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바(중순양함)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넘어옴)
아오바급 중순양함
아오바키누가사

青葉(아오바, 푸른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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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해군이 건조한 아오바급 중순양함의 1번함. 동형함으로는 2번함인 키누가사가 있다. 1924년에 기공되었으며 1번함인 아오바는 1945년 7월 28일 구레 군항 공습때 격침된 후 동년 11월에 해체되었고, 2번함 키누가사는 1942년 11월 13일에 격침되었다.

이름의 유래는 교토와 후쿠이 현 경계에 있는 아오바 산이다.

2 함생

와레 아오바 때문에 민폐함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실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몇 안되는 일본군의 수훈함.

해군조약 이전에 건조된 구닥다리 함임에도 여러차례 대파를 당하여 침몰 직전까지 가는 와중에 기적적으로 침몰만은 면한 경력이 있고, 수많은 수훈을 세웠기에 솔로몬의 늑대, 불침 중순양함 등의 별명을 얻었다.

2.1 전쟁 초기

중일전쟁에서는 상하이 상륙 작전 등에 참가했으며, 1937년부터 1940년에 걸쳐 개수작업을 받고 20.3cm 2연장포 3기로 주포를 교체하고 어뢰발사기도 현측 고정식에서 갑판 위에 장착하는 선회식으로 교체했으며, 대공기관총도 증설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무렵에는 아오바급 중순양함 2척과 후루타카급 중순양함 2척으로 이루어진 제6전대의 기함을 맡았으며, 제6전대의 사령관은 고토 아리토모.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아오바는 제6전대 기함으로서 남방작전의 일환인 괌 공격(일본 이름은 G작전)에 참가한다. 당시 일본군은 괌의 미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지만, 미군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괌을 수비할 수 없다고 판단, 별다른 대책을 준비하지 않았다. 어쨌든 일본군은 제6전대와 수상기 모함 키요카와마루 등을 동원하는 강수를 두었고 개전하자마자 수상기로 괌을 대대적으로 폭격했으며, 10일 새벽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 작전은 아침 6시에 막을 내렸는데, 미군이 재빨리 항복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너무 많은 전력을 동원했음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전사자 1명에 부상자 6명이라는 가벼운 피해로 괌을 접수했으므로 작전은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여담으로 양륙작업이 끝난 것은 전투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오후 3시였다고.

일본군이 괌을 점령한 후, 아오바는 라바울 공격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1차 웨이크 섬 전투에서 일본군의 침공군 기함인 경순양함 유바리가 대파되고 구축함 2척이 침몰하고 3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는 동안 미군 전사자가 0명이라는 굴욕적인 기록을 남기며 패주했기에 2차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제6전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해안 가까이까지 접근해서 화력지원을 실시하는 등의 활약으로 승리에 일조했고, 이후에는 라바울 공략전(일본 이름은 R작전)에 참가했으며, 라바울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1942년 2월 11일에 일본군의 종군기자이자 일본 SF의 시조 중 한 사람인 우미노 쥬조가 승선하였다. 우미노 쥬조는 3월 28일까지 아오바에 머물렀으며, 배의 거주성은 안 좋았지만 승조원들의 근무태도는 인상적이었다고 기록했다. 우미노 쥬조가 아오바에서의 취재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 적도남하(赤道南下)이다. 서적정보

2.2 산호해 해전

투라기 침공에서는 제6전대를 이끌고 무츠키급 구축함 우즈키, 경순양함 유바리와 함께 경항공모함 쇼호의 호위를 맡았으며 투라기 침공부대를 성공적으로 엄호했다. 이후 이들은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와 합류했으나, 미군이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렉싱턴과 요크타운을 파견하고 일본군도 이에 맞서 쇼카쿠즈이카쿠를 핵심으로 한 기동부대(제5항공전대. 일명 5항전)를 보내면서 산호해 해전이 벌어진다.

5월 7일의 1차전에서 일본군은 정찰기를 내보냈고, 쇼카쿠의 정찰기가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한다. 일본군은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공격대를 대거 발진시켜 이 목표물을 공격하는데, 제6전대의 후루타카가 다른 위치에서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키누가사의 정찰기가 이를 재확인한다. 문제는 미군도 포트 모르즈비 공격부대의 위치를 확인했다는 점으로, 미군은 포트 모르츠비 침공부대를 5항전으로 착각해서 전력을 다해 쇼호를 공격했다. 제6전대는 쇼호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미군기가 93대나 되었기에 항모 호위임무에 실패했고, 쇼호는 13발의 폭탄과 5발의 어뢰를 맞고 불바다가 된다. 그제서야 자신들이 유조선을 항모로 착각했음을 안 5항전은 급히 유조선 공격을 취소했으나, 쇼호는 그대로 침몰한다. 적의 위치를 가르쳐줬는데 왜 때리지 못하니

5월 8일, 5항전은 제6전대의 후루타카와 키누가사를 차출해서 자기들 기동부대에 합류시킨다. 아오바와 카코는 그대로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와 함께 하게 되었고, 대파된 쇼카쿠는 후루타카, 키누가사,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으로 돌아간다. 미군 역시 그대로 퇴각했지만, 포트 모르즈비의 연합군 비행대는 멀쩡했고 미국-호주 연합함대도 있었기에 그리고 후루타카와 키누가사도 빠졌기에 제4함대 사령관 이노우에 중장은 포트 모르즈비 공격부대를 철수시킨다.

1942년 7월 14일부로 아오바와 제6전대는 제18전대와 경순양함 유바리, 그리고 몇 개의 구축대와 함께 제8함대에 편입되어 과달카날 전역에 투입된다.

2.3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해전

사보섬 해전에서는 제8함대의 일원으로 작전에 참가했으며, 아오바가 띄운 정찰기(아오바 1호기)는 한밤중에 불을 켜고 날아다니는 기행을 벌인 끝에 연합군 함대를 발견했다. 미군도 이 정찰기를 발견했지만 "적이라면 한밤중에 불을 켜고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닐 리가 없다"는 이유로 아군기라고 판단했다. 이 정찰기는 이후 조명탄으로 연합군 함대의 위치를 밝혀주었고, 제8함대는 기함 초카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게 된다. 아오바는 초카이 바로 뒤에 서서 제6전대를 이끌고 돌격했으며,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미군을 개발살내는 데에는 30분도 안 걸렸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중순양함 4척 침몰, 1척 중파, 구축함 2척 대파라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일본군의 피해는 초카이와 아오바가 소파당했고 격침된 배는 한 척도 없었다. 미 해군에게 더욱 수치스러운 건 그 유명한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3척의 항모를 보유한 61임무부대가 과달카날에 있었는데도 싸우지도 않고 퇴각했다는 점(...) 이 가공전기를 방불케하는 패배에 대해 미 해군은 역사상 최악의 해전이라는 평가를 내렸고, 일본군은 미군의 공습을 우려하여 철수하지만 제8함대 사령관 미카와 중장은 미군 수송선단까지 격파하지 않고 철수했다는 이유로 일본군 수뇌부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패배로 미군은 제해권을 빼앗겼고, 미 해병대는 과달카날에 고립되어 물자부족에 시달렸으며, 밤마다 찾아오는 일본 함대의 포격에 고통받게 되었다.

이 해전에서 아오바는 적탄에 어뢰발사관을 피격당했지만, 일본군답지 않게 산소어뢰에 불이 붙기 전에 화재를 진압했으므로 소파에 그쳤다. 일본어 위키 제1차 솔로몬 해전에 따르면 기관총탄에 산소어뢰가 피격되어 화재가 발생했지만, 스기우라 일등 수병의 결사적인 소화작업 덕분에 진화에 성공했다고 한다. 설계상의 결함을 노련한 수병과 행운 덕분에 극복한 사례.

