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타바레스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오스카 타바레스
(Oscar Tabarez)
이름오스카 와싱톤 타바레스 스클라보
(Óscar Wáshington Tabárez Sclavo
생년월일1947년 3월 3일
국적우루과이
출신지몬테비데오
포지션수비수
소속팀수드 아메리카 (1967~1971)
스포르티보 이탈리아노 (1972~1973)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1975)
센트로 아틀레티코 페닉스 (1976)
푸에블라 FC (1976~1977)
CA 베야 비스타 (1977~1979)
지도자CA 베야 비스타 코치 (1980~1983)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U-20 감독 (1983)
다누비오 FC 감독 (1984)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감독 (1985~1986)
페냐롤 감독 (1987)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U-20 감독 (1987)
데포르티보 칼리 감독 (1988)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8~1990)
보카 주니어스 감독 (1991~1993)
페냐롤 감독 (1993~1994)
칼리아리 칼치오 감독 (1994~1995)
AC 밀란 감독 (1996)
레알 오비에도 감독 (1997~1998)
칼리아리 칼치오 감독 (1998~1999)
벨레르 사르스필드 감독 (2001~2002)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6~)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U-23 감독(2012)

1 개요

침체에 빠졌던 우루과이 축구의 대부흥을 이끈 명장[1]

우루과이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2016년 기준으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별명은 스페인어로 선생님을 뜻하는 엘 마에스트로(El Maestro)이다.

2 생애

1947년 3월 3일에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났다. 풀 네임은 오스카 와싱톤 타바레즈 스클라보(Óscar Wáshington Tabárez Sclavo)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2]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안 페린 감독의 뒤를 이어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2016년 현재까지 10년째 역임 중이다.

3 선수 생활

대부분의 명장들이 그러하듯 오스카 타바레스도 선수 시절은 보잘 것 없었다. 20세였던 1967년에 프로에 데뷔해 우루과이 리그, 아르헨티나 리그, 멕시코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현역 때 포지션은 수비수였다. 32세 때인 1979년에 우루과이 리그인 베야 비스타[3]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4 감독 생활

4.1 우루과이에서의 지도자 생활

그가 처음으로 지도자에 입문한 때는 1980년으로 그 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했던 우루과이 리그의 베야 비스타에서 코치를 맡은 게 첫 지도자 경력이었다. 그곳에서 3년 간 코치 생활을 한 후 1983년에 우루과이 U-20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아 멕시코에서 열린 1983년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했다. 그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미국, 폴란드, 코트디부아르와 함께 B조에 속했는데 1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 3 : 1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에서 폴란드를 3 : 2로 물리쳐 일찌감치 8강 진출을 확정지었고[4] 3차전 코트디부아르전도 0 : 0으로 비겨 2승 1무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조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8강전에서 연장 접전 끝에 대한민국에 1 : 2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그 때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사람이 그 이름도 유명한 빠따박이었다! 대회가 끝난 후 그는 감독직에서 물러나 1987년까지 우루과이 리그를 전전하며 감독 생활을 계속했다가 1988년 드디어 41세의 나이에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해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5] 대한민국, 벨기에, 스페인과 함께 E조에 속한 우루과이는 1차전에서 난적 스페인과 0 : 0으로 비겼으나 2차전에서 벨기에에 1 : 3으로 패해 코너에 몰렸다. 3차전에서 조 최약체로 꼽혔던 대한민국을 1 : 0으로 꺾고[6]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 승리는 1970년 대회 이후 무려 20년 만에 거둔 것이다. 펠레의 예측과 달리 우루과이와 이탈리아의 만남은 턱도 아닌 16강전에서 이루어졌고 결국 0 : 2로 패해 탈락하게 되었다.

