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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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昌成
1927년 9월 1일 ~ 2006년 2월 14일

1 일생

1.1 출생

1927년 경기도 포천군(현 포천시)에서 출생하였다.

1.2 군인 시절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이다. 동기생들 중에는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오치성 등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사람이 많았으나 그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5사단장, 중앙정보부 차장보, 육군보안사령관 등 군내 요직을 거쳤다. 육군보안사령관 시절 김복동의 장성 진급 누락 계획을 알고 이를 막는 데 기여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조윤형, 김상현, 이세규, 강근호, 이종남, 김경인, 김녹영, 김한수, 나석호, 홍영기, 조연하, 최형우, 류갑종, 박종률 등을 고문하는 데 관여하였다.

1973년 4월, 육군보안사령관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에 의하여 윤필용 사건을 수사하게 되었다. 10월 유신 직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하였으니 물러나고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강창성은 처음에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윤필용을 살려 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는 더욱 분노하였고, 결국 윤필용과 주변 사람들을 수사하게 되었다. 쿠데타 혐의가 나오지 않자 군무이탈 등의 다른 죄를 적용하였다.

한편, 이 과정에서 전두환, 노태우 등이 조직한 군부 내의 사조직인 하나회의 존재를 알게 되고 하나회를 뿌리뽑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73년 8월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인물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으며, 1976년 예비역 소장으로 예편하게 되었다.

1.3 민간인 시절

예편 이후 해운항만청장을 역임했던 강 전 사령관은 1980년 3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초대로 국정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두환이 집권욕을 드러내자, "이번만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뽑은 민간정치인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전두환은 1980년 여름 강창성을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여 고문을 하고 나서 삼청교육대에 보내 버렸다. 무려 2년 동안 4번에 걸쳐 삼청교육대에서 혹독한 수난을 겪은 강창성은 체중이 70kg대에서 40kg대까지 빠진 데다 당뇨병까지 얻었고, 여기에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다.[2] 출옥 이후 강창성은 이후 일본 유학을 하고 잠시 명지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명지대 일본문제연구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군벌>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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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끝이 강창성 의원. 외모가 많이 달라졌다. 왼쪽 끝은 뭐 다 아시다시피..

1992년 민주당 국회의원(전국구 3번)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93년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12.12 군사반란에 대한 국정조사가 열리자 야당의 공격수로 활동했다. 국정조사 중 민주자유당권익현 의원은 강창성에게 "XX. 자기가 보안사령관 시절 나를 잡아넣을 때는 영장을 갖고 했어?"라며 욕설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권익현은 하나회의 대표적인 구성원일뿐더러 윤필용 사건 당시 윤필용 계열로 몰려 징역형을 선고받고 예편했기 때문이다.[3] 19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이 민주당의 동교동계 국회의원들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으나 이에 따라가지 않았고, 다음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용산고등학교를 나온 인연으로 서울 용산구에 출마했으나 3위(21%)로 낙선했다[4]. 1997년 통합민주당[5]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되자 한나라당에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이 때 권익현 의원과 한솥밥을 먹게 되어 험악한 분위기까지 가기도 하였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4번으로 당선되어 재선의원이 되었다. 2004년 대통령 노무현 국회 탄핵사태에서는 당론에 따라 앰뷸런스를 타고와서 휠체어 신세로 탄핵 표결에 참석하였다(비밀 투표였으나 찬성표 행사로 확인).

2004년 16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뒤로는 삼청교육대 시절의 후유증 때문에 암과 당뇨병으로 고생하다 2006년 2월 별세하였다.

1.4 국립묘지 안장 거부 논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6·25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본래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지만, '금고 2년 이상 선고받은 자'는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을 만들면서 80년에 신군부에서 탄압받는 과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은 그도 국립묘지 안장이 부결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자면 비록 사면은 받았어도 실형은 선고받은 신군부 인사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을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탄압받은 강창성까지 대상이 된 셈이다. 2012년 재심의에서도 거부(!)

그러나 정작 비슷한 시기 죽은 안현태 전 대통령경호실장은 같은 상황임에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관련 기사

2 드라마에서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서상익이,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겸 성우 조명남이,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겸 성우 이도련이, 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최동준이,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이영후가 강창성을 연기했다.

3 기타

후손으로는 강규형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등이 있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국회의원)민주당-당선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용산구)통합민주당(1995년)-낙선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한나라당-당선
  1. 보안사령관 시절 그의 부관이었던 이준 소령도 하나회의 견제를 받아 제6공화국 때까지 주로 강원도 오지에서 근무했다.
  2.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장군 시절의 후덕한 체구가 삼청교육대의 고생과 그로 얻은 당뇨병 때문에 빼빼 마른 체구로 바뀌었다!
  3. 權翊鉉의원 원색욕설
  4. 당시 당선자인 신한국당 서정화 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 오유방 후보의 격차가 4%가 안됐으니 신한국당 서정화 후보의 승리에 공헌(?)한 바가 된다.
  5. 민주당이 1995년 말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만들어진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