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泰錫
1 개요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학교, 내 집처럼 정이 넘치는 그런 학교 말이다.
- 故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의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中
기댈곳도 없이 굶주림과 전쟁의 화염속에 죽어 가던 아프리카 수단의 수많은 영혼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아픔을 같이 했던 진정한 신앙인
인간 세상에 잠시 다녀간 천사
1962년 11월 5일 부산 출생 ~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경 암으로 선종.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가톨릭 신부이며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수단 현지에서의 애칭은 요한(John)과 성씨 이(Lee)의 합성어인 '쫄리'. 수단 아이들이 계속 "존 리", "존 리"하면서 부르는 게 그런 발음으로 굳혀진 듯하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고 있으나, 사실 한국 가톨릭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한 성인 돈 보스코의 이름을 따 수단의 돈 보스코라 칭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하지만 돈 보스코 성인과 슈바이처의 인지도 차이로 인해 잘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돈 보스코 성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사랑하십시오
는 돈 보스코 성인의 대표적인 교육 철학이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이태석 신부의 소속 수도회이기도 한데, 숨지기 직전 임종을 지키고 있던 수도회 수사들에게 '어젯밤 꿈에서 돈 보스코가 나를 축복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본격 본인이 소속된 수도회의 설립자에 비견되는 이태석 신부.
이태석 신부의 출신 의과대학이 인제대학교라, 한국의 개신교에서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장기려와 엮으려는 시도도 있다고 한다.
2 생애
1962년 | 9월 19일 부산 출생 |
1987년 |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
1991년 | 살레시오 수도회 입회 |
1992년 | 광주가톨릭대학교 입학 |
1994년 | 첫 서원 |
1997년 | 로마 유학(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 |
2000년 | 종신 서원(로마), 부제 서품(로마) |
2001년 | 사제 서품(서울), 아프리카 수단으로 출국 |
2005년 | 제7회 인제인성대상 수상 |
2009년 | 제2회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 수상 |
2010년 | 1월 14일 선종 |
2010년 | 제1회 KBS 감동 대상 수상 |
2011년 | 7월 15일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
이태석 신부는 1962년에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천주교 부산교구 송도본당[1] 출신이다.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홀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특히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음악에도 재능을 보여 어린 시절 성당에서 풍금을 독학으로(!) 익혔다고. 직접 작사, 작곡을 할 정도라고 하니, 공부 잘하는 데다 음악까지 잘하는 보기 드문 엄친아인재.
특히 초등학교 시절 동네 성당에서 보여준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신부[2]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후 중학교 3학년 때 작곡 작사한 성가 '묵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그려내었다. 이 곡은 1998년 수원가톨릭대학교 갓등 중창단 첫 번째 앨범 <내 발을 씻기신 예수>에 소개되었다. 여기서 들을 수 있고 가사는 다음과 같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만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3] 1981년에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87년에 학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군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졌다고 한다. 돈 보스코가 설립한 대표적인 자선 수도회인 살레시오 수도회에 제대 후인 1991년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하여 200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보통 사람보다는 늦은 시작이었지만 그의 신앙과 덕행은 남달랐다. 2001년에 사제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아프리카 케냐로 건너갔다가 얼마 안 되어 더 위험하고 어려운 지역인, 20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었던 수단(현 남수단 지역)으로 건너가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열악한 수단의 환경 속에서도 병원을 손수 만들었고, 나병 혹은 문둥병이라 불리는 한센병 환자들과 결핵 환자들을 보살피며 지속적인 예방접종 사업을 벌였다. 특히 발가락이 뭉그러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그들의 발에 맞춰 특수 제작한 신발을 선물하기도 했다. 또한 일주일에 1번씩 오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동진료를 하면서 8년을 지냈다. 여기에 내전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받을 미래 세대들을 걱정하며, 손수 학교와 기숙사를 짓고 수학을 가르치기에 이른다. 거기다 아이들을 모아 악단을 만들고 지휘자를 맡기까지 했다. 이 때 브라스밴드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당연히 없었기에 스스로 교본을 보고 배워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흠좀무.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25장 40절)
위와 같은 성경 구절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며 의료활동을 해나가던 2008년 10월, 2년마다 1번씩 들르는 한국에서 휴가차 건강검진을 받던 중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말기암 선고를 받고도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해서 주변 사람들이 뜯어말리느라 고생하였다고 한다. 담당 의사에 따르면, 말기암 선고를 받자마자 "톤즈에서 우물 파다 왔어요. 마저 다 해야 하는데…"라며 실의에 빠졌다는데, 본인이 암 판정을 받아서 그런게 아니라 앞으로도 봉사활동을 계속하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으로 보였다고 한다. 판정 직후 인터뷰에도 병명은 숨긴 채로 미소를 띄우며 담담하게 봉사활동 및 지원 호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 이후에도 투병 중에 톤즈로 몇 번이고 다시 가려고 했기 때문에 그 때마다 주변에서 말렸다고 한다.