4.2 아르헨티나 리그, 세리에 A에서의 감독 생활

이탈리아 월드컵이 끝난 후 1991년, 본격적으로 우루과이를 벗어나 타국에서 감독 생활을 하게 되었다.[7]1991년 아르헨티나 리그의 명문 구단 보카 주니어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불과 1년 뒤인 1992년에 보카 주니어스는 아르헨티나 1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보카 주니어스를 우승시킨 후 타바레스는 다시 우루과이 리그로 돌아와 1년 간 페냐롤이란 구단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9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세리에 A칼리아리 칼초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90년에 세리에 A로 승격된 이후 줄곧 강등권에 머물러 있던 칼리아리 칼초는 오스카 타바레스의 지휘 아래 순위를 끌어올려 중위권까지 치고 올라갔다.[8] 이 같은 성적을 인정받아 1996년 파비오 카펠로의 후임으로 세리에 A의 명문 AC 밀란 감독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AC 밀란 감독에서 그는 큰 좌절을 맛보게 된다. 시즌 개막 전에 치른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AC 밀란은 피오렌티나에 1 : 2로 패해 우승에 실패했다. 리그에서도 저조한 성적을 거두어 결국 경질되고 아리고 사키로 교체되었다.[9] AC 밀란에서 경질된 이후 그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2부 리그 레알 오비에도 감독으로 취임해 1년 간 감독 생활을 한 후 1999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칼리아리 칼초 감독으로 복귀했다. 당시 칼리아리 칼초는 1997/98시즌에서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 바로 다음 시즌에서 세리에 A로 복귀했는데 또 강등권에 놓여 구원투수로 타바레스를 긴급 호출한 것이다. 그러나 칼리아리 칼초로 복귀한 이후 치른 경기에서 1무 3패를 기록하면서 강등권 탈출에 실패해 단 4경기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2년 간 휴식을 취한 그는 2001년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가 벨레스 사르스필드 감독에 취임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후 다시 보카 주니어스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2002년에 물러나 4년 간 휴식을 취했다.

4.3 우루과이 축구의 부흥을 이끌다

그렇게 4년 간 백수로 있던 그에게 일을 준 곳은 다름 아닌 우루과이축구협회였다. 2006년 독일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에 패해 본선 진출에 실패한 후 우루과이 축구의 부흥을 위해 그를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한 것이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한 그는 침체되어 있던 팀 분위기를 빠르게 추스르고 첫 국제대회인 2007년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를 4강에 올려놓으며[10] 우루과이 축구 부흥의 신호탄을 쐈다. 그러나 남아공월드컵 남미 지역예선에서는 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남미의 중하위권 팀을 상대로만 승리했을 뿐 상위권 팀을 상대로는 파라과이와의 홈 경기에서 승리한 게 고작이었다.[11] 그렇게 불규칙한 레이스를 치른 끝에 6승 6무 6패(승점 24점)의 성적을 거두어 또 5위를 차지해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나서게 되었다. 상대는 북중미 4위 코스타리카. 산호세에서 치른 1차전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1 : 0 승리를 거두었고 몬테비데오에서 치른 2차전 경기에서 1 : 1로 비겨 합계 2 : 1로 코스타리카를 누르고 본선 진출국 중 가장 마지막인 32번째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본선에 진출한 우루과이는 개최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포함해 유럽의 강호 프랑스,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와 함께 A조에 속했다. 예선에서 다소 막장스런 경기력을 보인 탓에[12] 우루과이의 16강 진출을 예상하는 이는 드물었다. 잘해야 복병 정도로 예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차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탄탄한 경기력을 보이며 오히려 프랑스를 압도하였다. 그러나 공격진의 마무리가 부족했고 후반 막판에 니콜라스 로데이로가 퇴장당해 수적 열세에 놓이는 바람에 불리함에 놓여 결국 0 : 0으로 비기고 말았다. 2차전 개최국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는 90분 내내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골잡이 자블라니 마스터 디에고 포를란의 2골과 수비수 알바로 페레이라의 1골을 더해 3 : 0으로 대파했다.[13] 사실상 조 1위 결정전이었던 3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도 전반 43분에 넣은 루이스 수아레스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 승리를 거두어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2승 1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더욱이 조별리그 3경기에서 우루과이는 무실점을 기록했다.

