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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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생년월일포지션
로저 달트리 (Roger Daltrey)1944년 3월 1일~보컬
키스 문 (Keith Moon)1946년 8월 23일~1978년 9월 7일드럼
존 엔트위슬 (John Entwistle)1944년 10월 9일~2002년 6월 27일베이스
피트 타운젠드 (Pete Townshend)[1]1945년 5월 19일~기타, 리더

1 개요

비틀즈, 롤링 스톤즈 시대에 어깨를 나란히 견줬던 전설적인 밴드이자 60년대 대중음악계의 주역들 중 하나
모드족의 상징
하드 록펑크 록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밴드

1964년 결성된 영국록밴드. 동시대 비틀즈, 롤링 스톤즈와 더불어 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었던 밴드 중 하나이다. 하드 록, 헤비 메탈 장르의 단서가 된 밴드 중 하나로 거론되며, 거친 무대매너와 연주력, 기성시대에 반발하는 가사로 많은 평론가들이 사실상 펑크 록의 창시그룹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2 역사

2.1 디투어스, 하이 넘버스

당시 영국 일링 아트스쿨에 재학하던 피트 타운젠드는 음악적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쌓아가던 시기였는데, 어느날 동네 친구인 로저 달트리로부터 밴드를 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로저는 그 때 이미 베이시스트 존 엔트위슬을 구했다고 했는데, 로저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베이스 기타를 들고 있던 존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당시 피트는 스타일이 좀 거친 로저와의 밴드활동이 내키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로저가 어릴적부터 계집애같다는 놀림을 받아 그게 싫어 대장간같은 힘쓰는 곳을 전전하며 거칠게 살았다고 한다. 아무튼 세 사람이 모이면서 밴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로서 밴드의 베타버전인 '디투어스 (The Detours)' 가 결성된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알앤비와 컨트리 음악에 영향을 받은 밴드라 인기는 그냥저냥이었다.

피트, 로저, 존은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인 음악을 하기로 결정하고, 드럼 좀 친다는 친구 한 명을 가입시키고 밴드를 만들어 연습을 시작한다. 연습이라고 해봐야 하교시간 이후의 교실 하나 빌려서 연습하는 정도였는데, 워낙 음악에 재능이 있던 그들이라 얼마 안 가서 학교 축제나 동네에서 콘서트를 열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이 와중에 키스 문이 최종멤버로 그룹에 가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골때린다. 사실 더 후의 멤버인 피트, 로저, 존은 같은 학교친구로서 학교에선 싸움도 자주 벌이는 등 거의 말썽꾼에 가까웠다고 한다. 서로간에도 늘 치고받고하며 티격대던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 당시 키스도 같은 학교였지만 이들과는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연습하던 어느 날, 한창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만취 상태인 더벅머리 아이 한 명이 술병을 들고 막무가내로 연습실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드럼세트로 가서 드러머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더니 강제로 내쫓았다. 내가 무슨 잘못했다고 그러고는 자기가 드럼을 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피트의 증언에 따르면 거의 실성 직전의 발광적인(...) 연주였다고. 그리고 키스는 전 드러머가 산지 얼마 안되는 새 페달을 단 한 곡 연주로 왕창 부숴놨다고 한다. 이러니 다른 멤버들에게 욕설과 몰매를 맞고 쫓겨날수 밖에 없었지만... 키스의 그 연주실력은 멤버들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얼마안가서 키스는 정식으로 밴드에 가입하게 된다.[2]

이후 밴드명을 '하이 넘버스 (The High Numbers)' 로 개명하게 되고, 매니저 피터 미든과 계약을 맺고 당시 유행하던 모드족 컨셉을 받아들여 밴드의 방향을 전환한다.[3] 당시 하이패션이던 모드 패션은 이들에게 있어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알앤비 음악을 시끄럽고 강렬하게 연주하면서 점차 이름을 알려나갔으나, 전체적으로 구닥다리 블루스를 연주하는 느낌이라 큰 음악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 때 매니저 피터 미든이 써준 싱글 I'm The Face를 발매하지만, 당시에 넘쳐나던 알앤비 곡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에 상업적으로 망했어요.

