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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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국기설산사자기. 지금은 티베트 망명정부의 국기로 사용한다.[1]

FREE TIBET!티벳독립만세![2]

1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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སྲིད་ཞིའི་ཕན་བདེའི་འདོད་རྒུ་འབྱུང་བའི་གཏེར།

씨시 팬데 되구 즁외 떼르
윤회계와 열반계의 소원을 이루는 보고(寶庫)

ཐུབ་བསྟན་བསམ་འཕེལ་ནོར་བུའི་འོད་སྣང་འབར།
툽땐 쌈팰 노르뷔 외낭 바르
불법(佛法)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빛이 난다네.

བསྟན་འགྲོའི་ནོར་འཛིན་རྒྱ་ཆེར་སྐྱོང་བའི་མགོན།
땐되 노르진 갸체르 꾱외 괸
법과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시는 보배를 지니신 보호존[3]

འཕྲིན་ལས་ཀྱི་རོལ་མཚོ་རྒྱས།
틴래끼 뢸초걔
크나큰 위업(偉業)의 장엄(莊嚴)이 바다같이 펼쳐져

རྡོ་རྗེའི་ཁམས་སུ་བརྟན་པས་ཕྱོགས་ཀུན་བྱམས་བརྩེས་སྐྱོང།
도제 캄쑤 땐빼 쵹뀐 잠째 꾱
금강계의 견고함으로 시방(十方)을 사랑과 자비로 보살피신다네.

གནམ་བསྐོས་དགའ་བ་བརྒྱ་ལྡན་དབུ་འཕང་དགུང་ལ་རེག
남꾀 가와 갸댄 우팡 궁라 렉
하늘이 내려준 만 가지 환희의 위상이 중앙에 솟았네.

ཕུན་ཚོགས་སྡེ་བཞིའི་མངའ་ཐང་རྒྱས།
퓐촉 데시 응아탕 걔
원만한 4가지 덕(德)의 위력이 늘어가고

བོད་ལྗོང~ས་ཆོལ་ཁ་གསུམ་གྱི་ཁྱོན་ལ་བདེ་སྐྱིད་རྫོགས་ལྡན་གསར་པས་ཁྱབ།
뵈종 쵤카 쑴기 쾬라 데끼 족댄 싸르빼 캽
티베트 삼방(三方), 모든 땅에 즐거움과 기쁨이 새로이 퍼지리.

ཆོས་སྲིད་ཀྱི་དཔལ་ཡོན་དར།
최씨끼 뺄 욘다르
불교와 세간의 훌륭한 덕이 성행하고

ཐུབ་བསྟན་ཕྱོགས་བཅུར་རྒྱས་པས་འཛམ་གླིང་ཡངས་པའི་སྐྱེ་རྒུ་ཞི་བདའི་དཔལ་ལ་སྦྱོར།
툽땐 쵹쥴 게빼 잠링 양빼 게구 시데 뺄라 죠르
불법이 시방에 퍼지어 세상에 광대한 중생의 행복에 기여하기를

བོད་ལྗོངས་བསྟན་འགྲོའི་དགེ་མཚན་ཉི་འོད་ཀྱིས།
뵈종 땐되 게챈 니외 끼
티베트 땅의 불교와 중생의 선상(善相) 태양에서

བཀྲ་ཤིས་འོད་སྣང་འབུམ་དུ་འཕྲོ་བའི་གཟིས།
따시 외낭 붐두 토외 시
쏟아지는 상서로운 무량 광명의 위력으로

ནག་ཕྱོགས་མུན་པའི་གཡུལ་ལས་རྒྱལ་གྱུར་ཅིག།
낙쵹 뮌배 율래 갤규르 찍
암흑의 어두운 싸움에서 승리가 있기를

-티베트의 국가. ༄༄། བོད་རྒྱལ་ཁབ་ཀྱི་རྒྱལ་གླུ།(뵈걜 캅끼 걜루: 승리의 노래)[4]

