북 혹은 납북되었고, 연습실과 악기, 악보도 소실 또는 파손되는 등 재기불능 상태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1950년 가을에 피난지인 부산에서 해군 소속의 '해군정훈음악대' 라는 단체로 가까스로 재건되었고, 휴전 후인 1954년에는 해군교향악단으로 개칭했다. 1957년에 해군에서 서울시 측으로 관리 주체가 넘어가면서 민간 악단이 되었고, 이름도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초대 상임 지휘자였던 김생려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재차 상임을 맡았는데, 1961년에 단원들과 불화가 생기는 바람에 물러나고 다시 미국에 이주했다.

후임으로는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김만복이 부임했고, 김만복은 1969년까지 재임하면서 그 동안 고전에서 초기 낭만에 국한되었던 연주 곡목을 후기 낭만에서 근현대까지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뒤이어 미국과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한 원경수가 1970년에 제3대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지만, 악단이나 운영진과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불과 한 시즌만 지휘하고 물러났다.

원경수의 사임 직후에는 미국 유학을 갓 마치고 귀국한 정재동이 전임 지휘자라는 직책으로 초빙되어 공백기를 메꿨고, 1974년에 제4대 상임 지휘자로 공식 부임했다. 정재동은 이후 16년 동안 장기 재임하면서 일반적인 관현악 연주회 외에도 대중적인 팝스 콘서트나 신진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범세대 음악회' 등의 기획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혔고, 신규 단원을 적극 영입해 100명 이상의 대규모 악단으로 탈바꿈시켰다. 1978년에는 악단 운영권이 서울특별시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넘어갔다.

정재동이 1990년 퇴임한 후에는 박은성이 후임으로 들어왔지만, 1년 뒤인 1991년에 조기 퇴임하고 다시 상임 공석 상태가 몇 년 동안 유지되었다. 1994년에 원경수가 다시 초빙되었으나, 1996년까지 단기 재임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지휘자의 단임과 공석 상태가 반복되자 악단 안팎에서도 비판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1999년에는 세종문화회관이 경영난 타개를 위해 법인 단체로 바뀌면서 잠시 명칭이 '서울시교향악단' 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때 운영권이나 재정 분배 문제로 악단과 회관 측이 대판 싸웠고, 동시에 단원 오디션 등의 예술적인 문제로까지 논쟁이 확산되어 악단이 파업에 들어가는 등 흑역사급 사태가 연출되었다. 명칭 변경과 동시에 단장으로 들어왔던 지휘자 정치용도 여기에 휘말렸다가 2001년 불명예 퇴진했고, 영문 명칭과 관련한 어느 민간 악단과는 고소미까지 먹이는 등 여태까지 쌓아온 명성과 실력에 꽤나 먹칠을 했다.

2000년에는 창단 이래 최초의 외국인 상임 지휘자로 러시아에서 마르크 에름레르가 초빙되어 화제가 되었다. 오페라발레 무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에름레르는 고국 러시아를 비롯한 북유럽 레퍼토리의 적극적인 소개와 양질의 연주로 기대를 모았는데, 2002년 4월에 악단과 리허설을 마친 직후 급성 신부전으로 갑자기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다. 에름레르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뜻하지 않게 지휘자를 잃은 악단에서는 같은 해 예술 고문 자격으로 곽승을 영입했고, 곽승은 2003년에 공식적으로 상임 지휘자에 취임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못되어 세종문화회관 측에서 해임 선언을 해버렸는데, 사유는 출근 일수 미준수였다.[2] 하지만 곽승과 단원들은 회관 측의 발표를 독단이라고 맹렬히 디스했고, 또 다시 회관과 악단 사이의 관계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곽승을 해임시켰던 당시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뇌물수수 혐의로 중도에 강판당해 처벌받았다.

결국 2005년에 악단 측에서 재단법인화 절차를 밟아 회관으로부터 독립했고, 명칭도 다시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환원시켰다. 동시에 정명훈을 예술 고문으로 영입했고, 1년 뒤인 2006년에 상임 지휘자 겸 예술 감독으로 격상시켰다. 이와 동시에 악단 운영과 체제 전반에 걸쳐 대폭 개편이 단행되었고, 수석/부수석급 주자에 외국인을 영입하거나 상임 작곡가 제도의 도입, 정기 연주회의 시리즈별 세분화, 현대음악 전문 공연, 찾아가는 음악회 등의 시도가 행해지고 있으며 해외 공연도 활발하게 다니는 중이다. 특히 2014년에는 NHK 교향악단에 이어서 아시아 오케스트라로써는 두번째로 BBC 프롬스에 초청받아 연주를 서기도 했다. 정명훈은 2015년 까지도 계속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5년 9월 고액 연봉 논란으로 지휘자 직책에 대한 재계약에 대해 부정적 의사를 내놓았으며, 1차적으로 악단측의 요청으로 2016년까지 연주를 하기로 하고 새 시즌 일정까지 다 나와서 예매까지 오픈되었다. 하지만 계속된 논란으로 결국 2015년 마지막 연주를 끝으로 상임지휘직을 내려놓았고, 2016년은 상임 없이 운영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근데 첫 대타부터 크리스토프 에셴바흐다. 3월에는 엘리야후 인발이 지휘한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닌 것 같다.