그러나 해전 이후 귀항 중에 후루타카급 중순양함 카코를 날려먹었다. 귀항 중 적의 세력권을 벗어나자 함대 기함이었던 아오바에서 이제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잠수함 회피 운동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후 카코가 미군 잠수함 S-44에게 어뢰 3방을 얻어맞아 격침되고 말았다. 아오바의 수상정찰기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S-44를 막지는 못했다고. 안전하다면서요?

다만 카코의 함장은 '적이 너무 멀리서부터 쫓아온거니 어쩔 수 없었다'라며 딱히 아오바의 판단을 책망하지는 않았다. 고토 소장은 나중에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고.

사보섬 해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

2.4 동부 솔로몬 해전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아오바는 제8함대 기함 초카이와 함께, (이제 3척으로 줄어든) 제6전대를 이끌고 다나카 라이조가 이끄는 제2수뢰전대(기함 진츠와 구축함 5척)와 함께 수송선단을 호위하게 된다. 일본군의 편성은 아래와 같다.

  • 주력부대
    • 제3함대(주력)
항공모함 쇼카쿠
항공모함 즈이카쿠
구축함 6척
  • 제3함대(전위)
전함 히에이
전함 기리시마
순양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 제2함대(전위)
전함 무츠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유라
수상기모함 치토세
구축함 6척
  • 미끼부대
항공모함 류조
중순양함 토네
구축함 2척
  • 수송부대
    • 수송함대
수송함 3척
순찰정 4척
  • 제2함대(제2수뢰전대)
경순양함 진츠
구축함 8척
  • 제8함대
중순양함 초카이
중순양함 아오바
중순양함 키누가사
중순양함 후루타카

미 해군은 항공모함 사라토가와 엔터프라이즈, 전함 노스케롤라이나,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1척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항공모함 류조를 미끼로 내세워 미군을 끌어들였고, 미군은 류조를 격침시킨다. 그러나 일본군은 미군이 미끼를 문 것을 확인한 후, 대대적인 반격으로 엔터프라이즈에게 폭탄 3발을 먹여 중파시킨다. 일본군의 수상기모함 치토세도 미군의 반격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일본군의 우세였다. 그러나 일본군 기동부대의 지휘관인 나구모 주이치가 제3항공함대를 철수시킨다. 덤으로 제2함대(전위)의 주력인 나가토급 전함 무츠는 너무 느려서 순양함들을 쫓아가지 못하고 낙오된다. 무츠를 호위하기 위해 구축함 3척이 뒤로 빠졌고, 이들은 이후 트럭으로 돌아간다.

후방에 대기하던 다나카의 수송선단은 일본군의 우세로 전투가 끝나자 다시 남하했지만, 나구모의 철수로 인해 제공권을 장악당한 해역에서 과달카날까지 가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된다. 원래 계획은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류조가 미끼 역할을 수행한 후, 살아남아서 다나카의 수송선단에 공중엄호를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류조는 침몰했으므로 항공엄호는 사라졌다. 산호해 해전에서도 제공권 없이 돌파 명령을 받았는데, 똑같은 일이 재현된 셈. 일단은 제2함대(전위)에서 경순양함 유라를 지원해줬지만, 그 이상의 지원은 없었다.

다나카는 공습을 피하기 위해 1942년 8월 24일 밤에 구축함 5척으로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포격하고, 초카이와 키누가사와 경순양함 유라의 정찰기로 야간폭격까지 감행하지만 미군은 25일 낮에 핸더슨 비행장의 급강하폭격기를 띄워 공습을 감행, 다나카의 기함이자 제2수뢰전대의 기함인 경순양함 진츠에 큰 피해를 입힌다. 다나카는 진츠를 돌려보낸 후 구축함 가게로를 새 기함으로 삼았고, 25일 밤에는 초카이, 아오바, 키누가사, 후루타카, 유라의 정찰기 전부를 동원해 야간공습을 감행한다. 아오바, 사실은 항공순양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군도 B-17까지 불러와서 수송선단을 계속 공습했고, 결국 다나카는 무츠키급 구축함 무츠키와 수송선 1척을 잃고 후퇴한다. 수송함대가 과달카날에 도착하지 못한 원인은 항공모함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철수한데 따른 제공권 상실이었으므로, 함대를 철수시킨 나구모 주이치는 욕을 바가지로 처먹었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

2.5 와레 아오바

2.5.1 원인

과달카날 전투 당시, 미군이 제공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군측은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야간전 위주의 작전을 행하고 있었다. 아오바를 포함한 제6전대는 밤을 틈타 미군의 헨더슨 비행장을 기습포격함으로서 적의 시선을 끌어 동시에 진행되는 일본의 물자수송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헨더슨 비행장을 향해 출발. 하지만 선행하고있던 수송함대가 미군 정찰기에게 발견되고, 이 수송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미 해군의 제64기동부대를 출동하면서, 1942년 10월 11일, 에스페란스 곶 해전이 벌어진다.

2.5.2 규모

양측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일본 해군미국 해군


* 제6전대
아오바급 중순양함 아오바
아오바급 중순양함 키누가사
후루타카급 중순양함 후루타카
후부키급 구축함 후부키
후부키급 구축함 하츠유키
* 수송함대
수상기모함 닛신
치토세급 수상기모함 치토세
아사시오급 구축함 아사구모
아키즈키급 구축함 아키즈키
후부키급 구축함 무라쿠모
아사시오급 구축함 나츠쿠모
후부키급 구축함 시라유키
아사시오급 구축함 야마구모


* TF 64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
펜사콜라급 중순양함 솔트레이크 시티
세인트루이스급 경순양함 헬레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보이스
글리브스급 구축함 던컨
벤슨급 구축함 래피
글리브스급 구축함 맥칼라
글리브스급 구축함 부케넌
벤슨급 구축함 파렌홀트

2.5.3 전개

증원부대는 제6전대와 분리되어 목적지로 향했고, 일본군은 수송함대를 위협하는 핸더슨 비행장에 폭격을 가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이윽고 미군 정찰기가 14시 45분에 일본군 수송함대를 발견했고, 제64기동부대가 이들을 잡기 위해 출동한다. 제64기동부대의 지휘관인 스코트 소장은 신형 레이더를 장비한 경순양함 헬레나 대신 구닥다리 레이더를 장비한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를 기함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나중에 문제를 일으킨다.

21시 30분 무렵에 제64기동부대의 중순양함 2척이 정찰기를 발진시키는데, 이들 중 한 대가 조명탄 발화 사고로 추락한다. 이걸 본 고토 소장은 과달카날에 있는 아군이라고 착각해서 발광신호를 보내지만, 거리가 멀어서 응답은 없었다. 일부 장교가 적일지도 모른다고 진언했지만, 사보섬 해전에서 영혼까지 털린 미 해군이 밤에 나타날 리가 없다고 오판한 고토 소장은 그 의견을 무시했다. 어쨌든 미군 정찰기들은 일본군의 수송함대를 포착해서 스코트 소장에게 보고했고, 스코트 소장은 일본함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수색을 계속했다. 여담으로 일본군의 수송함대 지휘관인 조지마 소장은 "이 근처에 미군이 없다"는 보고를 고토 소장에게 보내는데, 이후에 미군기가 지나갔다(!) 조지마 소장은 급히 미군 발견의 보고를 보내지만, 이 보고는 고토 소장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23시 32분, 경순양함 헬레나의 신형 레이더가 제6전대를 발견했고 곧 보이스와 던컨의 레이더도 아오바를 포착했다. 애초에 이쪽은 명확한 요격임무를 위해 출격하여 해당 해역에 자신들 외에는 모두 적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상태였던지라 보다 대응이 빨랐다. 게다가 마침 상황도 적이 아군의 옆구리로 들어오는 T자 형태로 유리한 상황.