티베트어: (bod, /pʰø̀ʔ/)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합병하자, 티베트인들은 독립운동에 나섰다. 1959년 3월 10일 티베트인들은 라싸를 중심으로 집단 무장 봉기에 나섰으나,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중국군의 공세 앞에 무장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실패로 끝난다. 이후 두어 차례 크고 작은 무장 봉기가 시도되었지만, 이 역시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달라이 라마 14세 텐진 갸초(Tenzin Gyatso, 1935년생)의 비폭력 평화 투쟁 노선의 영향도 있어 무장 투쟁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에 대한 추가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티베트의 무장 저항군은 1970년 무렵까지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티베트 변경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군에 게릴라전으로 맞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그러나 1973년 미국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국교 수립을 하면서 더 이상 중국에 대한 적대 정책을 철회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이 주는 지원도 끊겼다. 그 바람에 티베트 저항군들은 중국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인도 공화국으로 망명, 티베트의 무장 항쟁은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티베트 정부는 중국의 적대국인 인도 공화국망명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한 달라이 라마 14세는 국제적으로 중국을 규탄하고, 티베트 독립을 호소하는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8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노벨평화상도 티베트 독립의 가능성을 높여주지는 못했다. 특히 중국은 결코 티베트를 독립시켜 줄 생각이 없는터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쨌거나 티베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어디까지나 여론일 뿐, 달라이 라마가 방한할 수 있게 우리나라 불교계가 탄원서도 내보고 서명도 받아봤지만 현재까지 외교통상부에서 비자 발급을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주한 티베트 대사관은 일본 도쿄의 티베트 임시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2 티베트 독립 문제는 과장되었다?

물론 어떤 의견이든 반대되는 의견이 존재는 하는 법이니 이런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한 반박은 아래 문단에 있다.

티베트 독립에 대한 반발 여론이 존재한다. 국내에는 대표적으로 2011년 출판된 정호영의 저서 <인도는 울퉁불퉁하다>[5]와 2008년 <민중의 소리>[6]에 기고한 김도균의 <티베트 독립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티베트 독립을 반대하는데 그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티베트는 중국에 점령되기 이전에 노예제 사회였고, 사지를 절단하는 고문이 자행되던 곳이었다. 절대 다수의 티베트인들은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했고, 소수의 봉건 귀족들로부터 50%나 되는 이자를 물고 돈을 빌리면서 살던 빈민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왜 남의 땅에 내정간섭을 하는데? 그럼 우리도 북한에 쳐들어 가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야 하지 않나?

2. 중국이 티베트를 다스리고 나서 티베트인들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3. 티베트인들은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며, 자체 TV 방송까지 할 정도로 자유를 누린다.

4. 인도 공화국으로 망명한 티베트 망명 정부중국의 악행을 과대포장하여 거짓말을 했다. 물론 중국군에 의한 티베트인들의 학살이 있기는 있었지만, 자세한 자료가 없으니 확실히 알수가 없다.

5.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일하는 티베트 승려들은 인도 공화국 정부로부터 세금을 면제받고, 가난한 인도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부유하다.

6. 달라이 라마미국CIA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 티베트 인권 문제 거론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달라이 라마에게 1989년 노벨평화상을 준 이유도 중국천안문 6.4 항쟁을 비난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있다.

7. 티베트를 침략한 중국군은 소수였다. 또한, 군사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권고에 따라 중국군과의 저항을 중단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러니 티베트인들더러 무기를 들고 중국과 맞서 싸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8. 현재 티베트 독립을 운운하는 자들은 순수한 티베트 민중이 아니라 중국에 의해 기득권을 빼앗긴 티베트의 봉건 지배층들이다. 과연 일반 티베트 민중이 독립을 원할까?

2.1 이에 대한 반론

1번에 대한 반론 :

2번에 대한 반론 :

3번에 대한 반론 : 지금 중국에서 티벳은 자신들의 언어와 글자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방송국에서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티벳이 자유롭다는 것과는 별개다. 예시로 1920년대부터 중일전쟁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글자를 사용하고 방송국에서도 한국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문화 통치를 받았으니, 일제강점기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티베트에서 11살에 망명한 티베트인 승려 푼촉 최중(Puntsog Chojung)은 "우리 지방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처음 3년간만 티베트어를 배우고 나머지는 중국어를 배웠다. 수업은 중국어로 진행되었고, 단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집에서 이야기할 때만 티베트어를 썼다. 간혹 티베트의 다른 지방에서 친척이나 순례자가 왔는데 사투리의 차이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중국어가 공용어로서 사용되었다.[7]" 라고 할 정도이니 중국 정부가 얼마나 티베트어 교육에 무관심한지는 자명한 일이다.