16강 상대는 천신만고 끝에 16강에 올라온 대한민국. 월드컵 무대에서는 20년 만에 재회하는 것이었다. 우루과이는 전반 8분 만에 대한민국의 골키퍼 퐈이야정성룡의 실책을 놓치지 않은 루이스 수아레스의 선제골로 1 : 0으로 앞서가며 손쉽게 경기를 풀어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경기는 예상과 달라졌다. 우루과이는 1골을 앞서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한민국의 매서운 공격력에 밀리며 수비하기에 급급했다. 후반전 들어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라인을 끌어내리며 우주방어 태세에 돌입해 1골 지키기에 나서기까지 했다.[14] 그리고 후반 23분, 대한민국이 얻은 결정적인 세트피스 찬스에서 이청용이 헤딩으로 동점골을 터뜨려 1 : 1로 균형추를 맞추었다. 기세가 오른 한국은 계속해서 우루과이를 몰아붙였고 우루과이는 간간이 역습으로 나섰다. 후반 35분, 역습 상황에서 루이스 수아레스김정우의 수비를 따돌리고 파 포스트(Far post)로 절묘하게 감아찬 볼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며 접전 끝에 결국 2 : 1로 승리해 1970년 이후 40년 만에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경기를 마친 후 타바레스는 "상당히 힘든 경기였으며 중원을 한국에 지배당했다. 우리가 운이 좋아서 이길 수 있었다."고 밝히며 한국의 경기력을 극찬했다. 8강전에서 아프리카 최강자 가나를 만나 전반 막판에 설리 문타리에게 중거리슛 득점을 허용해 0 : 1로 끌려갔으나 후반 10분, 디에고 포를란의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터뜨려 1 : 1로 균형추를 맞추었다. 그러나 우루과이 공격진들은 계속해서 추가 득점 기회를 놓쳤고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연장전 막판 가나에 결승골을 허용할 뻔한 걸 루이스 수아레스신의 손으로 막아내고 가나의 주포 아사모아 기안페널티킥을 날려먹으면서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승부차기에서 골키퍼 페르난도 무슬레라가 가나의 킥 2개를 선방하는 기염을 토하며 4 : 2로 승리해 1970년 대회 이후 40년 만에 4강 진출에 성공했다. 4강전에선 네덜란드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2 : 3으로 패했고 3위 결정전에서도 독일에 2 : 3으로 역전패를 당하며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40년 만에 4강 진출을 이룬 업적을 인정받아 우루과이 축구협회는 계약을 더 연장했고 자블라니 마스터 디에고 포를란은 우승팀 선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회 최우수 선수인 골든볼에 선정되었다.

월드컵이 끝난 다음 해에 치른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는 페루, 칠레, 멕시코와 함께 C조에 속해 페루, 칠레와는 모두 1 : 1로 비겼고 3차전에서 멕시코를 1 : 0으로 꺾어 1승 2무의 성적으로 조 2위를 차지해 8강에 진출했다. 8강 상대는 개최국 아르헨티나였는데 우루과이는 탄탄한 수비력과 수문장 페르난도 무슬레라의 활약에 힘입어 1 : 1로 비겼고 승부차기에서 5 : 4로 승리해[15] 4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4강전에서 루이스 수아레스의 활약에 힘입어 페루를 2 : 0으로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왔다. 결승전 상대는 일명 '과이' 형제 파라과이. 결승전에서 우루과이는 무재배로 올라온파라과이를 3 : 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이전까지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공동으로 최다 우승팀의 타이틀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 대회 우승으로 단독 최다 우승팀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2012년 중반까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지역예선(남미)에서도 5차전까지 3승 2무의 성적으로 한때 1위를 달렸다. 그러나 런던올림픽에서 8강 진출에 실패하면서[16]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고 공격진의 주포 디에고 포를란과 수비의 핵심 디에고 루가노 등이 노쇠하면서 점차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남미 지역 예선에도 영향을 미쳐 2012년 9월, 콜롬비아에 0 : 4로 대패한 걸 기점으로 우루과이는 부지런히 조개양식을 하며 순위가 쭉쭉 내려가기 시작했다.[17]