하지만 이 T자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스코트 제독이 함대 변침명령을 내리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선행하던 구축함 두척이 제대로 방향을 돌리지 못하고 함대에서 떨어져나가 낙오해버린 것. 결국 미군측도 사라진 이 구축함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군을 오사하는 사태를 우려해 뻔히 일본측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도 사격을 개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는 동안 아오바의 초계병이 7km 전방에서 미군의 제64기동부대를 발견. 하지만 해당 해역은 6전대 앞에서 일본의 물자수송을 위해 선행하는 수송함대가 있는 상황이었고, 사전 정찰정보로 '해당 해역에는 적함대가 없다'는 보고를 받았던 제6전대의 사령관 고토 소장은 이를 아군의 수송함대로 오인하고 만다. 조지마 소장을 조져야 합니다

2.5.4 전투

끝내 일본측이 육안으로 확인이 되는 4500m 거리까지 다가오자 조바심이 난 경순양함 헬레나에서 기함 샌프란시스코에게 '사격허가를 바란다'는 통신을 보내고, 이에 샌프란시스코는 '통신을 수신했다'는 뜻으로 'Roger'라는 답변을 보냈는데, 헬레나가 이것을 '사격을 허가한다'로 잘못 알아먹은 통에 헬레나가 포문을 열었고, 이에 이끌리듯 다른 미군함들도 포격을 시작하면서 전투가 개시. 결과적으로 레이더도 아니고 전력차도 아니고 사전정보도 아닌 이 오해에 의한 선제공격이 전황을 미군에게 유리하게끔 만들어주게 되었다. 스코트 제독은 평소 훈련에서 "야간전에서 함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발포해라"라고 강조했으므로 잘못한 건 아니었다.

이때 미확인물체를 살피던 아오바의 항해장이 적의 정체를 파악하고 '저건 적입니다!'라고 보고하자 비상이 걸렸다. 아오바의 함장이 황급히 총원전투배치를 명령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헬레나의 포탄이 아오바의 함교에 직격하고,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불발탄이었는지라 포탄이 터지지 않은채 함교의 벽 내부를 이리저리 튕겨다니며 아오바의 함교를 피곤죽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전투개시와 동시에 제6전대의 지휘계통은 괴멸되었으며, 아오바는 함교 외에도 2번 포탑과 사격 방위반과 통신장비를 파괴당해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여기서 일본과 미국의 주장이 갈리는데, 일본측 주장은 아오바가 경계를 위해 우선회를 시작하다가 포격에 맞았다는 것이고, 미국 측 주장은 제6전대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미군의 기습포격을 당했으며 이후에 고토 소장이 우선회를 명령했고, 그 후에 아오바의 함교에 포탄이 명중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의 주장이 사실이든간에 결과는 어차피 똑같았고, 일본군은 1분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처맞았다. 이때 아오바가 적함을 아군으로 착각하고 와레 아오바라는 발광신호를 보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와레 아오바는 사실인가' 항목 참조.

여기서 미군이 그냥 포격을 계속했다면 일본군은 괴멸되었겠지만, 전투가 벌어지고 난 뒤로도 스코트 제독은 사라진 아군 구축함을 포격하는게 아닌가하여 다급하게 사격중지 명령을 내리고, 4분 동안 포격을 멈춘 뒤 구축함 2척의 소재를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실제로 이때 낙오한 미 구축함 던컨과 파렌홀트는 아군과 적군 사이에 끼어 양쪽으로부터 집중포격을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경순양함 헬레나의 신형 SG레이더를 제대로 활용했다면 포격을 멈출 필요도 없이 제6전대를 괴멸시켰을 것이다.

미군의 공격이 멈춘틈을 타 태세를 정비한 일본군은 후퇴를 결정. 재빨리 선회한 후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오바는 우선회를 거의 끝냈지만 그 뒤에 있던 후루타카는 그렇지 못해서 우선회 도중 집중포화를 맞게 된다. 여기서도 일본 측에서는 기함 아오바를 구하기 위해 후루타카가 몸을 던져 방패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미국 측에서는 후루타카가 아오바의 뒤에 있어서 우선회가 상대적으로 늦었기에 얻어터졌다고 주장하지만 어차피 두 배 모두 개발살난 건 똑같았다(...) 이 와중에 아오바의 3번 포탑에 포탄이 명중하면서 약실 안에 있던 포탄과 장약이 폭발, 아오바는 탄약고 유폭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3번 포탑의 탄약고에 바닷물을 주수하면서 아오바는 유폭을 모면한다.

한편, 포탄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걸 보고 겁을 먹고 얼떨결에 좌선회를 실시한 구축함 하츠유키와, 그 뒤를 따라간 아오바급 중순양함 2번함 키누가사는 반격을 가하면서 전속력으로 전장을 이탈했다. 이 과정에서 키누가사는 경순양함 보이스의 탄약고 부근에 포탄을 명중시켜 화재를 일으킴으로서 107명을 전사시켰지만, 키누가사의 포탄이 만든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가서 불이 꺼지는 바람에 탄약고 유폭은 없었다.

후부키는 전투 초기에 침몰해버렸고, 한참을 얻어맞던 아오바와 후루타카는 가까스로 항해능력을 유지한채 전장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90발 이상의 포탄을 얻어맞은 후루타카는 도저히 재기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던지라 결국 바다에 버려져 그대로 침몰했다.

2.5.5 피해

양측의 피해는 다음과 같다.

앞서 가고 있던 일본군의 수송함대는 무사히 과달카날에 도착해서 결과적으로 수송함대 호위는 성공시켰지만 헨더슨 비행장 포격은 실패했고, 제6전대의 상황을 전달받은 뒤 이를 도우러 합류한 구축함 무라쿠모가 후루타카의 승무원을 구조한 뒤 후퇴하던 도중 미군의 공습을 받아 항해불능에 빠지고, 또 이 무라쿠모를 구조하던 구축함 나츠구모 역시 공습을 받아 격침된다. 결국 구축함 하츠유키가 3척분(…)의 생존자들을 구조하고, 무라쿠모는 자침처분.

아오바는 이 전투에서 40발 이상의 포탄을 맞아 2번 포탑이 손상되고 통신장비, 사격 방위반, 3번 포탑이 파괴되고 함교가 개발살났지만, 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했다.

구축함 후부키의 승무원 중 8명은 일본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했으나, 함장은 전사했고 승무원 109명은 미군에 의해 구출되어 포로가 되었다.

2.5.6 와레 아오바는 사실인가?

적을 아군으로 착각해서 와레 아오바라는 발광신호를 보내다가 미군에게 처맞았고, 얻어터지는 와중에도 '와레 아오바'라는 발광신호를 계속 보냈다는 게 그 유명한 와레 아오바 전설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많은 이견이 존재하지만, 일단 전투개시전까지 아오바에 탑승하고 있던 제6전대 사령관 고토 소장이 꽤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취했던 것은 대부분의 기록이 일치한다. 미함대를 아군이라 생각하면서도 만약을 대비한 최소한의 대처는 했다는 소리. 다만 미군 측에서는 완벽한 기습이라고 단언하고 있으며, 일본군 수뇌부도 제6전대의 경계실패를 비판한 게 사실이다.

전투개시 이후의 아오바와 고토 소장에 대해서도 다소 견해가 갈린다. 일단 선제공격에서 큰 부상을 입은 고토 소장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상대를 아군이라 믿고 '와레 아오바(나는 아오바다)'라는 발광신호를 계속 보내도록 명령했으며, 죽을 때까지도 아군의 오인사격을 당한 줄로만 알고 (포격을 가한 미군을 원망하며) "바보 같은 놈들"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이 있다. 반면 이 '와레 아오바'는 통신시설이 날아가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태에서 기함의 건재를 알리기위해 아군에게 보냈던 발광신호라는 설도 있다.[1] 또한 당시 6전대의 참모였던 키시마 중좌는 고토 소장에게 '연막을 피워서 태세를 정비한 다음 반격하겠다'는 허가를 받아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만 미군은 이 발광신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혼란상황에서 치뤄진 야간전이었고, 일본측은 지휘부가 순식간에 괴멸당해 생존자 증언이 적은데다 전투기록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지라 결국 당시 일본측 상황이 어떠했지는 불명. 사실 '고토 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적을 아군이라 믿고 있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일본에서 발간된 태평양전쟁사 관련서적들 중 딱 한 권뿐이다.

