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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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사단
내 조국 삼천리를 지켜서 싸워가는

우리는 맹호 같은 필승의 용사로다
송악산 10용사의 투혼을 본 받아서
옹진전투 싸워 이긴 명예로운 1사단
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날 전공을
세기에 휘날리는 당당한 사단
1사단 1사단 천하의 1사단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불러라
 
-1사단가

1 개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일명 전진부대, 혹은 천하제1사단. 경례구호는 전진[1]. 상급자에게 큰 목소리를 경례를 하면 떷!떛! 쨘!찌인! 이라는 격렬한 발음이 난다. 옆에도 있지만[2] 부대마크가 전군에서 촌스럽고 단순무식하기론 첫손꼽힌다. 오죽하면 위장형이 더 낫다는 소리를 들을까(...)[3] 난 후진

2 역사

미군정이 1946년 1월 15일 창립한 국방경비대는 동년 6월에 조선경비대로 명칭을 바꾸고서 1947년 12월 1일에 3개 여단을 창설하였는데 그 중 제1여단(서울)이 현 제1보병사단의 시작이다. 초대 여단장은 중국 국부군 및 독립군 출신의 송호성[4] 준장이었다. 그러나 일본군 출신이 군을 장악함에 따라 김구와 가까웠던 송호성 준장이 밀려나고 1948년 2월 5일에는 일본 육사 26기 이응준 대좌가 제2대 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9년 1월 7일에는 일본 육사 27기 김석원[5] 대좌가 3대 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49년 5월 1일에 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됨으로써 초대 사단장은 김석원 대령이 되었다. 같은 해인 1949년 5월에는 11연대가 북한군과 개성에서 5.4 송악산 충돌(육탄10용사) 국지전을 벌이게 된다. 이후 개성등을 포함하는 38선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9년 10월 1일에는 일본 육사 26기 유승렬 대령이 제4대 사단장을 맡았으며, 1950년 4월 22일에는 역시 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임진강파주에서 방어전을 펼친 후 한강교가 폭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 건제를 유지한 채 지연작전을 벌이며 낙동강까지 철수해 대구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낙동강 전선을 지켰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10월 19일에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는 부대가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섰던 미1군단에 소속된 부대인 미제1기병사단과 미제24보병사단, 1보병사단 간에 평양 선봉 입성을 위한 경쟁이 붙었다. 1보병사단에는 미군 전차부대가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속도에 맞추기 위해 전차부대는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휴식, 보병부대는 낮이나 밤이나 그냥 걸었다(…). 당시 미군들도 '우리는 미군이지만 지금은 1사단이다'라면서 결국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부대가 되었다. 평양 입성 다음날인 10월 20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 선봉 입성을 기념하여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는 의미로 전진이라는 부대 명칭을 내린다.

참고로 7사단도 부대 역사에 자신들이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평양에 진입한 7사단의 부대규모는 1개 중대 규모 정도로 알려져 있고, 사단급으로 동평양(11/12연대)과 본평양(15연대)을 점령하여 평양시 전체를 점령한 1사단이 평양선봉입성의 주역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부대가 먼저 본평양에 진입했는가의 문제도 서로 이견이 많은 상황에서는 1사단이 공식적인 선봉입성 부대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6] 여담으로 7사단은 당시 평양으로 진격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미 1군단(미1기병사단, 미24보병사단, 국군1사단)이 평양으로 진격하는 계획이었는데, 서울 선봉입성을 미해병대에게 빼앗긴 이승만이 평양마저도 미군에게 선봉을 빼앗길 수 없어, 7사단 중 일부 부대를 급하게 평양쪽으로 돌린 것이라고 한다.[7]

중공군의 개입 이후에도 사단 건제를 유지한 채 후퇴하였다가 다시 북진해서 개전 직후 방어하였던 임진강-파주 지역에 되돌아오게 된다. 이후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후방재편성 및 일부부대 전용을 제외하고는 해당진지를 고수한 채 휴전을 맞는다. 물론 그동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밀려오는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것은 다른 지역과 동일했다.

