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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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군관련

단결!

제6군단 예하 사단. 넌 들어와서 조뺑이 친다

대한민국 육군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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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화보병사단 보병사단 ■ 향토보병사단 ■ 동원보병사단
대한민국 육군의 상비사단 (기계화보병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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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바탕정열과 명예
백색 원단결과 완전무결
열쇠 문양통일의 문을 여는 열쇠

1 개요

대한민국 국군 제5보병사단. 일명 열쇠부대. 공식 별칭은 상승 열쇠부대. 부대의 상징도 열쇠.그래서인지 이 문서에서 5사단이 관련 문서로 되어있다 통일의 열쇠가 되라는 뜻이다. 열쇠모양은 5사단의 숫자 5에서 따왔다. ㅇ부분을 동그랗게 그려넣은 형태이다. 불행히도 GOP철책이 뚫린 사건이 3번이나 있었기에 인근 GOP사단인 옆동네 청성아저씨들과 무적태풍 아저씨들에겐 북괴군에게 문을 열어주는 열쇠라는 비아냥을 받기도한다.BCTP훈련 할때도 대항군한테 제일 먼저 털린다고 적화로 가는 열쇠냐며 조리돌림당하는건 연례행사다 그래도 별들의무덤인 무적태풍 아저씨들보다야

경례 구호는 "단결!"[1]

메이커 사단 중 한 곳...이긴 한데 다른 메이커 사단에 비해 임팩트가 많이 약하다. 아무래도 바로 옆에 위치한 28사단6사단이 주로 산악지형을 경계구역으로 담당하는 것과 달리 비교적 평지백마고지를 경계구역으로 담당하기 때문일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은 동두천-연천 내 부대 중 제일 빡센 편에 속하고, 사자연대를 제외한 나머지 연대 예하부대특히 구 신교대의 시설은 열악하기로 소문난 바로 옆 28사단보다도 열악하다.

현재는 육군/해병대 전 부대에 퍼져있는 5분대기조 시스템이 사단 포병연대 예하 2596부대에서 최초로 시행되었다. 또한 전군 최초로 GOP 과학화 경계시스템이 도입된 부대2번이나 철책이 뚫린 덕분이기도 하다.

주 임무로 중부전선 중심 연천지역 및 철원 일부의 GOP 경계를 담당한다. 사단 좌익에는 28사단, 우익에는 6사단이 위치한다.

2 역사

1948년 4월 29일 경기도 수색에서 3, 4, 9연대를 기반으로 제5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최초 지휘관은 대령 김상겸 [2]. 창설 후 여단 주둔지가 광주로 변경되었고, 1949년 5월 12일, 제5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 15, 20연대가 사단으로 배속되었다. 초대 사단장은 준장 송호성. 이후 1949년 7월에는 백선엽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사단은 제15연대를 전주에, 제20연대를 광주에 주둔시켜 빨치산 토벌을 주 임무로 하며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후 한국전쟁 발발 전 제주도 4.3 사건, 건군 후 최악의 반란사건으로 꼽히는 여순사건을 진압하였다.

이후 1950년 6월 25일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의 소환으로 서울 용산에 올라와 북한군 남하 지연작전에 참여 하였다. 말이 지연작전이지 한국의 무다구치 렌야 채병덕의 삽질로[3] 인해 사단의 주력인 15연대는 1사단으로 편성되고, 20연대가 창동-미아리 방어전을 위해 한강 이북에 투입되었다가 휘하 연대가 모조리 박살 결국 사단 자체가 공중분해 당하기 직전까지 가게 된다.

결국 한강을 방어하지 못한 채 1950년 7월 1일부터 시흥으로 지연전을 전개하며 철수하게 되는데, 철수하는 도중 대부분의 병력이 분산되어 17일 사단이 해체 되었다. 이후 1950년 10월 8일 대구에 주둔 중이던 27연대, 마산에 주둔 중인 35연대, 부산에 주둔 중인 36연대를 근간으로 대구에서 제5 보병사단을 재창설 하였고, 이 연대들이 지금까지 이르게 된다.

다시 재창설된 5사단은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루게 되는데, 그중에서 특히 피의 능선 전투[4]와 가칠봉 전투[5]가 유명하다.

