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아돌프 히틀러
목차
- 1 히틀러의 능력
- 2 정치적 능력
- 3 행정 능력
- 4 군사적 능력
- 4.1 히틀러 군사적 실책
- 4.1.1 소련 공격과 대미 선전포고
- 4.1.2 공군 잉여병력 방치
- 4.1.3 공수부대 투입을 꺼림
- 4.1.4 신무기 도입 중지
- 4.1.5 바르바로사 작전
- 4.1.6 모스크바 공격 거부
- 4.1.7 청색작전 말아먹기
- 4.1.8 쿠르스크에서의 뻘짓
- 4.1.9 동부방벽 건설 거부 (1943년 3월~8월초)
- 4.1.10 동부전선의 정예 기갑병력 일부를 이탈리아로 돌린것 (1943년 7월~ )
- 4.1.11 제트기인 Me 262 상당수를 폭격기로 생산
- 4.1.12 바크라티온 재앙
- 4.1.13 모르텐, 아르덴 삽질
- 4.1.14 라트비아 북단에 고립되어 있던 쿠를란트 집단군을 빼오지 않은것
- 4.1.15 아르덴 병크
- 4.1.16 히틀러의 마지막 뻘짓 '발라톤 호수 공세'
- 4.2 히틀러의 군사적 결정으로 인한 승리들
- 4.1 히틀러 군사적 실책
- 5 최종평가
- 6 현재와 이후의 역사적 평가
1 히틀러의 능력
히틀러는 분명 한때나마 유럽 대부분을 군사적으로 석권했다. 전성기에는 서유럽은 물론 북아프리카 대부분과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나치 독일 및 추축동맹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독소전쟁 개전 초기에는 유럽 러시아 영토마저 거의 점령할 뻔 했다. 본국과 점령지에서 저질러진 온갖 비인도적인 전쟁 범죄들을 배제한 채 순수 국력만으로 비교한다면 짧게나마 독일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룬 지도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최전성기 때 대독일국 인구는 9200만에 루마니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동맹국을 합치면 소련의 인구와도 맞먹었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이념과 무력에 의존한 거대 제국은 허상에 불과했으며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서부전선을 마무리짓지도 못한 상황에서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을 과소평가하여 섣불리 침공함으로써 나치 독일의 종말을 앞당겼으며, 독선적인 자세로 끊임없이 군사적 실책을 저지르며 결국 조국에 전범국이라는 멍에와 폐허만을 남긴 채 자살했다. 그 와중에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를 한답시고 불필요한 인력 손실과 정치적 실책을 범했으며, 무엇보다 국가 주도의 대량학살이라는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2 정치적 능력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는 능력은 뛰어났다. 히틀러의 연설 능력이 없었으면 나치당 전신 독일 노동자당에서 아무 기반없이 당수가 될수 없었을 것이고, 맥주홀 폭동 이후에 그저 수없이 사라져간 듣보잡 극우정당 중 하나로 끝장났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 실패 이후에 많은 당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또는 당을 떠나는 등 나치당은 거의 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히틀러는 놀랍게도 쿠데타가 아닌 합법 노선으로 집권 전략을 바꾸어서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 여기서도 나치당에서 재건 전에 모든 시도를 해봤으나 지지율이 오히려 떨어졌고[1], 히틀러 없이는 구심점도 없고 선동적인 연설로 흥행도 되지 않았던 점도 작용한다.
나치당에서 집회 시 히틀러가 없을 때나 연설 금지령을 먹었을 때는 모이는 사람 숫자 단위와 모금액이 크게 차이가 났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1년여의 수감기간 후에 나치당이 재건 될때에도 별다른 반대 없이 당내 절대적 존재로 재추대된다.
물론 1930년 선거에선 3.0%만도 못하게 지지율이 떨어지는 시련도 있었고, 미국발 경제 대공황과 대통령 비상체제라는 예측 불가능한 운빨이 작용하기는 했으나, 이런 운빨을 잡는 것도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당장 2.6% 득표로도 당내에서 히틀러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한때 총애를 받다 숙청된 한프슈탱글이나 오토 슈트라서까지도 히틀러의 이런 능력을 인정한다. 학습이나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본능이나 감으로 상대방이나 대중심리를 잡아냈다고. 누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는지 세력균형이 어떠한지 약점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서 집권 시에도 블러핑으로 상대방을 현혹시켰고, 상대진영의 병림픽과 세력구도 역학관계를 잘 파악했으며 마치 오늘날의 북한을 연상케하는 벼랑 끝 전술과 도박에 가까운 무모함에 질려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역량도 뛰어났다. 이러한 전법은 오스트리아와 체코 합병시까지 잘 통했다. 물론 그 배경에는 북한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강대국인 독일의 국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말이다.북한 1패
애초에 복잡한 독일의 정치지형을 분석하고 각 정파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집권전략으로 삼은 것도 보통 지략이 아니면 힘들다. 그를 다른 정파의 수장들이 과소평가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집권 후에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을 공적으로 만들며 극우 뿐만 아니라 우익들을 모두 휘어잡아 총통에 오른 것을 보면 그가 운빨로만 집권한 것은 아니다.[2]
3 행정 능력
나치즘이 반관료적인 성향을 보인것처럼 히틀러도 당연히 행정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지배에 대한 권력욕은 컸지만 그 자리에 앉고 나선 행정적인 면은 '무능을 넘어선 무관심'이었다. 관료적인 체제를 박살냈지만 다른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한건 아니고 '예술가'를 자처한 만큼, 항상 즉흥적 판단이나 어려울 경우 최대한 질질 끌거나 부하들의 영역이나 권력 다툼에선 방관하다가 이기는 사람 편을 들어주고 건축 프로젝트 같이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선 기존 행정체제를 무시하고 항상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기 때문에, 나치 치하에서의 행정은 중첩되고 혼란스러웠으며 비효율적이었다.
그의 정치적 최전성기라고 볼 수 있을 무렵, 그는 상당한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 자리를 겸임하고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유능했다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이 모자랐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가방끈이 짧아서 전문지식은 물론, 전반적인 교양과 지성을 갖출 시간을 갖지 못했고, 게다가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군사작전의 그림을 보는 눈도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히틀러 집권 이후 제3제국은 대공황에서 비롯된 경제난을 거의 극복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것은 군대를 확장하고, 이런저런 군수공업을 일으키고,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도로나 철도를 대규모로 확충하느라고 많은 실업자들이 고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히틀러 본인은 무능했지만 측근인 히믈러나 헤스, 괴벨스, 괴링 같은 자들은 나름 자기 분야에서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이 실무를 맡아 상당한 성과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엄청난 재정적자로 실시된 것이었으며(재정적자가 경제에 순영향을 주었다는 평도 존재한다), 군수투자는 다른 산업에 파급 효과가 적기 때문에 침략이 필연적이었다. 1930년대 당시 독일 정부는 무리한 재군비로 파산의 위기까지 처하게 되었다. 독일 군부가 준비부족을 이유로 오스트리아, 체코 침공에 미온적이었음에도 히틀러가 밀어붙인 것은, 바로 전쟁으로 한 몫 챙기지 않는 한 독일 정부는 파산하고 자신도 하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박이 성공하고 나서는 군부에선 폴란드 침공에선 이의가 별로 없었으며, 소련 침공 때도 동조했다. 이런 동조는 제3제국의 파멸로 이어졌다.[3]
게다가 나치당이나 제3제국의 하부조직들은 자신들의 지도자(SS의 히믈러, 공군의 괴링, 나치당의 보어만, 해군의 되니츠, 그리고 육군수뇌부…등등)를 따라 반목을 거듭했으며, 합심해서 총력전을 벌여야할 때 낭비적인 자존심 싸움만 벌이고 있었다. 이런 엉성한 행정 때문에, 1943년까지 독일은 독재국가인 소련뿐만 아니라 민주국가인 영국이나 미국도 실시하던 전 산업의 총력전 체제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알베르트 슈페어가 군수상이 된 이후에야 어느정도 정리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결과적으로 독일의 패망을 불렀다.