한국전쟁에서는 개전 전에 편성된 사단이면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단 건제를 끝까지 유지한 정예사단으로 평가받았으며, 미군이 항상 신뢰하는 유일한 국군 사단이었다. 당장 백선엽 사단장이 승진과 보직변경으로 물러날 때는 이미 타 사단의 사단장들은 다른 인물로 여러번 교체된 이후였다.

자주국방 네트워크 신인균 대표는 2013년 7월 종편 채널A의 시사프로 쾌도난마에 출연하여 정전 60주년 기념특집으로 한국전에서 가장 잘 싸운 5대 국군부대를 꼽았는데, 전진부대는 2위로 평가받았다.

1위-육군 제6사단(청성부대. 김종오 장군 지휘. 춘천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2위-육군 제1사단
3위-해병대(진동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서울 수복작전, 도솔산전투 등)
4위-육군 제3사단(백골부대. 38선 첫 돌파, 현리전투 등)
5위-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참고적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한국전쟁 초기 가장 뛰어난 사단으로는 6사단, 8사단, 1사단을 꼽는다.

78년에는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도라산 바로 밑에 있기에 도라산역 관광코스로 끼여있기도 한다.

참고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 작업반으로 위장한 특전사가 진입할때 판문점을 둘러싸고 수색대대, 중대 병사들이 전투태세를 취한채
수풀안에 매복해 있었다.

3 예하 부대

  • 육군 연대급 이하 부대는 고유명칭(예 ; 육군 제 1보병연대)을 사용할 수 없고, 반드시 통상명칭(예 ; 육군 제3260부대)이나 애칭(예 : 한라산 부대)을 사용해야 합니다.[8] 또 주둔지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 또한 작성할 수 없습니다. 내용 작성에 주의해 주세요.

1. 육탄연대
육탄10용사의 그 부대이다. 사단 우측방 GOP를 담당하고 있다. 사단 내의 다른 부대들과는 달리, 가장 외진 지역을 담당하고 있다. 여담으로 각 대대 병영시설이 가장 구리다.

2. 쌍용연대
한국전쟁 기간 중, 평양입성시에 미군 전차부대가 배속되어 선봉에 섰던 부대이다. 사단 좌측방 GOP를 담당하고 있다. 심심하면 언론에 노출되는 도라산 OP를 담당하고 있다.

3. 무적칼연대

겨례의 소원인 통일을 위해

육군의 선봉에선 무적의 용사
뭉치어 싸워서 이겼으니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하였다
아~~ 그 이름 칼부대 용사
영원히 빛내리 OO연대
 
-무적칼연대가

한국전쟁 기간 중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한 부대이다. 사단 예비연대인 동시에 평시엔 임진강 경계를 담당하고 있으며, 연대본부 위병소를 지나서 연병장으로 올라오다 보면, 거대한 언월도 상징물[9]을 볼 수 있다. 원래 부대명칭은 13연대였으나, 임진강과 파주 전투에서 예하 부대가 큰 피해를 입고 1개 대대 전력만 남게 되었고, 증원으로 배속된 5사단 15연대의 2개 대대를 배속 받아 13연대로 활동하다가, 낙동강방어전 다부동 전투시에 현재의 연대로 개칭하였다.[10]

연대본부 주둔지가 예전 미군부대 주둔지[11]여서, 상대적으로 편의시설이 좋다. 부대 내에 수영장, 스쿼시장, 체육관, 목욕탕(2000년대 중반 기준, 사우나 포함)이 있다. 연병장의 형태도 잘 보면 일반적인 직사각형 연병장이 아니라 야구장 모양의 연병장이다. 2005년경 축구하기 좋도록 직사각형에 좀 더 가깝게 하면서 넓혔다. 부대 정문에 M47 패튼전차가 세워져 있다.[12]

4. 으뜸포병연대
예하에 4개 포병대대가 있다.

4.1. 백곰대대 (대한민국 최초로 창설된 6개의 포병부대 중 하나)
4.2. 백호대대
4.3. 사자대대
4.4. 독수리대대

예전에는 모든 장비가 견인포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최근 몇년사이에 연대 직접지원대대는 K55A1으로 교체가 되었고, 사단일반지원대대도 K-9 자주곡사포 로 교체 되었다.