그리고 201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치르게 되었다. 그 대회에서 순위는 비록 4위에 불과했지만 스페인, 브라질, 이탈리아 등과 대등한 경기력을 보이며 저력을 과시했다. 그 때를 기점으로 다시 반등하여 페루콜롬비아를 연파하며 순위를 회복했다. 그리고 15차전 에콰도르와의 경기. 우루과이로서는 반드시 에콰도르를 잡아야 본선에 직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에콰도르의 고산 축구의 벽을 넘지 못하며 0 : 1로 패했다. 우루과이가 본선에 직행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경기에서 칠레가 에콰도르를 5점 차 이상으로 꺾어주는 전제 하에 아르헨티나를 최소 2점 차로 꺾어야 했다.[18] 물론 이 미션 임파서블 같은 미션이 이루어질 리는 없었다. 우루과이는 마지막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3 : 2로 제압하긴 했지만 칠레가 에콰도르를 5점 차 이상으로 대파해야 순위가 뒤집히는데 고작 2 : 1로 이겼기 때문. 그래서 우루과이는 7승 4무 5패(승점 25점)의 성적으로 에콰도르와 승점은 동률을 이루었으나 득실차에서 4점이 밀려 또 5위를 차지해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나서게 되었다. 우루과이 : 우리는 플레이오프를 안 치르면 뭔가 찝찝해. 대륙간 플레이오프 상대는 아시아의 요르단. 플레이오프에 이골이 난 우루과이는 요르단 따위를 손쉽게 처바르고 합계 5 : 0으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19] 우루과이가 본선 진출에 성공하면서 덤으로 톱 시드를 따내는 성과도 이루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조 추첨에서 그만 헬게이트가 열려 버렸다. 유럽의 강호인 이탈리아, 잉글랜드 그리고 북중미의 코스타리카와 함께 죽음의 조인 D조에 편성된 것. 우루과이가 톱시드를 얻었지만 포트 X가 이탈리아로 선정되었고 그 이탈리아가 우루과이가 속한 D조에 들어가 버리면서 헬게이트가 열린 것. 톱시드로서 이득을 얻은 게 전혀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다 주포 루이스 수아레스는 리그에서 입은 부상으로 출전이 불투명했다. 또 우루과이가 전통적으로 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 다음 대회에서는 폭망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우루과이의 16강 진출을 비관적으로 보는 견해가 꽤 있었다.

마침내 치러진 1차전 코스타리카와의 경기.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반드시 이기고 봐야 했는데 그만 1 : 3으로 지며 이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루이스 수아레스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우루과이는 너무도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인데다 막시 페레이라가 비매너적인 반칙으로 퇴장을 당해 경기에서도 매너에서도 졌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2차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타바레스는 결국 부상이 아직 다 낫지 않은 루이스 수아레스를 투입시키기에 이르렀다. 2차전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90분 내내 밀리는 내용을 보였지만[20] 잉글랜드의 허접한 골 결정력과 역습 찬스를 잘 살린 루이스 수아레스의 맹활약 스티븐 제라드 : 나도 활약했어! 내가 수아레스한테 어시스트 했다고!에 힘입어 2 : 1로 승리를 거두었다.[21] 그리고 단두대 매치가 된 3차전 이탈리아와의 경기. 양 팀 모두 코스타리카의 돌풍에 일격을 당한 바 있다.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탄탄한 수비와 빠른 역습으로 이탈리아를 괴롭혔고 마침내 루이스 수아레스핵이빨과 함께 후반 35분, 세트피스 찬스에서 터뜨린 디에고 고딘의 결승골로 1 : 0으로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2승 1패(승점 6점)의 성적으로 조 2위를 차지해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주포 루이스 수아레스가 핵이빨 사건으로 징계를 받으면서 전력에 큰 타격을 입었고 죽음의 조에서 너무 힘을 많이 뺀 탓인지 16강전에서 콜롬비아를 상대로 무기력한 경기력을 보인 끝에 0 : 2로 패하며 탈락했다. 에딘손 카바니의 부진과 디에고 포를란의 노쇠가 아쉬웠다.