결론을 내자면, 히틀러 본인의 업무능력은 그저 그런편이지만 그의 지지자와 밑에 있던 사람들 중에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고 이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성공을 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고제 같은 인재들을 잘 활용한 승리자들과 달리 히틀러는 인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떨어졌을 뿐더러, 더 큰 문제는 그 인재들의 능력으로 히틀러는 엄청나게 위험한 망상을 실천하려 했다는것.
4 군사적 능력
전반적인 군사적 능력은 전반적인 평가는 밀덕 똥별이다. 군사적 재능? 그게 뭔가요? 우걱우걱 수준이다. 그러나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나 이따금 기발한 책략을 알아보고 이를 채택할 수 있는 안목과 감은 어느정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군사적 능력은 그다지 우수하지는 못하지만 일단 업적으로는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에 싸이렌을 달아서[4] 재미를 보거나 스스로 스케치한 유럽전선 서부방벽에 대한 토치카는 아마추어가 그린 주제에 육군사령부의 별 이의없이 원안대로 채택되는 업적(?)이 있다.[5]쓸데없이 고퀄리티 다른 장군들과 달리 노르망디에도 상륙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도 했고[6]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공세가 나치의 바르바로사 작전 3주년인 6월 22일쯤 올거라고 예상하는 날카로운 면도 약간은 있었다.
히틀러 자신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주장은, 1차대전 당시 참호에서 근무했고 이러한 경험이 책상머리에서 근무하는 장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한 '경험'덕에 할더를 비롯한 참모 장교들과 의견이 충돌하면 실전 경험도 없는 주제에 하면서 모욕을 했고 의지가 부족하다느니 겁쟁이라고 까내렸다. 이러한 히틀러의 '능력'에 대해 카이텔 같은 아첨꾼들이 불세출의 군사적 영웅이라면서 치켜세웠고, 독일이 잘나가는 시절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독소전쟁 때부터 능력을 벗어난 판단에 거듭된 병크를 저지르며 몰락을 앞당겼다.
그의 최대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체코병합이나 폴란드 침공의 경우에는 그러한 전략이 당시 유럽 최강대국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속내를 읽고 향후 대책까지 미리 대비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이 체코와 폴란드를 침공해도, 예전에 베르사유 조약 파기나 라인란트 재점령 때처럼 구경만 할 것이라는 믿음에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 폴란드 침공 이후에 나타난 가짜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에 상당히 당황하게 된다. 물론 다시 한 번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행동에 대해 무대책으로 나감으로써, 히틀러의 전략적 능력에 대한 허세에 더욱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논란의 여지 없이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히틀러의 전략적 안목은 거의 전무하다고 평가한다. 한창 영국과 싸우고 있는 도중에 영국이 반격할 경우에 대비한 최소한의 대책도 없이 다시 소련을 침공하고, 진주만 공격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의 국력을 훨씬 넘어서는 두 초강대국을 상대로 자진해서 싸움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었다. 물론 그냥 외면했어도 결국 미국은 전쟁에 들어갔을 것이다. 미국은 전쟁을 참여하면서 일본보다 독일에게 퍼붓는 군사력이 훨씬 더 많았다. 사실 말하자면 미국이 진주만 기습을 당한 것도 사실 일본 제국을 견제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물론 자기 식민지였던 필리핀 식민지를 정복하는 것도 한 몫 했다. 당장 봐도 미국이 일본제국을 견제하려고 석유 수출 금지를 하다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즉 미국이 일본에 대해 견제하는 만큼 당장 독일이 유럽에서 가장 세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계속 가만히 지켜보기는 어렵다. 당장 전쟁이 터지면서 1차 세계대전처럼 영국에 갔던 미국 선박들을 격침시키는 것이 독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전포고도 히틀러만 까기도 뭣한것이 이 선전포고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는 장성은 거의 없었고 해군은 아예 정식으로 선전포고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마디로 미국에게 선전포고 하는것의 의미를 히틀러만 모르는게 아니라 독일 지휘부 전체가 잘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7] 그러나 전술적 능력은 아주 제로는 아니었으며, 그 근거로는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을 승인한 것과, 파드칼레 대신 노르망디에 연합국의 상륙이 이뤄질 것을 예측한 것을 들 수 있겠다.
게다가 통솔순발력이 떨어져서 군대를 넣고 빼는 능력이 매우 부실했다. 이 때문에 통솔순발력이 발군인 에르빈 롬멜과 병력운용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스탈린그라드에 억지로 집어넣는 병크를 터뜨리기도 했다. 파울루스 부대를 빼야만 하는 상황에서 넣어버린 것이다. 결국 파울루스와 그의 부대는 소련이 통째로 삼켜버렸으며 파울루스 본인은 히틀러에게 너무나 질려버린 나머지 아예 소련으로 귀순해버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히틀러의 사병 경력은 오히려 독일 병사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병사들의 고충을 받아들이는게 아닌, 오히려 자기는 예전에 이렇게 했는데, 너넨 그렇게 노오오오력을 안하느냐는 것. [8]
말하자면 전체를 보는 능력은 부족한데, 기발한 책략을 내거나 승인할 만한 눈은 가지고 있었고 이 기발한 책략이 가끔 대박을 친것도 부정할수 없는 사실, 이런 전술적인 기계(奇計)들은 우수한 독일군의 작전 능력으로 완수될 수 있었다. 문제는 히틀러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나머지 자신보다 훨씬 이성적이며 상황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탁월했던 참모들의 진언을 무시했고, 이러한 오만은 결과적으로 파멸을 가져왔다. 간혹 상황이 나쁘고 참모들도 답을 내놓지 못할 때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식의 제안을 하는 정도라면 큰 문제 없었을 것이다.