5. 사단직할대

  • 본부대
  • 공병대대
  • 정비대대
  • 보급수송대대
  • 수색대대
  • 의무근무대
  • 정보통신대대
  • 전차대대[13]
  • 헌병대대[14]
  • 화생방지원대
  • 신병교육대대
  • 토우중대
  • 방공중대
  • 서해지구군운영단(CIQ)

신병교육대대와 전차대대 그리고 의무근무대는 서로 이웃해있다. 신병교육대대에서 영외에서 실시하는 교육훈련 교장으로 이동할때 거의 필수적으로 전차대대 주둔지를 통과한다.

헌병대대와 공병대대는 한 위병소 두 집 살림을 살고있으며, 한때 정비대대,보급수송대대,의무근무대가 한 위병소 세 집 살림을 하였으나 현재는 의무근무대가 신병교육대대로 이사갔다.

4 사건사고

  •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항목참조
  • 2015년 10월 29일 새벽 5시, 경기도 파주시 육군 1사단 GOP에 근무하던 박 일병이 후임과 같이 경계근무를 서던 중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비운 뒤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터트려 자살했다. 박 일병이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조사했지만 “가족에게 미안하다” 등 선임들의 구타와 부대 내 부조리를 암시하는 내용의 메모를 발견되면서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로 인해 자살한 걸로 밝혀졌다. 보도 기사[ 자세한 내막의 기사
  • 연평도 포격도발 후 당시 1사단 포병연대의 모 포병대대에서 북 도발에 대한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자주포로 실탄 장전 연습도중 실수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으나 DMZ를 향하여 실탄을 발사하였다. 당시 1사단장은 당장 전 병력 방탄착용 후 대피하라 지시를 하였고, 다행히도 큰 일없이 잘 넘어갔다.

덕분에 진돗개는 더 오래갔고. 그 후 연습용인지 교보재인지. 상황보고용인지 실제탄과 똑같은 모의탄을 해당대대의 간부들이 와서 받아갔는데. 부대의 간부,병사 할것없이 그 간부들에게 눈초리를 보냈었다

정말 위급상황이였는지 방탄과 방독면만 챙겨서 뒷산으로 당장 올라가라 햇다.(60미리 포반이였는데 박격포도 두고 갔다...) 저녁이 되어 날이 추워지자 분대장과 선임병들이 내려가 옷만 챙겨서 대기하다가 철수(율곡대대 10년 5월군번)

5 출신 유명인물

5.1 장교

초대 1사단장. 중일전쟁의 공로로 당시 일왕 히로히토에게서 공3급 훈장을 받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출신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일본군 평양병사부에서 대좌로 근무하고 있었다. 6.25 전쟁 개전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인민군 제1사단장 최현 휘하의 병력과 교전, 격퇴하였다. 말년에는 자신이 설립한 서울 용산구의 성남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6.25 전쟁 당시 제5대 사단장을 역임했다. 대령이었다가 준장 진급.
제 6대 사단장, 1951년 백선엽의 후임으로 1사단장 역임. 김창룡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중장 예편되고 옥고를 치루다[15] 4.19 혁명 이후 풀려남.
소장 시절 사단장을 역임.
소장 시절 사단장을 역임.
준장(진) 시절 작전부사단장을 거침.
대령 시절 육탄 연대장, 소장 시절 사단장을 역임.

5.2

육탄연대 소속 GOP 근무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사단 문화선봉대에서 병사로 복무하며 부대 행사의 사회자로 활약.
육탄연대 소속 3대대 11중대에서 대대 천주교 군종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6 기타

현재도 경기도 파주에 주둔하고 있으며 주둔 지역은 임진강을 넓게 끼고 있다. 개성공단 출입인원을 관리하는 서해지구 군 운영단(舊 도라산 CIQ)와 임진강을 건너는 통일대교도 관리하고 있어서 각종 미디어에 출연 빈도가 많은(?) 부대이다. 일단 도라산 주변은 민간인이 출입가능한 곳 중 수도권에서 가까운 최전방 지역이어서 안보견학 및 어르신들의 효도관광(?) 코스로도 인기 있는 지역. 수도권에서 제일 가까운 최전방 부대라는 이유로 정치인들의 외부 부대방문도 잦은 편. 그리고 방문부대엔 헬게이트가 열린다. JSA 경비대대 또한 1사단의 지역에서 행정 지원 및 보급을 받지만 이쪽은 1사단 소속이 아니며 일단 3군사령부 직할이다.