이후 5사단은 1952년 10월에 강원도 351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강원도 전선을 북방으로 밀어 올렸고, 이 전선은 지금 강원도에 그어진 휴전선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강원도 화천에 주둔했던 5사단은 1953년 3월 신편된 제15보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여 후방으로 돌려져 남원으로 이동,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 되었다. 이후 1954년에 강원도 철원, 1960년 경기도 포천, 1971년 경기도 양평으로 주둔지가 변경되다가, 1977년 당시 전방을 담당하던 제20보병사단이 대대장 월북사건으로 대박을 터뜨리며 서울 근처로 재배치되는 바람에 20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여 1978년 4월 1일 현재의 주둔지인 경기도 연천에 이르게 되었다.

잠깐이지만, 1968년 1월 23일에 육군 사단 특성화 계획에 따라 3개의 특수사단을 지정했는데, 이중 5보병사단을[6] 공수사단으로 전환시켰던 과거가 있다. 특전사에서 공수 위탁교육을 받고 자체 공수교육대도 보유했지만 2년만에 보병사단으로 복귀되었다.

3 5사단가

1절 : 아름다운 내 조국의 완전 통일 위하여
물불을 가림없이 한데 뭉쳐 싸운다
가평 춘천 탈환전 피의 능선 가칠봉
청사에 아로새길 전공세운 5사단

(멸공의 횃불과 도입부 가사가 유사해서
음을 틀리는 고문관들이 종종 있다)

2절 : 슬기로운 내 겨례의 자유 평화 위하여
화랑의 높은 기개 온몸 바쳐 싸운다
삼각봉과 백암산 치열한 전투에
달려든 붉은 적을 무찔러친 5사단

(1,2절 공통)후렴 : 조국의 깃발 아래 민족의 이름으로
새세기 선봉에서 용감히 싸워 나가는(빰빰빰~)
백전백승 열쇠부대 우리 5사단

4 예하부대

  • 육군 연대급 이하 부대는 고유명칭(예 ; 육군 제 1보병연대)을 사용할 수 없고, 반드시 통상명칭(예 : 육군 제3260부대)이나 애칭(예 : 한라산 부대)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 주둔지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 또한 작성할 수 없습니다. 내용 작성에 주의해 주세요.
  • 사단 예하 4개의 연대와 13개의 직할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대는 3개의 보병연대와 1개의 포병연대로 구성되어있다.
  • 표범 보병연대
  • 사자 보병연대
  • 독수리 보병연대
  • 백곰 포병연대
- 고대산 포병대대
- 황룡 포병대대
- 백곰 포병대대
- 절골 포병대대 [7]
- 본부포대, 표적획득포대
  • 사단 예하 13개의 직할대
  • 본부근무대
  • 공병대대 (황소)
  • 정비대대(참수리)
  • 보급수송대대
  • 수색대대 (비마)
  • 의무근무대
  • 정보통신대대
  • 전차대대
  • 헌병대
  • 화생방지원대
  • 토우중대
  • 보충중대
  • 방공중대

5 훈련소

현재의 신교대가 아닌 옛날 대광리 구신교대의 경우엔 최악의 시설을 자랑했다.[8]

구신교대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여기로 들어가서 '슭의 말년휴가'를 보자 간략하게나마 5사단 구신교대에 대하여 나온다.

사단버스 또는 전세버스로 이동하는 다른 사단과는 다르게 306보충대에서 신교대까지 기차로 이동하는 유일한 사단인데 보충대에서는 그 사단이 가난해서라고 말하고, 실제 구 신교대에 도착하면 그 말이 수긍되지만, 사실 다른 사단의 신교대와는 다르게 기차역에서 신교대까지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던 이유였다. [9]

그러나 2012년 신교대가 다른 곳에 새롭게 신막사로 지어지게 되면서 현재는 중서부전선 부대 신교대중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 막사의 경우 겉모습만 보면 대학교 캠퍼스 포스를 뿜어낸다. 비록 생활관은 침상형이지만 구신교대 때 낡아 무너질뻔할 때를 생각하면... 현재의 신교대는 연천군 궁평리에 있다. 유명한 망향비빔국수 본점 바로 맞은편 건물이 신교대라 찾기는 아주 쉽다. 신교대 중대장이 훈련병들한테 뭐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망향비빔국수가 젤 먹고싶다고 한다 왜냐면 맨날 바로앞에 있으니깐 보는것만 해도..고문이거든...[10]

다만 제2신병교육대대는 여전히 구막사이기에 1신교대에서 5주훈련을 받고 2신교대로 갔을 때의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다행히 2012년 12월부로 2대대는 일반 보병부대로 바뀌게 되면서 신교대에서 7주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이동하게 된다.그리고 2대대 소속 장병들은 훈련폭탄을 맞이하였다.