결론은 평상시에 해오던 밀덕질과 군복무 경험으로 전문가를 흉내내는 아마추어. 잘해봐야 전선 참모급 장교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고 봐야 한다. 아마추어나 하급 장교라도 기본적인 군사학 지식은 있는 만큼 나름 그럴듯한 계획을 만드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체계적인 참모 교육 과정과 군사적 장비 개발 지식과 상층 사령부에서의 지휘 경험 등이 없이는, 변화무쌍한 상황이 벌어지는 전장에서 예측이 빗나가기 시작하면 소위 밀덕이라고 부르는 비전문가 수준에서 내리는 판단은 원숭이가 점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지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능력 수준 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이 타인의 의견을, 그것도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견에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밀덕답게 신무기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서 '보복무기' V1, V2의 연구를 지원하거나[9] 그리고 크고 아름다운 슈퍼병기에 대한 환상이라도 있는지 독소전쟁 개전 즈음에는 1000톤급 차체에 순양전함용 주포를 탑재한 전차 "란트크로이처(육상순양함) 라테"의 개발을 지시하기도 했으나[10][11] 애초에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해 개발이 취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중전차에 대한 로망을 버릴 수 없었던 히틀러는 결국 포르쉐 박사에게 지시하여 200t급의 괴물 마우스를 내놓게 하는데, 그것도 포르쉐 박사가 가져온 초안을 직접 손보면서 어설픈 수정사항들을 일일히 기록하는 둥 밀덕질을 보여준다. 그래도 부정적인 영향만 미친것은 아니어서 1호전차부터 시작해서 무조건 더 크고 더 강한 전차를 내놓으라는 독촉질로 간접적으로나마 티거, 티거 2의 탄생에 기여하기도 했다.[12] 물론 전시 지도자가 무기에 관심을 가지는건 잘못된게 아니고 오히려 어느정도 관심을 가지는건 긍정적인 면도 있는건 사실이나 히틀러는 그 관심이 지나쳤다. 세계최초로 실전배치된 제트전투기 Me262를 폭격기로 생산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당장에 제공권도 간당간당한데 폭격기를 원했던 이유는 '이런 킹왕짱 빠른 전투기를 사용하면 그만큼 더 빠르게 런던을 폭격할 수 있으니까' 물론 이 지시를 무시하고 대부분 전투기로 생산했고 폭격기 버전도 일선에서 전투기로 개조해서 날렸으니 이 결정이 부정적인 영향을 몰고온건 아니다. 물론 전시 지도자가 병기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이치이나 히틀러의 경우는 쓸데없이 세세한 부분에 까지 간섭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고 의외로 인도적인 결단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V1 로켓을 개량해서 사람이 직접 탑승해 목표물로 유도하는 자폭 병기의 개발을 건의하자, 히틀러는 "'자살 공격은 독일 민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반대해서 시제기만 제작하고 끝났다.[13]
4.1 히틀러 군사적 실책
소련을 공격하고도 성과가 없자 지휘관들과 장군들을 믿을수 없다며 자신이 모든걸 결정하겠다며 주요작전들에 개입하고 그 이전에는 괴링의 주장을 믿고 지상군을 멈추고 공군으로 됭케르크를 공격하지만 성과없이 철수하는 영국군을 곱게 보내주는등 상당한 실책이 있었다. 그러나 실책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경우도 제법 있는 편이다.
그리고 내용중 일부는 히틀러의 실책이 아닌 경우도 있다. 독일의 패전 이후 독일의 장성들은 회고록등에서 모든 잘못을 히틀러에게 떠넘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연합군 지휘부인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윈스턴 처칠도 만만치 않은 실책을 저질렀으니 히틀러만 무능하다고 보기는 애매하다.
4.1.1 소련 공격과 대미 선전포고
1941년 당시에는 영국과 한창 전쟁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소련을 공격한다"는 의사를 피력, 결국 영국침공 실패 이후, 전력을 재정비하여 소련을 공격한다. 기대와는 달리 정작 일본은 도와줄 의사도 없었고 소련과 불가침 조약까지 맺은 상태였으며, 독일한테 얻어맞은 영국이 멍청하게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또 소련침공 당시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식민지 주둔 잔여 프랑스군들과 영국군을 상대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독일이 소련에게 선빵을 갈긴 시점은 소련이 가장 취약하던 시점이었고 여기에 스탈린의 환상적인 트롤링까지 겹쳐서 독일군은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독일과 소련이 언젠가는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도 하다. 한술더 떠서 소련 침공을 개시한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는 일본 때문에 매우 기뻐하며 또 다른 강대국인 미국에게도 선전포고했다.(...), 결국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하게된다. 그러나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그 시기 자체는 늦춰지는 정도지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는것은 시간문제였으니 결과가 달라진건 없을것이다. 그리고 다른 독일군 장성들도 대미 선전포고에 반대하지 않았고 해군은 오히려 내심 바라고 있었으니 히틀러만 바보라고 까기도 좀 뭣한 경우다.
4.1.2 공군 잉여병력 방치
괴링의 뻘짓으로 1942년말까지, 공군에서 T/O이상의 잉여병력이 25만명이나 놀고 있는 것을 용인하고 방치했다. 결국 공군 야전사단이라는 부대들이 생겨서 육상전에 투입하기는 한다.
4.1.3 공수부대 투입을 꺼림
크레타 작전이후 공수부대의 피해가 매우 심각하게 크다는 이유로 그 피해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공수부대의 공수작전투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최정예 병사들을 방치하고 주요 작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주로 독소전쟁과 몰타.
4.1.4 신무기 도입 중지
42년에 보병화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줄 신무기 MKb42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생산성의 문제와 기존의 무기들의 재고 등을 문제로 계획을 중지시켜 구식화 되어가고 있는 기존의 Kar98k, MP40 등을 대체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그러나 생산성, 기존에 생산된 재고 또한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요소이다. 당시 독일이 기관단총이 부족해서 노획한 기관단총까지 알뜰하게 주워서 사용해야 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탄약이 호환되는것도 아니므로 총만 만든다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탄약까지 신경써서 보급해야하는데 이 또한 보급능력이 떨어지는 독일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요소이다. 게다가 이런 사례가 독일에만 있는것도 아니고 연합군도 보급을 이유로 신무기의 도입을 느긋하게 하다가 피를 본 사례도 있다.(M26 퍼싱은 셔먼보다 수송이 더 어렵다는 것이 배치가 늦은 원인 중 하나이다. 물론 다른 요인들도 작용하기는 했지만.)
4.1.5 바르바로사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근거없는 망상으로 월동장비 지급을 금지해서(뒤늦게나마 괴벨스가 수습하긴 하였지만) 1941년 12월 말의 시점에서 동상자가 10만명 이상 발생[14]. 그러나 히틀러 뿐 아니라 다른 독일군 주요 지휘관들도 겨울이 오기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는 점에서 이건 히틀러만의 잘못이 아니라 독일 사령부 전체의 실책에 가깝다.