4번에 대한 반론 : 티베트 전쟁 내내 중국이 보인 잔학무도함은 너무나 심각해서, 수년동안 티베트 공산당 지도자였고 티베트 민족정치자문의원회의 부회장이라는 중책에 있던 푼촉 왕걀마저 중국군이 저지르는 잔학 행위에 항의했다가 티베트인의 자유 투쟁에 동정을 표했다는 명목으로 투옥되었을 정도였으며, 중국군 내부에서도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무시하는게 말이 말이 되냐면서, 항의한 사례들이 있다. 거기에다가 당시 라싸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대 지휘관이었던 청호칭 대령은, 동료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학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티베트군으로 전향해 버렸다. 청호칭 대령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미군과 싸웠고, 티베트로 파견되어 군인으로 몇 년을 더 복무했다가 티베트 저항군에 가담하여 예전의 동료들과 싸웠다. 나중에 그는 티베트 동부 지방인 캄과 암도에서 일어난 티베트 저항군과 중국군과의 전투로 인해 약 4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죽었으며, 중국군 수뇌부에서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서 티베트인들에게 주는 식량 배급을 줄이고 통제를 강화하고 더 긴 시간 동안 노동을 시켜야 한다고 작성한 기록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롭상 타시라는 티베트식 이름도 얻었는데, 중국군탱크비행기가 티베트 민간인을 노리고, 티베트 마을들이 중국군 폭격기에게 폭격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8]

지금은 고인이 된 청호칭 대령은 인도 공화국에서 티베트 난민으로 여러 해를 살았다. 티베탄 리뷰 1979년 10월 호에 그와의 인터뷰가 남아 있다. 제목은 "티베트 자유를 위해 싸운 중국군 대령(A Chinese Colonel Who Fought for tibet's Freedom)."

또한 1989년 3월, 티베트의 수도라싸에서 벌어진 티베트인들의 봉기를 진압할 때 벌인 중국군의 학살에 관해 중국 공산당의 간부가 증언한 내용도 있다.

티베트인 청년이 중국인민무장경찰에게 돌 2개를 던졌다. 부소대장이 물었다. "저놈을 패야 하지 않습니까?" 돌멩이 하나를 다리에 맞은 부대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패라!" 그러자 부소대장은 무장경찰 3명을 이끌고 돌을 던진 티베트인을 쫓아갔다. 티베트인들은 일반 티베트 가족이 사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중국인민무장경찰은 문을 차고 들어가 모든 거주자를 사격으로 싹슬이했다. 가족 6명이 모두 죽었다. 가족 중 막내는 겨우 11세였다. 그러나 돌을 던진 티베트인은 벽을 타고 올라가 도망쳤다. 무장경찰은 그의 뒤를 쫓아가 다리에 총상을 입혔다. 그러자 한 무장경찰이 부리나케 달려가서 자신의 총을 들어 티베트인의 머리에 대고 발사했다. 그런데 소총이 갑자기 오발되어 그 뒤에 있던 무장경찰 하나가 목에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병사가 죽는 것을 보고 분노한 부소대장은 돌을 던졌던 티베트인의 머리를 때렸고, 티베트인 청년의 머리가 깨져 가 밖으로 쏟아졌다. 이 티베트인 청년이 중국인민무장경찰에게 총으로 구타당했을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집 문간에 서있던 한 티베트인 가족 6명이 '살인자! 살인자!'라고 외쳤다. 부소대장은 경기관총을 들더니 가족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 모두 죽여 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들은 <Amnesty International, Urgent Actiom 8/3/1989, PRC 'Fear of MassArrests/Torture/Summary Execution in Tibet'>(앞의 글)에 인용되었다. '1989년 3월 5일과 그 이후로 라싸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한 직접목격증언(Eye Witness Accounts Of Events in Lhasa, Tibet, on and after March 5th 1989)'앞의 글. <가디언>(1989년 3월 7일자)라싸 휩쓴 유혈 폭동(Bloody Rioting Sweeps Lhasa). 두 티베트인 가족의 몰살이 관련된 돌멩이 투척 사건은 홍콩의 잡지인 <홍콩제밍(Hong Kong Cheng Ming)> NO. 139, P.24, 1989년 3월 1일자에도 실려 있다. 방문자, 티베트인 학살에서 256명 사망 주장(Visitor Claims 256 Deaths in Tibetan Massacre) <Reference News> columm 라싸의 학살(Massacre in Lhasa), Huang Min. 이 글의 필자인 황민은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와 만난 뒤, 상기 사건에 관한 진술을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 간부는 1989년 3월의 라싸 학살 사태에 발생한 티베트인 사망자가 256명이라는 수치 정보도 흘렸다. 시위자가 돌을 던지자 총으로 쏴 죽였는데, 이들이야 당연히 그렇다고 쳐도, 전혀 상관없는 일가족까지 총살해 버린 것이 중국인민무장경찰이다.