사실 더 후는 모드족의 붐에 묻어간 면이 없지 않았으나,[4] 오히려 당시 모드족 붐을 적절히 반영하며 "시대를 반영한" 밴드가 된다. 단순히 묻어가는 차원이었다면 시대의 흐름에 쓸려 내려갔을텐데, 그만큼 당대 젊은이들의 분위기를 잘 반영했고, 이러한 점이 공감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모드족의 대변자이자 스스로 모드족으로 칭한 밴드는 거의 없었다.

위기를 느낀 멤버들은 밴드이름을 새롭게 바꾸고 활동하기로 결정했고, 모드 컨셉은 유지했지만 음악적 감각은 없었던 매니저 피터 미든을 잘라버리고 다른 프로듀서를 찾기위해 킹크스의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던 미국인 프로듀서 셀 타미와 계약을 맺은 다음에 The Who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거친 느낌의 알앤비를 연주했던 특성을 잘 살려서 Maximum R&B이라는 슬로건을 매 공연마다 붙이게 된다. 개명 이후 공연. 키스문의 미친듯한 드러밍이 깨알같다

2.2 더 후 출범

2.2.1 60년대 - 70년대

첫 싱글 "I Can't Explain" 발표 이후 첫 앨범 'My Generation'이 히트하게 되면서 유명해진다. 타이틀 곡인 "My Generation"은 하드 록펑크 록의 시초로 거론되는 위대한 곡으로, 특히 이 곡의 '늙기전에 죽고싶어' (I hope I die before get old)란 가사는 이들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멤버 중 가사를 실천한 사람은 키스 문 밖에 없다. 본인의 의지로 그렇게 된건 아니지만 또한 이들의 독특한 패션은 모드로부터 출발했지만, 모드에게 다시 영향을 미쳤다. 로저 달트리의 화려한 의상은 유행을 선도했고, 피트 타운젠트는 영국 국기유니언 잭으로 자켓을 만들어 입었다. 이는 록 역사에서 일종의 패션 코드가 되었고, 존 엔트위슬은 군복 셔츠나 자켓을 입고 나와 록 역사상 최초로 밀리터리 룩을 선보이기도 했다.

1966년, 2집 'A Quick One' 발표 이후 더 후는 기존의 음악스타일에서 한층 진일보한 모습을 선보인다. 키스 문의 드럼 사운드가 돋보이는 "Happy Jack"이나, 존 엔트위슬의 베이스 라인과 묵직한 그로울링[5]이 돋보이는 "Boris The Spider"가 싱글로 발매된다. 당시 수많은 비트 밴드들이 명멸하던 시기에 이 앨범으로 인해 더 후는 록스타의 지위를 더욱 굳히게 된다.

이후 1967년, 여러 기발한 시도를 하던 타 밴드들의 영향을 받아 여러 시도를 하던 끝에 3집 'The Who Sell Out'이 발매된다. 곡 중 짧게 등장하는 광고음악이나, 라디오 음악을 집어넣어 앨범 전체가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곡들을 구성하는 컨셉트 앨범으로,[6] 수록곡 "I Can't See For Miles"는 빌보드 싱글차트 9위를 기록하면서 더 후의 유일한 10위권 진입 히트곡이 된다.

전작의 성공에 고무받은 피트 타운젠드는 이는 인도힌두교 요기 사상가인, 메헤르 바바 (Meher Baba)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아예 앨범 하나를 통째로 스토리라인으로 구축해 하나의 뮤지컬처럼 만들 계획을 한다. 이에 구상해 낸 스토리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한 젊은이가 자신을 찾아가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워드 페인팅' (Word-painting) 기법에 의해 곡들이 쓰여지고, 1969년, 록 역사상 최초의 록 오페라로 기록되는 4집 앨범 "Tommy"가 탄생한다.[7] 총 오리지널 24곡으로 구성된 두 장짜리 LP는 1969년 영국 앨범차트 2위에 오르는 성공을 이루었고, 이러한 록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도는 이후 핑크 플로이드, 예스, 등의 다른 밴드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훗날 이 음반은 오페라 버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되며, 1975년 켄 러셀 감독의 실사 영화로도 제작이 된다.[8] "Tommy"역으로 보컬 로저 달트리가 출연, 사이비 교주 역에 에릭 클랩튼, "Acid Queen"역에 티나 터너, "Pinball Wizard"역에 엘튼 존이 출연하는 등 / 음악 팬들에게 상당히 익숙한 뮤지션들이 나온다. 영화 자체도 상당히 수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당한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더 후는 더이상 젊은 층의 패기를 대변하는 밴드가 아니었고 이를 싫어한 과거의 팬들과 모드족들은 상당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걸 상쇄할 만큼 더 후의 음악성은 날로 진보해나간다.