4.1.6 모스크바 공격 거부
이점은 미묘하다. 물론 모스크바는 소련의 수도로써 독소전쟁의 최중요 목표 중 하나였다. 모스크바는 군사, 정치, 공업의 중심지이자 도로와 철도망의 요충지였으며 소련군은 붕괴 직전의 상황이 되었고, 이 독소전쟁의 결정적인 지점에서 승리를 거두어 소련군의 주력을 괴멸시킨다면 보다 쉽게 우크라이나 공업지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키예프 공략을 우선하고 키예프 함락 후인 늦가을 10월 2일에야 모스크바 공격을 명함으로써 독일군은 소련군의 저항과 동장군으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하고 이는 독소전쟁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독일군 패배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된다.[15]
그러나 최근에는 키예프 공략 이전에 모스크바 공세를 행하였다면 키예프의 소련군으로 인하여 배후가 위협당해 모스크바 공략이 더욱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이 보편화되고 있다. 아래 키예프 전투 참조
4.1.7 청색작전 말아먹기
원래 계획대로 진행했으면(침공군 전체로 우선 스탈린그라드를 장악하여 볼가강을 확보) 1번과 2번의 뻘짓에도 불구하고 함락이 가능했을 스탈린그라드를, 하필이면 병력을 둘로 나누는 바람에 양쪽 다 거하게 말아먹고, 아군 병력 85만명을 소련군 사상자 113만명과 맞바꿈. 이중에서 45만명은 동맹군 쩌리병력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포위되었던 6군은 최정예 병력이었다. 제때에 후퇴했다면 상당수가 살아 돌아올수 있었던 1942년 11월의 시점에서 6군의 25만 병력은 정상적인 보급과 지휘를 받는다면 소련군 150만명 정도는 소모시킬수 있는 정예병력이었다. 1942년 11월부터 1943년 2월2일 항복 때까지 포위되어 제대로된 보급도 없는 상태에서도 소련군의 병력을 소모시키며 산화한 것만 봐도 알수 있다. 그러나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버티는 동안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A집단군은 그틈을 타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4.1.8 쿠르스크에서의 뻘짓
기갑전력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작전 개시일을 7월달로 2달 이상 연기하였고, 이미 우수한 정보수집 능력으로 치타델 작전계획을 파악한 소련군은 그 동안에 6겹으로 된, 대전차지뢰로 도배된 수백km길이의 방어선은 축조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독일 또한 준비가 안되있기는 마찮가지였으며 소련군의 방어선은 이미 상당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작전 개시를 미루었던 원인인 증강된 기갑병력들 중 판터는 쿠르스크 남부전역에서 200대중에 1/3 정도인 60대 이상이 작전 초반에 가동불능이 되면서 작전을 연기하였던 이유가 무색하게 되었다.[16] 물론 이 판터가 전부 제대로 돌아갔어도 뚫을 가능성은 희박했을테지만. 이런 무모한 꼴아박기식 병력소모 이후에도 아직 독일군과 소련군의 교환비가 병사당 4:1, 전차로는 7:1 이상이 나왔으니, 쿠르스크 공세 대신에 기동방어로 소련군을 소모시켰다면 소련에 훨씬 더 큰 손실을 입힐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만슈타인이 그의 회고록인 '잃어버린 승리'에서 밝혔던 주장에 따른 내용인데, 사실 만슈타인이 주장하는 시기에는 아직 독일의 병력이 제대로 집결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또 소련군의 방어선 역시도 이미 그전에 상당수 준비되어 있었고 수많은 예비대들도 마련되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결국 이러나 저러나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운 작전이었다. 즉, 히틀러의 선택이 그리 잘못된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세한 정보는 쿠르스크 전투 항목 참조.
4.1.9 동부방벽 건설 거부 (1943년 3월~8월초)
축척을 보면 알수 있지만 드네프르강은 크게 3군데의, 10km에서 최대 22km이상까지 어지간한 호수는 압도하는 넓은 강폭지대가 있다. 상당한 길이의 전선축소가 가능하고, 제대로 된 요새를 만들경우 소련군은 강폭이 좁은 몇몇곳으로 엄청난 희생을 무릎쓰고 축차투입을 강요받을수밖에 없게된다.
구데리안은 이런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곳을 요새화시킬 것을 1943년 3월부터 건의했으나 히틀러는 '후방에 요새를 건설하면 장병들이 최선을 다해서 싸우지 않을것'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이를 각하한다.과연 히틀러 클라쓰 뒤늦게 쿠르스크를 말아먹고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된 1943년 8월에 되어서야 동부방벽 건설을 허가하지만, 제대로 된 방어선을 축조할 시간이 모자랐다. 본래 소련군을 엄청나게 소모시킬수 있던 동부방벽은, 제대로 된 방어요새 건설없이, 대충 참호나 판 엉성한 방어선으로 소련군에 맞서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에게 상당한 소모를 주었으나, 독일군의 퇴각이 늦은것을 최대한 이용한 소련은 현지 빨치산들의 협조로 재빠르게 9월21일 첫 강건너 교두보를 만들어버린다. 교두보는 하나둘셋넷....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더니 결국 드네프르강 라인은 뚫려버린다. 게다가 히틀러가 드네프르강 동쪽의 동부전선 독일군에게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후퇴를 허용한것은 9월15일(....)이었다. 남부집단군 상당수가 드네프르강 동쪽에 있었는데 후퇴시기를 놓쳐서 소모되고 전투피로가 쌓인 병력이니(.....)
4.1.10 동부전선의 정예 기갑병력 일부를 이탈리아로 돌린것 (1943년 7월~ )
군사적인면만본다면 뻘짓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합군이 상륙한 직후 이탈리아 정부가 내분을 일으켜서 붕괴되고 무솔리니가 체포되었으며 이를 가까스로 수습한것은 다름아닌 이탈리아에 주둔해있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는 독일군이었다. 만약 이탈리아를 내벼려 두었다면 이미 붕괴한 이탈리아는 손쉽게 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어서 군사적으로도 손해다. 비록 연합군이 이탈리아에서 전진을 거의 못하고 종전 직전에야 대대적인 진격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이는 철저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그게 가능했던게 히틀러가 파견한 독일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점이라는걸 생각해야한다. 뿐만 아니라 노르망디 상륙 이후 주력을 서유럽에 쏟아부우면서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까지 차출되어 나가서 양측의 병력비가 1:1까지 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삽질을 많이 하기는 했어도 추축국에서 그래도 강력한 나라중 하나였다.[17] 이런 나라가 추축국의 대열에서 탈락한다면 다른 나라에 미치는 정치적 여파 또한 엄청날 것이다. 이런 점을 살피지 않고 이탈리아로 전력을 파견한것이 실수라는것은 정치적, 군사적인 면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근시안적인 견해다.
4.1.11 제트기인 Me 262 상당수를 폭격기로 생산
영국항공전 손실은 물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만 항공기를 8000대를 상실하고[18], 그간 누적된 동부전선 손실도 있고 그나마 제공권에서 완전히 발리는걸 막으려면 Me 262를 전부 전투기로 생산했어야했다. 하지만 1943년 11월 시제비행에 강력한 인상을 받은 히틀러가 전부 폭격기로 생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물론 실제로는 상당수가 전투기로 생산되었고 일선 부대에서는 폭격기 버전을 어렵지 않게 전투기로 개조해서 사용했다. 따라서 이건 히틀러의 실책은 맞지만 이 실책이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온것은 아니다.
4.1.12 바크라티온 재앙
히틀러는 1942년말~1943년초 스탈린그라드는 물론, 1944년초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후퇴불허, 진지사수명령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고도[19] 히틀러의 진지사수명령, 기동방어를 위한 후퇴불허라는 사망상(?)은 굳건했다.
당시 소련군은 233만명. 독일군은 85만명이었다. 3:1이 조금 안되는 병력비였는데, 독일군은 수비측의 입장이므로 히틀러의 간섭없이 싸웠더라면 소련군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도 있었다. 비록 기동력의 차이로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겠지만.[20]
1. 효율적인 방어를 하려면 병력을 방어가 용이한곳 위주로 배치해야하는데, 방어거점이 아닌 행정거점에 병력 다수 배치
2. 숫적으로 열세인 독일군이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려면 기동방어는 필수였으며 기동방어를 위해서라면 2보전진을 위한 1보후퇴. 즉 일시적인 후퇴는 불가피한데, 1km의 영토도 내주기 싫어하는 히틀러는 6월말~7월내내 사실상 기동방어를 거의 불허했다.[21]
3. 바로 위에 언급한대로 기동방어를 안하니 숫적으로 열세인 병력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련군은 총 전력의 우세뿐 아니라 몇몇곳을 집중타격해서 쌈싸먹기 각개격파를 하거나 포위시켜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니 실제로 전투를 할때는 3:1정도가 아닌 10:1이상의 병력비도 나오곤 했다.