1996년 7월 26일 수해가 발생했을 때 기간병 2명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어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구신교대에 위치해있다. 여담인데 이 수해로 무려 60여명 가까운 사병(신병교육대 인원이 아님 사단 전체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사단 장병들이 1달동안 검은 리본을 달고 다닌 바 있다.(5사단 사망자는 신교대 기간병 2명이고 대다수 사망자는 철원에서 발생했다. 사건 발생 열흘 후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11][12]

구신교대는 현재 타연대의 전투지원중대와 수색중대의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기존 구 신교대에서 사용하던 기독교 교회 / 천주교 성당 / 불교 법당이 남아있는 관계로 부대 내에 종교시설이 없는 전방의 대대장병들이 주말마다 종교행사를 온다.[13] 특히 모대대에서는 주말 휴가자와 종교행사자를 같은버스에 태워서 보내기 때문에 휴가자가 대광리역에 내리면 다들 부러워 죽을려고 한다고 한다. 물론 휴가자는 기분이 좋겠지만......

구 신교대가 과거 삼청교육대의 터였다.

대광리 시절 잦은 단수때문에 조교들은 일주일에 한번 씻을까 말까 했을정도였다.

구 신교대 시절은 훈련장소가 전부 부대밖에 있어 훈련시 상당히 행군했어야 했지만(2009년 말 신종 플루로 인해 부대 밖에서 하는 몇몇 훈련은 실시하지 않았다, 화생방 훈련을 안했단 말이다!), 신신교대의 경우는 훈련시설이 전부 내부에 있기때문에 상당히 편해졌다.(30km행군 영내에서 하면 지옥이 된다. 같은 장소 빙글빙글)

2011년까지만해도 9~11중대는 전부 대광리(구신교대) 12중대만이 지금의 신병교육대 위치에 있어 12중대장의 권한이 상당했다.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다녀갔다. 그 당시 부대를 하루종일 정비했다. 신교대 어딘가에 사진이 크게 걸려있다

2012년 가수 비가 훈련후 조교를 지원하여 잠깐 근무했었다. 당시 초도물품과 식당에서 부식을 주는 병사중에 비인줄 모르는 훈련병들이 상당했다.

또한 훈련소 최초 4주훈련 후 가족면회 시범부대였다.

1993년 故 최진영이 훈련을 받기도 했다. ( 평일 면회온 故 최진실의 편의를 봐줘 영외 면회를 허가했다 대대장이 영창갈 뻔 )

6 사건사고

6.1 심규환 상병 사망 은폐 사건

1987년 8월 20일, 육군 5사단 35연대 4대대 소속 심규환(당시 22세) 상병은 총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6.2 철책 사건

2004년에서 05년까지 무려 두번이나 철책이 뚫리는 바람에 수많은 간부들이 모가지가 잘리는 소동이 있었다. 특히 05년 철책사건은 철책을 넘어 내려온 탈북자가 하필이면 마을 이장(…)에게 발견되고 언론에 대서특필된 바람에 사단 간부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혹시 근무 불량이었는지 집중 조사를 받느라 부대 전체가 개박살 나기도 했다. 인근 사단들에도 국지도발 실상황이 걸려서 고생했다.[14] 이 사건 이후 무인 감시 시스템이 대폭 강화되었다 한다.[15][16] 아무튼 이런 일로 인해 인근 다른 사단에게 적이 오면 문 열어주는 열쇠라서 열쇠 부대냐?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휠체어도 서러운데....[17]

여담이지만 그 뚫린 지점은 하필 철책을 쳐놓는 지점에 하천이 흐르고 있다. 더불어 이 사건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과학화 경계 시스템이 시범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최근 신교대의 정신교육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고 방심하면 큰일난다고 하면서 이 사건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어 전 사단 예하 부대 정신교육때 교육시키고 상기시킨다.