1971년, 5집 "Who's Next"가 발매되었고, 이는 더 후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최고로 손꼽히는 앨범이 되었다. 빌보드 4위, 영국차트 1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앨범에서는 신디사이저를 적극 도입해 더욱 더 진일보한 음악성을 보여준다.[9] 이전부터 쌓아오던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성향을 뿜어낸 Baba O' Riley, 더 후의 곡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인 8분짜리 대곡 Won't Get Fooled Again 같은 명곡들을 수록하며 이들을 역사상 최고의 록 아티스트 중 하나로 만들어 준다.

1973년. 더블 앨범으로 기획된 록 오페라 앨범 "Quadrophenia"를 발매하여 빌보드 2위, 영국차트 2위의 기록을 남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멤버들 성깔이 죽은건 아니라서 1976년 5월 31일 찰튼 애슬래틱스의 홈 구장에서 공연했을 당시, 120데시벨의 소음을 내서 한동안 기네스북에서 '가장 시끄러운 공연'으로 남기도 했다.

2.3 키스 문의 죽음 - 현재

성공도 잠시, 드러머 키스 문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Who Are You" 앨범 발표 후 1978년 9월 7일 사망했고, 그 뒤 밴드는 새로운 드러머 케니 존스를 영입해 여러 앨범을 냈지만 예전의 기량을 보이는데 실패하였고, 1982년 해체하게 된다.

이후 각자 솔로 활동을 펼치다가 90년대 들어서 재결성되었지만, 2002년 존 엔트위슬이 코카인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바람에 비틀즈처럼 현재 오리지널 멤버는 단 두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 하지만 그 뒤에도 여전히 세션 멤버들을 대동하고 종종 라이브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 중 오아시스 세션으로 활동했던 링고 스타의 아들 잭 스타키가 드러머로 있으며, 2010년 슈퍼볼 하프타임쇼에 서기도 했다.

영국의 대표하는 록밴드인 만큼 2012 런던 올림픽 폐회식에 마지막 무대를 멋지게 장식하였다. "Baba O' Riley", "See Me Feel Me", "My Generation" 세 곡을 연주했다.

2014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영국 투어에 돌입했고, 두 멤버에 따르면 "이번 투어는 긴 이별의 시작"이라 밝혔고, 로저 달트리는 "이번 투어는 정말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공연을 할 수는 없다. 나는 내 목소리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 빌보드 등 외신에 따르면 밴드는 2015년 11월~12월을 마지막으로 런던, 더블린, 벨파스트 등에서 9회에 걸쳐 공연을 펼친다. 영국 공연이 끝나면 미국에서 투어 공연이 이어질 전망. 출처는 이곳. 2014년 11월 3일 데뷔 50주년 기념 히트앨범인 "The Who Hits 50"이 발매되었다.