1944년 6월말 시점의 독일군은 전성기보다는 크게 약화되어있었으며 이미 승리는 소련에게 완전히 기운 상태였지만 [22]히틀러와 최고사령부의 삽질이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독일에게 악영향을 준것은 확실하다. 쿠르스크 시점에서는 독일군이 공격측 입장으로 소련군이 우주방어로 구축한 수백km지뢰밭 방어선에 닥돌하고도 소련군 4 : 독일군 1 정도의 교환비를 냈었는데, 바크라티온에서는 독일군이 수비의 입장이었는데도 소련군: 독일군의 교환비가 1(18만) : 1.39(25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23] 그러나 중부 집단군의 상황은 기동방어를 수행하는것 조차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는데 3기갑군은 이름과는 달리 예하에 기갑부대를 편제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소련의 기만책에 낚인 독일군 사령부는 56기갑군단을 다른 지역으로 배치하는 삽질까지 겹치는등 히틀러가 아니라도 이미 충분히 망할 상황이었다.
- 정리
1943년의 소련군은 이미 누룽지 긁듯이 박박 긁어서 최대한 징병한 병력이 670만명이었는데, 쿠르스크 전투 손실 85만명, 쿠르스크 이후 반격에서 60만명이상 손실 (류만체프,쿠트죠프), 드네프르강 도하 전투로 최소 40만 명 이상 손실(최대 120만명까지도 추산)으로 1943년에만 200만명은 족히 사상자로 손실했고, 1944년 1월~3월 남부 우크라이나 공세로 110만명 사상자 손실, 1944년 6월~8월 바크라티온 작전 손실 77만[24] 발틱공세 27만명 손실(1944년 9월~11월) 1944년에도 최소한 214만명이상은 족히 손실했다.
즉, 1943~1944년 2년간 최소한으로 잡아도 소련군은 414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소련군이 전체 640만명을 넘는 병력을 유지했던것은 점령되었던 영토의 탈환을 통한 추가적인 징병과 부상자의 복귀 덕분이다.
히틀러가 뻘짓안하고 정상적인 작전운용이 가능했다면 1943~1944년 2년간 소련군의 414만명 이상 손실은 훨씬더 커졌을 것이고 드네프르강 라인을 유지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계속 독일이 쥐고 있으면 실제 역사에서 이루어진 영토 회복 후 마구마구 징집해서 벌충도 불가능하다.[25] 문제는 히틀러가 뻘짓을 안했어도 이미 전세는 소련이 우위였을 것이지만. 물론 덕분에 병력 손실을 훨씬 감소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히틀러의 삽질인건 맞다.
4.1.13 모르텐, 아르덴 삽질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부집단군이 50만의 손실을 내면서 붕괴하고 연합군의 상륙이라도 저지했다면 모를까 이미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한 이상 그나마 독일이 버텨 보고자 시도라도 해보려면, 서부전선의 병력들을 보존하면서 프랑스 동북부와 독일 서부의 삼림지대로 후퇴시키고[26] 그나마 제공권을 확보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되는, Me 262 제트기를 전투기로 몰빵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전을 펼치며 지연전을 벌이고, 동부전선으로 주력을 보내어 루마니아 플로에스티 유전을 사수하는 것이 거의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상황판단이 안 됐는지 1944년 8월 7일부터 서방연합군을 대서양으로 쓸어버리겠다는 망상으로 무리하게 모르텡 공세를 시도하다가 1400대의 전차중에서 1300대 이상을 상대측의 폭격에 의해 무의미하게 손실했다[27]. 게다가 어러다 후퇴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20만명의 포로가 추가로 발생하고 5만명의 추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런 뻘짓들을 하는 동안에 소련군은 1944년 9월초부터 루마니아 영내로 대대적으로 진격하여 플로에스티 유전을 점령한다. 중부집단군 50만의 괴멸만으로도 감당할수 없는 인적자원 소모였는데 괜히 뻘짓만 하다가 25만명을 추가로 더 잃으니, 1944년 12월의 아르덴 대공세 때는 당연히 질이 아주 떨어지는 병력인 노인과 어린 소년들이 다수 섞인 국민돌격대로 겨우 20만명을 편성할수 있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모르텡 공세의 뻘짓과 플로에스티 유전 상실후, 1944년 9월 시점에서도 아직 헝가리의 유전과 액화석탄이 있긴했지만, 그동안에 주요 연료 보급로 였던 플로에스티 유전을 상실한 손실은 너무 컸다. 게다가 그와 함께 동맹국들도 줄줄이 이탈하면서 순식간에 발칸반도 거의 전역을 상실한다.
4.1.14 라트비아 북단에 고립되어 있던 쿠를란트 집단군을 빼오지 않은것
쿠를란트 집단군[28]은 1945년 5월 항복할때도 19만명이란 대병력이 남아있었다. 이 20만명에 가까운 대군은 사실 제때 후퇴했으면 동프로이센으로 충분히 후퇴할수 있었지만 히틀러의 뻘짓인 사수명령으로 1944년 10월 중순부터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었다. 그나마 이곳은 발트해로 바다가 있기 때문에 유보트를 비롯한 해상보급으로 종전까지 계속 버틴다. 늦어도 1944년말 시점에서 쿠를란트 반도를 포기하고 병력을 철수시켜서 동부전선에 돌리든, 서부전선에 돌리든 하는게 훨씬 나았다. 히틀러는 발지전투란 뻘짓을 하면서 인력난으로 노인, 어린 소년까지 박박 긁어서 20만명을 투입하는데, 정작 동부전선의 정예병력 20만명을 고립된 라트비아 북단에 방치했다.쿠를란트군 입장에선 개꿀ㅋ
4.1.15 아르덴 병크
1944년 12월 장군들 대다수가 뜯어말린 아르덴 대공세를 히틀러의 고집으로 강행해서 뻘짓으로 전차 800대이상을 또 손실했다. 상당수가 동부전선에서 빼온거라 1945년 1월13일부터 폴란드 비슬라강을 건넌 소련군 공세에 동부전선은 쭉쭉 밀린다.[29]근데 이쯤 되면 히틀러의 뻘짓이 있든 없는 이미 끝난지 오래된 이야기다
4.1.16 히틀러의 마지막 뻘짓 '발라톤 호수 공세'
1945년 3월초 베를린 방위에 돌려야할 사실상 마지막 기갑병력으로, 헝가리 유전지대를 탈환하려고 공세를 펴다가[30] 겨우 15~40km를 전진하고 실패했다. 마지막 도박 실패로 받은 손실은 전차 331대(완전 파괴 86대 + 가동불능 245대)에 돌격포와 구축전차는 244대 손실(완전 파괴 42대 + 가동불능 202대)로, 전차+돌격포+구축전차 총 575대가 날라갔다(.....) 게다가 하프트랙과 장갑차의 손실도 거의 1000대에 육박했다.
