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차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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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초대 혁거세거서간 박혁거세2대 남해 차차웅 박유3대 유리 이사금 박유리
시호남해 차차웅(南解 次次雄) / 남해 자충(南解 慈充)[1]
박(朴)
남해(南解) / 유(悠) / 민해(愍解)
생몰년도음력? ~ 24년 9월
재위기간음력4년 3월 ~ 24년 9월(21년)

1 개요

신라의 2대 으로, 박혁거세 거서간과 알영부인의 적자이다. 이름은 남해(南解)라 하나, 족보에는 박유(朴悠), 민해(愍解)라고 적혀 있다. 칭호는 차차웅인데 삼국유사에서는 아버지처럼 거서간을 붙여 남해 거서간이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왕비운제부인이며, 3대 국왕이 될 유리 이사금의 아버지이자 4대 국왕이 될 석탈해장인어른이다.

2 호칭

'차차웅'이라는 호칭이 특이한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의 글을 인용하며 "차차웅은 무당을 부르는 신라의 방언"이라고 한다. 즉 오늘날 말로 하자면 신관이 왕이 된 셈. 물론 고대에는 왕이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주재하기는 했지만[2] 대놓고 자기가 무당이라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비슷한 예는 일본 여왕히미코 정도. 이를 샤머니즘적인 부족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전 왕인 박혁거세가 기록상 그 사망의 형태가 미심쩍음을 보면 혼란한 국가를 종교로 수습했다는 해석이 더 타당할 것이다. 차차웅을 오늘날 '스승'이라는 말의 기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 쓰기도 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차차웅이 앞서 혁거세거서간의 호칭인 거서간과 동격의 의미라고 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고 써 놔서 마찬가지로 둘이 비슷한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에는 삼국사기를 따라 거의 남해 차차웅으로만 쓴다.

3 일생

서기 4년에 즉위해 재위 3년째(기원후 6년) 봄에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의 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제사지에 따르면 남해왕 3년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 여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혁거세거서간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박혁거세 말년의 기록이 비록 반란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심쩍은 묘사가 있는데, 아버지 박혁거세의 사망장례식을 치른 기간이 차이가 나는 사실 또한 반란설에 무게를 두는 대목이라 한다. 물론 이 때 건립한 것은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종묘와 비슷한[3] 곳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

사실 삼국사기에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오르면서 "두 분(혁거세와 알영)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한 시점에서 의혹 확정이다.

기원후 8년에는 석탈해사위로 받아들였고, 기원후 10년에는 그를 대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고 한다.[4] 즉 석탈해를 실질적으로 정치를 하는 왕으로 대접했다는 소리. 여담으로 석탈해가 맡은 대보는 신라 왕사에서 딱 세 명만 맡았으며, 이는 석탈해의 출신 지역을 추리하는 데 단서가 되기도 했다. 석탈해 해당 문서 참조.

기록상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는데, 4년(즉위 원년)에 낙랑군이 금성(경주시)을 두 겹으로 에워쌌다가 물러났고, 14년(즉위 11년)에 가 100여 척의 배를 타고 몰려와 해변가의 민가를 약탈하자 경주 6부의 병사들을 내보내 격퇴하는 사이 이번에는 낙랑 군사들이 빈틈을 노려 다시 신라에 쳐들어왔다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일본은 그렇다치고, 낙랑이 정말로 한사군낙랑인지는 의문인데, 여러 설이 있다.

19년에는 북명(北溟)에서 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 차차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북명은 삼국시대 기록에서 종종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나라인데, 원산만 근처의 동예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 북명이 동북부여를 가리키는 것임을 들어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있다. 초기 신라의 범위가 아무리 영향권을 크게 잡아도 부여와 접점이 있을만큼 그리 넓지는 않았다는 것. 헌데 이를 석탈해가 이끌던 집단이 나라째로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것을 기록하였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 외에, 박혁거세의 치세에서는 보이지 않던 천재지변의 기록이 잦은데, 11년 여름에 가뭄, 15년 봄~여름에 대기근, 18년 서라벌가뭄, 7월에 누리(蝗蟲(황충): 메뚜기)의 재해가 있었으며 22년 질병이 크게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으며, 또한 24년 9월에 누리의 피해가 컸다는 기록이 있다.

24년에 사망하고, 그 자리를 아들인 유리 이사금이 물려받았다.

4 대중매체에서 모습

5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낙랑의 군사들이 침공했다가 물러가다
三年春一月 시조묘를 세우다
三年冬十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왕의 장녀를 탈해의 처로 삼다
七年秋七月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다
八年 가뭄이 들다
十一年 낙랑인들이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다
十三年秋七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 서울이 가물다
十五年秋七月 창고를 열어 기근을 구제하다
十六年春二月 북명 사람이 예왕의 도장을 바치다
十九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十九年冬十一月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다
二十年 금성이 태미로 들어가다

二十一年秋九月 왕이 죽다
  1. 자윤(慈允)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2. 중국황제 역시 근현대까지도 이런 성격이 있어서, 예를 들어 제후국인 조선대한제국 선포 이전까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환구단 문서 참조.
  3. 아직 중국에서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기 때문에 흔히 아는 조선 스타일 종묘와는 다르다. 그런 건 통일신라대에 가야 생긴다.
  4. 저 두 가지 일을 빼고 이 할 일이 몇 가지나 남는지를 생각해 보면 기껏해야 외교 정도밖에 없고, 굳이 왕호를 무당 칭호로 한 것을 보면 제사 정도는 치렀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