3 음악적 특징

밴드의 모든 멤버들은 연주력이 출중하며, 보컬인 로저 달트리는 록 오페라 스타일의 드라마틱한 보컬과 로큰롤에서의 정열적인 보컬 둘다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는 사람이라 많은 록 팬들에게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드러머 키스 문의 드럼 연주는 그 자체로 정열이 넘쳐 흔히 천둥 소리로 비유되기도 한다. 키스 문은 라이브 도중 드럼 세트를 수도 없이 부숴 먹었다. 게다가 실제로 호르몬 과다분비 등의 질환으로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는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한다. 이 필요없는 약쟁이 하지만 결국 약으로 갔다

키스 문은 슈퍼밴드 Cream의 드러머이자 '드럼의 마왕'이라 불리우던 진저 베이커와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진저 베이커가 훨씬 먼저 데뷔했으나, 하드 록 시대에 접어들자 두 사람 다 경쟁적으로 드럼 구성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너님 플로어탐 두개 씀? 슈ㅣ바 그럼 나는 투베이스 씀." "투베이스라고? 그럼 나는 탐 숫자를 늘리겠음 ㄲㄲ" 등의 방식으로 정말 괴물같은 드럼세트 군비경쟁이 불을 뿜었다.(...) 게다가 이 때 앨리스 쿠퍼 밴드의 드러머이자 키스 문의 친구였던 닐 스미스도 '나도 질 수 없뜸 ㅇㅇ!'을 외치면서 둘보다 항상 드럼 개수를 하나 늘려서 연주했다고 한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이 답없는 경쟁은 당시 그저 병풍에 불과했던 드럼의 세계를 확장한 훌륭한 결과를 일구어 냈다.

전성기 시절 키스 문의 탐은 무려 열 개(...)가 넘었다.

베이시스트 존 엔트위슬은 다른 멤버들이 폭주(?)하는 와중에 얌전한 자세로 연주하긴 하지만, 그의 베이스 연주는 리드 기타의 역할을 대신 할 정도로 매우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빌리 쉬언, 러시의 게디 리 등 후대 베이시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노년기의 연주 영상을 보면 웬만한 후배들과는 격이 다른 노련한 정도가 아니라 후배들의 기량을 능욕하는 수준이라 입이 떡 벌어진다. 베이스를 신체의 일부인 마냥 마음대로 다루어서 괴물같은 스피드, 테크닉을 뽐내기 때문에 Thunder Finger라는 별명이 있다.

피트 타운젠드는 세계 제1의 리듬 기타리스트라 불리는만큼,동시대 유명 기타리스트에 비해 화려한 면모는 적었지만 밴드 음악 기초를 탄탄히 구축했다.그외에도 풍차 돌리기나 악기 파괴 등의 무대 퍼포먼스는 후대 밴드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데뷔 당시와 전성기의 음악 스타일이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성공을 거두었고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르로는 펑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등에 주로 영향을 주었으며, 레드 제플린, 더 클래시, U2, 러쉬, 펄 잼, 블러, 오아시스, 라몬즈, 그린데이 등의 밴드에게 영감을 준 록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밴드로 기록되었다.

키스는 46년생이고 "더 후"의 일원으로 데뷔한 것이 1964년이며 1978년 약물과용으로 사망했다. 그러니까 키스는 그의 생을 온전히 그룹 "더 후"에 바친 것이다. 그는 드럼에는 제일 많은 혁신적인 연주를 선보인 사람이고. 록의 카타르시스를 정확히 집어 나가는 풍부한 스타일을 가장 많이 창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드럼에 온전히 바쳐진 열정과 격정. 그리고 광적인 연주는 이제는 전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키스의 연주를 생각해 본다면 키스는 그 당시 여타의 드럼연주자들보다는 훨씬 사용하는 탐의 수가 많다. 물론 무대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더블베이스 드럼을 나누어 주고 마운트도, 플로어, 스네어를 통틀어 탐 수가 거의 8~16여 개에 이를 정도로 많은 탐을 사용했는데. 놀랍게도 키스는 그 모든 탐을 참으로 전광석화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또한, 정식으로 배운 드럼이 아니라 독학으로 마스터한 터라 그의 드럼스타일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했고.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물론 대다수의 드러머들이 독학이긴 하지만 키스는 더 고독했다고 본다.) 또한 밴드 초창기부터 그가 밴드에서 보여준 악의없는 코믹함과 순박한 인간미는 팬들뿐만 아니라 많은 뮤지션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었다.

