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역사

1 조선시대 이전

독립소국 탐라국이 있었으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원래 한반도 본토의 나라들과는 매우 문화가 이질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부용국→통일신라의 속국→고려의 속국→삼별초원나라 속국→고려의 속국을 거쳤다.

자세한 사항은 탐라국 문서 참조.

2 조선시대

조선 초 이방원 때 탐라국 체제를 폐지하고 전라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세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완전하게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는 행정구역으로 되었다.[1] 하지만 섬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악명높은 유배지로 이름이 난 지역이 됐다. 왕족들이나 유력 정치인의 단골 코스로 대표적으로 광해군, 소현세자의 아들들, 송시열, 최익현이 있다.

또한 전통시대 공물을 많이 바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이 있었으며 해산물 또한 주요 공물품이 되었다. 귤 같은 작물의 경우 제주도에서 나는 최고의 산물로 평가되어 왕족들을 위한 진상품으로 엄청 보내려 했다고 한다. 나무에 맺힌 열매 하나하나마다 기록해서 그 물건들을 다 바치라 했다 하는데 태풍이라도 맞으면 내야될 공물은 그대로인데 수확물은 토막토막난 상태이니... 정작 그래놓고 가는 길에 썩어서 왕에게 전달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하여튼 그 때문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귤나무를 없애려 시도도 했다.(자세한것은 조선시대 제주도 진상품 고난 참조)

제주도의 방어시설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요약 가능. 봉수는 먼 거리를 감시하는 데에 연대는 가까이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봉화대 같은 통신시설이었다.

탐관오리들에게 인기인 지방이었는데 본토와 떨어져 있어 중앙의 입김이 잘 미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백성들 쥐어짜서 부정축재하기에 좋고 경치가 좋으니 놀러다니기도 좋고 또 소 목장이 있어서 쇠고기 먹기도 좋았기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농본국가라 소 금살령이 자주 내려져서 벼슬아치들도 쇠고기 먹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물론 제주도 소는 정부 소유라 함부로 잡으면 안되지만 법 지키면 탐관오리가 아니지 자연사한 소라고 허위보고하고 몰래 잡아먹었다고 한다. 거기에 덧붙여 귀한 한약재였던 우황 역시 짭짤한 부수입 거리였다. 더군다나 주로 기르던 소는 제주 토종 흑우로 진상품이었다.

상당히 전투적인 곳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중국이나 전라도로 가는 왜구들이 자주 들렀을테니... 말도 많아서 기병의 비율이 한반도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여성도 예청(제주어다. 한자로는 女丁이라고 쓴다)이라 하여 군역을 졌다.

출륙금지령 때문에 제주도민은 아예 본토로 이주가 금지되었다. 배를 만드는 것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어선 대신 뗏목인 테우를 써야했고, 때문에 과부 숫자가 더더욱 늘어나게 된다. 멀쩡한 어선도 툭하면 안돌아오는데 뗏목타고 나가면 퍽이나 안전하겠다. 정조 때 최초로 김만덕이 흉년에 재산을 내어 제주도 사람들을 구휼한 공로로 국가에서 육지여행을 허락한 바 있다.

3 근대

1896년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제주부(府)로 통합하였다가, 1년 만에 복구하면서 전라남도 관할하에 두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제주목, 정의군, 대정군 및 완도군 일부(추자면)를 제주군으로 통합하였으며, 다음 해인 1915년 제주군을 제주도(島)로 개칭하고,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칭하였다. 여기서의 도(島)는 행정구역 단위 명칭으로 쓰인 것. 같은 시기 울도군(울릉군)도 울릉도(島)로 개칭되었다.