그러나 우루과이축구협회는 두 대회 연속으로 토너먼트에 진출시킨 그의 업적을 높이 사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또 계약을 연장하였다. 이거 이러다 우루과이 버전 모르텐 올센이 탄생할 판이다. 월드컵이 끝나고 1년 후 치른 201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는 주포 루이스 수아레스의 징계 때문에 공격력에 타격을 입어 수비 중심의 전술로 경기에 임했다. 우루과이는 자메이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함께 B조에 속해 자메이카를 1 : 0으로 꺾고 아르헨티나에 0 : 1로 패했으며 파라과이와 1 : 1로 비겨 1승 1무 1패로 조 3위를 차지했으나 와일드카드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8강 상대는 개최국 칠레. 칠레의 닥공 축구에 맞서 우루과이는 그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우루과이 특유의 늪 축구를 발동하였다. 칠레는 조별리그에서 무려 10골을 터뜨려 경기당 3.3골이라는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자랑했지만 악명 높은 우루과이의 늪 축구 앞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22]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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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손길로 느껴지는 후X의 감촉[23]
왠지 가 생각나는 거라면 기분 탓으로 돌리자 (아니 그보다 더 위일수도?)

그렇게 팽팽하게 이어지던 경기가 갑자기 반전된 건 이른바 곤살로 하라의 똥침 사건. 후반 17분, 곤살로 하라가 우루과이의 공격수 에딘손 카바니에게 몰래 다가가 중지 손가락으로 똥침을 먹였는데 이에 격분한 카바니가 싸대기를 때린 것.[24] 크게 때린 것도 아니었건만 곤살로 하라가 심판 앞에서 마치 죽빵이라도 맞은 양 오버스럽게 뒹구는 바람에 심판은 카바니를 퇴장시켜 버렸다. 우루과이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들은 당연히 카바니의 퇴장에 크게 격분했고 벤치 클리어링 직전까지 갈 정도였다. 이 와중에 오스카 타바레스 감독은 벤치에서 퇴장 명령을 받았다. 겨우 패싸움까지 가는 일을 막긴 했으나 우루과이의 멘탈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수비로 칠레의 공격을 막고 또 막아냈으나 후반 36분, 수문장 페르난도 무슬레라의 볼 처리 미스를 놓치지 않은 칠레의 이슬라가 중거리 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려 결국 0 : 1로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코파 아메리카에서 다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으나 오스카 타바레스는 계속해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에 남게 되었고 현재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지역예선(남미)에서 우루과이는 3차전 에콰도르와의 경기에 1 : 2로 패한 걸 제외하고 볼리비아, 콜롬비아, 칠레, 페루를 상대로 모두 승리하고 강호 브라질과 비겨 4승 1무 1패(승점 13점)로 에콰도르와 승점은 같으나 골 득실에서 앞서 1위에 랭크되어 있다. 지난 대회 예선에서도 초반에 잘 하다가 중반부터 불규칙한 레이스를 치른 끝에 플레이오프로 밀려난 바 있어서 본선 직행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제 주포 루이스 수아레스의 징계가 해제되어 3월 25일 브라질과의 5차전 경기부터 출전할 수 있게 된 게 우루과이로서는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코파 아메리카 2016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낸지라 그의 거취에도 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루과이는 멕시코, 베네수엘라, 자메이카와 함께 C조에 속했다. 전력을 고려할 때 멕시코 외에는 딱히 경쟁자가 없어 무난히 8강 진출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우루과이는 1차전에서 형편 없는 졸전을 벌인 끝에 1 : 3으로 참패했다. 그리고 2차전에서는 베네수엘라에마저 0 : 1로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다. 더군다나 베네수엘라는 현재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지역예선(남미)에서 꼴찌를 달리고 있는 팀이고 우루과이는 1위를 달리고 있는 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것이다. 결국, 우루과이는 2패로 일찌감치 탈락이 확정되어버렸다. 아무리 주포 루이스 수아레스가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2경기 모두 내용이 좋지 않아 오스카 타바레스의 거취에도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감독 자리를 지킨다고 해도 이미 루이스 수아레스 원맨 팀으로 전락해 버린 우루과이의 체질 개선을 이뤄야 할 과제를 안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5 전술 특징