하지만 "더 후"라는 밴드는 그 자체가 인기의 가도를 달릴 때도. 데뷔 당시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늘 티격티격 싸웠다고 한다. 옆에서 보기에는 늘 내일 당장에라도 밴드가 깨질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만큼 절친했다는 간접증거도 된다. 가까울수록 더 싸운다고 하지 않는가…. 당시 다른 밴드들도 많이들 싸웠다. 뭐 더 후의 차이점이라면 서로 주먹질도 자주 했다는 것일 것이다. 흡사 오아시스를 보는 듯 하다

또 이 더 후는 록사상 최초인 록 오페라를 기획하는데 그것이 "토미"이다. 앨범이 영화화된 영화에서는 더 후의 멤버 모두와 엘튼 죤 같은 스타들이 대거 출연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키스의 모습은 여간 코믹하지가 않다. 그런데 내가 소개하는 드러머에 대한 생각을 할 때 한가지 유의했으면 하는 것은. 이들은 드럼에서 그 기법의 창시자에 가까운 사람들이고 모두 개성이 독특해 서로 간에 유사하긴커녕 비슷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들 이후로 많은 드럼연주자가 이들이 많든 수많은 스타일과 기법을 구사하고 있어 이들을 현재에 듣기에 새롭지 못하게 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대를 참작하여 생각해 주길 바란다. 키스 문은 더 후의 드럼연주자로서 활동하던 내내 록계에서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에피소드와 기행으로 유명했다. 록스타의 가쉽에서 거의 빠지지 않을 정도로 사고(?)뭉치였으며 끊임없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마스코트였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무대 밖의 모습과 전혀 달랐는데…. 그 격정과 광기. 그리고 최상의 연주는 그가 어떤 몸 상태였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도 스스로 말하길…."난 스테이지에 오를때 늘 취한 상태로 오른다. 그리고 가발을 쓴다. 그리고 스테이지에서 드럼을 칠 때의 나는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라고 했다.

78년 그가 급작스럽게 죽었을 때 많은 록팬들과 뮤지션들이 안타까워했으며 그 2년 뒤에 죤 본헴마저 사망하여. 드럼의 큰 별 두 개가 70년대의 말에 떨어지며 매우 어둡게 80년대를 맞이하는 셈이 되었다. 사실 그 당시 록 밴드들은 디스코와 펑크의 등장으로 입지가 상당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였다. 그런 때 이 두 사람의 죽음은 "아…. 이제 록은 끝인가" 하는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베이시스트 죤 엔트위즐 역시 지금도 가장 위대한 베이시스트로 기억되는데 그가 더 후에 가입한 배경은 앞에서 설명과 같다. 그역시 음악가이던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부모의 이혼으로 조부모에 의해 길러지며 7살 때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을 시작한다.

그가 더 후를 통해서 보여준 베이스 라인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뛰어난 것이었으며 소위 말하는 기관총 같은 베이스 테크닉을 록계에 처음 선보인 사람도 바로 존이다. 녹음에서건 무대에서건 늘 조용히 입을 다문 과묵한 그이지만 그 속에 있는 격정과 활화산 같은 열정이 그의 손에 의해 베이스라인으로 고스란히 표현된다.

피트의 리드기타라인과 하나도 뒤질것 없는 속사포 같은 그의 베이스는 이후 영국에서 등장하는 록 베이시스트들에게 필수적인 교본이 되다시피 했고 결국 그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음악학교에서 강의해야 했을 정도이다. 원래부터 동네 친구사이였던 더 후는 늘 트러블이 많았고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도 많았다. 그때마다 존은 늘 과묵했고 흥분한 멤버들이 냉정함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언제나 힘차고 박력 넘치며 와일드한 사실상의 밴드 창시자 로저 탈트리는 성격 또한 와일드 해서 밴드 초창기에는 주먹으로 밴드를 이끌다시피 했는데 작은 키와 예쁘장한 외모. 그리고 여자 형제가 많아서 그의 행동거지에 여성스러움이 배어 있었다는 게 그에게는 컴플렉스였다. 그래서 짐짓 더 거칠게 행동했는데…. 친구 사이다 보니 의견충돌이 있을 때는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로저는 그 당당하고 힘에 넘치는 그 음색이 일품이라 할수 있는데 10만이 아니라 100만의 관객 앞에서도 관객을 압도할 수 있는 그런 힘을 지니고 있다. 그토록 늘 싸우던 멤버들이라 키스가 죽기 전 수년간을 불화로 공백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싸우고 해어진 뒤라 서로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뭐 피트와 로저가 불화의 주된 이유였다. 그러다가 수년의 공백 후 피트가 로저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가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지 로저가 펑펑 울며 사과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새 앨범의 계획이 수립되고 레코딩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1977년 발매된 후기 명작중 하나인 "Who are You" 앨범이다.