지리적인 조건은 최전방사단 가운데서는 가장 좋은 축에 속한다. 일단 휴전선의 서쪽 끝이기도 하고[16], 전반적으로 담당지역이 평야와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고저차가 크지 않다. 물론 맥도날드 고개같은 영 좋지 않은 곳도 있긴 있으니 1사단 배치됐다고 너무 방심하진 않는게 좋다(...) 서울에서 매우 가깝기도 한데, 사단 위수지역 내로 서울 소속 버스들이 들어오는 유일한 최전방사단이기도 하다. 때문에 외출나온 장병들이 서울로 점프뛰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여기까진 좋은데 여름철에는 파주의 유명한 모기와 사투를 벌이며 클로로퀸이라는 아주 독성이 강한 말라리아 약을 먹어야 한다. 약의 부작용이 심한 사람은 차라리 말라리아에 걸릴 각오로 약을 버리기도 하지만 말라리아가 잘 걸리는 지역이다보니 간간히 말라리아에 걸려서 실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거기다 말라리아의 경우 잠복기간이 6개월~ 1년이 넘기도 하므로 전역후 발병하는 재수없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헌혈의 집에서도 이쪽에서 복무했던 사람을 잘 안받아준다.

앞에서 서술했듯 임진강 하류를 넓게 끼고 있다 보니 GOP경계와 동시에 강안경계도 맡고 있다. 실제로 95년 임진강 벼락바위 일대에서 임진강 하류로 침투하는 간첩을 격멸한 사례(벼락바위사건)도 있다. 제 3땅굴 발견 등과 함께 부대의 자랑거리 중 하나.

게다가 이 부대는 전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거점인 관계로 완벽한 진급코스이다. 육군사관학교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17] 이 사단에 소대장으로 부임한다. 장교라면 이 부대에서 한 번 이상은 복무해야 장성까지 무난하다.

위수지역2011년까지는 파주시 시내, 그중에서도 금촌역까지가 대부분이었으나, 2012년에 하창호 사단장이 부임한 이후 제1군단과의 협의를 통해 1사단 전 부대의 위수지역을 고양시까지 확장하였다. 이에 따라 일산신도시까지 합법적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서울특별시계와 한강을 건너지 않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다들 서울특별시점프를 뛰지 그런데 2012년 전에도 위수지역이 일산까지인 부대가 더 많았다.

7 속설

  • 제1보병사단이 선봉으로 평양에 입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하 연대들이 서로 자기가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한 부대라고 자랑질을 하는데 진실은 저 너머로.....(칼부대는 부대정문에 "평양선봉입성부대", 쌍용부대는 부대정문에 "평양입성선봉부대" 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요새 칼부대 정문 지나갈때 봤는데 팻말 안보이더라 쌍용부대 상황은 최근 전역자가 수정바람. 쌍용부대는 여전히 연대본부 앞에 대문짝만하게 "평양입성선봉부대" 팻말이 걸려있다.)

백선엽장군 기록에따르면 15연대가 선봉입성이다.
2016년 8월 기준으로 12연대 정훈장교가 기록을 모조리 뒤져 12연대가 먼저 입성했다는 증거를 찾았다며 예하부대를 돌아다니면서 교육했다.
12연대에 배속된 미군 전차부대를 선두로 평양 외곽에 입성하여 15연대가 안정하게 입성할 수 있게 방비해줬다고 한다