5번에 대한 반론 : 티베트 망명 정부의 티베트 승려들이 자동차를 타고 잘 산다고 그들의 독립 주장에 정당성이 없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동포들이 보내준 돈으로 (상대적으로) 유복한 삶을 누리며 미국에서 일본조선에 저지르는 악행을 폭로, 독립운동을 했던 한국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저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무슨 독립을 하겠다는 거냐?"라고 꼬투리를 잡는 것과 같은 셈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사이토 마코토를 위시한 일본 극우들의 논리와 매우 똑같다.

1905년, 러시아로 파견된 조선 사신 이위종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고 있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나서서 일본을 막고 조선의 독립을 지켜달라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는 러시아인 아내인 바로네사 엘리자베타 놀렌과 별거하고, 다른 러시아인 여성인 엘리자베타 에피모바와 동거하는 등 문란한 사생활에 빠졌다. 만약 러시아인이나 외국인이 이런 이위종의 행동을 문제삼으면서 "당신의 방탕한 꼴을 보니, 무슨 조선 독립을 운운하는가? 당신이 외치는 조선 독립에 어떤 당위성이 있느냐?"라고 말하며 조선의 독립을 부정한다면 그 말에 수긍해야 할까?

망명 정부와 티베트 승려들이 인도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 이들은 망명인이라는 신분이다. 이들은 어느 정도 세금에 감면을 받는 면도 없지는 않지만, 인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인도 내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이상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 또 인도 내의 티베트 사원의 경우 사원의 사무원이나 청소원 등은 인도인들을 우선으로 고용하여 오히려 인도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는 상황이다.

6번에 대한 반론 : 장개석 총통의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구이봉창, 윤봉길 등의 한국독립운동가들도 모두 중국의 앞잡이나 첩자라는 말이 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 정보 기관인 OSS[9]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고 대일 항전에 나섰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미국의 스파이라는 말인가?

무엇보다 저런 식의 논리는 티베트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중국을 물어뜯고 있으니, 순수하지 못하다."라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조국중국에게 짓밟혔는데, 외부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맨주먹으로 강대한 중국에 맞서 싸우다 몽땅 죽어야 할까?

달라이 라마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한 태클은 트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달라이 라마가 평화상을 받은 것은 비폭력 노선을 견지해서인 거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7번에 대한 반론 : 인도로 파견된 중국군이 매우 적은 수였을 거라고 말한 내용은 <인도는 울퉁불퉁하다>에 실려있다. 그러나 그 말의 출처는 저자인 정호영 본인이 직접 발로 뛰면서 취재하거나 구체적인 사료를 제시하며 주장한 게 아니라, 미국의 저술가인 마이클 파렌티의 말에서 "아마 티벳에 진주한 중국군은 소수였을 것이다."라는 극히 추상적이고 단순한 주장을 그대로 배껴온 것인데, 마이클 파렌티는 스스로도 확실치 않다고 하니, 이와 같은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1950년 10월 약 2만 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중국군이 티베트 동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티베트 저항군의 격렬한 반격에 부딪치자, 1957년 중국은 탱크와 포병과 항공기까지 포함된 15만 명의 대군을 집결시켜 다시 티베트를 침공한다. 그렇다면 전부 합쳐 누적 17만 이상의 군대가 동원된 셈인데, 이걸 가리켜 소수라고 부른다면 대체 얼마나 많아야 다수라고 해야 하나? 1950년대에 시작된 티베트와 중국의 전쟁은 약 20년 넘게 계속되었을 정도고, 가장 큰 전투는 티베트군과 중국군을 합쳐 10만 단위의 병력이 참가했을 정도다.