이후 베를린 공방전에서 남은 극소수의 전차 + 팬저파우스트로 소련군을 상대하게 된다. 만약 이 뻘짓 공세를 안하고 베를린 방어전에 돌렸으면 베를린 함락이 최소한 몇주는 더 늦어졌을 것이다. 근데 더 버티면 버틸수록 양측 희생자만 더 늘어나니 오히려 잘된거네
이처럼 히틀러의 실책은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31] 결국 히틀러는 이렇게 거듭 병크와 병크들을 점철하여 수백만의 독일군의 목숨을 헛되이 날렸으며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 유럽을 제패하고 독일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웅비할 기회조차 놓쳐 패전하고 자살함으로써 히틀러 그 자신이 인류 역사에 이름난 천하의 개쌍놈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된다.[32]
4.2 히틀러의 군사적 결정으로 인한 승리들
비록 그렇게 많지는 않으나 이 결정들이 2차 대전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아주 좋은 결과를(나치 독일 입장에서) 만들어낸것은 명백하다. 앞서 히틀러의 수많은 실책들이 있었으나 애초에 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은 그까지 세력을 확작하는것 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비극을 만들어내기는 했으나 철저하게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만 고려한다면 대단한 업적인 셈이다.
4.2.1 1940년의 '낫질 작전'
'낫질 작전'은 벨기에로 진격하는 독일군은 조공으로 하면서 정작 주력이라고 할수 있던 기갑부대가 당시에 전차로는 기동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던 아르덴 고원지대를 통하여 고속으로 돌파, 벨기에로 공격해 오리라 생각되던 독일군에 대비하고 있을 프랑스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의 주력을 포위해버린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만슈타인이 이러한 작전안을 건의하자, 당시 참모장이었던 할더가 이끄는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끝까지 반대하였고 오히려 만슈타인을 새로 창설된 후방의 제38군단장으로 사실상 좌천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만슈타인에게 38군단을 방문한 히틀러와 독대할 기회를 얻게 되는 큰 행운이 되었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 총 참모본부가 제시하였던 황색 작전 계획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슈타인이 제안한 낫질 작전을 직접 듣고는 바로 허가하였고, 곧 총통의 지시로 낫질작전이 준비에 들어갔다.
이 작전이 실행되면서 프랑스 육군은 전력이 양분되었고 결국 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과 같이 됭케르크라는 해안 도시로까지 밀리게 된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나도 빠른 상태였고, 또 괴링의 요청이 있었기에 히틀러는 됭케르크에 몰려 있는 프랑스 및 영국 병력은 일단 제쳐두고 프랑스 점령 및 확보에 주력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덕분에 됭케르크의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결국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 하였으나 주력의 대부분을 잃은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당시에 참모장이었던 할더를 비롯한 육군 수뇌부들은 1차대전 때의 슐리펜 계획과 거의 다름이 없는 황색 작전을 계획하였는데 히틀러의 과감한 결단으로 인하여 그런 진부한 계획은 취소 되고 참신한 방법의 침공 계획이 수립되었던 것.
이때 만약에 히틀러가 아니었다면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은 묻혔을 것이고 원래의 황색 작전이 시행되었을텐데, 그리 되었다면 과거 1차대전 때와 같이 끝없는 대치전이 이루어져 결국 그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패전을 되풀이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히틀러의 이러한 결정으로 독일이 예전 4년간 서부전선에서 질질 끌다가 결국 패전한 1차대전과는 달리 2차대전에서는 불과 6주만에 서부전선을 정리하게되는 엄청난 성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때의 결정은 2차 세계대전에서의 가장 중요했던 결정들 중에 하나 였다고 볼수 있는데 독일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서부전선을 정리할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승리에서 얻은 결과물들은 어마어마해서 그러한 결과물들을 바탕으로 독일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결국 소련을 공격할 야심을 실행에 옮길 자신을 얻게 되었다. 사실상 2차 대전의 진행 방향을 가장 크게 바꾸어 버렸던 결정이었다. 한마디로 이게 아니었으면 1차 대전 시즌2 찍고 망했다.
4.2.2 1941년 '키예프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연전연승을 하던 중 8월 3일, 히틀러는 일시적으로 남쪽의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격을 위해 모스크바 전진을 중지했다. 중부집단군에 비해 더 강한 소련군의 저항으로 인한 남부집단군의 진격속도 떨어지자 키예프 돌출부가 형성되었는데 그곳에는 백만에 가까운 소련 남서 방면군이 있었다.. 이 돌출부의 이 거대한 병력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중부집단군에 크게 위험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 진격이 우선이라며 히틀러를 설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8월 12일 34 총통 지시령에서 프란츠 할더, 페도르 폰 보크, 하인츠 구데리안 등 모스크바로 바로 진격하자는 주장과 모스크바 진격을 시작하기 전 중부 집단군을 남부 집단군의 키예프 방면으로 진격시켜야 한다는 히틀러의 의견 사이에서 타협을 이루게 되었다.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을 각각 지원하기 위해 재배치되었던 중부 집단군의 2 기갑 집단과 3 기갑 집단을 중부 집단군으로 돌린 이후 북부 집단군의 4 기갑 집단과 함께 목표로 돌리고자 했다. 그리고 이 3 기갑 집단은 중부 집단군 지휘 하에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8월 18일, OKH가 히틀러에게 동부에서의 연속적인 작전에 대한 전략적 보고서(Denkschrift)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이 중부 집단군의 도움 없이 목표 달성이 가능하기에 모스크바로의 진격이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의 결정적인 작전을 시작하기까지 겨울이 오고 있어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8월 20일, 히틀러는 자신의 우선 순위에 대해 독일을 위해서 산업 지역을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8월 21일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은 히틀러의 지시 사항을 요약한 보고서를 육군총사령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전달했다. 이 계획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크림 반도 및 돈 강의 석탄 산업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강조했다.
8월 23일 구데리안이 직접 동프러시아 총통 본부에서 히틀러를 면담했지만 결국 설득하는데 실패하였다.
즉 수많은 군수뇌부 특히 중부집단군 2기갑단장 구데리안이 계속 해서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끝까지 추진하였던 것이다.
히틀러의 중부 집단군을 이용하여 남부집단군과 함께 소련군을 포위한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2개의 기갑군이 만든 포위망을 줄이기 시작했다.
키예프 동부의 마지막 군이 9월 26일 항복하였고 독일군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과 함께 약 6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히틀러는 이 전투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말했다.
이부분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계속 되지만 키예프 방면 남부집단군의 그 수많은 소련 병력을 그대로 놔두고 중부집단군이 모스크바로 진격을 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나도 컸다. 또한 모스크바에는 이미 수많은 전투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중부집단군이 키예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더 빠르게 모스크바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모스크바 함락은 힘들었다라는게 현재 군역사학자들의 보편적인 의견이다.
