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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소리치며 굽은 길 곧게 하는 그 이름은 예언자 그 이름은 예언자 부름받은 젊은이들 그 몸 드려 단련하는 감리교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학어둠을 물리치며 진리로 해방하는그 이름은 전도자 그 이름은 전도자 만민으로 제자 삼고 주의 약속 이룩하는 감리교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학
빛나거라 그 전통 자라거라 그 자손 비추어라 그 불빛 복음의 투사
홍현설[1] 작사, 감리교신학대학교가
감리교신학대학교 監理敎神學大學校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 |
300px | |
교훈 경건, 학문, 실천 | |
분류 | 사립대학 |
개교년 | 1887년 |
총장 | 제13대 박종천 |
국가 | 대한민국 |
소재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독립문로 56) |
교색 | MTU PURPLE |
웹 사이트 | 감리교신학대학교 홈페이지 |
목차
1 개요
개교년: 1887년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독립문로 56길)
교육이념: 경건 학문 실천
교육목적: 복음주의, 에큐메니즘, 평화주의
2 개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학대학교.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1887년 배재학당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07년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감리교 협성신학교[4]가,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여자 협성신학교도 생겼다. 1925년 두 신학교가 통합했다. 1940년 일제에 의해 휴교(사실상 폐교)된 뒤 해방후 복교되었다.
약칭은 '감신대' 또는 '감신'이다.
3 특성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직영 신학대학교[5]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 신학대학교이다.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로 남녀공학을 실시한 학교이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신학적 입장은 진보적으로 성서비평, 종교다원주의, 에큐메니즘 등에 개방적이며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다. 감리교신학대학교만의 독특한 신학적 전통은 '토착화 신학'으로서 서구의 신학을 그대로 읊조리는 신학이 아닌, 한국의 문화와 현실에 맞게 적응된 신학을 하는 것이 바로 토착화 신학이다. 이 토착화 신학 전통은 개교 직후 최병현 목사로부터 시작되어 윤성범, 변선환, 유동식, 이정배 교수에게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국 개신교 신학, 특히 조직신학 분야를 선도하는 신학대이며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 사회에 기여도 많이 한 대학이다.
4 역사
4.1 신학회 시대(1887년~1907년)
4.1.1 배재학당에서의 신학 교육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배재학당이 설립되었다. 배재학당 설립 당시 고종 황제는 마태오 복음서 20장 26-28절을 인용,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欲爲大者當爲人役]."는 당훈을 지어주었다. 이 배재학당에서 최초의 신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미 감리회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1887년 9월부터 배재학당 내 한국 학생들에게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87년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설립 연도로 볼 수 있다.
4.1.2 영아소동과 그 이후의 신학 교육(신학반, 신학회)
1888년에 '영아소동'이 일어났다. 이는 근대화 정책에 반감을 가진 수구세력들의 음모로 인해 벌어진 것으로, 수구세력들은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아 눈을 뽑아 사진기의 렌즈로 만들고 간을 빼내어 약으로 쓴다는 소문을 악의적으로 퍼뜨렸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무고한 서양인들을 폭행하는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하자, 고종은 서양인들의 활동을 잠시 중단시켰다. 그리하여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잠시 활동을 중단하였고, 종교집회 및 선교사들의 지방 여행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재학당 내에서 이루어졌던 신학 교육도 상단 기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888년 영아소동으로 중단되었던 신학교육은 1893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이는 1893년 미 감리회 해외 선교회 연례보고서에 실려 있는 한국 선교의 통계에서 "신학교 1, 교사 2명, 학생 12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1893년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보고나 편지를 보면 지속적으로 한국인 전도자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크랜턴은 1893년 5월 6일자 편지에서 1893년에야 비로소 규칙적인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 안에 이러한 취지에서 학생들을 훈련시킬 한 반을 개설해 장차 우리 사역자로 양성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신학교의 시작입니다. 아펜젤러가 돌아오면 이 학교를 출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가장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로 12명이 선발되었는데, 그들은 1주일에 2~3일 정도 오후마다 모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과목은 성서, 설교학, 구원론, 성서개론 등입니다."