오스카 타바레스는 전술적인 유연성이 대단히 탁월한 인물로 상대에 따라 맞춤형 전술을 짜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래도 주로 써먹는 전술이 있긴 한데 그가 주로 쓰는 포메이션은 4-4-2와 4-3-1-2이다. 4-4-2는 수비적으로 풀어나갈 때 주로 쓰고 4-3-1-2는 공격적으로 풀어나갈 때 쓴다. 우루과이의 공포의 삼각편대[25][26]가 위력을 발휘한 포메이션도 바로 4-3-1-2. 이 중에서는 4-4-2를 쓰는 경우가 좀 더 많다. 1가지 특징을 들자면 감독이 수비수 출신이라 그런지 4-4-2의 중앙 미드필더 라인을 모두 수비적인 선수들로 넣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4-4-2 포메이션을 쓸 때는 공격, 수비 만능인 미드필더를 투입시키는 게 보통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투 볼란치 전술을 쓰는 탓에 다소 지루한 면은 있지만 성과는 뚜렷했다. 우루과이는 전통적으로 팀의 성향이 공격적이었다 보니 공격은 강하나 수비가 약해 득점에 비해 더 많은 실점을 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스카 타바레스 감독이 부임한 이후 투 볼란치 체제를 정착시켜 강한 공격력에 치중한 팀 컬러에다 수비력을 더해 공수 균형을 잡게 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비해 우루과이의 수비력이 더욱 끈끈해졌고 실점도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 특히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3경기 내내 무실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월드컵 본선에서도 주로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루이스 수아레스를 비롯한 공격진들의 빠른 역습을 통해 득점을 노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6 트리비아