6.3 연천 대북전단 발원지 격파사격

연천 대북전단 발원지 격파사격 참조

7 안보관광

열쇠전망대라고 하여 군, 관이 뜻을 모아 반반씩 자본을 대 1998년 4월 건립한 안보관광지가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있다. 연천군과 육군 제5사단이 공동관리하고 있고 실질적인 운영은 사단 전방대대가 맡아서 하고 있다. 민간인도 민통선 출입시간때에 맞추어 간단한 신원확인을 한 후에 방문할 수 있다. 다른 민통선 지역과 마찬가지로 자전거나 이륜차, 혹은 도보로는 입장이 불가하며, 또한 기상악화 혹은 관리부대 여건상 예고없이 출입 통제 또는 강제퇴거 될 수 있다. 실제 들어갈 때 2번에 걸쳐서 신분조회를 하고 들어간다.

뭔가 북한의 도발이 일어나면 유명인사들이 많이 찾는다. 군사시설내에 위치한 관계로 사진 촬영은 전망대 앞 전방 기념사진만 허용되며 관리 브리핑병에게 물어보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 잘못하면 관리병은 정훈장교한테 개털린다. 진짜 비무장지대를 보고 싶다면 한번쯤 와볼만한 곳. 통일전망대같이 관광객이 우글거리는 곳도 아니고, 말 그대로의 온대원시림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정작 북한군은 잘 안보인다

여기에는 T-본 능선 전적비가 있는데, 이는 1952년 미군 1개 소대가 중공군 1개 중대를 맞아 격퇴하여 당시 미군 소대장이었던 넬리 중위가 전사한 부하 8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다. 휴전된 이후 잊혀졌다가 1977년 비무장지대 수색 중 발견하여 전시 중이다.

8 기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때 사단장으로 재직한 적이 있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연이 시작된 부대이기도 하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인제 지역에서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될 부분.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쇠전망대 방문하여 그의 족적인 기념비와 "전망대 언덕의 포장도로"가 남아있다. 2012년 초에 이명박 대통령도 다녀갔다.

2011년 10월 14일 난데없이 네이버 검색어 1위로 올라섰다. 이유는 (정지훈)가 이곳으로 입대해서…[18]. 비는 제1신병교육대에서 조교임무를 수행하다가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연예병사)로 옮겼다.그리고 그는...

성유리이훈이 주연한 MBC의 군대 드라마 막상막하의 배경이 5사단이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연출로 욕을 많이 먹었다. 탄피로 내기를 한다던지, 말년병장이랍시고 위병소를 무단으로 뛰쳐나간다던지. 당시 드라마를 위해 드라마에 출연한 대대가 공지 훈련을 두번 뛰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1화,2화의 경우 사단 차원에서 취침 시간 이후 시청을 허락해줬지만 드라마상의 막장행각으로 이후부터 시청이 금지된 대대도 있다.

2014년 초부터 전 스타크래프트1 프로게이머 신상문이 복무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복무 중인 부대는 사자연대 1대대. 참고로 이 대대는 근처 장병들과 민간인들이 '슈퍼땅개'라고 부를만큼 훈련이 빡세고 많다. 철책을 만지지 않는 예비연대이기 때문. 이게 어느 정도냐면 대대막사가 최신식으로 사단 내에서 가장 훌륭한 편인데, 1960년대에 지어진 막사에 살며 나무관물대를 이용하는 사단 내 다른 부대의 아저씨들이 행군도중 지나가거나 중간휴식을 취할 때면 캠퍼스라고 부를 정도지만, 그러나 정작 당사자 부대들은 훈련하느라고 막사를 쓸틈이 없다고 할정도(...)