즉 공식적인 신학교 개설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12명의 학생들이 정기적인 수업을 받고 있었으며 교과 과정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가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1893년 8월에 열린 미 감리회 한국 선교회 19차 연회에서는 아펜젤러를 '배재대학 학장 겸 신학부 부장'으로 임명하여 '본처 전도사 과정'으로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1893년 겨울에 시작된 '신학반'이 1899년 2월 '신학회'로 개칭되었다.
"전체 수업은 유쾌하고도 유익한 것이었으며 전 수업 기간을 통해 그 관심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들(21명 참석자)은 이 반을 신학회로 부르기로 투표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매번 서울에서만 모일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도 모이며 음력 설날 어간이 가장 좋은 시기임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영어로 "Theological Department"(신학부), "Theological school"(신학교), "Theological class"(신학반)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던 신학 교육 모임의 명칭이 '신학회'로 한국인의 투표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이 모임은 '신학회'란 명칭을 결정한 것과 함께 모임 장소를 서울특별시 외 다른 지방으로 확산시킨 중요한 의미를 지닌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도 한국인 전도인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확대시켰다. 신학교육의 장소와 대상이 확대되자 그 지원자들이 급속히 늘어났고 교수진과 교재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교수진 부족 문제는 지방마다 선교를 관장하는 선교사들과 이웃 지방에서 지원 받은 선교사들로 해결했고, 교재 부족 문제는 1900년 12월부터 <신학월보>로 해결하였다.
4.2 감리교 협성 신학교 시대(1907년~1923년)
4.2.1 감리교 협성 신학교(남성 신학 교육)
1910년대 감리교 협성 신학교의 전경. 지금의 캠퍼스가 위치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
1887년부터 시작된 신학회 교육은 미 감리회의 신학 교육 과정이었다. 당시 미국의 감리교회는 남북전쟁 이후로 미 감리회, 남 감리회로 나뉘어 있었는데, 미 감리회보다 10년 늦게 한국 선교를 시작한 남 감리회는 별도의 신학 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1899년부터 미 감리회의 신학회에 학생과 1903년 무스, 하운센 등을 교수로 보내, 미 감리회에 위탁 교육을 시키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신학회는 초기부터 남, 북 감리교 연합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로도 통합되지 못하고 서로 독자적인 조직과 선교 통로를 지니고 있던 두 감리교회가 한국에서는 연합하게 되었다. 특히 1903년 원산 부흥 운동 이후 초교파적인 신앙 부흥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두 감리교회의 일치와 연합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신학 교육에서도 나타나, 1905년부터 남, 북 감리교 연합 신학교 설립 논의가 두 감리교회 안에서 제기되고 마침내 1907년 6월, 연합으로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감리교 협성 신학교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 북 연합 신학 운동이 실시되고, 그 결실이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 결성으로 나타났다.
1907년 감리교 협성 신학교가 설립된 후, 1910년 4월에는 미국 남북 감리교회 한국 선교부에서 현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위치한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에 부지를 구입,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전시켰다.
4.2.2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여성교육)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의 모습. 학교 건물의 설계는 러시아인이어서 건물의 모습은 러시아풍이었다. 이런 이유로 광복 후 반공 영화나 일반 영화에서 소련 건물로 많이 등장하였다.
1907년 개교한 감리교 협성 신학교는 남성 교육 기관이었다. 여성에 대한 신학교육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미 감리회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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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감리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여자 성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1921년에 이르러서는 북감리교회와 남감리회의 성서학원이 통합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 부지는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 8번지에 마련하였다.
4.2.3 3.1 운동과 감리교신학교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서 감리교신학교 재학생 중 7명이 독립선언 33인 중에 참여하였다. 곧 박희도(朴熙道),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신석구(申錫九), 신홍식(申洪植), 정춘수(鄭春洙)였다.
4.3 감리교 신학교 시대(1931년~1945년)
1920년대부터 남북 감리교가 협동으로 운영하는 남녀 신학교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그리하여 2년간 실험 교육을 거친 후 마침내 1925년 4월 두 학교를 '감리교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였다. 이는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남녀 통합 교육 기관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로써 '감리교 신학교'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 구조가 팽배하던 시대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복음을 배우는 신학 교육의 장이 되었다. 1925년 감리교 협성 신학교와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통합된 후, 1931년 12월 14일부터는 전문학교령에 준하여 4년제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교장은 빌링스(B. W. Billings)가, 부교장은 구 협성여자 신학교 교장으로 일했던 체틴(A. B. Chattin)이 맡았다. 이후 1935년 4월 5일에는 대학령에 따라 5년제(예과 2년, 본과 3년)로 학제를 개편하였다.