3 역대 상임 지휘자

  • 김생려 (재임 기간 1948-1961)
  • 김만복 (재임 기간 1961-1969)
  • 원경수 (재임 기간 1970-1971, 1994-1996)
  • 정재동 (재임 기간 1974-1990)
  • 박은성 (재임 기간 1990-1991)
  • 마르크 에름레르 (Марк Эрмлер, Mark Ermler, 재임 기간 2000-2002)
  • 곽승 (재임 기간 2003)
  • 정명훈 (재임 기간 2006-2015. 예술 감독 겸임)

차기 서울시향 상임지휘자가 임명되는 대로 추가 바랍니다.

상임 작곡가는 진은숙이 2006년부터 맡고 있다. 이외에 성시연이 2009년 6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부지휘자로 활동했고, 성시연이 2014년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예술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이임한 뒤에는 최수열이 2014년 7월 1일부터 이듬해 6월 말까지 1년 계약의 부지휘자로 선임되었다.


4 특징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고, 동시에 서울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유수의 악단이라고 전반적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다만 대체적으로 혼란스러웠던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꽤 심한 부침을 겪기도 했고, 운영 주체나 지휘자와 벌인 불화나 대립도 '대표적인 악단' 이라는 이유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크게 부각되며 스캔들로 번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악단과 단기 재임으로 끝난 지휘자들의 경우, 서울시향에 객원으로라도 출연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덕분에 1990년대에 악단 이미지를 굉장히 구겼다.

이 시기 연주실력도 상당히 저하되면서 서울시향은 깊은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오랜 라이벌이었던 KBS 교향악단과의 격차도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KBS 교향악단은 방송국의 안정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중견급 해외지휘자를 초빙하는 등 국민소득의 급증과 더불어 높아진 시민들의 예술적 욕구에 어느 정도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여 가시적인 발전을 이룬 반면 서울시향은 정체 내지는 퇴보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80년대 후반 새로 창단된 신생 교향악단들 중 부천필, 코리아 심포니, 수원시향, 대전시향 등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는 서울시향이 이들 교향악단은 물론 심지어 유라시안 필 등 비상임 민간 교향악단에도 밀린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안습한 시기를 보냈다. 예술의 전당 건립 후 대부분의 오케스트라들이 예술의 공연에서 연주했지만 서울시향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음향사정이 좋지 못한 세종문화회관에서 주로 공연을 해야했던 점도 관객들의 발길을 돌리는데 한 몫했다.

이렇게 서울시향이 끊임없는 나락으로 빠져들던 와중에 2002년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취임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시장은 서울시향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공언했고, 그 첫 신호탄으로 2003년 로린 마젤을 전격 초빙하여 서울시향 객원지휘를 성사시켰다. 당시로서는 해외 거장이 직접 국내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첫 사례였기 때문에 적지 않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로린 마젤을 수석 객원지휘자 또는 비상임 음악고문으로 초빙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불발되면서 단발성 이벤트에 끝났고, 서울시향의 안습한 상황은 한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 했다.

이랬던 서울시향의 상황은 2005년 정명훈이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면서 급격히 달라지게 되었다. 이미 세계구급인 지휘자의 굉장한 이름값도 있고 실제 연주력도 안정 추세를 이어가고 있어서 점차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해군교향악단 말기였던 1957년부터 해외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는데, 민간 악단이 된 후에도 동남아시아나 미국, 유럽 등지로 순회 공연을 가면서 KBS 교향악단과 함께 비교적 풍부한 해외 연주 경험을 가진 한국 악단 반열에 들었다. 2010년 6월에는 두 번째 유럽 순회 공연을 개최해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2011년 추석 연휴 동안 방북했던 정명훈이 귀국 후 연말에 북한의 조선국립교향악단과 합동 공연을 갖자고 북측에 제의했는데, 하필이면 그 연말에 뽀글이가 죽는 바람에 성사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그래도 아직까지 가능성은 있다고 보고 있는지, 서울시장 박원순이 김정일 장례식이 마무리된 뒤인 12월 31일에 이 합동 공연 계획을 남북 축구팀의 서울-평양전(약칭 경평축구) 부활과 함께 남북 양측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다만 아직까지 공식적인 반응은 나오고 있지 않는 상황.