  • 오스카 타바레스는 축구에 대한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축구 연구를 많이 하는 감독이라 그런지 교수님, 선생님이란 뜻을 지닌 엘 프로페소르(El Profesor), 엘 마에스트로(El Maestro)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 또 그는 자타공인 한국 킬러다. 청소년 대표팀 시절 때엔 전설적인 빠따박이 이끄는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에 1 : 2로 패한 적이 있지만 A대표팀에서는 한국을 상대로 전승을 거두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비록 편파판정의 수혜를 입긴 했지만 1 : 0으로 승리했고 2007년, 서울에서 치른 평가전에서도 2 : 0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전에서도 루이스 수아레스의 맹활약에 힘입어 2 : 1로 승리했다. 2014년 9월에 치른 평가전에서는 건강 문제로 불참했으나 우루과이는 또 한국을 1 : 0으로 꺾었다. 한국은 우루과이를 상대로 1무 6패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4패가 바로 이 오스카 타바레스가 안겨준 것이다.
  • 2011년 11월, 그의 부인 실비아 마르티네스가 귀가 길에 괴한으로부터 산성 용액으로 테러를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테러로 인해 그의 부인은 얼굴과 팔에 전신화상을 입었다고 한다.관련기사
  • 우루과이가 40년 동안 앓고 있던 유럽 징크스를 최초로 깬 감독이다. 우루과이는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소련을 상대로 1 : 0 승리를 거둔 것을 끝으로 월드컵에서 무려 44년 동안 유럽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1974년 대회부터 2010년 대회까지 우루과이가 유럽 팀을 상대로 거둔 전적은 6무 8패에 불과했다. 그렇게 이어져 왔던 유럽 징크스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뻥글잉글랜드를 맞아 2 : 1로 승리를 거둔 것을 시작으로 다음 경기에서 이탈리아마저 1 : 0으로 격파하면서 완전히 털어냈다.[27]
  1.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 우루과이는 점점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것을 끝으로 1974년, 1978, 1982년 3개 대회 연속으로 예선 탈락을 하는 수모를 당했다. 1986년, 1990년에도 형편 없는 경기력으로 간신히 와일드 카드의 수혜를 입어 16강에 올랐다. 1994년, 1998년에는 또 2개 대회 연속으로 예선 탈락했고 2002년에도 2무 1패로 1라운드에서 허무하게 탈락해 남미의 2류 팀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루과이가 다시 월드컵에서 톱시드를 받고 피파 랭킹에서도 10위 안에 들 정도로 성장한 건 오스카 타바레스 덕분이다. 그가 4강 신화를 썼던 남아공 월드컵 때에도 대회 치르기 전까지 우루과이는 잘 가야 16강 정도 혹은 프랑스나 멕시코 등을 위협할 복병 정도로 인식됐을 뿐이었다.
  2. 이 때 우루과이가 예선에서 거둔 성적은 6승 7무 5패였는데 공격에 비해 수비가 구멍일 정도로 숭숭 뚫려서 5위에 그쳤고 플레이오프에서 명장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호주와 맞붙어 1차전 홈 경기에서 1 : 0으로 승리했으나 원정에서 0 : 1로 패했고 연장전에서 승부를 내지 못해 승부차기까지 갔으나 2 : 4로 패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3. 팀의 연고지는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다.
  4. 당시 대회는 16개국 출전이라 2라운드가 8강이었다.
  5. 이 때 활약했던 선수가 바로 우루과이의 스타 플레이어 엔조 프란체스콜리였는데 월드컵보다 더 어렵다는 남미 예선에서 맹활약을 하여 펠레가 우루과이를 우승후보로 지목했고 이탈리아와 우승컵을 놓고 다툴 것이라고 예측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는 처참한 저주가 되어 돌아왔지만....
  6. 사실 이 경기는 0 : 0무승부였어야 한다. 당시 경기 주심을 맡았던 이탈리아인 툴리오 라네세는 노골적인 편파판정을 보였고 심지어는 석연찮은 판정으로 윤덕여를 퇴장시키는 병크를 터뜨렸다. 10명이 뛰는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 선수들은 분전했으나 경기 종료 직전 다니엘 카리스 폰세카에게 헤딩 결승골을 허용했다. 그러나 폰세카의 위치는 명백히 오프사이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심 툴리오 라네세와 가봉, 튀니지 국적의 부심들은 모두 쌩까고 모른 척했다.이런 개새끼들! 우루과이는 주심의 편파판정에 힘입어 1 : 0으로 한국을 꺾고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에 대해 개최국 이탈리아가 16강전에서 다소 만만한 우루과이와 대전하기 위해 고의로 편파판정을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7. 사실 1988년에 콜롬비아의 데포르티보 칼리에서 감독 생활을 한 적이 있으나 단기 알바 형식이라 사실상 이 때가 본격적으로 타국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8. 1994/95시즌에 9위, 1995/96 시즌에 10위였다.