4.3.1 아빙돈 주석 번역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전반에 한국의 개신교에 신학적인 갈등이 찾아오게 된다. 이는 감리교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아빙돈 성경 주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아빙돈 주석’은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성서 신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것이었다. 아빙돈 주석서는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던 성서비평학을 통해 성서를 주석하였다. 아빙돈 주석서는 성서비평학의 활용으로 일반 독자들에게 성서 주석의 현대성을 밝혀주어 미국 개신교계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었던 책이었다. 이러한 ‘아빙돈 주석서’를 감리교 주축으로 번역하였다는 것은, 당시 감리교가 진보적인 신학 노선을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빙돈 성경 주석’은 감리교의 류형기가 번역과 편집 책임을 가지고 출판한 것으로, 번역자로는 감리교에서는 양주삼, 정경옥, 김창준, 전영택, 변홍규, 장로교에서는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김관식, 김재준, 조회령, 윤인구 등 53명이 참여했다.
4.3.2 삐라 사건과 폐교
감리교 신학교는 이렇게 번역으로나마 한국인의 손으로 각주서를 발행할 만큼 신학적으로 성숙해갔지만, 아울러 우리 민족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에도 동참하게 되었다. 1940년 5월 어느 날 감리교 신학교 교정에 “일본인 학교에 조선 사람 보내지 말라.”, “일본인 상품을 보이콧하라.”, “창씨개명하지 말라.”,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 등의 내용이 적힌 삐라가 발견되었다. 이는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이었다. 그로 인해 몇몇 학생들이 조사를 받고 변홍규 교장과 정일형 교수가 구속되었다. 결국 그 해 10월 당시 감독이었던 친일파 정춘수가 무기한 휴교(사실상 폐교령)를 선언하여 학교가 폐교되었다.
4.4 광복 후 감리교 신학교 시대(1945년~1959년)
1945년에 광복을 맞자 바로 전에 형성(1945년 7월 19일)되었던 기독교 조선교단의 지속 여부에 대해 논의가 일어 같은 해 9월 8일에 새문안교회에서 교역자들이 “남북 대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의견은 비록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하나가 되긴 했지만 교파 통합이 바람직한 만큼 통합 교단을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과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된 것이니 각 교단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었다. 엇갈린 의견 속에서 회합에 참여했던 감리교 교역자들 중 이규갑, 변홍규, 김광우 목사 등이 조선교단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퇴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남북 대회"는 회의 끝에 단일 교단을 결성하기로 하고, 38도선으로 북측 교회가 참여하지 못함에 따라 이름을“조선 기독교회 남부대회로 고쳤다. 남부대회는 같은 해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남부대회는 여러 교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여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46년 해체되고, 각 교파가 환원되었다.
한편 새문안교회에서 퇴장했던 감리교의 목사들은 재건위원회를 조직, 위원장에 이규갑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다시 1945년 12월 17일에 조선 감리회 유지 위원회를 조직하고 역시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삼았다. 위원회는 전국에 연락을 취해 1946년 1월 14일에 동대문 교회에서 연합회(중부장: 이규갑, 동부장: 변홍규, 서부장: 이윤영)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중도파와 선교사들의 중립적 자세에 의한 화해를 종용으로 미루어져 오다가 4월 6일에서야 개최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감리교 신학교의 재건을 결의하고 교장에 변홍규 목사를 추대하였다. 그렇게 1946년 3월에 감리교 신학교가 다시 개교하였다. 이어 4월 5일에는 감리교 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 조선 감리회 중부 및 동부 연회가 연합으로 개최되고 1939년의 감리교회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재건파에 의해 어렵게 다시 개교한 감리교 신학교는 1948년에 45명, 1949년에 40명, 1950년에 3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 1951년 민가를 구입, 판잣집을 지어 임시 가교사로 사용하였다. 부산 피난 시절에 1951년에 43명, 1952년에는 6명, 1953년에는 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휴전 후, 1954년 3월 13일 부산에서 마지막 졸업식을 끝내고 4월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환도 이후로는 정상적으로 매해 30여 명에서 50여 명을 배출하였다.