물론 그 직후에 키스 문이 사망하며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하지만 한번 복구된 우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더 후는 새 드럼연주자 케니 죤스를 영입해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또한, 에릭 클렙튼과 가장 친한 친구 사이기도 하다. 또한 록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록 뮤지컬이라면 "토미","쿼드로페니아"등이 있는데 영화화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이다.

음악에서 다방면에 재능을 발산하다 보니 정작 그의 기타에 관해서는 언급이 잘되지 않는 것 같다. 단적으로 피트의 기타를 말하라면 "질적으로 매우 우수한 기타"라고 할 수 있겠다. 사운드 하나하나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피트만큼 기타를 멋있게 연주하는 사람도 드물듯 한데 아마도 그와 스타일적으로 유사한 사람을 찾는다면 그의 나이대에선 "키스 리챠드" 정도뿐이라 생각한다. 그의 연주를 오디오로 들어보면 그 음색과 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기타로 이런 음색을 내는 기타리스트는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의 기타가 죤 엔트위슬의 빼어난 베이스와 만나면 그 질적 우수함은 더욱더 배가가 되는듯하다.

또한, 곡이 진행됨에 따라서 팔색조처럼 변하는 변화무쌍한 음의 택스쳐도 일품 중의 일품이며 기타 리프에서 최고의 경지를 들여 준다. 이 음의 택스쳐라는 것은 요즘은 기타리스트조차도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듯하고 이제는 이런 부분을 대부분 랙과 같은 기계에 의존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곡의 순간순간마다 어떤 색깔의 음을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수천수만 가지의 음색이 있고 그 음색마다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깊은 연구가 없고 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니 그의 이런 질적으로 우수한 사운드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는 악기의 음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기로도 이름나 있는데. 과거 제프 백이 신스사이저 기타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보다 이전에 이 신스사이저 기타를 연구하고 사용을 해왔다. 또한 피아노등. 다른 악기에 대한 연구도 경지에 올랐을 정도로 대단한 지식을 기지고 있다.

물론 피트가 요즘 기타리스트처럼 화려 절미한 기관총 에드립은 잘 연주하지 않지만, 그의 연주는 그 드라마틱함에서 대적할 자가 드물 것이다. 기타의 아티스트라 불러도 절대 과하지 않은 표현일 것이다. 사실 그가 영국 록계에서, 아니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작곡자로 제작자로 또 엔터테이너로서 대단한 유명세를 차지해온 세월이었지만 그의 기타에 관해서 심층적으로 다뤄진 예는 없는듯 하다.

아마도 그가 굳이 기타가 아니더라도 여러 부분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는 경지의 인물이라서 기타 정도는 따로 다루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백에 절대 뒤지지 않는, 아니 음색이나 음질. 그리고 그 어떤 면에서는 그들보다 훨씬 더 우수한 기타리스트이다.

"Who are You"의 에드립(소리가 작게 연주되어서 유심히 그리고 크게 들어 봐야 알수 있다) 부분에서 속삭이듯 들여주는 속수는 그 또한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해 준다. 드러머 "키스 문"을 기억해 본다면 "광인 드러머"라는 단어와 "장난꾸러기"라는 생각이 난다.