5 최종평가
요약하자면 히틀러는 집권을 위한 정치적 능력만 뛰어났다. 이것으로 끝났으면 다행인데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착각했던 것, 그리고 그 능력으로 굉장히 위험한 망상을 실천할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히틀러가 다른 사람들보다 빼어나게 잘하는 게 딱 두 개뿐이었는데 하나는 그 뛰어난 그림솜씨였고[33] 다른 하나는 선거 나와서 표를 얻는 능력이었다. 나머지 분야는 전부 다 일반인과 동일하거나 더 떨어지는 수준이었고 게다가 무관심했다. 특히 전투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히틀러의 모든 분야 중 최악이었고 똥별이라는 단어가 마치 히틀러를 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34]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를 평하기를 "총통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특유의 자유로운 생활상에서 나왔으나, 각종 격무에 시달리는 상황에 직면하자 통찰력을 잃어버렸다"라는 그럴싸한 평가를 내렸다. 즉 히틀러는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맨날 자빠져 자다가 갑자기 번뜩! 하고 사태를 해결해버리는 스타일. 역사적으로 보자면 게으른 천재와 같은 사람처럼 데리고 있으면서 밥을 먹여주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어쩌다 한 번씩 기발한 계책을 내서 밥값하는 스타일. 젝트 밑에 있었으면 유능한 장교라고 인정받았겠군
오히려 히틀러는 그러한 독재자의 위치 보다는, 처음에 자신이 자각했듯이 "독일 민족을 위해 준비된 영웅을 위해 북을 치는 사람"으로서 선동가의 위치에 있었거나, 필요할 때 괜찮은 전술적 아이디어나, 위에서 나왔던 날카로운 감이나 배짱을 통한 제3의 시선을 제시하는 참모로 활동했거나 혹은 철저하게 상징으로 남으면서 추종자들을 확실하게 장악해 놓고는 대신 이들에게 실무를 맡겼다면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근데 일본은 군대가 실무를 맡았어도 망했잖아? 안 될거야 아마.[35]
6 현재와 이후의 역사적 평가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어떤 책이 나왔나로 먼저 볼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를 다룬 서적은 전후 수천종이 쏟아져 나왔는데 음모론이나 별 신빙성 없거나 흥미위주의 책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다룬 서적으로는 수백여종이 있고 국내에 발매된 것중 권위있는 서적은 요아힘 C.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과 이언 커쇼의 <히틀러 1(의지),2(몰락)>이 있다. 요하임 페스트는 전문 학자는 아니지만 독일의 저명한 방송인겸 저널리스트로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에서 주필과 독일 공영방송 ZDF의 현대사 편집장을 20년간 지낸 전문가이며 이언 커쇼는 영국의 역사학 교수이다. 커쇼는 수십년 넘게 준비해서 발표한 히틀러를 다룬 저작으로 영국 기사작위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히틀러를 다룬 저작중에 가장 권위가 있고 자세한 대신에 단점이라면 읽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분량…페스트는 개정판 기준 1400페이지, 이언커쇼는 2200페이지가 넘는데 커쇼책은 페스트책보다 책 넓이도 넓어서 양은 거의 두배에 달한다. 두 작품 모두 읽으면 좋겠지만 하나만을 읽는다면 2000년대에 나온 커쇼책 하나만 봐도 무리가 없다. 반대로 히틀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실제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가 쓴 <히틀러 여비서와 함께한 마지막 3년>을 읽어보기 바란다.
페스트의 책은 70년대에 먼저 나왔고 90년대 동구권 기록이 해제되면서 개정판이 나왔지만 그래도 커쇼의 책보다 이전이며 전체적으로 무리는 없지만 현재의 연구와 사실과 약간 다른 면도 있다. 무엇보다 페스트 책의 단점은 독일인 특유의 하품터지는 문체 커쇼의 책은 2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이지만 문장도 읽기에 무리가 없고 번역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가격이 인터넷에서도 10만원에 육박한다…대학이나 공립도서관에 갑시다.
평전이 아닌 또 다른 저명한 서적으로는 시대가 낳은 쌍생아 스탈린과 히틀러를 동시에 다룬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Dictators)>가 있다. 리처드 오버리는 역사학자로 독소전쟁을 다룬<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의 저자이기도 하며 이 부분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이러니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순전히 영토욕심이니 나폴레옹이 전쟁 일으킨 것하고도 다르다. 게다가 히틀러가 비난받는 이유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도 있지만
사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정복자라는 면에서야 비슷하지만 행동과 영향면에선 전혀 다르다.나폴레옹 고인드립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신분제나 종교적 특권같은 중세적인 봉건 잔재를 청산했을 뿐만 아니라 정복하는 지역마다 이를 확산시키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하드 파워(막강한 군사력)와 소프트 파워(자유, 민주주의)를 전부 가진 미국같은 느낌. 오죽했으면 헤겔은 자기 나라를 침략한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하는 것을 보고 "저기 절대정신이 간다!"고 했을까. 반면 히틀러는 그저 파괴자 학살자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탈린에게 이를 갈던 소련 내 소수민족들조차 독일군을 상대로 항쟁에 나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36]
놀랍게도 현존하는 네오 나치들 가운데 상당수가 러시아에 있다. 이들 신 나치주의자는 사실 아리안민족의 추종보단 일종의 백인우월주의자에 가깝지만, 그들이 추종하는 히틀러는 러시아 민족인 슬라브족을 말살하려 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국영신문인 이타르타스에서는 2차대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가득 받은 노병이 승리의 날 행사에 참여하며 우는 사진과 같이 나치식 경례를 하는 러시아인 네오 나치를 같이 싣으며 조상의 무덤 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신 나치들이 한국 교민 등 여러 유학생과 투자가를 공격하고 더군다나 시베리아 지역의 한 아파트에서는 누구의 집인지조차 알지도 못한 채 아파트를 공격하여 황인종 처녀를 신성한 백인의 씨를 밭에 뿌려준다며 윤간하여 임신시키기도 했으나 러시아 정부에서는 이들이 우익집단이란 이유로 못본 척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투자가나 관광객 등이 중요해지자 푸틴 총리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현장에서 네오 나치를 신나게 패주고 연행하는 강압책을 보여주며 제재할 필요성을 느낀 듯 하다. 우라돌격을 벌이며 경찰이 네오 나치를 두들겨패준다
그리고 히틀러 생가는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이민족' 센터로 유용하게 재활용됐다고 한다. 그야말로 합법적 고인드립*(...)
6.1 옹호론?
칠레, 아르헨티나 같은 중남미 몇몇 국가들은 친독 또는 반미나 반서방 국가인데다[37] 중동, 아프리카나 인도 공화국 등지에서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이다. 일부는 아예 대놓고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여겨 그를 옹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국,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에게 시달린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스웨덴이나 핀란드(계속전쟁 당시 나치와 동맹을 맺고 협력했다.), 아이슬란드, 발트 3국 같은 국가도 마찬가지. 스웨덴, 핀란드, 발트 3국 등은 나치독일의 후원자였고(단 핀란드, 발트 3국은 소련에게 많이 시달렸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나치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아이슬란드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0세 때문에 화가 났던 히틀러가 독립시켜줬기 때문이다. 단 이 나라들은 (발트 3국을 제외하면) 현재 중립적으로 보는 경우는 있어도 결코 대놓고 히틀러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인 정치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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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5%에서 3%로
- ↑ 히틀러가 만약 (수정의 밤 이전인) 1938년에 암살당해 사망했더라면 그는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남았을 것이다. 이건 <히틀러 평전>을 쓴 요하임 페스트가 하는 말이다. 결국 전쟁과 유대인 학살이 문제였다.
독재는?그래도 요하임 페스트는 히틀러를 옹호하지 않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 제프리 메가기의 <히틀러의 최고사령부>에선 라인란트 재점령 및 오스트리아와 체코 병합에는 군부가 반대했지만 이후엔 히틀러에 동조했다고 한다.
- ↑ 큰 피해를 못 줘도 소음으로 인한 공황상태로 적들이 붕괴되는 적도 있었다고 한다. 구약성경서 7일 동안 나팔만 불렀더니 저절로 함락된 '여리고의 나팔'(Jericho's trumpet)이라고 이름 붙였다.
- ↑ 뭐, 결과적으로는 서부방벽 토치카는 롬멜의 예상대로 아무 쓸모 없게되기는 했다.
- ↑ 물론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기에 철회했다.
- ↑ 프란츠 할더의 경우 대미 선전포고가 있던날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 ↑ 물론 장군이었던 도조 히데키 역시 그랬다.