1951년 4월 5일부터 부산에서 사용한 임시 교사. 1954년까지 사용되었다.
학교 재건 후 다시 교장에 오른 변홍규 박사는 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33년부터 감신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1939년에 빌링스에 이어 감신의 6대 교장을 맡은 바 있었다. 이어서 1941년에 김인영 목사가 교장을 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다시 변홍규 목사가 맡았고, 1948년부터 1951년까지는 유형기 목사가 맡았다. 1952년부터 25년간은 홍현설 목사가 교장 직을 수행하였다.
4.5 감리교신학대학 시대(1959년~1993년)
1959년 감리교신학교는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교장이었던 홍현설은 같은 해 3월 18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3부 연합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일 먼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 싶은 기쁜 소식은 과거 수십 년 간 우리의 숙제였던 대학 승격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어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금년 4월 1일부터 정규 대학의 인가를 받아 학생을 모집할 것입니다.”
1959년 4월 1일 이후 학교의 공식적인 명칭은 감리교신학대학이 되고 홍현설 교장이 제 1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미국 웰치 감독의 헌금으로, 웰치 감독의 이름을 딴 웰치 채플이 건립되었다.
4.19 혁명이 있기 두 달 전인 1960년 2월 21일 뜻하지 않은 화재로 도서 및 학적부가 거의 전소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새 본관 공사에 착수하였고, 10월 31일 새 본관(현 대학원 건물로 쓰이는 청암기념관)이 3층 규모로 준공되었다. 1969년 선교 대학원이 교단의 위촉으로 개설되었고, 1971년 봄에는 대학원과 신학대학원이 문교부로부터 정규 대학원의 인가를 얻어 개원하였다. 이어 부설 연구소를 두었다. 부설 연구소에는 기독교 교육연구소(소장: 은준관 교수)와 한국교회 선교 문제 연구소(소장: 홍현설 교수) 등이 있었다.
1977년에 홍현설 학장이 정년 은퇴했다. 1977년 6월, 그 뒤를 이어 윤성범 교수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윤성범 교수부터 학장을 4년 임기제로 하였다.
1980년 2월 11일 윤성범 학장에 이어 김용옥 교수가 제 3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용옥 학장은 학장 재임 기간인 1980년 3월 15일 교육부로부터 공동 박사 과정 설립 인가를 받았고, 같은 해 9월 30일에는 1981학년도 입학정원 증원 및 기독교교육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신학대학원(Th. M. 과정, M.Div. 과정)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새로 도서관을 신축할 것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김용옥 학장은 도서관 완공을 보지 못하고 간염으로 돌연 소천하였다. 김용옥 학장의 뒤를 이어 1981년 2월 14일 박봉배 박사가 제 4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7월 15일에 도서관이 준공, 개관되었는데, 도서관 건립을 추진하다가 병사한 김용옥 학장의 이름을 따 “김용옥 학장 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1982년 6월 29일에는 종합관이 준공되었고, 충정로 3가 구 협성여자신학교에서 종합관 지하로 기숙사를 옮겼다.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종교철학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리한 종합대학화 계획과 학장 종신제 추진 등의 이유로 1982년, 1985년 두 번의 학내 사태가 일어났다. 두 번의 걸친 사태 후 박봉배 학장이 학장직을 사임하고 퇴진하였다. 1987년에는 이사회가 퇴진하기에 이른다. 1985년 박봉배 학장이 사임한 후 송길섭 박사가 제 5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0월 30일에 기독교교육과를 기독교교육학과로 개편하였다.
감리교 신학의 토착화 전통은 변선환 교수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학문적 전통에 대한 교단의 일부 세력이 반발하고 나섬으로써 교단과 학교 간에 학문적인 갈등이 야기되었다.