재단법인이 된 이래로 재정 문제는 크게 겪고 있지 않은 상황이고, 오히려 더 나아지고 있는 편이라 여러 기획 연주회나 해외 유명 음악인과 지휘자의 초빙, 해외 순회 공연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서울시 측에서도 재정 지원을 하고 있고, 대기업이나 기타 재단의 스폰서도 받고 있다.

주요 공연장은 세종문화회관예술의 전당인데, 아직 상주 공연장은 잡지 않은 상태다. 비록 연습실이나 사무실은 회관 것을 그대로 쓰고 있지만, 다시 회관 상주 악단으로 들어갈 움직임은 없다. 아마 90년대처럼 또 싸울까봐 그런거 같다 그리고 애호가들의 경우 오히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세종체육관' 이라고 까는 일이 많고[3],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하는 것을 더 반기고 있는 실정이다. 그 때문인지 법인화 초창기에는 세종문화회관 정기 연주회도 있었으나 이후로는 정기 연주회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만 열고 있고,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1년에 두세 번의 특별 연주회 정도만 개최할 뿐이다. 대신 단원들의 실내악 연주회 같은 경우,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이후의 급속한 성장세는 정명훈의 이름값과 영향력에 상당 부분 기인하고 있어서, 정명훈이 자의든 타의든 직책에서 물러날 경우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2013년 1월 25일에 개최될 예정이었던 바그너 음악회가 공연 직전 정명훈의 급성 요통 발병으로 인해 급히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도 이와 관련된 여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5 녹음과 음반

음반 녹음 같은 경우에는 여타 한국 악단들과 마찬가지로 그리 활발하지는 않은 편이였는데, 정재동 재임기였던 1987년 8월에 악단 창립 30주년(당시 기준)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스튜디오에서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과 슬라브 행진곡, 리스트의 교향시 '전주곡', 정윤주의 '황병기 주제에 의한 가야금 협주곡' (양승희 협연) 네 곡을 녹음했고, 서울음반(현 로엔 엔터테인먼트)을 통해 LP카세트 테이프로 출반되었다. 1989년 2월에도 역시 정재동의 지휘로 악단 상주 공연장이었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혜경 협연)을 녹음했는데, 이 녹음도 같은 해 SKC에서 악단 최초의 CD로 출반되었다. 하지만 이 음반들은 오래 유통되지 못하고 폐반크리를 맞는 바람에 레어템이 된 상태다. 후새드.

이후에는 잦은 상임 지휘자 교체와 공석 상태를 거듭하던 탓에 녹음 계획 자체가 잡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1994년에 당시 상임 지휘자였던 원경수의 지휘로 정기연주회 무대에서 연주한 앙코르의 녹음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이 삼성뮤직 산하 클래식 레이블인 나이세스를 통해 출반되기도 했다. 그리고 정명훈 재임기에 들어 악단 정기 회원에게만 주어지는 비매품 특전이기는 했지만, 베토벤교향곡 5번6번(2006), 브람스교향곡 1번과 대학 축전 서곡(2007),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2008), 스트라빈스키봄의 제전(2009) 등의 공연 실황 녹음을 담은 비매품 CD가 매년 주기로 규칙적으로 나왔다.

이렇게 실황 녹음을 내놓으며 녹음 분야에서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가 2010년 말에 도이체 그라모폰(약칭 DG)과 계약해 5년 동안 매년 두 종류 씩의 CD와 디지털 다운로드 음원을 출반하게 되었다. 한국 관현악단으로서는 최초로 클래식 메이저 레이블과 손잡고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계획이라 나라 안팎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첫 음반은 정명훈의 지휘로 연주한 드뷔시의 교향 소묘 '바다' 와 라벨의 모음곡 '어미 거위', 무용시 '라 발스' 세 작품들을 담고 있으며, 2011년 7월에 한국과 일본에서 먼저 발매되었다. 나머지 국가와 지역에서는 8월 이후 발매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말러교향곡 1번이 담긴 두 번째 CD가 나왔다. 2012년 4월에는 세 번째 CD로 말러의 교향곡 2번이 발매되었고, 8월에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과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관현악판)를 커플링한 네 번째 CD가 나왔다. 2013년 4월에도 같은 해 1월의 실황으로 제작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김선욱 협연)과 교향곡 5번을 담은 CD가 출시되었고, 음질은 시망 12월에는 전년도 12월 실황으로 제작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CD가 여섯 번째 음반으로 나왔다.