티베트인들은 1970년 무렵까지 CIA의 지원을 받아 중국군의 침공에 게릴라전으로 맞서 끈질기게 저항했다. 티베트인들의 무장 항쟁이 사라진 이유는 달라이 라마의 저항 중단 권고가 아닌, 1973년 들어서 미국이 중국과 정식으로 국교 수립을 하자, 그에 따라 중국과의 대립 정책을 포기하는 바람에 더 이상 티베트 저항군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게 된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그에 따라 티베트 전사들은 중국군과 계속 싸우다 전사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인도로 망명하게 되었다.[10][11].

8번에 대한 반론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정말 못 먹고 못 살았던 일반 서민들이 많았나? 아니면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했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고급 학문을 익히고 배웠던 지식인들이 많았나? 당연히 후자다. 위의 논리대로라면 일제강점기의 한국 독립투사들 중에서 부유한 집안의 지식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던 불순분자라고 보기도 힘든 것이 독립운동을 한 사회주의 계열의 사람들 중에서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다. 원래 먹고 살아야 반정부운동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발전의 열매가 민주주의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일단 국민들이 배고픔을 극복해야 이런저런 사회와 정치문제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거지, 굶어죽기 일보 직전의 서민들에겐 정치니 국제관계니 그딴 거 생각할 여력도 없다.

또, 기득권층인 왕실이나 양반 계층에서도 자기 사비를 들이고, 집안 식구들을 거지로 만들면서까지 일제에 맞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자기들의 기득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싸웠던 부정하고 타락한 집단으로 매도하란 말인가? 그렇다면 왕실이나 양반 계층 같은 사람들은 결코 독립운동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뜻인지?