1982년 6월 26일 현대사회연구소가 주최한 불교와 기독교와의 대화 모임에서 변선환 교수가 주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단 시비가 일어났다. 문제가 된 강연 내용은, “무신론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것인데, 이 말의 본래 의도는, “우리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입장을 떠나 무신론자까지도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연 내용이 신문에 발표되자 감리교 부흥단은 변선환 교수가 사도신경과 감리회 교리적 선언을 부인했다는 일종의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고 변선환 교수의 감리교 정회원 자격 정지를 요구하였다. 결국 오경린 감독회장이 변선환 교수로 하여금 해명서와 자신의 신앙 고백서를 발표하도록 하여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이는 진보적 신학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발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4.5.1 변선환·홍정수 교수 사건(변·홍 사건 1991년)
1988년 8월 10일, 변선환 교수가 제 6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91년 변선환 학장은 다시 이단 시비에 휘둘렸다. 1990년 변선환 학장은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다음 해에 홍정수 교수가 ‘부활의 메시지를 다시 조명한다’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글에는 변선환 교수의 종교 다원주의 신학이 잘 드러나 있었는데, 변선환 교수의 신학은 이웃종교를 사탄이나 우상으로 적대하거나 개종의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이웃 종교를 존중하고 그리스도교와의 공통된 내용을 찾아 대화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홍정수 교수의 글에는 포스트 모던 신학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이자 금란교회 담임목사인 해일 김홍도 목사가 주동한 교리 수호 대책 위원회로 대표되는 부흥사들은 두 교수의 사상이 ‘이단 사상’, 내지는 ‘기독교 신앙과 감리교 교리에 배치되는 신학 사상’으로 ‘선교에 특히, 7천 교회 2백만 성도 확장 운동에 막대한 장애 요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총회 차원에서도 받아들여져 두 교수는 출교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정성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고, ‘교단 정치의 싸움으로 전락되었다’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고, 특히 감신 학생들의 많은 저항을 받았다.
4.6 감리교신학대학교 시대(1993년~현재)
1992년 7월에 변선환 학장이 종교재판의 후유증 속에서 정년 은퇴와 동시에 임기 만료로 퇴임하게 되고 이어 구덕관 교수가 학장직을 승계하였다(1992년 8월 10일). 1993년 3월 1일에는 교명이 감리교신학대학교로 개칭되고, 학장은 총장이 되었다. 구덕관 총장은 취임사(1992년 9월 10일자 학보)에서 학교의 후진성에 대한 깊은 인식과 발전 계획에 대해 밝혔는데, 오해가 다분한 발언들로 학생들의 큰 불만을 샀다. 변선환 학장 시절인 1990년 3월 12일에 이사회에서 충북 음성군 감곡면 원당리에 제 2 캠퍼스를 개발하기로 가결하였었는데, 이 계획이 이때 알려져 학생들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결국 학생들의 불만은 구덕관 총장 퇴진 운동으로 이어져 구덕관 총장은 결국 1994년 10월 퇴진하였다.
구덕관 총장이 퇴진한 후, 이종수 감독이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97년, 1998년의 전국대학종합평가와 건물 확보를 위해 백주년 기념관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종전에 각종 집회가 열리고 학생들의 담소 공간이었던 아레오바고를 헐고 그 자리에 지상 7층, 지하 3층의 규모로 계획되어 1999년 완공하였다. 완공 이후 교수 연구실과 김용옥 학장 기념관에 있던 도서관 등이 백주년 기념관으로 이동하였다.
이종수 감독이 약 2년의 짧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고 1997년 염필형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에 김득중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03년에 웰치 채플을 헐고 그 자리에 웨슬리 채플을 지었다. 웨슬리 채플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1,5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와 현대적인 모습으로 지어졌다. 웨슬리 채플 건립 시, 웰치 채플의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를 들어 학생회와 학교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 학생회는 웰치 채플을 보존하고 운동장 자리에 지을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웨슬리 채플이 완공된 후 같은 해부터 장천 김선도 감독의 헌금으로 새 기숙사 건축을 시작하였다. 2004년, 학과제를 폐지하고 학부제를 실시하였다. 신입생은 과 배정 없이 신학부로 편성되어 2학년 때부터 신학, 기독교교육학, 종교철학 세 전공으로 나뉘는 체제로, 2004학번부터 적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 없는 학교 측의 일방적인 실시로 또 다시 학생회와 학교가 큰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학부제 실시로 인해 선후배 간의 친목 도모가 어려워지고 학우들 간 개인주의가 심화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4년에 김외식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비아돌로로사가 건립되고, 2005년에 주차장이 완공되었다. 또한 새 기숙사가 완공되어 '장천생활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김외식 총장은 감신의 국제화를 내세워 여러 외국 학교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외국 학생들의 교육 프로그램(International Church Leader Program, 약칭 I.C.L.P. 후에 International Graduate School of Theology, 약칭 I.G.S.T.로 개칭)을 신설하였다.