그는 영국 록계가 헐리웃이라 본다면 그는 록계의 "안소니 퀸" 같은 존재였다. 그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발군의 드럼과 따듯한 인간미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더 후는 드러머 키스 문과 베이시스트 죤 엔트위슬 까지 사망하여 이제는 피트 타운젠드과 로저 달트리만 생존해 있다. 요즘 더 후의 열광적 팬이라는 드라마 제작자 "제리 부룩하이머"의 "CSI"시리즈가 3개의 시리즈 모두 이 더 후의 곡을 타이틀로 사용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후가 관심을 받는 것 같다.

사실 이들이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70년대 말 드러머 키스문의 죽음과 앨범 "Who are You"가 나오고 또 그들의 공연에서 공연장에 먼저 들어가려면 관객들 11명이 압사하는 사고로 잠간 관심을 받은 정도였는데 엉뚱하게도 범죄 시리즈 드라마에 음악들이 사용되면서 뒤늦게 이들이 더 알려지는 것 같아서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로저는 요즘도 왕성하게 활동하는데 CSI 라스베가스 시리즈에 범인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이들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알고 보면 이들은 비틀즈나 롤링스톤스에 버금가는 굴지의 밴드이고 영국 록계에 끼쳤던 영향력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멤버 개개인의 음악적 재능 또한 대단했는데 그 면면을 보면, "피트 타운젠드"는 그룹 "더 후"의 리더이자 핵심이다. 거의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그는 작곡과 작사 편곡에 일가견이 있고 또한 기획자로서 그의 명성은 일찍부터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4 사건.사고 및 여담

  • 현재 국내에서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매니아를 제외하고는 인지도가 바닥에 가깝다. 그것도 80년대 앨범 "Who Are You"가 소개되고, 미드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같은 범죄 드라마 시리즈에 음악들이 사용되면서 뒤늦게 그들이 알려지게 되었다.[10][11] 아마도 특유의 거친 음악스타일이 한국인의 성향에 잘 맞지 않은 듯.
  •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이라는 밴드명은 추락한 비행선의 이름인데, 절친한 친구였던 드러머 키스 문(혹은 로저 달트리)이 장난 반으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추락하기는 커녕 더욱 떠버린것이 문제
  • 해체의 미학을 철저히 구현한 밴드지만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천장이 낮은 클럽에서 공연하다가 피트가 기타를 높이 들어올렸는데, 그만 천장에 기타 헤드가 닿아 부러지는 바람에 그만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관객들은 환호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기타를 부수기 시작했다고 한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그리고 키스 문도 덩달아 드럼을 부수기 시작했다
  • 더 후는 가는 곳마다 호텔방을 몽땅 부숴놓기로 유명했다. 특히 키스 문의 주도하에 이런 일이 많았는데, 변기에 M60 폭죽을 넣어서 변기를 폭파시킨다거나, 호텔 수영장에 캐딜락을 처박아 버린다거나, 창밖으로 티비를 던져 박살을 낸다거나 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문제는 그 이후 수많은 악동 밴드들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부터 시작해서 그 후대까지 줄줄)이 이런 행동을 따라했다. 이로인해 키스 문은 홀리데이 인, 쉐라톤, 힐튼 호텔에서 영구 거부당했다. 결국 죽을때까지 그는 이러한 몇몇 호텔에 숙박할 수 없었다.
  • 어떤 쇼 공연 도중 키스 문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언제나처럼 공연이 끝나고 악기를 부수는데 키스 문이 숨겨뒀던 화약들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바람에 키스는 황급히 무대밖으로 나가버리고, 피트 타운젠트는 머리가 타고 귀에 이상이 생기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신문에서 대서특필될 정도였다.
  • 키스 문은 약을 하도 많이해서 무대에서 기절한 적이 있다. 1973년 Quadrophenia 투어 도중 공연전에 말 진정제를 브랜디와 섞어 마신 탓에[12] 공연 중 무대위에서 기절한 것(...). 그 상황에서 피트 타운젠트는 즉석으로 "관객 중에 누구 드럼 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잘 치는 사람 으로."라고 말을 했고, 즉석으로 지원한 스콧 할핀이라는 젊은이가 드럼을 치게 된다. 그는 더 후의 심각한 였기 때문에 모든 노래를 줄줄 외우고 있었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다행인건가?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 공연 영상을 보면 다른 멤버들이 스콧을 위해 노래의 템포를 조절해주거나 중간중간 손짓이나 말로 가이드를 해 주는 등 상당히 배려해준 부분이 있다.)
  • 키스 문은 이러한 괴팍한 행보와는 별개로, 성공적인 영화배우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데이빗 에섹스가 주연한 록 음악 영화 스타더스트에서 드러머 역으로 출연한 이래, 크고 작은 영화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역시 정상이 아니야
  • 일본 애니메이션 케이온!!에서 히라사와 유이가 선보인 팔을 풍차처럼 돌려서 피킹하는 '필살기'는 원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드의 시그내쳐 무브이다. 또한 2기 3화에서 밝혀진 바로는 타이나카 리츠 또한 키스 문의 열렬한 광팬이라고. 하지만 그 행보는 따라하고 싶진 않다고 한다
더구나 케이온 극장판에서 엔딩곡 Singing의 MV영상에서는 더 후를 오마주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13] 작가가 더 후의 열렬한 팬이라고.
  • 노브레인의 전 기타리스트이자 모노톤즈의 현 기타리스트인 차승우가 더 후의 팬이다, 실제로 2014년 모노톤즈 공연 당시 My Generation을 커버했을 정도.