미군 측에서는 와레 아오바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완벽한 기습에는 성공했지만, 헬레나의 SG레이더를 좀 더 활용했다면 완벽하게 제6전대를 괴멸시킬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게 미군 측 시각이며, 발광신호 이야기도 없다.

따라서 와레 아오바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 단지 '와레 아오바'의 임팩트가 워낙 강한데다 한사람의 삽질탓으로 돌려버리면 속이 편한지라(…) 정설처럼 떠돌고 있는 것.

2.5.7 패배의 원인

일본군엔 레이더가 없었다.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진짜 원인은 이것이다. 미군은 레이더로 일본군을 먼저 발견했고, 일본군이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엔 이미 포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유리한 조건인데도 완승을 거두지 못했으니, 미군이 SG레이더를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했어야 했다고 땅을 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일본군의 견시는 야간감시능력이 탁월했고, 타사파롱가 해전에서도 레이더 이상의 실력을 보여준 바가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눈은 레이더를 당해낼 수 없으며, 미군의 레이더가 점점 발전하면서 일본군은 야간전에서도 맥을 못추게 된다. 벨라만 해전에서 일본 구축함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게 그런 이유다. 일본에서는 제6전대의 경계실패를 패배의 원인으로 꼽고 있지만, 그걸 인정하더라도 미군이 일본군을 먼저 발견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경순양함 헬레나의 선제공격도 중요한 이유이다. 레이더 덕분에 일본군을 먼저 발견하고도 미군 지휘관인 스코트 제독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기회를 놓칠 뻔했지만, 헬레나가 성급하게(?) 발포하는 바람에 미군은 기습공격에 성공했고, 이게 먹히면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미군이 더 머뭇거렸으면 일본군도 미군에게 반격했을 것이고, 산소어뢰로 미 함대를 날려버렸을 수도 있다. 이후 벌어진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미군이 공격기회를 잡고도 4분동안 머뭇거리다가 산소어뢰에 맞고 참패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산소어뢰를 발사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은 것도 승리의 커다란 요인이었다.

여담으로 키누가사는 격침될 때까지 레이더를 달지 못했지만, 아오바는 과달카날 전역 이후 레이더를 달게 된다.

2.5.8 여파

이 참담한 패배의 책임자인 제6전대 사령관 고토 아리토모 소장은 일단은 전사했으므로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그런데 제6전대에 레이더가 없었던 건 이 사람 탓이 아니잖아?

제8함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는 이 패배에 빡돌아서 해전이 끝나자마자 제6전대 참모 키시마 중좌를 해임했다. 안 그래도 사보섬 해전(1번 항목)에서 승리의 기회를 날려버린 멍청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는데, 휘하인 제6전대가 하라는 경계는 안하고 어리버리하게 미군에게 승리를 갖다바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니까 레이더 주세요 이 패배만이 원인인 건 아니지만, 이후 미카와 제독은 과달카날 전투가 종료된 후 1943년 4월 1일자로 해임되어 한직을 맴돌게 된다. 절대로 아오바 혼자서 미카와 제독의 목을 날린 게 아니다!

연합함대의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는 이 해전의 보고를 받고 제6전대의 방심과 자만심, 경계실패를 크게 질책하며 "제대로 싸운 거 키누가사뿐이잖아"라고 평가했다.

또한 대파된 아오바를 둘러본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군의 불발탄이 많은 것을 보고서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라며 아오바를 격려했다는 모양이다. 뭐요? 불발탄이 나오지 않았다면 100% 격침됐을 것이라는게 당시 수리당담자의 말.

미군은 사보섬 해전에서 불발탄이 속출했기에 포탄의 개량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는 별 효과를 못 본 것으로 보인다. 저 많은 불발탄을 보라 다만 사보섬 해전에서 1년 가량 지난 후에는 불발탄 발생률을 크게 줄이게 된다.

여담으로 이 해전은 야간전에서 무적을 자랑했던 일본 해군이 패배한 첫 야간전이었다. 다만 일본군 수송함대가 과달카날에 무사히 도착했으므로 일본군도 손해만 본 건 아니었다. 피해가 큰 게 문제지만(...)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은 항목 참조. #

2.6 키누가사의 운명

아오바가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귀환한 후, 키누가사는 6전대의 기함을 맡아 10월 15일 새벽에 제8함대 기함 초카이와 함께 헨더슨 비행장에 752발의 8인치 포탄을 퍼부었다. 이미 10월 14일 새벽에 공고와 하루나의 포격을 받고 큰 타격을 입은 헨더슨 비행장에게 있어 이는 치명적이었고, 핸더슨 비행장은 거의 모든 비행기를 상실하고 연료도 전부 불타버렸다. 이 포격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를 참조.

이후 키누가사는 제8함대의 일원으로 기함 초카이와 함께 과달카날 해전에 참가, 1942년 11월 14일 새벽에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한 제7전대를 엄호한다. 그러나 14일 아침이 되자마자 핸더슨 비행장의 미 해병대는 돈틀리스를 발진시켜 일본군을 폭격했고, 키누가사는 어뢰 4발을 맞지만 탈출한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항공모함)이 보낸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의 집중공격이 일본 함대를 덮쳤고, 키누가사는 폭탄을 함교에 맞고 함장이 전사한다. 그래도 살아남은 키누가사였지만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이 다시 공격을 가해왔고, 다시 폭탄을 맞아 엔진과 방향타가 날아가면서 침수, 511명의 전사자를 내며 침몰했다.

1번함 아오바의 지독한 생명력과 비교하면 약해보이지만, 항공어뢰 4발을 맞고도 도망간 키누가사의 맷집은 결코 약한 게 아니다. 단적인 예로 이탈리아군이 자랑하는 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는 타란토 공습에서 소드피시의 항공어뢰 3발을 맞고 착저했다. 미군 어뢰가 그리 좋은 물건이 아니라고는 해도, 아오바급이 구식 중순양함이고 리토리오급이 이탈리아의 최신 전함임을 감안하면(...) 그냥 이탈리아군이 약한 거다

키누가사 침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영문 위키 과달카날 해전, 일본어 위키 제3차 솔로몬 해전을 참조하고, 한글로 된 이야기는 #를 참조.

키누가사의 격침으로 제6전대는 아오바 하나만 남았기에, 제6전대는 해산되고 아오바는 제8함대 직속이 된다.

2.7 아오바 대폭발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수리를 받는 과정에서 파괴된 3번 포탑 자리에 96식 25mm 대공기관포를 장비. 1943년 2월 24일에 트럭으로 돌아오지만, 동년 4월 3일에 파푸아뉴기니카비엥에 정박했다가 제5공군 소속 B-17 3대와 조우한다. 한밤중이라 미군은 정박중인 아오바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누군가가 실수로 대공기관포의 방아쇠를 당겨버렸고 아오바는 어쩔 수 없이 대공사격을 시작한다. 놀란 미군은 급히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게 아오바에 명중하면서 산소어뢰가 폭발, 재기한지 2달만에 또다시 대파된다. 당시 침몰할 수준의 피해를 입었으나, 가까스로 해안가로 돌진해 좌초함으로서 생존. 미군의 제공권 안에 떡하니 고립된 상황이었음에도 배 전체를 섬으로 위장하고 버틴 덕분에 이후 한차례의 공격도 받지 않았고, 이후 경순양함 센다이에게 인양되어 트럭으로 귀환한다.