2008년에는 김홍기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김홍기 총장은 취임사에서 300억을 모금하여 감신의 발전을 도모하겠다고 밝혔고 실제로도 모금에 들어갔으나.. 현실은 시궁창...
2012년에 박종천 교수(조직신학)가 감신대 13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5 신학부
2004년 이전까지 학과제를 운영하여 신학과, 기독교교육학과, 종교철학과 세 개의 학과가 있었다. 2004년 이후부터는 학과제가 폐지되고 학부제가 실시됨으로써 1학년은 전공 배정 없이 신학부에 있다가 각 전공에 지원하여 배정된다. (하지만 사실 신학대의 특성상 목회자 양성이 우선순위이고 따라서 목회자 양성 과정인 신학전공이 주력인지라.. 배정은 성적순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 지원해서 신학전공 외 다른 전공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신학전공
1887년 개교 당시부터 존재해온 학과로,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대표하는 학과이다. 정원은 120명으로 이 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2년 과정을 마치면 감리교 목회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2004년부터는 학부제 실시로 '신학전공'으로 개편되었다. 교육 목표는 '감리교회 교역자 양성', '민족과 사회를 위해 일하는 지도자 양육', '세계를 섬기는 영적 지도자 양성'이다. 전문적인 교역자 양성은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육목표인 ‘성서적 체험적 신앙의 양육’, ‘기독교 에큐메니칼 전통의 확립’, ‘신앙공동체를 위한 지도력 함양’과 연결된다. 성서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철저히 교육받고 양육받은 학생들은 교인들의 영적 성숙을 책임질 수 있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전통을 배움으로써 보수와 진보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건전한 목회를 할 수 있다. 또한 신앙 공동체를 위한 지도력 함양을 부단히 연마 받은 자만이 건전하고 능력 있고 성숙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민족과 사회를 위해 일하는 지도자’를 양육하는 것은 건전하고 능력 있는 민족과 사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내면적 경건수련의 기도생활과 깊은 학문적 탐구와 수많은 실천의 경험이 요청된다. 이에 부응하며 대학의 교육목표인 ‘전통문화와 간학문적 대화’, ‘사회, 민족, 국가, 세계를 위한 봉사’, ‘종파, 인종, 계층, 성을 초월한 평화와 생명구현'의 목적에 부합하는 교육과정을 마련하고 있다. '세계를 섬기는 영적 지도자 양성'이라는 목표에 따라 신학과는 교육과정에 어학과정과 해외 목회 등에 대한 과목을 배정하고 있다.
- 기독교교육학전공
기독교교육학과는 1980년대 인가를 받아 1981년에 설립되었다. 기독교교육학과는 기독교 교육 분야에 소명을 받은 이들에게 신학 및 교육학의 이론과 실천을 배우고 익히게 하여 교회와 사회현장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성인과 노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함양시키는 기독교 교육의 전문지도자 양성 학과이다. 토한 기독교교육의 이론적 토대를 근거로 교회 및 사회단체 등 각종 현장에서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학과이다. 기독교교육학과를 졸업하면 교육분야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교육목회자, 교육 분야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교육사, , 종교계 학교, 그리고 일반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 활동을 담당하는 종교 교사가 될 수 있다. 이 중 종교 교사의 양성을 위해 기독교교육학과의 정원 중 10%의 학생들을 선발하여 교직 과정을 이수할 수 있게 한다.