유유상종 - ↑ 덕분에 인류의 로켓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무기 자체의 성과는 가성비가 처참했다. V2의 경우 런던에 총 1358발을 쐈는데 사망자는 2754명.
생화학 무기를 넣고 날렸으면 가성비가 급상승 했겠지만그럼 더더욱 화학전으로 더 많은 살인을 했다고 더욱 욕을 처먹었겠지 - ↑ 히틀러가 직접 개발을 지시했다, 크루프사에서 제안한 것을 히틀러가 승인했다의 두가지 설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좋아했기 때문에 개발이 시작됐다는 점은 동일하다.
- ↑ '움직이는 요새'의 개념으로 방어시에는 토치카나 고정포대처럼 기능하고, 공격시에는 진격도 할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하는, 참으로 히틀러다운 현실감이 결여된 발상이었다.
- ↑ 역사학자들은 히틀러의 이러한 전차덕질이 1차 대전중 일개 보병으로 참호전을 겪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 ↑ 그런데 지구 반대편의 동맹군은 이 짓을 진짜로 했다.(...) 그나마 독일군의 그것은 중간에 조종사가 탈출하는 방식인 반면에 이쪽은 그런 거 없었다. 다만 일본도 공대공 자폭에는 독일처럼 조종사를 탈출할 수 있게 했다.
하는것 부터가 문제인건 넘어가자 - ↑ 1번과 2번의 병력 수만 해도 대략 35만명이다. 청색작전 실패의 큰 원인 중에 하나가 병력 수의 부족이었는데 이 병력들이 청색작전에 투입되었더라면, 작전 전체의 성공은 몰라도 스탈린그라드의 함락은 가능 했을수 있다. 병력을 둘로 나누고도 1942년 10월에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의 90%를 점령했었으니, 이 35만명을 둘로 나누어 A집단군과 B집단군에 분배하면 각각 17만5천명 정도가 늘어나는 것이니까
- ↑ 특히 모스크바 공략을 주장한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은 모스크바로의 쾌속 진군 도중에 무리하게 중부집단군을 키예프 방면 포위전에 투입한 것을 히틀러가 개입하여 독소전쟁의 향방을 바꾼 최대의 전략적 실수 중 하나로 평가한다.
- ↑ 물론 판터가 이꼴이 날거라고 예상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 ↑ 당장 추축국 하면 생각나는 나라가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라는걸 생각해보라.
삼연병 - ↑ 단, 이 손실은 이탈리아군과 비시 프랑스군이 보유한 항공기 손실을 모두 포함한 수치이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이 손실한 항공기가 1,400여대임을 고려하면 결코 가벼운 손실은 아니다.
- ↑ 그나마 뒤늦게나마 만슈타인의 재량으로 병력은 상당수 살려냈지만 알토란같은 기갑장비들은 대다수 버리고 후퇴해야했다.
- ↑ 소련의 T-34는 공방능력에 있어서는 티거나 판터에 못미치고 4호 전차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전략적 기동성은 당대의 어느 전차보다도 우수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은 수송량의 절대다수를 말에 의존한 반면에 소련군은 차량을 이용했다. 말과 차량의 기동력 차이는 명백하다.
- ↑ 8월달에 뒤늦게 발터 모델이 기동방어를 하기는 했다.
- ↑ 쿠르스트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면서 독소전의 무게추는 완전히 소련쪽으로 기울었다.
- ↑ 전사 및 실종자만 집계한 수치. 포로와 부상자를 전부 집계하면 소련이 77만명, 독일이 60만명의 손실을 입었다.
- ↑ 이는 사수명령으로 60만명의 독일군이 77만명의 소련군 사상자를 내고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잡히게된 이유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군과 독일군의 기동력 차이로(소련은 랜드리스로 받아온 차량을 이용한 반면에 독일은 말을 이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 ↑ 드네프르 서안 우크라이나 인구만 해도 족히 2500만명은 되고, 벨라루스도 거의 1000만명 정도였으니 여기서 러시아 본토 식으로 10%이상 징병하면 최소가 350만명이다.
- ↑ 1944년 8월 팔라즈포켓 재앙, 1944년 12월 발지전투에서의 뻘짓으로 독일군이 거의 반신불수가된 상태에서도 서부전선의 연합군이 독일 서부의 삼림지대를 완전히 돌파한 것은 1945년 3월이 되어서였다. 모르텡 공세에서의 뻘짓으로 날린 전차 1300대와 25만의 병력, 그리고 아르덴 공세에서 뻘짓으로 날린 전차 800대와 10만명 전후의 병력을 보전했더라면 서부전선은 훨씬 더 오래 버틸수 있었다.
- ↑ 이정도 규모의 손해이면 쿠르스크 전역에서 손실하였던 기갑병력의 거의 2배에 달한다
- ↑ 북부집단군의 잔존병력
- ↑ 그나마 보유하던 헝가리유전도 이때 함락된다.
- ↑ 물론 이떄도 장군들은 반대했는데 히틀러가
개지랄하여관철시켰다. - ↑ 그러나 이런 실책은 히틀러만 저지른것이 아니며 스탈린이나 처칠도 이런 실책으로는 히틀러 못지 않게 많이 저질렀으니 히틀러만 무능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당장 소련이 초반에 탈탈 털리는것 히틀러는 저리가할 스탈린의 트롤링이 막대한 기여를 했다는걸 생각하면.
- ↑ 물론 만에 하나 2차대전에서 승리하여 독일이 초강대국이 되고 히틀러가 자연사했더라도 독일은 머지않아 소련처럼 무너지고 나치 독일은 공산 소련처럼, 히틀러가 스탈린과 다를바없는 폭군으로 욕을 먹었을 것이라는 점은 변함없었을 터이지만(...)
이기나 지나 ㅄ - ↑ 오죽하면 히틀러를 다룬 매체들에서 '계속 그림이나 그리지, 으이구!'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히틀러의 미술 실력이 평범하거나 낮은 수준이었다는 말이 많지만, 독일의 역사학자인 라이너 자이틀만 등에 따르면 사실 히틀러의 그림 실력은 적어도 평타 이상이었다. 다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계속해서 옛날 화풍을 고집한 것일 뿐이지 그림은 꽤 잘 그리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별로였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히틀러에 대한 증오심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는 의견도 있다.
-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히틀러가 어떻게 행동했나를 보면 확실히 증명된다.
- ↑ 독일군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점, 문민통제를 거부한 점, 의견이 다르면 최고 지휘관의 명령도 무시했던 점에서 일본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만 해도 사방에 적을 만들었던 빌헬름 2세의 책임이 크긴 하지만 슐리펜 계획을 중지하라는 빌헬름 2세의 명령에 독일군이 복종했다면 전쟁이 그렇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 다만 스탈린에게 이를 갈던 이들도 소련편에서 싸웠다는 내용의 진술이 많은 데 실제론 독일과 소련 양국을 상대로 저항을 펼친 이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당장 스탈린도 독소전 이전에 우크라이나에서 한 짓만 봐도 알수있다. 이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UPA
우파:우크라이나 반란군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1950년까지 활동하였으나 스탈린의 진압으로 전멸한다. - ↑ 다만 아르헨티나 등에서 나치 잔당을 받아준 건 그 나라들이 친독이라서보다는 다른 부득이한 이유로 받아줬을 가능성이 더 높다. 나치의 남미 도주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