보급쪽에서 근무한 경험에 따르면 근처 사단에 비해 이거저거 잘 주는 편이다. 각종 특근자 증식과 부식(빵류와 핫바, 컵볶이, 각종 라면류 등)이 잘 나오고, TV나 사제 발열조끼 등의 위문품도 드문드문 나온다. 전방사단 특성상 새 보급품도 빠르게 보급해준다...지만 정작 군수지도검열방문을 나가면 철책을 직접 만지는 수색대대나 철책경계부대, 신막사가 지어진 극히 소수의 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부대에서 1942가 찍힌 미군수통이 굴러다니고그런데 이게 2000년대 생산된 우리 수통보다 깨끗하고 광나며 심지어 효과도 더 좋다! 거의 40년이상 쓴 X반도, 썩어가는 수통피와 하이바 피가 쏟아져 나온다. 이것은 해당 부대 군수계쪽의 문제라고도 보여지지만, 의외로 부식같은 소모품이 충분히 보급되고 사제품 찬조가 잘 이루어지는 것에 비해 전작 병사 개인전투비품의 보급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반증...이라기 보다는 편성부대에서 신청을 해야 주는데 바꿔는 준다, 그래도 잘 안하는게 문제지. 2014년경부터 신형 철모와 전투조기를 전방 보병연대부터 병사들까지 불출하기 시작하면서 전투장구류 문제는 많이 나아졌다. 기행부대는 보병들 쓰다 남은거 쓴다

사단을 거쳐간 유명인물로 백선엽, 민기식, 박정희, 김재규, 채명신, 이태석 신부, 가수 량현량하, 가수 비, 배우 변요한 등이 있다.

2015년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인 최모씨의 출신부대이기도 하다.