- 종교철학전공
종교철학과는 1982년에 설립되었는데, “종교철학과”라는 이름으로는 학부에 관한한 국내 최초인 것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학과 중의 하나이다. 종교철학과는 오늘의 세계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직시하면서,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교회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해 설립되었다. 종교철학과는 영성과 인성은 물론 철학적 교양의 폭을 넓히는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전문 목회자 및 종교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하고 있다. 종교철학과의 교과과정은 우선 기독교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초적 소양을 닦도록 꾸며져 있다. 종교철학과 교과과정 가장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는, 교회라는 작은 터전에서 기독교 신학을 다루는 것을 넘어서서 기독교 바깥의 세속학문의 도전에 기독교적으로 응답하는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고등 종교들, 즉 유교와 불교, 이슬람과 유대교 등에 대해서 종교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물론, 오늘의 실용학문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과학이나 문화의 제반 학문영역과 유기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동시에 때로는 그들의 학문적 도전에 기독교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적합한 이론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동시에 병행한다. 진로는 목회자, 교수, 선교사 등이 있다.
6 대학원
대학원은 일반대학원, 전문대학원으로 나뉘어 있다. 전문대학원에는 신학대학원과 목회신학대학원이 있다. 일반대학원에는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이 있으며 신학대학원은 신학석사와 목회학석사 두 과정으로 나뉘어 있고 목회신학대학원에는 목회학석사과정 밖에 없다.
- 대학원(M. Th. / D. Th.)
타 신학대와 달리 신학석사(M. Th.) 과정이 개설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학석사 과정은 4학기제로, 감리교 직영 신학교(감신대, 협성대, 목원대) 신학과 출신이 들어갈 수 있다.
- 신학대학원(M. Th. / M. Div.)
신학대학원에도 신학석사 과정이 개설되어 있으며, 과정은 일반대학원의 신학석사 과정과 거의 같다.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과정은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학위 논문을 쓰지 않아도 학위 취득이 가능하다는 것이 차이이다.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과정도 감리교 직영 신학교 신학과 출신이 들어갈 수 있다. 목회학석사 과정은 본교 기독교교육학과, 종교철학과 출신이나 타 대학 출신들이 들어갈 수 있다. 즉 학사 학위만 있으면 전공 불문하고 다 들어갈 수 있다. 목회학석사 과정도 전공 선택하지 않고 학위논문을 쓰지 않아도 학위 취득이 가능하다. 단 선택시에는 쓸 수 있다.
- 목회신학대학원(M. Div.)
목회신학대학원은 주로 직장인을 위한 대학원이다. 야간 과정이며, 목회학 석사 과정만이 개설되어 있다.
7 비판 및 논란
7.1 학내사태
2015년, 인사비리로 인해서 학내사태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하는 등 학내사태를 해결하려 했지만, 이사장의 막말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총여학생회장이 웨슬리 채플 종탑에까지 올라갔었다. 15학번과 16학번들 지못미..
7.2 성추행 추문
조직신학 전공 교수가 연구실에서 논문을 지도하던 여제자를 상습적으로 추행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학교측은 기사가 날 때 까지 즉각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고, 기사가 난 후 교단측에서 징계 절차를 밟고 있다.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는 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총학생회의 성명총여학생회의 성명- ↑ 감신대 초대 학장
- ↑ 영문명은 2008년 이전까진 신학교를 의미하는 Seminary를 썼으나 2008년부터는 University로 바꿨다. 이유는 세계 타 대학과의 교류시 격이 떨어지는 취급을 받기 때문이라고...
- ↑ 감신대에 가서 느는 게 말빨이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별명
- ↑ 여기서 '협성(協成)'은 영어 Union의 번역어이다. 영어권 신학교의 경우 Union으로 시작하는 학교가 많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남.북 감리교로 갈라져 한국에서도 각기 선교를 들어온 두 교단이 신학교 운영만큼은 합력하여 운영한다는 의미에서의 협성이다. 현재 협성대학교와는 관련이 없다. 협성대의 '협성'도 이런 전통과 의미에서 온 것이지만 감신대와의 직접적인 연결성은 없다는 의미다.
- ↑ 그래서 그다지 크지 않은 학교 규모에 비해, 실제로는 감리교계 제1의 신학대학교로서의 위상이 높은 학교다.
거기에 동문파워도 막강한 것도 유명하다. - ↑ 現 매향중학교와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