8월 1일에 수리를 위해 구레 군항으로 귀항한 후, 3번 포탑을 새로 끼우고 대공레이더와 대공화기를 보강한다. 항공순양함이나 급유함으로 개장하는 것도 검토되었지만 무산. 그러나 엔진에 손상을 입어 최고속도가 28노트로 떨어졌다.

근성으로 침몰위기를 면한 헝그리 정신 덕분인지, 이 두번째 대파 이후로는 일본군 내에서는 솔로몬의 늑대라는 별명이 붙었다.

1943년 12월, 아오바는 16전대로 배속되어 기함을 맡게 된다. 이때 16전대에 소속된 군함은 묘코급 중순양함 아시가라, 쿠마급 경순양함 쿠마, 키타카미, 오오이, 경순양함 키누, 19구축대[2]였으며, 아시가라가 기함이던 1942년에는 '집보기 부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가한 전대였다.

그러나 아오바가 기함이 된 후, 쿠마는 1944년 1월 11일에 대잠훈련을 하던 중 연합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격침되었고, 키타카미는 1944년 1월 말에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어뢰 2발을 맞은 후 6월까지 수리를 했으나 완전히 회복되지 못해서 7월에 사세보로 귀환하게 된다. 집보기 부대의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증거였다.

1944년 2월 25일, 아시가라는 16전대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다.

2.8 베허호 사건

1944년 2월 말에,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츠 시로 대장은 16전대에 인도양 방면의 연합군 선박을 습격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아시가라가 일본으로 돌아갔으므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6전대는 7전대 소속의 중순양함 2척을 지원받게 된다. 16전대는 2월 27일에 기함 아오바, 경순양함 키누와 오오이, 구축함 5척, 그리고 7전대 소속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치쿠마를 이끌고 출격하지만 토네의 삽질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3월 15일에 인도네시아의 탄중 프리옥 항구에 입항함으로서 작전은 종결된다. 이후 토네는 작전 과정에서 생포한 영국 상선 베허호의 포로 일부를 아오바에 넘겼으며, 아오바에 보내진 포로들은 포로수용소로 보내져서 강제노동에 종사하다가 전후에 석방된다.

임무가 끝났으므로 토네는 16전대의 관할에서 벗어났으며, 3월 18일 밤에 토네 승조원들은 남은 포로 80명의 목을 벴다. 포로 살해 현장에는 토네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도 동석했다. 통칭 베허호 사건으로, 당시 16전대 사령관 사콘조 나오마사는 전후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지만, 학살을 저지른 토네 승조원들은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고 석방되었으며 토네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도 '소극적 가담자'라는 이유로 노동형 7년이라는 가벼운 벌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토네급 중순양함 항목의 '베허호 사건'을 참조.

2.9 혼작전(곤작전)

1944년 6월, 일본군은 파푸아뉴기니 근방에 있는 비야크 섬을 지원하기 위해 2500여명의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섬은 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군을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이 있었기에 일본군 해군은 이 섬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어했고, 아오바는 이 작전에 동원된다.

1차 혼작전에 동원된 일본군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수송부대호위대
16전대(본대)
중순양함 아오바
경순양함 키누
구축함 시키나미
구축함 우라나미
구축함 시구레
지원대
부설함쓰가루
부설함 이츠쿠시마
수송함 127호
구잠정 2척
경계부대간접호위대
중순양함 묘코
중순양함 하구로
구축함 3척
후소급 전함 후소
구축함 2척

16전대 소속인 오오이는 이질환자가 발생했기에 작전에서 제외되었다. 어서 치료하고 일해라 오오이

일본 함대는 다바오에서 분산했고, 경계부대인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와 하구로는 구축함 3척과 함께 다른 곳에 병력을 상륙시킨다. 아오바의 16전대와 후소는 비야크 섬으로 향했으나 미군 잠수함과 정찰기에게 발각된다. 덤으로 일본군 정찰기가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올렸고, 일본군은 혼작전을 취소한다. 아오바의 16전대는 소롱에 일본군 병력을 내려놓은 후 귀환했지만, 미군 항모전단은 근처에 없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1차 '혼작전(渾作戦)'이 정찰기의 오보로 실패한 후, 일본군은 소롱에 내려둔 병력을 비야크 섬으로 보내기 위해 2차 혼작전을 실시한다. 16전대 사령관 사콘조는 시키나미를 기함으로 삼았고, 아오바와 키누는 후방에서 지원을 위해 대기하게 된다. 16전대의 시키나미와 우라나미, 구축함 시구레, 그리고 구축함 하루사메, 사미다레, 시라츠유는 사콘조의 통솔 아래 소롱의 병력을 싣고 비야크 섬으로 향하지만 미군의 공습을 당해 하루사메가 침몰한다. 16전대는 비야크 섬에 도착하여 병력을 내리기 시작했지만, 호주군의 중순양함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군 경순양함 보이스[3], 미군 경순양함 피닉스가 이끄는 14척의 구축함과 조우한다. 16전대는 급히 달아났기에 살아남았지만, 극히 일부의 병력만이 비야크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2차 혼작전도 실패하자, 일본군은 비야크 섬 주변의 미군 함대를 몰아내기 위해 3차 혼작전을 기획한다. 아오바의 16전대와 중순양함 묘코, 하구로 외에도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 경순양함 노시로와 구축함들이 추가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제58기동부대를 출동시켰고, 미군이 사이판 섬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파악한 일본군은 3차 혼작전을 취소한 후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대거 출동시켜 필리핀 해 해전이 벌어진다.

자세한 정보는 #1#2, #3, 그리고 일본위키 혼작전을 참조.

혼 작전이 실패하면서 외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고립된 비야크 섬 일본군의 운명에 대해서는 비야크 섬 전투를 참조.

2.10 오르목 만 전투(다호작전)

2.10.1 16전대 최후의 작전

1944년 7월에는 16전대 소속 고속수송함 경순양함 오오이가 격침되었다. 구축함 시키나미는 오오이를 견인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함장을 포함한 368명의 승조원은 시키나미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153명이 전사했다.

1944년 9월 12일, 시키나미는 미군 잠수함에 격침되어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추가증원이 없었으므로, 16전대에 남은 배는 구축함 우라나미와 경순양함 키누, 그리고 아오바 뿐이었다.

1944년 10월 11일, 경순양함 키누와 충돌 사고가 났지만 피해는 미미했다.

10월 18일, 아오바는 구리다 함대와 함께 브루나이에서 출항한다. 원래는 구리다 함대에 배속되어 레이테 만 해전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편성이 바뀌면서 제2유격부대(통칭 시마 함대)에 소속되었다. 편성표에 대해서는 일본어 위키 레이테 만 해전을 참조하자. 여기서 아오바가 수행한 작전이 바로 다호작전으로, 영어로는 오르목 만 전투이다.