경기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좀 덜할 것 같지만, 사실 정말 춥다. 말이 경기도지 바로 옆이 철원이다. 대광리 일대에서 철원 정도는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간다. 게다가 중부원점이 관내에 있다. 다시 말하면 바다가 멀다. 대륙성 기후. 겨울에 GOP로 휴가 복귀할 경우, 부대가 가까워 질 수록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마음이 추운게 아니라 정말로 기온 차이가 심하다. GOP 초소는 산 중턱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잘 알겠지만 해발 고도가 높아질 수록 기온은 떨어진다. 4-5월에 GOP에 있으면 하루에 4계절을 경험할 수 있다. 혹자는 GP근무하면서 4월에도 눈이 쌓여서 제설작업을 했다고 한다. 따뜻한 봄 볕과 함께 아침 먹고 취침했다가,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에서 작업 하고, 선선한 가을 바람과 함께 투입했다가, 차가운 칼 바람 맞으면서 철수 한다.
  1. 앞서 1993~4년경과 1996년에 구호를 "단결! 하면 된다!"로 바꾸었다가 도로 단결로 바꾼 바 있다.
  2. 군경력이 러시아군-백군-폴란드군에 1차대전,적백내전에 참가한 군인이다
  3.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 멋대로 5사단 연대들을 전부 쪼개서 온 전선에다 축차투입 하는 바람에 사단장조차 자기 부대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 안되는 사태가 발생.
  4. 피의 능선 전투란 종군기자들이 신문에 Bloody Ridge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면서부터 생겨난 이름으로,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983고지·940고지·773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일컫는 것이다.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미군 2사단과 국군 5사단이 북한의 12사단, 24사단과 치열하게 맞붙어서, 전투 끝에 한미 양군 1개 연대 규모와, 북한군 1개 사단 규모의 사상자를 내고 한미 연합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 전투는 6.25 전쟁 사상 단일전투에서 최대의 성과를 올린 전투로서, 당시 이 승전보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5사단에 천하무적 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5. 1951년 6월 23일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처음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군 19 군단장이 양구 북방의 가칠봉 일대에 5사단을 투입하여 고지를 점령하게 한 작전이었다. 당시 북한군은 27사단과 12사단의 2개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반격에 나섰으나, 40여일의 치열한 격전끝에 결국 5사단의 승리로 전투가 끝났다.
  6. 나머지 두 사단은 2사단11사단.
  7. 이 부대는 애칭이 사실상 없지만, 전방 포병부대 특징 상, 통상명칭+포병연대라는 것만으로 포병부대임이 식별 가능해 가급적 통상명칭은 지양하는것이 좋다
  8. 구신교대가 있던 곳이 옛날 삼청교육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9. 문제는 이게 장정 수송을 위한 특별 열차가 아니다. 경원선 일반 열차에서 몇 개 차량에 장정들을 태운다. 잘 맞지도 않고 계급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혁대에 세면백을 끼운채로 의정부역에서 열맞춰서 구르다 보면, 힘든 것보다 무척 챙피하다. 그 와중에, 이제 집 떠나온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집으로 전화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다. 기차 안에서도, 일반열차다 보니 홍익회 직원이 돌아 다닌다. 몇몇 장정들은 걸신 들린 듯이 이것저것 사먹는다. 홍익회 직원이 꼬시기도 한다. "니들 이제 이런 거 못 먹어" 인솔자도 크게 제지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기차역에서 내려 3번 국도를 건넌 후 대광리 시가지 (굉장히 작다)를 지나면 차탄천이 나온다. 그 다리 건너가면 신교대인데, 정말 건너가고 싶지 않았다. 인솔자들도 장정들 마음을 아는지, 무지막지하게 욕을 해 댄다
  10. 망향비빔국수집은 원래 군부대 앞에 하나씩 있는 망향상회라는 잡화점이었다. 외출, 외박, 휴가자들을 대상으로 비빔국수를 팔았다. 버스가 자주 없으니 출발자들은 버스를 기다리면서, 귀가자들은 일찍 들어와 귀가시간 맞춰 들어가기 전에 한 그릇 먹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군부대에서 회식할때 특식으로 주문하기도. 그 이전에도 맛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군인상대 장사라. 그런데 자가용이 보급되면서 군 제대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망향상회 주인이 잡화점을 접고 국수집으로 업종을 전환했다고 한다
  11. 신교대 앞에 있는 차탄천을 보면 그리 넓지 않다. 그 작은 하천이 범람해서 사람이 급류에 휩쓸려 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폭우는 기록적인 것이었다. 하류에 있는 모 부대는 차탄천과 300여 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제방 높이도 신교대 부근 보다 훨씬 높았지만 (사람 3길은 되었던 것 같다) 물이 넘쳐 위병소 앞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지시 사항이 '비상 상황 발생시 총기류 포기하고 몸만 빠져 나올 것'이었다. 산사태 나는데 괜히 총기 챙기다가 죽지 말라는 소리였다. 군인에게 총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했을때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다
  12. 위에 언급했던 모 부대는 보급이 3-4일 가량 끊겼었다. 쌀은 있었지만 부식이 없었기에, 며칠은 건더기 없는 똥국에 밥만 먹어야 했다. 물론 피엑스는 진작에 동이 났으며, 각 중대 텃밭도 아작이 났다. 비가 그치자 마자 출발한 청원 휴가자는 휴가증이 배달이 안 되서 '알아서 연대 본부에 가서 신고하고 받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위병소를 지나 지나가는 차를 잡아 탔으나, 연대로 가는 길이 끊어져, 중간에 내려서 연대 본부로 이어지는 산을 넘어가야 했다. 연대 본부로 가니 기간병들이 길 끊어졌는데 어떻게 들어 왔냐고 놀랐다고 한다 (예하부대 보병들은 훈련할때 가끔 지나가는 길인데, 정작 본부 인원들은 모르고 있었다니.....) 당직 사관은 부대가 난리가 났는데 휴가 간다고 졸라 욕 했다고. 그렇지만 사유를 듣고는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했다고 한다
  13. 사단 후방부대는 사단본부로 종교행사를 간다
  14. 심지어 양주에 위치한 국군양주병원에도 국지도발 실상황이 걸리는 바람에 새벽부터 판초에 군장 내용물 죄다 싸짊어지고 증가초소로 튀어 올라가고 실탄이 불출되는 난리통을 겪었으니 다른 전투부대들 상황은 안봐도 블루레이 수준.
  15. 그런데 무인 감시 시스템을 강화시켜뒀더니 인근 수많은 야생동물들도 걸려버려서 병사들은 죽을맛이란다.
  16. 전군 최초 무인 감시 시스템이 도입된 이유도 철책이 두번이나 뚫리는 업적을 올린 덕분이다.
  17. 사실 1996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에 탈북한 사람은 북한군 부사관인데 키가 160도 안되는 사람이라 숨기 쉬웠다고 한다. 다만 이때는 군인들이 발견했다.
  18. 그 덕인지 당시 육군 사단 중 가장 많은 보온팩을 보급받은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