  9. 그 시즌은 AC 밀란의 흑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전 시즌인 1995/96시즌에서 우승한 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96/97시즌에선 동네북 신세로 전락해 잦은 감독 교체가 이어졌고 끝내 11위로 마쳤다.
  10. 4강전 상대는 바로 남미 최강 브라질이었는데 이 팀과 2 : 2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7번 킥커까지 가는 접전 끝에 4 : 5로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대신 4년 후 브라질은 같은 '과이' 형제 파라과이를 상대로 사연뻥을 시전하는 추태를 보였고 또 4년 후에 과이 형제 파라과이에 또 승부차기로 졌다. 파라과이 : 우루과이 형, 내가 대신 브라질한테 복수해줄게.
  11. 브라질과 아르헨티나한테는 모두 졌다는 말인데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악의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그런데도 우루과이는 홈에서 0 : 1로 패해 본선 직행에 실패했다. 심지어는 그 대회 예선 꼴찌였던 페루에도 패배했다. 물론 페루 원정은 다른 팀한테도 어렵다. 왜냐? 고산지대니까.
  12. 우루과이가 본선 직행에 실패한 이유는 수비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루과이는 전형적인 강공약수(强攻弱守)의 모습을 보였는데 플레이오프를 포함해 20경기에서 30득점, 21실점을 기록했다. 이는 본선 진출국 중에서 3번째로 많은 득점이고 2번째로 많은 실점이었다.
  13. 이 1패로 남아공은 금세 조 꼴찌로 추락해 광탈 위기에 놓였다. 그리고 3차전에서 프랑스를 2 : 1로 꺾었지만 이 패배의 영향으로 득실차에서 멕시코에 밀려 사상 최초로 개최국이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14. 후반 초반 볼 점유율이 7 : 3까지 벌어졌다. 못 믿겠지만 대한민국이 7이다. 그리고 볼도 대부분 우루과이 진영에서 놀았고 우루과이 선수들은 중앙선 넘는 것도 거의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15. 유일하게 카를로스 테베스만 실축했다.
  16. 당시 타바레스 감독은 올림픽 팀 감독도 겸임하고 있었다. 그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1차전에서 아랍에미리트를 2 : 1로 꺾었으나 2차전에서 세네갈에 0 : 2로 패했고 3차전에서 영국에 0 : 1로 패하며 1승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17. 6차전부터 12차전까지 7경기에서 불과 1승 2무 4패의 성적을 거두는데 그쳤다.
  18. 15차전까지 4위 에콰도르의 성적은 7승 4무 4패(승점 25점)에 득실차는 +5였고, 5위 우루과이는 6승 4무 5패(승점 22점)에 득실차는 -1로 승점 3점, 득실차 6점이 차이 나는 상황이었다.
  19. 역시 본선 진출국 중 가장 마지막인 32번째로 확정지었다. 여담으로 개최국 브라질을 제외하고 최초로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은 팀은 일본.
  20. 이 때 양팀의 볼 점유율은 62% : 38%로 잉글랜드가 더 높았고 슈팅 횟수도 잉글랜드가 더 많았다.
  21. 참고로 이 승리는 우루과이가 무려 44년만에 유럽 팀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다.
  22. 칠레는 주로 짧은 패스에 기동력을 앞세운 콤팩트한 축구를 구사하는데 이 날 경기에서는 그렇게 패스를 돌려 뚫고 뚫어도 우루과이 수비수들이 양파 껍질처럼 계속 등장해서 성과가 없었고 세트피스 찬스에서도 평균 신장이 더 큰 우루과이 선수들이 공중볼을 따내 버려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23. 놀라운건 구글에서 'gonzalo jara' 라고 치면 연관 검색어로 Finger 라고 나온다.
  24. 문제는 곤살로 하라의 이 같은 성추행이 초범이 아니었다는 것. 2013년 브라질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는 핵이빨로 악명 높은 루이스 수아레스곧휴를 만진 적도 있다.
  25. 예선에서는 디에고 포를란, 루이스 수아레스, 세바스티안 아브레우가 이 삼각편대에 속했고 본선에서는 아브레우 대신 에딘손 카바니가 들어갔다.
  26. 참고로 예선에서의 삼각편대는 우루과이가 득점한 30골 중 18골을 합작해 넣었다.
  27. 아이러니한 건 그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유럽 팀을 상대로만 승리했고 북중미, 남미 팀을 상대로는 모두 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