5 디스코그래피

  1. 철자에 따른 일반적인 발음 경향과는 다르게 Townshend는 타운셴드가 아니라 타운젠드(shen은 zen으로 읽으며 h는 묵음.)라고 읽는다.
  2. 존 엔트위슬에 따르면 "키스 문과의 첫 공연 때 키스가 밧줄을 갖고 와서 드럼 세트를 꽁꽁 묶어 고정시키길래 왜 이러나 싶더니 공연이 시작되자 그 의문이 사라졌다. 키스 문이 드럼을 치자 드럼 세트가 앞뒤로 요동쳤기 때문이다." 라고 회상했다.
  3. 그 전까지는 딱히 방향성이라 할 것도 없었고, 패션도 신경쓰지 않았다.
  4. 모드족이 등장한 것이 1950년대 후반인데(50년대 비트닉 문화가 계승, 발전되었다. 50년대 테디보이 문화가 계승, 발전된 것이 로커), 1960년대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런던의 급진적 보헤미안 문화가 합쳐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모드족 붐이 절정에 도달한 것이 1964년이고 하이넘버스의 첫 싱글은 1964년에 발매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5. 당시 록계 최초의 그로울링 창법이었다.
  6. 앨범 자체가 페이크광고 컨셉이다. 앞커버, 뒷커버의 멤버들이 실제로는 없는 상품을 광고하고 있는 셈.
  7. 이전에 헤어같은 훌륭한 록 뮤지컬이 있기는 했으나, 정식으로는 더 후의 "Tommy"가 최초다.
  8. 일설에 따르면 본래 이 영화에 스탠리 큐브릭을 감독으로 초청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멤버들은 이에 빡쳤는지 'Who's Next'의 커버에 모노리스로 추정되는 콘트리트 물체에 오줌을 갈기고 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9. 앨범 커버에 관하여 충공깽스러운 일화가 있는데, 퇴짜맞은 시안 중에 키스 문이 코르셋을 입고 말채찍을 든 모습이 있었다. OME 후방주의(?)
  10. 여담으로 멤버 로저가 CSI 라스베가스 시리즈에 범인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1. 이는 CSI를 처음 기획한 총감독 앤서니 자이커가 이 밴드의 팬이기 때문이다. 각각 라스베가스는 'Who Are You', 마이애미는 'Won't Get Fooled Again', 뉴욕은 'Baba O'Riley'.
  12. 상기했듯 호르몬 분비 및 혈기 관련 증상이 있어서 웬만큼 센 약이 아니면 안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찾다 찾다 도달한 마약이 말 진정제(...). 말 진정제는 대체로 야생마같이 날뛰는 짐승들에게 쓰인다(...).
  13. 특히 방과후 티타임 멤버들이 영국 국기를 이불삼아 껴안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