1차 작전은 아오바의 16전대(아오바, 키누, 우라나미)와 수송선 5척으로 구성되었으며, 10월 21일에 링가 정박지를 출발하여 마닐라로 향한다. 그러나 아오바는 1944년 10월 23일에 미군의 가토급 잠수함 브림에게 2번 기관실이 직격당해 다시 빈사 상태에 빠진다. 경순양함 키누가 연인해줘서 마닐라로 귀환했고, 16전대 사령관 사콘죠는 키누를 기함으로 삼지만 미군의 공습으로 키누에서 47명, 우라나미에서 25명의 전사자를 낸다. 그래도 전진을 계속한 16전대와 수송선들은 10월 25일에 카가얀에 도착, 병력을 양륙시킨다. 그러나 귀환하던 16전대는 10월 26일에 미군의 공습을 당했고, 우라나미와 키누 모두 침몰했다. 사콘조 제독은 수송함을 기함으로 삼아 10월 27일에 마닐라로 귀환했고, 수송선 2척이 본대와 갈라져 추가적인 수송작전에 임하지만, 한 척은 중간에 격침되었고 다른 한 척은 양륙 중에 격침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 항목에는 우라나미와 키누도 이 해전에서 격침된 군함이라고 나와 있으므로, 16전대는 오자와의 항모전단과 함께 레이테 만 해전에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유이한 부대가 되었다. 마이너한 수송작전이긴 했지만

마닐라로 귀환한 후, 아오바는 응급수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10월 29일에 윌리엄 홀시 휘하의 38 기동함대(Task force 38)의 공습을 당한다. 수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대로는 너무 위험했기에 아오바는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와 수송선단과 동행,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같은 곳에 있던 묘코급 중순양함 나치는 피해가 너무 심했기에 동행하지 못했고, 나중에 미군의 공습으로 침몰한다.

그러나 일본군 연합함대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 정규항공모함 7척을 격침시켰다고 발표했고, 희소식을 들은 일본군 육군은 이 기회에 레이테 섬에 병력을 증원해서 미군을 몰아내자고 결정한다. 그래서 다호작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만, 미군의 실제 피해가 호위항공모함 3척이었으므로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2.10.2 시마카제의 최후

16전대가 괴멸되고 아오바가 일본으로 떠난 후, 일본군은 2차 작전을 시행한다. 보통은 여기서부터 다호작전이라고 부르므로 영어 위키백과에선 1차 작전이 빠졌지만, 일본 위키백과에는 1차 작전도 함께 기술되어 있다. 그냥 모조리 다호작전이라고 불러라 2회의 임무는 수송선만으로 진행되었지만, 미군의 공습을 당하면 답이 없으므로 3번째 수송에서는 다수의 구축함을 추가로 투입했고, 수송함 1척이 침몰하지만 작전은 성공한다.

4차 작전을 맡은 부대는 11월 8일에 마닐라를 출항, 병력 양륙에는 성공하지만 물자 수송은 미흡한 편이었다. 4차가 3차보다 앞에 있는 건 4차 작전이 먼저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수송함 2척을 잃고 해방함 11호가 대파되어 침몰 처분되었지만, 그 외의 손실은 없었다.

3차 작전은 4차 작전을 실행한 부대가 귀환한 후에 실시될 예정이었지만, 악천후를 이용해 미군의 공습을 피하려는 의도로 11월 9일에 출항하게 된다. 작전에 참가한 배는 기함 시마카제를 필두로 한 구축함 4척, 수송함 5척, 구잠정 2척이었으나, 수송함 1척이 좌초했으므로 구잠정 46호가 구조를 위해 뒤에 남는다. 그런데 10일이 되자 갑자기 날씨가 맑아졌고, 항공엄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함대는 그대로 작전을 진행하기로 한다. 이후 4차 작전을 성공시키고 귀환하던 함대와 만나 구축함 일부를 교환했기에 멤버가 조금 바뀐다. 최종적으로 돌입한 부대는 다음과 같다.

구축함 시마카제(제2수뢰전대 기함)[4]
구축함 나가나미, 아사시모, 와카츠키, 하마나미
구잠정 30호, 수송함 4척

11일 정오에 오르목 만에 도착할 예정이던 수송함대는 오전 8시 30분에 미군 함재기에 발각되었고, 함대 전부는 347대의 미군 함재기에게 공습을 당한다. 수송선들은 급히 만으로 들어가서 양륙을 시도하려 했지만 모조리 격침되었고, 유구모급 구축함 나가나미, 대공전문인 아키즈키급 구축함 와카츠키, 유구모급 구축함 하마나미도 격침당한다. 유폭을 막기 위해 산소어뢰를 버린 시마카제는 놀라운 속도와 기동성으로 미군의 공습을 전부 피했지만 지근탄과 기관총탄으로 피해가 누적되었고, 결국 과열을 버티지 못한 보일러가 폭발하면서 격침된다. 함대 사령관인 제2수뢰전대장 하야카와 미키오[5]를 포함한 430명이 전사하고 22명이 살아남았으며, 함대에 소속된 배들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유구모급 구축함 아사시모 뿐이었다. 시마카제의 생존자들은 간신히 살아남아 12월에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2.10.3 이후의 작전

5차 작전에서는 2차례의 수송선단이 파견되었으나, 첫 번째는 전멸했고 두 번째는 전멸 직전에 작전을 포기했기에 겨우 마닐라로 귀환했다.

6차 작전을 맡은 선단은 11월 27일에 마닐라를 출항하여 무사히 오르목 만으로 돌입했으나, 미군 어뢰정의 공격으로 2척, 공습으로 1척을 잃었고 살아남은 2척도 귀환하던 도중 조난을 당해 침몰함으로서 전멸했다.

7차 작전은 11월 28일부터 12월 4일까지 4회에 걸쳐 실행되었으며, 비교적 성공적으로 물자를 양륙했다.

8차 작전은 12월 5일에 행해졌으나, 미군이 오르목 만에 상륙해버렸으므로 양륙지점을 변경했다. 수송함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병력만은 어떻게든 상륙시켰고, 생존한 배들은 귀환했다.

9차 작전은 12월 9일에 행해졌으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어쨌든 양륙에는 성공하고 생존 선박들은 귀환했다.

10차 작전은 취소되었으며, 이것으로 다호작전은 종료되었다.

2.11 인양 능력 없음. 실례

1944년 11월 5일, 아오바는 마닐라 항을 출항해서 루손의 산타크루즈항에 들렀다가 11월 6일에 출발해서 필리핀 볼리나오 근처에 도달했는데 미군 잠수함편대가 선단을 덮쳐서 옆에 있던 중순양함 쿠마노가 (아오바를 전에 공격했던 가토급 잠수함 브림도 낀) 미군 잠수함들의 어뢰 2발을 맞아 항행불능이 되었다. 이 때 23발의 어뢰가 발사되었지만 아오바는 기적적으로 안 맞았다.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7발의 어뢰가 아오바를 노렸지만 다 피했다고. 이후 아오바는 인양 능력 없음. 실례라는 전문을 남기고 살아남은 수송선단의 대다수와 내뺀다. 이 전문은 아오바에서 기록한 통신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아서 진위여부가 한때 논란이 되었는데, 비교적 생존자가 많았던 쿠마노의 승조원들이 이 말을 들었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아오바의 '먼저 실례'는 사실인가? 링크에 나온 바에 따르면, 쿠마노의 함교에 있던 항해사가 아오바가 보낸 "인양 능력 없음. 먼저 실례"라는 발광신호를 봤다고 한다(...) 쿠마노가 피격되자, 뒤에서 따라오던 아오바가 그런 발광신호를 보낸 후 내뺐다고.

전후에 살아남은 쿠마노 승무원들은 아오바의 발광신호를 계속 화제로 삼았다고 한다. 다만 당시 아오바의 승무원들은 갑판으로 올라와 쿠마노에게 거수경례를 했고, 쿠마노의 승무원들은 아오바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힘내라 아오바!'라고 소리를 지르며 배웅했다는 기록도 있는 등, 나름 훈훈한(…) 분위기였던 모양.

사실 아오바가 정말로 인양 능력이 없던 건 맞다. 이 때도 최고 속력이 시속 6노트 정도였기에 인양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그러면 다른 조치를 취하던가 상황을 전달할 것이지 왜 하필 실례라고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전을 가급적 짧게 보내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단어 선택이 좀(...) 무운을 빈다거나 좋은 말 많잖아 결국 쿠마노는 유조선에 인양되어 루손의 산타크루즈 항으로 회항해서 긴급수리를 받고 있었지만, 결국 11월 25일에 미군의 공습으로 침몰했다.