  • 6.25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제1보병사단이 등장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미군과 자주 붙어다녀서이다.
  • 도라산 정상의 도라전망대도 같이 관리하는데, 도라전망대에서 망원경쪽 벽을 월담하면 바로 DMZ다. 덤으로, 도라전망대엔 군인들만을 위한 공짜 망원경이 있는데, 500원도 내기 싫은 구두쇠민간인도 몰래몰래 이용한다그리고 경비서던 군인이 그걸 잡겠지 보다보면 중국인 관광객도 와서 구경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조중 연합군인데, 왜 과거 적군의 땅에와서 동맹의 땅을 구경할까? 대만 국적일 수도 있잖아[18]
  • 전두환이 제1보병사단장을 맡은 적이 있으며 군사독재에 열심히 도와주었다. 쿠데타 당시 동원했던 전차가 현 소속 대대 것이라는 소문이 부대 내에서 돈다. 물론 실제로는 2010년 기준 사용하는 전차가 K1전차이기 때문에 해당 전차일리는 없다.[19]-12.12사태 당시 신군부측에서 동원된 전차부대는제1군단[황영시 중장] 예하 제2기갑여단[이상규 준장] xx전차대대이다. 1사단 관할지역은 서울 근교가 아닌 최오지 전방이라 12.12사태에 낄 수 없는 부대이다.[20]
  • 이 부대의 위수지역에 초평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임진강 중류에 위치한 하중도이며 현재는 민통선 내에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원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섬의 규모도 상당히 넓은 섬이였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휴전이 성립되어 휴전선이 결정되자 이 섬은 민통선 내에 들어가 버려 그 이후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현재는 무인도가 되었다.
  •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때 협조 해줬다. 가요제가 임진각에서 했는데 가뜩이나 대중교통이 불편한 이곳에 사람들이 그렇게 몰리니 별수 있나. 1사단 군인들이 인원통제를 도와줬었다. 당시 근처 부대에서 위병소 근무를 서면 노랫소리가 부대까지 들리기도 했다..
  • 일본 방송국에서 1사단 전방을 방문,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적이 있다. 내용이 크게 잘못된 것은 없었고 한국의 징집된 장병들이 이전에는 각자 사회에서 했던 일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단의 비극을 보여 주려 했다.
  • 2010년 즈음 본명이 '전진'인 병사가 1사단 자원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성이 전이고 이름이 진(...). 이는 속설이 아니다.
  • 2010년 즈음 본명이 '박격포'인 병사가 1사단에 들어온적이 있다. 다행히 박격포 분대나 화기중대에 배속받진 않았다.
  1. 2016년 5월 1일부터 '전진 때려잡자!'혹은 '전진 박살내자!'를 평상시에 사용하고있다. '떷!땣!............ 때려답따!'
  2. 파평면 두포나루를 기점으로 서쪽은 1사단, 동쪽은 25사단 위수지역이다.
  3. 미 육군 1사단 빅 레드 원도 부대마크가 단순무식하게 빨간 1자만 박아놨다. 6.25때 미군 따라다니더니 이런것까지 따라한건가
  4. 김구가 장제스에 위탁 교육을 맡긴 조선 청년들 중 하나로 국부군에서 장교를 하고 이후 독립군에 편입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 국군 창립군의 장교가 되고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였으나 여순사건 진압 등에서의 책임을 물어 일본군 출신들에 밀려 점차 요직에서 밀려났다. 그리하여 한국전쟁 발발 후 헌병사령관 장흥의 권유에도 피난을 가지 않다가 한강 철교를 건너지 못한 3명의 장교 중 하나가 되었다. 전쟁 초기 북한의 인민군이 장악한 서울에서 숨어 지내다가 밀서를 전달하던 어린 아들의 실수로 인민군에 발각되어 국군의 서울 재수복 직전에 납북되었다. 이후 인민군의 선전 수단으로 내세워져 1953년 인민군 해방전사여단 단장을 지냈고 "미제와 매국노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라"는 연설문을 읽기도 했다. 휴전 이후 1956년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상무위원을 지냈다. 그러다 1954년경 국제간첩혐의 및 반혁명분자로 체포돼 고초를 겪었고 이에 저항하여 단식 투쟁을 했다. 1958년부터는 평남 양덕에 유배되어 지내다 이듬해 1959년 3월 24일 뇌출혈로 사망한다.