2014년에는 상임 작곡가인 진은숙의 피아노 협주곡(김선욱 협연), 첼로 협주곡(알반 게르하르트 협연), 생황과 관현악을 위한 '슈' (우웨이 협연) 세 곡이 1월 중 실황/스튜디오 녹음되어 6월 17일에 먼저 선보였고, 말러의 교향곡 9번은 12월 중순에 발매되었다. 또 5월 23~24일에는 말러의 교향곡 5번을 녹음했는데, 이 녹음은 2015년 7월 3일에 음반으로 나왔다. DG와 맺은 계약 기간은 5년으로 잡혀 있어서, 2015년 하반기에 나올 예정인 열 번째 음반/디지털 다운로드 음원인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끝으로 만료가 될 예정이었으나, 2016년 1월 말러의 교향곡 6번 실황 연주를 녹음으로 담을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아선 계약이 연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16년 롯데콘서트홀 개관 공연의 연주 실황중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 3번과 생상스의 교향곡 3번이 DG 에서 다시 나온다.

DG의 음반 외에는 공식적으로 서울시향 이름을 달지는 않았지만, 비발디바이올린 협주곡 시리즈인 사계 전곡을 넥스트의 기타리스트인 김세황일렉트릭 기타 협주곡으로 편곡해 시향 현악 단원들만으로 구성된 12인조 현악 합주단과 녹음한 음반이 2011년에 CJ그룹 산하의 CJ E&M에서 발매된 바 있다. 또한 서울시향 현악 단원 세 명이 멤버로 있는 콰르텟 크네히트라는 현악 4중주단도 소니 뮤직 코리아를 통해 하이든의 현악 4중주 62번과 53번, 그리고 하이든 곡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로만 호프슈테터의 곡으로 사실상 확정된 현악 4중주 '세레나데' 세 곡이 담긴 데뷰 음반을 발매했으며, 이어서 2015년에 멘델스존의 현악 4중주 2번과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가 수록된 음반을 발매했다.


6 영어 명칭 문제

영문 명칭이 완전히 같은 악단이 존재했었는데, 1991년에 '뉴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어 활동하던 민간 악단이 1990년대 후반에 '뉴' 라는 단어를 빼버리고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 개명하면서 이 악단과 서울시향 사이에서 살벌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서로에 대한 고소와 맞고소가 이어졌다.

서울시향은 여전히 영문 명칭을 'Seoul Philharmonic Orchestra' 로 고수하고 있고, 몇몇 음악 잡지나 신문에서는 아예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고 싣는 경우도 있다. 민간 악단인 서울 필은 해당 악단 홈페이지의 명칭에서 'Orchestra' 를 빼고 그냥 '서울필하모닉' 이라고 하고 있다. 다만 서울시향의 영문 명칭도 마찬가지로 '서울 필하모닉' 이라고 축약해서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 또 양자 간에 키배가 연출될 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와 관련된 법정 소송은 2013년 3월에 서울시향 측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미 2004년에 서울시향측이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 승소한데 이어, 형사 소송에서도 상표명 도용 혐의가 인정되어 서울필하모닉과 단장에게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관련 기사] 그런데 해당 단체는 (2013년 7월 현재) 아직도 여전히 서울필하모닉이라는 이름을 사용 중이다. 엥?
  1. 다만 1990년대까지는 이 악단이 본격적으로 서울시향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57년을 창단 연도로 보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1987년에는 창단 30주년을 맞아 기념 공연과 음반 발매 작업을 하기도 했다.
  2. 출근 일수가 180일을 넘기지 못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데 "상임"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매일 출근부 찍어야 된다는 뜻이지만, 음악계에서는 그 악단의 연주를 주로 책임지는 역할 정도로 그 의미를 다르게 사용한다. 그래서 두, 세 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동시에 맡는 경우도 허다하다. 실례로 현재 상임지휘자인 정명훈은 당시 곽승 보다 더 적은 일수를 출근하고 있으므로, 이 규정을 똑같이 적용한다면 그 또한 당장 해임되어야 한다. 그만큼 180일 출근이라는 조건은 말이 안되는 조건이었던 것.
  3. 돈을 엄청나게 들여서 리모델링을 했다고는 하는데, 정작 음향 면에서는 별로 나아진게 없다는 것을 비꼬는 말. 사람들에 따라서는 세종대"광"장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