이후 아오바는 가오슝에 도착해서 연료보급을 요청했지만, "후퇴하는 배에게 줄 연료는 없다"며 보급을 거절당한다. "우리 아오바를 버릴 셈이냐"며 승무원들은 분노했고, 함장의 설득으로 겨우 보급을 얻어내고, 망가진 엔진을 수리해서 12노트의 속도를 회복하는 우여곡절 끝에 12월 12일, 구레 항에 입항했다. 입항할 때 승무원들은 "아오바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다고. 여담으로 일본군 중순양함 중 살아서 일본에 돌아온 건 아오바와 토네 뿐이었지만, 토네는 일본군의 공식 기록에서는 경순양함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살아서 일본에 돌아온 중순양함은 아오바 뿐이었다.[6]

2.12 구레 군항 공습

2.12.1 미션 임파서블

겨우 구레 항에 입항했지만, 잠수함에 입은 피해가 너무도 컸던지라 당장은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예비용이란 명목으로 방치한다. 그 와중에 1945년 3월, 미군의 1차 구레 군항 공습으로 폭탄을 한 발 더 맞는다. 그러나 솔로몬의 늑대가 어디 가진 않는지 격침되지는 않았고, 이후 수심이 얕은 곳으로 옮겨져서 대공포 진지로 개조되었다. 여기서 2연장 25mm 기관포 4기를 추가로 장착함으로서, 아오바는 3연장 25mm 기관포 5기, 2연장 25mm 기관포 10기, 25mm 단장 기관포 15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25mm 기관포의 합계는 50문.

구레 군항에는 이외에도 키타카미가 대공포 진지로 배치되었지만, 대부분의 군함들은 항구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대부분의 대공포가 철거된 상태라 미군의 공습에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주포로 3식 통상탄을 발사할 수는 있었지만 3식탄의 대공성능이 형편없다는 건 상식이었고, 항공모함 카츠라기처럼 대공화기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정도로 미국의 대규모 공습을 막는다는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덤으로 토네는 3월 19일의 공습으로 이미 구레 군항 밖으로 이동한 상황이어서, 구레의 중순양함은 아오바 밖에 없었다. 키타카미의 전과가 제로인 건 넘어가자

2.12.2 최후의 저항

1945년 7월 24일, 윌리엄 홀시 휘하의 38 기동함대가 2차 구레 군항 공습을 감행했고 아오바는 또 다시 폭탄 한 발을 먹고 착저한다. 보통은 이것으로 격침이지만, 처음부터 수심이 얕은 곳에 정박했기에 살아남는다.

그러나 미군은 의외로 다수의 대형함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네놈들을 묻어버리겠다며 7월 28일에 다시 공격을 감행했고, 아오바는 이세급 전함 이세,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와 함께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세와 하루나의 대공포가 철거된 상황이므로 대공포로 무장된 건 아오바 혼자밖에 없었기에, 아오바는 혼자서 미 해군의 공습을 전부 감당해야 했다. 이세와 하루나도 저항했지만, 부포와 대공포가 없는 두 전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주포로 3식 통상탄을 발사하는 것밖에 없었고 이것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아오바 VS 미군.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그런데 기름이 없잖아 안될거야 아마 결국 이세는 16발, 하루나는 8발의 폭탄을 먹고 격침되었고 나머지 대형함들(아마기, 오요도, 토네 등)도 모조리 격침되거나 무력화된다. 일본군 망했어요 공습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배로는 호쇼, 류호, 키타카미, 카츠라기등이 있었지만, 이들 모두 오래 전에 군함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상태였다.[7] 아오바 역시 38기동함대의 함재기로부터 4발의 폭탄을 먹었고, 화재까지 발생했기에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군은 구레 군항의 모든 군함을 없애기 위해 오키나와에 있는 7공군의 B-24 폭격기 79대를 출격시킨다. 그들이 발견한 건 불타는 아오바였고, 아오바가 아직 안 죽었다고 판단한 미군은 집중폭격을 감행한다. 만신창이가 된 아오바는 최후까지 싸웠지만, 침몰 직전의 중순양함 1척이 미군을 막는다는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B-24 편대에게 4발의 폭탄을 더 먹고 함미가 거의 절단되었다. 이 공습에서 미군의 B-24 2대가 격추되고 14대가 손상을 입었지만, 이게 전부 아오바의 전과인지는 불명. 일본에서는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가 B-24 2대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하지만, 대공포도 부포도 없이 주포로 3식 통상탄을 발사하는 게 고작이었던 하루나에게 그게 가능한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아오바가 격침되면서 일본 본토의 중순양함은 전멸했고, 일본군 해군도 괴멸되었다. 살아남은 군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투가 가능한 건 극소수의 잠수함 뿐이었고 나머지는 미군을 피해 숨거나 도망칠 뿐이었다.

2.13 전후

종전후 미군이 컬러로 촬영한 아오바의 모습 이세같은데?

격침된 후 그대로 방치되어 전후 스크랩 처리. 아오바의 함수에 붙어있던 국화문양은 현재 해상자위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아오바의 주포 부품은 구레시 해사 역사 과학관(애칭은 야마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전후생존함이라고 주장하지만, 물위에 얼굴만 내밀고 있으면 잔해라도 생존함으로 인정하는 일본의 기준을 감안하면 신뢰성이 낮다. 그런 식이면 진주만 공습으로 격침된 미군 군함은 하나도 없잖아? 일본인들의 주장대로라면 아오바는 미군이 전력을 다해 공격해도 끝내 가라앉지 않은 위대한 군함이 되겠지만,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으로 배가 쪼개졌으니 무리다. 미 해군의 집중공격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가라앉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여담으로 아오바가 최후를 맞이한 곳에서는 후루타카 산이 보였는데, 와레 아오바 사건 당시에 아오바의 뒤를 따르다가 침몰한 중순양함 후루타카는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후루타카에게 도움을 받았던 아오바가 후루타카 산 곁에서 격침된 것도 참 신기한 인연.

3 평가

아오바는 일본군 군함 중에서도 대단한 수훈함이다. 2번함인 키누가사도 '구식인데도 상당히 활약한 군함'으로 불릴 자격이 있지만, 아오바는 전쟁 시작부터 종결까지 계속 활약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몇 번이나 침몰 수준의 피해를 입으면서도 놀라운 운빨과 데미지 컨트롤로 전쟁 말기까지 생존했고, 일본군의 공식적인 중순양함 중 유일하게 살아서 일본에 귀환했으며, 구레 군항 공습에서도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집중폭격으로 격침될 정도로 운이 좋은 배다. 격침되지 않았으면 나가토나 사카와처럼 핵실험장에 끌려갔을지도 모르지만, 물위에 노출된 채로 격침되었기에 평화롭게 해체될 수 있었다. 물론 행운과 수훈만 있는 건 아니고, 오래 버텼던 만큼 여러 해전에 참전하면서 온갖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3.1 일본

일본에서는 아오바를 가리켜 "몇 번이나 대파되어도 살아돌아와서 미군을 공포에 떨게 한 군함"이라고 자화자찬했으며, 일본군 수뇌부도 그 끈질긴 생명력 덕에 아오바를 높이 평가했다. 위에 나온 전공과 끈질긴 생명력을 감안할 때, 국화문양과 주포 부품이 박물관에 전시된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3.2 미국

미국에서의 평가도 괜찮은 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아오바를 낮게 평가하면 그런 배한테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 미 해군의 체면이 망가진다. 감히 미 해군에게서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강탈했고, 미 해군이 끝내 격침시키지 못했으며(아오바 격침은 어쨌든 미 육군항공대이니), 엔터프라이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군함이니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엔터프라이즈의 일대기를 다룬 배틀 360 3편에서 사보섬 해전이 소개되며, 아오바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지만 이 해전으로 미군이 받은 엄청난 충격과 피해는 제대로 소개되고 있고, 미군의 질적 우위를 주장하면서도 "적은 놀라운 전술로 그 모든 걸 뒤엎었다"고 평가했다. '영웅이 된 전함 USS 레피'에서는 에스페란스 곶 해전이 소개되는데, 미 함대가 아오바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자랑하며, 와레 아오바 이야기는 거론도 되지 않는다.