3 티벳 독립운동의 현재

위 영상은 중국의 티베트인 차별에 대한 르포와 티베트 망명 정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달라이 라마 망명 정부가 원하는 것은 꼭 분리 독립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치권 선에서 만족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티베트 공산당에 의해 지배되는 허울뿐인 자치구의 현실이 티베트인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달라이 라마의 자치권 요구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자체가 미국의 조종을 받는 첩자라고 주장하면서, 그와 티베트 망명 정부와의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고 있다. 티베트 연구가들의 말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현(現) 달라이 라마가 늙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가 최고의 지도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아직 주류 세력은 아니지만, 아예 달라이 라마의 비무장 노선을 비판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부르짖는 독립운동가들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티베트 독립운동은 위구르 족과 함께 중국 소수민족 중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이다. 당장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티베트 승려 분신사건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중국이 진정으로 티벳과 평화를 원한다면, 응당 티벳인들과 자치권 협상에 들어가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마치 티벳과 자치 협상을 해서 안되는 이유가 티벳인들이 독립을 원하기 때문이라는데, 오해와 달리 현 티벳인들 대부분 원하는 것은 자치이지, 독립이 아니다. 거기에다가 격하게 시위하는 사람들도 조차 "마음 같아서는 독립을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치를 원한다.", "자치권만 준다면 중국 정부를 얼마든지 따를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들이 원하는 자치도 지금 중국의 자치 방식에서 좀더 유연해져서, 티벳 출신 공산당원도 티벳 자치구의 지도원으로 될수 있는 방식이고, 좀 더 민주화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중국 정부에서는 티벳인들의 애국심을 폄하하며, 이들이 티벳 망명 정부에 협력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데, 정작 티벳인들은 망명정부보다는 중국 자체를 더 선호하고 중국에 대한 인식이 좀 더 나은 편이다. 홍콩 언론에 가끔 티벳인들이 출연해서 공산당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들이 비판하는 레파토리 중 하나가 공산당이 중국에 대한 자신들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것을 비판하는 티벳인들이 있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와 심각한 의심이기 때문에 중국이 민주화되고 인권 상황이 개선이 되고, 티베트를 향한 중국 정부의 시선이 개선이 되면 티베트인들은 자치권을 얻는 대가로 독립운동을 중단하고 중국의 일부로 남는 선에서 중국과 타협할 수도 있다. 중국에 민주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전략적 요충지이자 자원의 보고인 티베트를 포기할 리도 없고,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인들의 인식도 변함이 없을 것이고 상당수의 티베트인들은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인식하며, 그에 대한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다. 따라서 티베트가 완전한 주권 국가로 인정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낮다. 게다가 중국은 공산당부터 한족까지 합심해서 소수민족 문제는 닥치고 협박과 폭력으로 해결한다. 당장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티베트에서의 7년> 촬영 이후로 지금까지 중국 입국이 불허되는 브래드 피트, 달라이 라마 생일 축하 영상을 올렸다는 이유로 중국 공연이 취소당한 마룬 5의 사례를 보자.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당시 남의 나라까지 쳐들어와 티베트 사람들을 구타한 개념없는 한족들은 덤이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티베트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일부에서 이 국기를 사용할 때 노란색 테두리를 오른쪽에까지 그리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도안이다. 혹시나 인터넷에서 구한 그림이 잘린 거 아닌가 싶어 테두리를 덧칠하지 않도록 하자. 티베트인에게 테두리를 덧칠한 도안을 보이는 것은 태극기태극 무늬를 뒤집어 그리는 것과 같은 굉장한 실례다. 근데 솔직히 이미지 짤린 걸로 오해할 만 하다. 오른쪽에 테두리가 없는 것은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관용과 열린 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한 게양할 때는 반드시 좌측의 '테두리가 있는 부분'이 봉과 연결되어야 한다. 우측에 테두리가 없다고 우측과 연결하는 것이 아니다.
  2. 프리 티베트. 티베트 독립운동의 구호. 중국에 가서 저 문구의 F자만 외쳐도 바로 한족들에게 두들겨 맞은 뒤 중국 공안들로부터 코로 마시는 빨간 물 한 사발을 친히 대접받을 수 있다 카더라.
  3. 티베트의 특별한 수호본존인 관세음보살을 이른다.
  4. 약칭 '걜루'라고 불리는 티베트 국가는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사용되는 국가로, 현 달라이 라마 14세의 스승이었던 트리쟝 린뽀체가 작사하였다. 곡은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종교의식 곡에서 나왔기에 작곡가는 불분명하다. 중국이 진주하기 전의 국가는, 곡은 동일하나 가사는 장수를 바라는 노래로 영국의 국가 God save the Queen과 비슷한 느낌의 가사였다.
  5. 이름부터 느껴지지만 주로 인도 공화국의 사회문제를 다룬 책으로, 티베트와는 한 파트를 제외하곤 하등 상관없는 책이다. 저자가 특별히 티베트에 관해 자세히 알고 쓴 책도 아니다.
  6. 미국과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중국에 대해서 호의적인 곳이다.
  7. 현재 인도 공화국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수도 라싸의 말을 표준어로서 배우고 사용한다.
  8. 넷상에서 이 사람이 이걸 보고 중경에 이보다 더 심한 짓을 당한 나라가 할 짓이냐면서 울부짖었다고 하지만, 진짜로 이 사람이 저렇게 발언했는지는 확실치는 않다.
  9. CIA의 전신
  10. 망명한 티베트 게릴라들이 인도 국경을 넘을 때 검이나 활 같은 고전무기는 일부 소지가 허가되었지만, 총이나 폭탄 같은 화기는 모두 인도 정부에 넘겨주었다.
  11. 현재 인도에 망명 중인 생존 게릴라들과 그 후손 등은 현재 게릴라 부대를 친목 모임의 형태로 유지하고 있으며, 종종 티베트 독립운동에 관련된 시위나 행동을 할때 부대의 군기를 게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