  5. 초대 1사단장 김석원은 중일전쟁의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에게서 공3급 훈장을 받은 일본 육사 27기 출신으로 1945년 8월 해방 당시 일본군 평양병사부에서 대좌로 근무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성남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6. 육군 공간사에도 1사단을 공식 입성부대로 명기하고 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사단 전체를 1계급 특진시키고 1사단의 부대애칭도 "전진"으로 명명한 것이다.
  7. 군 작전구역을 마음대로 변경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행위인데도...
  8. 물론 1사단은 6.25 이전에 창설됐던 부대로 현재 예하 연대들은 모두 전쟁 중에 예속받은 연대들로 당시 기록을 확인하면 바로 고유 명칭이 확인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는 언급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9. 2005년경 강풍으로 인해 칼날 중간쯤 부분이 부러져서 붙였다.
  10. 1950년 7월 5일, 아군이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1사단 13연대 1개 대대와 5사단 15연대 2개 대대를 통합하면서 13연대가 되고, 15연대장이었던 최영희 대령이 13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전 15연대 장병들이 호칭문제(13연대호칭)에 대하여 불만이 높아지자, 연대장의 건의로 육본 일반명령(육53호)에 의거 8월 25일부로 현재의 단대호 연대로 개칭되었다. 이후 이전 연대 단대호는 11사단 창설시, 예하연대로 신규로 창설되었다. 해당 연대에서 기존의 연대 역사를 계승하고 있는지, 계승하고 있다면 다부동 전투 이전까지의 역사를 연대 역사에 포함하고 있는지는 추가바람. 무적칼연대 역대 연대장 액자를 걸어둔 곳에는 1사단 13연대 창설시 연대장을 제1대 연대장으로 해놓았다.
  11. 이전에 미2사단 수색대대의 역할을 담당하는 7기병연대 4대대 B중대 (B Troop, 4/7 Cavaly)(기갑수색-전차 및 장갑차, 헬리콥터로 구성)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당시 기지 명은 Camp Rice였다가 Camp Garry Owen으로 변경되었고, 후에 4/7 기병대대는 선유리의 사단 전차대대 근처의 Camp Palham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해당 부지가 무적칼연대 연대본부 주둔지가 되었다. 이전 당시 무적칼연대 연대본부 주둔지는 육탄연대 연대본부 주둔지가 되었다. 선유리에 있는 Camp Palham은 4/7기병대대 이전후에 Camp Garry Owen으로 다시 변경되고, 4/7기병대대가 미2사단 2여단 소속이었다가, 이라크전으로 해당 여단이 이라크로 파병나가면서 1중기갑여단으로 소속이 변경되고, 1여단 완전 해체시까지 Camp Garry Owen으로 유지되었다. 지금은 해당부대는 완전히 해체된 상태.
  12. 2000년대 초반까지는 A/B/C동 막사가 있어서 A동에는 본부중대, 의무중대, 통신중대, B동에는 수색중대, 전투지원중대가 있었다. C동은 C동창고라는 이름으로 1층만 각종 공구들과 기자재의 창고로 활용되었으나, 2000년대 초반 C동을 전반적으로 개수하여 사단 BOQ로 용도 변경하였다. 2000년대 중반 A동 1층은 100일휴가대기 등으로 사용하다가 수송대 독립 후 수송대, 2층은 본부중대, 3층은 통신중대가 사용하였고, B동 1층은 의무중대, 2~3층은 지원중대가 사용하였다. A,B동 막사는 한 내무실당 6~7명 정도가 생활하였고, 내무실마다 화장실이 있었으나 사용은 하지 않았다. A동과 B동이 통합하여 신막사로 다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C동은 BOQ 전환공사 전까지는 1층의 창고 외에는 비둘기들이 살던 비둘기집이었다. 각 방마다 비둘기 똥이 한가득.
  13. 보병사단 전차부대 중에서 최초로 K-1 전차를 장비하였다.
  14. 현병대에서 2014년 대대편제로 개편되었다 .
  15. 그마져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이다.
  16. 우리나라 지형은 동고서저임을 기억하자.
  17. 즉, 수석졸업
  18. 참고로 도라산전망대에서 북쪽으론 촬영금지다. 멋모르고 카메라 들이대면 바로 군인들의 제지를 받는다. 전망대에서 북쪽을 볼수 있는 곳 바닥을 보면 노란 선이 그어져 있는데 그선을 넘어가면 촬영금지고 안넘어가면 촬영허용이다.
  19. 이 K1 전차도 기계화보병사단이 아닌 일반 보병사단 전차대대 중에서는 최초로 K1을 장비한 것이다. 나름 명예라면 명예랄까.
  20. 당시 전방병력을 빼려면 한미연합사 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