3.3 그 외

국내에선 밀덕외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함대 컬렉션이 인기를 끌고 와레 아오바가 알려지면서 지명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 와레 아오바의 임팩트가 너무 컸기에 당시 제6전대 사령관을 맡아 아오바에 승선했던 고토 아리토모는 수많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일본군/인물 항목에서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로 분류되었다. 이건 아오바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 많은 수훈에도 불구하고 미군 중순양함(...) 및 민폐함 이미지가 굳어 버렸고, 이는 일본 칸코레 팬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영 좋지 않은 군함으로 취급되고 있다. 한 번 굳은 이미지가 워낙 강한 터라 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활약이 알려진 후에도 그런 이미지는 여전히 유지되는 중(...)

4 기타

  • 전쟁 중의 전사자는 172명으로, 전체승무원이 657명이고 많은 전투에 참가한 걸 감안하면 상당히 전사자가 적은 편이다.
  • 구레의 구 해군 묘지와 공원에는 아오바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 태평양 전쟁 당시에 구레 진수부의 주계(경리)장교로 근무하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최초로 승선한 배가 아오바이며, 그 인연으로 2012년에 세워진 세 번째 위령비의 건립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 아오바의 함장을 지낸 인물로는 연합함대 사령관을 역임한 고가 미네이치, 제8함대 사령관을 지낸 미카와 군이치 등이 있다.
  • 아오바의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 일본 최고 수훈함(미군 주장)인 쇼카쿠급 항공모함 1번함 쇼카쿠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쇼카쿠는 산호해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침몰 수준의 피해를 입고도 살아남은 경력이 있어서다. 그러나 쇼카쿠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미군 잠수함에게 공격당해 격침되었으므로, 생존기간은 아오바가 더 길었다. 대파된 횟수도 더 많다
  • 아오바처럼 세 번이나 대파되고도 살아남은 군함으로는 아키즈키급 구축함 스즈즈키가 있다. 스즈즈키는 세 번째 대파 이후 침몰 직전의 상태로 간신히 항구로 돌아왔고, 그 후에는 방파제 신세가 되었다.
  • 수훈함임에도 불구하고 전설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마주친 적은 거의 없고, 1944년에 38기동함대가 수리중이던 아오바를 공습한 정도가 유일한 만남이었다. 사보섬 해전에서 미 해군 전체에게 빅엿을 먹이며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강탈한 일본군 제8함대의 주력이 아오바였고,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군 제8함대를 박살내고 아오바의 자매함인 키누가사를 침몰시키고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되찾아온 것이 엔터프라이즈이기에 엄청난 악연이었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두 배가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5 대중매체의 아오바

6 일본군의 다른 민폐함

와레 아오바 때문에 민폐함으로 유명하지만, 일본군엔 아오바 외에도 민폐를 끼친 군함이 많다. 수훈함인데도 민폐를 끼친 경력이 있는 군함들을 소개한다. 수훈도 없는 주제에 민폐를 끼친 군함들은 야마토급 전함 항목에 소개되어 있으니 참조.

1942년 3월, 크리스마스 섬의 연합군을 포격한 후 섬에서 항복의 표시로 백기를 올렸는데도 그냥 집에 갔다. 백기를 올린 범인은 인도인들로, 이들은 이후 일본군이 크리스마스 섬을 점령할 때 영국군 장교들을 제압한 후 다시 백기를 올리고 투항했다. 물론 이런 짓을 한 대가로 전후에는 사형판결을 받지만, 인도가 독립한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엠프레스 오구스타 만 해전에서 함대 전체가 추태를 보이며 미군에게 참패했다. 미군은 경순양함 4척에 구축함 8척에 공중지원은 없고, 일본군은 묘코와 하구로라는 중순양함 2척에 경순양함 센다이, 신형 아가노급 경순양함 아가노, 그리고 구축함 6척이라는 절대로 우세한 편성이었지만, 미군의 포격을 피하다가 묘코가 구축함 하츠카제를 들이받아 대파시켜 침몰의 원인을 제공했고, 구축함 사미다레가 구축함 시라츠유를 들이받아 둘 다 퇴각하고, 신형 경순양함 아가노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미군에게 얻어맞다가 집에 가는 등의 추태를 연발하며 패배했다. 미군의 포격으로 기동력을 잃고도 마지막까지 포격을 계속한 경순양함 센다이만이 그나마 높은 평가를 받는 편.
다른 배들도 잘못했지만, 묘코가 기함이므로 대표로 표기한다.
자바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포탄 명중률 0%라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김으로서 전조를 보였다. 이후 코만도르스키 해전에서는 같이 참전한 중순양함 마야가 미군 중순양함 솔트레이크 시티에게 명중탄 6발을 먹이는 동안 단 한 발도 명중시키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주며 미군의 전략적 승리에 일조했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도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를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이 충각공격(?)으로 나치 자신도 대파, 이후 수리를 받다가 미군의 공습으로 침몰했다.
산호해 해전에서 즈이카쿠와 함께 출격했으며, 쇼카쿠의 정찰기가 미군의 유조선을 항공모함으로 착각했기에 유조선 쪽으로 공격부대를 보냈다. 제6전대에서 미군 항공모함의 진짜 위치를 발견해서 통보했지만 공격을 취소하지 않았고, 이 실수로 경항모 쇼호는 93대의 미군기에게 공습당해 침몰했다. 나중에야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유조선 공습을 취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쇼호를 잃은 일본군은 포트 모르즈비 공격을 포기했다. 이 해전에서 쇼카쿠의 함재기가 미군 항공모함을 쇼카쿠로 착각하고 착함을 시도하는 멍청한 짓을 하기도 했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는 나구모 주이치의 후퇴 명령에 따라 수송선단을 놔두고 후퇴했고, 수송선단은 미군의 공습을 받으면서도 임무를 완수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구축함과 수송선을 1척씩 잃고 후퇴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산호해 해전과 동부 솔로몬 해전의 수송부대 모두에 아오바의 제6전대가 포함되어 있다.

7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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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지만 이런 의도였다면 오해받기 딱 좋은 '나는 아오바다'보다 '기함 건재'등의 좀 더 직설적인 신호를 보내는 게 더 타당하다.
  2. 후부키급 구축함 10번함 우라나미와 12번함(아야나미급 2번함) 시키나미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2척은 이미 격침된 상태였다.
  3.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키누가사에게 피격된 그 보이스다.
  4. 레이테 만 해전으로 침몰한 아가노급 경순양함 노시로를 대신해서 기함이 되었다.
  5. 사보섬 해전에서 제8함대 기함 초카이의 함장을 지낸 인물이다.
  6. 생존한 중순양함은 대파당한 묘코와 타카오가 있었지만 수리할 엄두도 못 낸 채 보급로가 두절된 싱가폴에 방치되어 있었고, 종전 이후 영국 해군이 접수하여 말라카 해협에서 자침 처분 되었다.
  7. 호쇼는 워낙 낡아서 훈련함으로 전용된지 오래였고, 류호는 전손판정을 받고 항구에 방치된 폐물이었으며, 카츠라기는 2000파운드 폭탄을 갑판에 맞고 중파된 상태였다. 일본 해군의 항공대가 오래 전에 전멸했으므로, 여기 거론된 항공모함들은 대형 수송선 이상의 역할을 할 수도 없었다. 전쟁 내내 아무 것도 안 한 군함으로 유명한 키타카미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