1935년에는 제주도의 면 이름들을 고쳤다. 원래 제주도의 행정구역은 제주·대정·정의의 세 고을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고을은 다시 방위에 따라 각자 좌면·중면·우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후 제주목의 좌면과 우면이 너무 넓어 신(新)과 구(舊) 자를 붙여 제주목을 구우면·신우면·중면·신좌면·구우면으로 나눴고, 역시 지나치게 넓은 정의군 중면 역시 동중면·서중면의 두개 면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1914년 일제가 이들 행정구역을 제주군으로 통합하면서 원래 군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중면과 정의군 좌면, 대정군 우면을 제주면·정의면·대정면으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면 이름들은 그대로 두었고, 그 결과 제주도 안에 방위를 나타내는 이름의 면이 구좌·좌·신좌·동중·중·서중·구우·우·신우의 9개나 되는 헬게이트(...)가 열렸으며, 구좌면은 동쪽에, 신좌면은 서쪽에 있는데 좌면은 서쪽에, 우면은 동쪽에 있는 등 완전히 행정구역 방위와 이름이 뒤죽박죽된 상태였다. 결국 1935년 이들 면들은 구좌면을 제외하고는 (주로) 면소재지 이름을 따서 모두 개칭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과 매우 긴밀히 연결된 편이었다. 제주 섬 인구의 1/4 정도 되는 인구가 일본 오사카 쪽으로 일하러 갔다 왔을 정도다. 광복 시점의 제주 인구가 30만 명 정도인데 이 가운데 10만 명 가까이가 오사카 등 공장지역에서 일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향한 인원이라 한다. 하지만 3년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재일교포 중 상당수가 그 근원을 살펴보면 조상이 제주도 사람인 경우가 많다. 재일교포 100만명 중에서 제주도가 본적이거나 고향인 사람이 20만에 달한다고 한다. 제주도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정도라는 걸 생각한다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큐멘터리로도 소개된 모리오카 냉면 체인인 뿅뿅사의 창업자인 변용웅씨의 부모가 제주도 출신이었으며, 새끼돼지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 또한 제주도 출신 교포부부의 자녀로 총련 소속이었다가 북한에 들어간 후 김정일과 만났다고 한다. 일본 최대의 도시락 체인 혼께 가마도야사의 오너인 김홍주씨도 제주도가 고향. 혼께 가마도야사의 국내 협력사가 한솥도시락으로 일본에서의 운영방식을 한국에도 그대로 도입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은 "결호작전"에 따라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고자 했고 전 일본영토에 요새화를 지시했는데, 제주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기 때문에 "결7호 작전"에 따라 요새화가 시작되었다. 섬 곳곳에 토치카와 지하땅굴이 파여졌으며 항공대가 주둔했다. 해안 절벽엔 가이텐이나 신요와같은 자살병기들이 배치되었고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일제의 흔적들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땅굴은 제주도에 수학여행가는 학교들이 많이 거쳐가는 곳이기도 하다. 168cm 정도 키인 사람도 정신줄 놓고 똑바로 서서 다니다가는 머리를 부딪치는 적이 있는 땅굴인데, 하여튼 위에 써놨듯 미친 짓.

이 시기 제주도의 요새화에 관해서는 결7호 작전 문서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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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겼다. 제주 해안을 둘러보다 보면 많이 볼 수 있는데, 자연동굴도 있겠지만 인공 동굴의 숫자도 무시못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신요 항목 참조.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제주도가 미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만약 올림픽 작전 같은 대재앙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면 제주도는...

4 현대

해방 이후 1946년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道)가 설치되었으며, 제주도 설치와 함께 남북을 분할하여 북제주군, 남제주군의 2개 군을 설치했다. 1955년 북제주군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남제주군 서귀읍과 중문면이 서귀포시로 승격되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각각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의 정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은 행정구역이 동서로 분리되는 모양을 취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48년부터 1954년까지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 4.3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유엔군사령부미국 합동참모본부38선을 돌파한 중국 인민지원군이 남진을 계속하여 금강 부근까지 내려올 시, 대한민국 정부를 제주도로 후퇴시킬 극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2의 국부천대. 그 이전에 미국은 북한군낙동강 방어선을 위협할 때도, 한반도가 함락될 경우 남은 한국인들을 서사모아 등지로 보낼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이 계획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물론 유엔군이 중공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지만, 제주도를 대만화하기에는 제주도 자체의 식수가 부족했던 탓도 있다.[2]

대규모 관광 개발을 해서 발전시켜보자는 중앙정부의 의도로 현재 한국 최고의 관광지로 발전하였다. 2006년 7월 1일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특별자치도로 출범함과 동시에 제주시와 북제주군이 행정시인 제주시로,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이 행정시 서귀포시로 통합되었다.[3]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각각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에서 분리 승격된 시였기 때문에 일종의 역관광역전인 셈이다.그렇지만 4개 자치구역이 2개 행정구역으로 격하된 셈이고, 통합 10년 가량 지난 2015년에도 제주시내와 서귀포시내를 벗어나면 인가는커녕 창고나 목장조차 드문 땅이 펼쳐진다.

본토에서는 부산영도구가 제주도 출신들이 모여살기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공교롭게도 이곳도 섬이다. 전국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오직 섬으로만 구성된 곳. 물론 제주도와 달리 영도는 부산 본토와 영도대교, 부산대교, 남항대교로 이어져 있다. 영도에는 제주은행의 셋밖에 없는 육지 내 지점까지 있다. 부산광역시 전체에 1057명의 해녀가 등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제주에서 이주해 간 60~70대의 할머니.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제주 말총으로 을 만들던 많은 제주인들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부산으로 옮겨온 것이다.
  1. 대정현과 정의현간 경계는 현재 서귀포 신시가지를 가르는 것으로 보이며 결국 옛 대정현의 강정동과 옛 정의현의 법환동-서호동을 가르는 경계로 추측된다.
  2. 대만의 면적 : 3만 6179㎢, 제주도의 면적 : 1825㎢
  3. 행정시란 지방자치권을 갖는 일반적인 (市)와는 달리, 제주특별자치도 산하의 단순 행정기구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때문에 시장 선거도 하지 않고 시의회도 존재하지 않으며, 제주특별자치도지사가 시장들을 임명한다. 일반 시 예하의 일반구와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