투병 중에도 자선 공연도 하고 각 지역의 성당을 직접 찾아가서 봉사활동과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결국 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 "Everything is good."[4]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47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왼쪽 사진의 얼굴 부분이 나중에 영정사진이 되었다. |
3 대중적 영향
2010년 4월 11일 방영된 KBS 스페셜 <수단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와 이를 재편집해 2010년 9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로 한국에 이름이 알려졌다. 사실 그 전에도 여러 성당을 돌며 모금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 영화가 개봉된 후 "그분이 그분이셨구나!"라는 반응을 보인 신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2011년 2월까지도 장기 개봉 중이며 단 몇 개 상영관 개봉 체제에서도 40만이 넘는 관객이 보았다. 자세한 정보는 해당 항목 참조.
씁쓸한 사실도 있는데, 수단 현지에서 몇몇 한국 사업가들이 이태석 신부로 인하여 높아진 한국의 인지도를 믿고 들어가 여러가지 사기사건 등을 저지르고 있어, 이태석 신부의 노력과 한국인에 대한 평판을 땅에 떨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단에서의 사기사건은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따로 다뤄지기도 했다.
2011년 행정안전부에서는 정부포상 국민추천제를 시행하였는데, 이 제도를 통한 첫 번째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2011년 12월 15일 로마 교황청 내 비오 10세 홀에서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울지마 톤즈>가 공식 상영되었으며, 선종 5년이 지나면 시복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다.
<울지마 톤즈>를 연출한 구수환 PD가 2012년에 쓴 책인 <울지마 톤즈-그후의 선물>을 보면 여전히 열악한 남수단 내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자를 보면 이태석 신부가 도왔던 현지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때론 욕까지 했다고 "우리가 서로 싸우고 죽게 하곤 왜 쫄리[5] 신부님을 데려가느냐"면서 울부짖으며 "그분만큼 우릴 돕던 분이 없어요"라며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가 자비를 털어가며 운영하던 병원은 이태석 신부와 같이 병원 일을 돕던 다른 한국인 신부가 남아서 하고 있는데 "정말 이태석 신부님이 하던 일을 도저히 못 따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태석 신부의 사망소식이 알려지고 톤즈를 비롯한 많은 현지 주민들이 이태석 신부를 애도하는 가두행진을 벌였는데, 워낙에 시국이 불안한 곳이라 시위나 행진 같은 집단행동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음에도 군인이나 민병대원 누구도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조차 이태석 신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
더불어 이태석 신부를 종교적으로 괜시리 욕하는 이들이 아직도 보이는데, 그는 절대로 그런 찌질이 종교 장사꾼이 아니었다. 생전 가톨릭인만이 아닌 무슬림, 토속신앙인, 개신교인 가리지 않고 모두 돌봤다. 민병대원도 치료하여 그들이 너무나도 고마워하며 이 병원 근처에는 알아서들 총들고 전투를 벌이지도 절대로 얼씬거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가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면서 성당을 짓기전에 병원과 학교부터 세워야 하는 걸 거듭 강조한 성직자이다. 고인의 뜻을 기리는 사단법인 이태석 사랑나눔을 봐도 스님도 있고 종교이니 뭐니 따지지 않고 받아들인다.
2013년 9월 22일 한가위 특선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브라스 밴드 한국에 오다!>가 방영되었는데 바로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서 처음으로 만든 밴드가 이 브라스 밴드이다.
2016년 8월 말. KBS뉴스를 통해 이태석 신부가 지은 학교의 제자들의 근황을 보도했는데, 이들은 한국에서 의학을 배우고 있다. 기사
4 저서 및 작품
- 생활성가 - "묵상" (성바오로) 1998년
- 자서전 -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쫄리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생활성서사) 2009년
- 자서전 -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증보판" (생활성서사) 2010년
- 강론집 - "당신의 이름은 사랑(톤즈의 돈 보스코 이태석 신부 영성의 메시지)" (다른우리) 2011년
- 만화 - "내친구 쫄리 신부님 1" (생활성서사) 2011
- 다큐멘터리 - "울지마 톤즈" 2010년
- ↑ 부산관광고등학교 옆에 위치. 성당 근처에는 이태석 신부의 생가가 복원되어, 여러 사진과 유물과 영상이 전시되어 있다.
- ↑ 성 다미아노 신부라고도 한다. 하와이의 한센병 환자를 위해 사목활동을 하다 결국 한센병에 걸려 1889년 선종했으며,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2009년 시성되어 한센병 환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 ↑ 이때 당시 경남고등학교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시행 전이라 부산고와 함께 부산의 2대(代) 명문 학교였다. 지금은 이미 평준화되어서 다른 일반계 고등학교랑 별반 다르지 않다. 2013년도에 자율형 공립고등학교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 ↑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이 다 좋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 이태석 신부를 현지인들이 존경하며 부르던 애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